제 2권
- 차례 -
제 1 장 대막(大漠)의 전설
제 2 장 지지 않는 꽃
제 3 장 보이지 않는 손
제 4 장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제 5 장 친구냐? 적이냐?
제 6 장 음모(陰謀)
제 7 장 의문의 살인(殺人)
제 8 장 돌아온 전설(傳說)
제 1 장 대막(大漠)의 전설
(1)
연문성(衍文城) 관부(官府).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넘어 연문성의 밤을 낮처럼 밝히던 불빛들이 사그러들면서 불빛 속에 숨어있던 어둠이 점점 영역을 넓히며 짙어져가고 있었다.
연문성의 밤은 조용했다. 때때로 성루를 따라서 순찰무사(巡察武士)들의 그림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초겨울에 부는 삭풍(朔風).
대륙의 끝에서부터 불어온 한줄기 삭풍은 높다란 첨탑들과 구중궁궐의 긴 지붕, 넓은 관도(官道) 위를 분주히 오가며 낮 동안 생겨난 오진(汚盡)들을 쓸어내며 연문성 안 곳곳을 휘몰아 치다가 다시 성곽을 넘어 연문성 밖으로 치달았다.
그 삭풍이 맞부딪치는 한가운데, 삭풍이 제풀에 못이겨 회오리바람으로 변하는 그 자리에 언제부터인가 한 인영이 서 있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추위에 엷은 얼음이 덮인 그의 안면(顔面).
바로 천리무영 석비룡이었다.
깎은 듯 반듯한 이마와 유려한 검미(劍眉), 우뚝 솟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은 무표정했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석비룡의 몸 전체가 엷은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발목까지는 아예 얼어붙어 차디찬 땅바닥과 맞붙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석비룡은 마치 어둠 속에서 태초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정물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만일 누군가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동상이라 여기기 십상이었다. 더욱이 그의 코나 입 주위에서는 차가운 겨울밤에 숨을 쉬며 내뿜는 하얀 입김마저 볼 수 없었으니……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착각이었을까.
석비룡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찰나의 짧은 움직임.
그러나 변화는 심했다. 그의 몸에 엷게 붙어있던 얼음들이 푸시식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얼음은 물로 흘러내리기 전에 하얀 수증기로 변해 석비룡은 마치 하얀 운무 속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석비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움직였다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말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사라진 석비룡의 모습은 어느새 연문성의 높은 성벽 아래에 나타났다.
그는 언뜻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는 것 같더니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몸을 뽑아 올렸다. 그의 신형은 그대로 한 마리 비조처럼 성벽 위를 날아올랐다.
중원무림의 인물들이 만약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경악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릴 것이다.
지금 그가 펼치는 신법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오백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 무영자(無影者) 천금옥(天金玉)의 비술,
무영비록 가운데 만리표풍(萬里表風)이기 때문이다.
한 번 호흡으로 천리(千里)를 가고, 한 번 호흡으로 백척(百尺) 높이를 날아오를 수 있다는 비전의 신법이 지금 석비룡의 가벼운 몸짓 하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연문성의 성벽을 넘어선 석비룡의 신형은 밤하늘 가운데서 몸을 틀었다.
새의 날갯짓처럼 부드러운 그의 몸은 처음부터 성의 한 지점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듯 거침없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몸은 성의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오십 척 높이의 허공에서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공술을 펼쳐, 허공에 만든 계단을 밟듯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연문성 관부의 심장부. 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방이 있었다.
연문성주 용운구(龍雲九).
방 안에는 열 개 남짓한 난화분 이외에는 침상과 탁자 하나가 놓였을 뿐이다.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방 안의 분위기는 주인의 성정(性情)과 기품(氣品)을 알려주었다.
용운구는 난 화분을 앞에 두고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문득 등 뒤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취미는 변함이 없구려."
뒤이어 들려오는 한 줄기 음성은 무척 귀에 익은 것이었다.
'혹시 그 분이?'
용운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소, 소군(少君)!"
석비룡이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객지를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라 이제야 뒤늦게 영전을 축하하게 되는구려."
용운구는 망연히 서 있다가 잊고 있었다는 듯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신(臣) 용운구, 삼가 소군을 뵈옵니다!"
"이러지 마시오!"
석비룡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굽혀 용운구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연문성주면 종삼품의 관직인데 어찌 보잘 것 없는 일개 평민에게 배례(拜禮)를 올린단 말이오?"
용운구는 일어서지 않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도 소군은 제게 영원한 소군! 평생을 통해 모셨거늘 어찌 관직 따위가 문제오리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연문성 안의 가장 깊은 곳.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연문성주 용운구의 침소.
황촉대 위에 올려진 가녀린 촛불은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며 제 몸을 사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정인(情人)이라도 상봉한 듯 방안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얘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군! 지금이라도 자금성으로 돌아가소서. 모든 분들이 소군을 찾고 있습니다. 특히 삼황야께선……."
용운구의 눈빛은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석비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비룡은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왜 천하를 떠도는지는 성주가 더 잘 알 것이오. 그 일이 해결되기 전엔 영원히 자금성으로 돌아갈 수 없소."
그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용운구는 알 수 있었다.
어떤 말로든 소군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웠지만 소군이 그렇게 원하는 한 그의 앞길을 막을 자는 없었다.
용운구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소군께 얽힌 소문은 매일같이 귀 따갑게 듣고 있습니다."
석비룡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무림맹 살명부에 올라간 일에 대해서 말이오?"
용운구는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정색하며 급히 말했다.
"소군께서 그런 행동을 하시는 데에는 필히 사연이 있으실 터…… 허나 제가 봤을 때, 지금 무림맹의 표적이 된 소군의 입장은 안전하다는 볼 수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무림맹을 통해 즉각 수배 대상에서 제외되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석비룡은 창 밖 어둠을 주시하던 눈길을 돌려 용운구를 쳐다봤다. 그리고 맑게 웃었다.
"후후! 내 정체를 온 천하에 드러내서라도 말이오?"
용운구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석비룡은 자신이 그를 찾아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내 성주에게 세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할 생각이오만……."
용운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원하신다면 제 목이라도 준비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화약 일만 근!"
용운구의 턱선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시(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그만한 화약을 확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주를 찾은 것이오."
소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할 수는 없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결심은 빨랐다.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어떤 것입니까?"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세 가지 부탁이 다 이런 종류라면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다.
석비룡은 품속에서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를 꺼내 용운구의 가슴 앞에 내밀었다.
"몇 가지 희귀한 약초가 필요하오."
용운구는 두루마리를 펼쳐 쭉 훑어보고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마지막 부탁은……."
석비룡은 말을 하다 말고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건 정말 말하기가 곤란하군."
용운구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필시 어려운 부탁이리라.
"말씀하시지요.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요즘 내 주머니 사정이 말씀이 아니라서 말이오. 돈 좀 꿔 주시겠소?"
당연했다. 뜻하지 않게 생긴 동생, 무극탑신 설고웅의 회포를 풀어주기 위해 주머니 속의 동전 한 닢까지 톡톡 털어야 했으니 말이다.
용운구는 빙긋이 웃었다.
"그거야말로 저로선 가장 쉬운 일이군요. 공금을 통째로 털어서라도 필요하신 만큼 드리겠습니다."
석비룡은 기분이 찜찜한 듯 입맛을 쩝 다시고는 몸을 돌렸다.
"오늘은 부탁만 하게 되는군."
그는 방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성주, 오늘 날 만난 건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주시오. 특히 자금성에는……."
"물론입니다."
용운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성주와 술 한 잔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쉽구려."
용운구가 말했다.
"술 한 잔 대신 제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만…… 며칠 전 성내로 한 인물이 들어왔습니다. 매우 특이한 인물이지요. 관부 내에서도 그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로……."
"나와 관계가 있는 자요?"
"화령귀객입니다. 무림맹에서 척살객으로 선택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석비룡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였다.
"화령귀객이라?"
들은 적이 있었다.
살아있는 대막(大漠)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자. 대막에서 그 이름은 곧 죽음으로 통한다고 했다.
화령귀객의 손에서 장미종이 울릴 때 대막의 모랫바람은 숨을 죽인다.
목숨이 귀한 것을 안다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여!
화령귀객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를 올리라.
대막에서는 세 살 난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노래였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지 않는 무신(武神)이자 전 대막무림인의 생사를 한 손에 움켜쥔 공포의 사형집행인(死刑執行人).
"화령귀객의 본명은 임단하(林丹霞). 특이하게도 스무 살도 안 된 아가씨입니다. 그녀가 쓰는 화무신관은 오백 년 전 천하제일의 암기제조 명인이라 알려진 암혼수(暗混手) 엽검(葉瞼)이 제조한 것으로, 그가 죽은 후 자손들에게 물려지다가 임단하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용운구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저희가 화령귀객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녀의 출신이 한족(漢族)이고 또 국경 지대에서 자주 활동하는 것이 여러 사람의 눈에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는 처음이고 무림맹과의 접촉이 빈번했다는 점에서 저희 관부에서도 그녀의 동정에 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편입니다."
(2)
다음날 아침,
연문성 내의 관도(官道) 위에는 금의위 복장을 갖춘 석비룡이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듯 빠르게 걷고 있었다.
뒤에는 금의위 위사 십여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뛰다시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석비룡을 쫓아왔다.
석비룡은 이미 갈 곳을 정한 듯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고 곧장 허름한 객점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객점 문 앞에 우뚝 멈춰 서자, 재빠르게 금의위 위사 두 명이 달려 나와 양쪽에서 어깨로 문을 들이받았다.
쾅!
부서질 듯 문이 활짝 젖혀졌고, 석비룡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객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볼이 축 늘어진 오십대 중반의 객점 주인은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지 연신 허벅지에 손을 문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무, 무슨 일이신지?"
석비룡과 그가 대동한 십여 명의 금의위 위사들이 모두 근엄한 표정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에 주인의 가슴은 뜨거운 화롯불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 바짝 오그라들어 있었다.
석비룡의 눈이 반짝였다.
주인의 어깨 너머, 썰렁한 객점 구석에 스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처녀 하나가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석비룡은 한 눈에 그녀가 화령귀객 임단하임을 알아봤다.
'호오! 꽤 반반한 미모의 소유자인걸.'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임단하의 미모는 빼어났다.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깃털을 그려넣은 듯한 눈썹, 완곡하지만 날씬하게 빼어난 콧날, 붉은 꽃잎을 문 듯한 입술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한 번 바라보게 되면 절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혼을 빼앗아 갈 만한 마력이 있는 듯.
연문성주 용운구는 오늘 아침 석비룡에게 말했다.
"화령귀객 임단하가 연문성을 찾은 이유는 소군보다는 무림맹 살명부에 오른 금각동인(金脚銅人) 조추상(曹秋象)을 찾기 위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젯밤 조추상의 아비인 조해(曺海)을 만난 것으로 봐서……."
금각동인 조추상은 이십 년 전부터 이미 무림맹의 공적이었다.
당시 그는 사천성(四川省)에 들렀다가 자신을 욕하는 소리를 듣고 한 마을 일천여 양민을 무참하게 죽여 버린 적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조해는 과거 철심냉군(鐵心冷君)이라는 별호로 천산의 호랑이로 협명이 자자했다. 하지만 아들의 성질만은 고치질 못했고, 결국 쉰 살에 강호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변방인 이곳에 은거해 전심전력, 부처님에게 아들의 손에 죽은 이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고 남는 시간에는 바늘 없는 낚시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화령귀객 임단하가 찾아간 것이다.
"임단하는 조해에게 그의 아들 조추상에 대한 단서를 얻어낸 것 같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난 것을 보면……."
석비룡은 손을 내밀어 주인의 어깨를 젖히고 뚜벅뚜벅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임단하가 앉은 탁자 위에는 소면 하나와 물 한 잔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녀는 석비룡 등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선 한 번 이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젓가락질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많아야 소면 두세 가닥을 건져 입 안으로 가져가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석비룡은 임단하가 앉은 탁자 앞에 우뚝 서서 포권지례를 취했다.
"식사 중에 죄송하오만 한 가지만 묻겠소."
임단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젓가락으로 다시 소면 몇 올을 건져 올렸다.
석비룡은 그녀를 노려보면서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보다 못해 오지랖이 넓은 금의위 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봐!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 못 들었나?"
귀머거리는 아닌가 보다.
"나 지금 식사 중이야."
대답을 했으나 여전히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은 오직 먹는 것뿐이라는 듯 건져낸 소면을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이런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니!'
위사는 발끈했다.
"뭐가 어쨌다고?"
석비룡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주고 나서 여인에게 정중히 물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신 분이시오?"
임단하는 이번에는 시간이 꽤 지난 후, 오물오물 씹던 소면을 입 안에서 완전히 제거한 다음에야 말했다. 물론 그 대답이라는 것도 금의위 위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크게 어긋났지만……
"식사 중이라고 했어."
염소수염을 기른 다른 위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례하다, 계집!"
그는 손가락으로 찌를 듯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우린 황궁 금위위에서 나온 위사들이다! 당장 식사를 중단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공무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즉시 잡아들이겠다!"
"좋을 대로!"
임단하의 대답은 짧았다.
어디 개가 짖느냐는 듯 들은 척도 않았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젓가락을 그릇 속에 넣어 휘휘 저었다.
본래 황실이든 관이든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란 것들은 인내심이 길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큰 기침 한 번만 해도 양민들은 그들의 발아래서 벌벌 떨며 엉금엉금 기지 않았던가?
관병은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임단하의 어깨를 잡아갔다.
"무슨 계집이 이렇게 뻣뻣해?"
순간, 임단하는 그릇 속에서 젓가락을 톡 튀겼다.
소면 한 올이 국물 위로 튀어 올랐다.
그것은 마치 화살처럼 쉬이익! 관병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뭐, 뭐야?"
관병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소면 끝은 그의 양 미간 사이를 노리고 쭉 곧게 뻗었다.
막 미간이 뚫리기 직전, 관병의 어깨 뒤에서 손 하나가 나오더니 소면을 그대로 내리쳤다.
탁!
소면은 그의 손바닥에 맞고 아래로 방향을 바꿨다.
놀랍게도 보리로 반죽되고, 끓는 물에 힘없이 풀어진 소면 한 올이 그대로 나무 바닥에 팟! 꽂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소면의 공격을 받은 금의위 위사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임단하의 가공할 신위를 목격한 다른 위사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석비룡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성질 급한 내 수하의 잘못도 크지만 다짜고짜 목숨을 노리는 귀하의 손버릇도 결코 칭찬할 만한 것은 못되는 것 같구려."
임단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일신 공력 중 절반의 힘으로 날린 소면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쳐 바닥에 떨어뜨리다니, 금의위의 위사 따위가 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보통 놈은 아니다!'
임단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맞은 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들은 할 말이 없어. 밥 먹는 데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는데…… 자, 이제 식사가 끝났으니 얘기를 들어볼까?"
석비룡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구려. 실례 많았소이다."
그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휙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임단하의 목소리가 그의 목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용건도 말하지 않고 그냥 가는 건가?"
석비룡은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얼마 전 자금성 감옥에서 여죄수 하나가 중요한 기밀서류를 훔쳐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소. 이 몸은 자금성 금의위(錦衣衛)에서 파견된 용비석이란 사람이고……."
임단하는 눈썹을 미간 쪽으로 모았다.
"날 그녀로 착각했다는 거야?"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곧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았소. 왜냐하면 그녀는 소저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지도 않고 소저처럼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오. 그럼……."
석비룡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3)
장삼곡(掌森谷)……
밀림을 연상시키듯 협곡 양쪽에 울울창창(鬱鬱蒼蒼) 빼곡하게 들어찬 거대한 수림(樹林).
장삼곡의 오솔길, 낙엽이 켜켜 깔린 산길은 마치 군데군데 함정을 파놓은 것과 같다.
낙엽으로 뒤덮여 보이지 않을 뿐 그곳에는 낭떠러지도 있었고, 깊이가 없는 거대한 늪도 있었다.
그래서 나무들이 옷을 벗고, 땅 위에 한 자 높이로 낙엽이 덮인 이후에는 나무꾼이나 사냥꾼들도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고 알려진 장삼곡.
스스슥……!
위험한 장삼곡 안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마치 날짐승이라고 여길 정도로 낙엽 위를 빠르게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것은 검은 인영이었다.
검은 면사에 검은 옷, 그리고 검은 망토. 온통 검은 색으로 치장한 그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은 손에 들린 세 뼘 길이의 짧은 죽봉뿐이다. 장미꽃 종이 달린 그것은 화령귀객 임단하의 독문무기 화무신관이었다.
화령귀객 임단하의 모습이 이쪽에서 나타났다 싶었는데, 저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눈을 감았다 떴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스스슥……!
이번에 나타난 것 역시 검은 인영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의 숫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섯 개의 그림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임단하가 지나간 길 위를 스치듯 통과해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멀어져갔다.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맑고 청아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그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진기가 실려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앞에서나 십 리 밖에서나 똑 같은 크기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딸랑!
딸랑!
종소리는 꼭 여섯 번 울렸고, 그리고 끊어졌다.
여섯 그림자는 곧 자신들을 기다리고 서 있는 한 인영을 보았다. 검은 면사의 여인, 화령귀객 임단하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오른쪽의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키키키키!"
섬뜩한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는 어두운 하늘 위로 치솟았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며 병아리를 덮치는 솔개처럼 맹렬하게 아래로 덮쳐왔다.
"조심해라! 저 계집의 화무신관은 특별하니까."
임단하의 표정은 한 점 동요 없이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놈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홉 척은 충분히 될 듯한 거구의 사내. 헝크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한 쌍의 눈에는 충혈된 붉은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무림맹 살병부 서열 삼십구위(三十九位)에 올라있는 백구혈안(白軀血眼) 소진량(蘇鎭良)이라…… 이건 의외의 소득이로군."
소진량의 거구가 머리 위를 덮칠 때, 임단하는 발을 살짝 움직였다.
얼핏 보기에는 약간 움찔했는가 싶었는데 그녀의 신형은 일 장이나 물러나 있었다.
꽈꽝!
맹렬하게 떨어진 두 주먹은 목표를 잃고 땅바닥을 한 자 깊이로 파냈다.
뒤로 물러섰던 임단하는 다시 다가오며 화무신관을 앞으로 쭉 뻗었다.
파파파팟!
죽봉 끝에서 붉은 광채가 폭사돼 나왔다.
쉐에엑……!
한 송이 장미꽃이 피고 장미꽃 속에 숨어있던 수십 개의 꽃술이 소진량을 향해 뻗어왔다.
"우웃!"
츄츄츄ㅊ!
화무신관에서 뻗어온 빛은 소진량의 앞가슴과 어깨 등에 무수한 구멍을 뚫었다.
촤아악!
구멍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소진량이 몸을 날린 후 그의 거구가 땅바닥에 뒹굴기까지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 사이,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는 임단하를 포위했다.
스스스슥!
그제야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한 명의 꼽추와 여인, 그리고 건장한 체구의 남자 셋이었다.
임단하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내가 오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철심냉군 조해로부터 연락이 닿은 건가?"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왼쪽 눈 아래서부터 입술까지 톱날에 찢긴 것 같은 흉칙한 흉터가 눈에 띄는 사내와, 창백했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한 삼십대 초반의 여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여인의 배는 약간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이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단하는 흉터를 가진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긴 문제가 많은 아들일수록 제 부모는 끔찍히 섬기는 법이지. 문제아는 바로 문제가정에서 나온다던가, 안 그래?
금각동인 조추상!"
조추상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린 피차 초면일 뿐더러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집요하게 날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건 무림맹 맹주 서문화가 대답해야 될 성질의 질문 같은데……."
"흐흐흐!"
음산한 웃음소리는 반대편에 선 키 작은 난장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곡마단에서 재주를 부리는 난장이를 연상시키는, 석자도 못되는 키에 등에는 작은 쌍칼을 꽂고 있었다.
만약 아이들이 그의 모습을 봤다면 킥킥 웃었을 것이지만, 임단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의 작은 한 쌍의 눈이 마치 숫돌에 잘 간 한 쌍의 칼날같이 날카로웠던 것이다.
"대막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화령귀객이 서문화의 발바닥이나 핥아주는 개가 된 줄은 미처 몰랐군."
임단하는 차갑게 되받았다.
"귀왕(鬼王) 제수륭(祭需隆)! 네 쪽에서 본다면 지독한 불행이 될 테지. 그리고 그 뒤에 서 계신 두 분은 상산(常山)의 두 형제겠지?"
그녀의 눈빛이 왼쪽에 선 두 사람을 향했다. 그들은 쌍둥이였는데 피골이 상접했고 이마가 툭 튀어나온 것이 평범한 인상은 아니었다.
"크크크! 아랫도리만 잘 돌리게 생긴 줄 알았더니 우리 상산쌍마(常山雙魔)를 알아보는 것을 보면 눈알 굴러가는 솜씨도 제법이구나, 계집!"
임단하는 오른손에든 죽봉, 화무신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래저래 횡재했군. 이미 백구혈안 소진량을 잡은 데다 금각동인 조추상이 제 발로 나타났고, 또 다시 세 명이나 과외 소득을 추가하게 생겼으니……."
조추상이 섬뜩한 눈빛을 빛냈다.
"화령귀객, 네년은 처음부터 중원 땅을 밟지 않았어야 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스스슥!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네 사람의 신형. 미부는 멀찌감치 뒤에 떨어져 있었다.
"너희들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솜씨를 보이도록 하라. 목이 떨어진 다음에는 후회해도 늦을 테니……."
"크크크! 걱정하지 말아라, 계집!"
그들은 품속에 양손을 쑥 집어넣었다가 꺼내는데 손가락 사이에는 검은 구슬이 끼여져 있었다.
"벽력탄?"
"크캇캇캇! 특별히 화령귀객을 위한 죽음의 축제이니 사양치 말고 마음껏 즐기도록!"
손바닥을 쫙 펼쳤다.
슈슈슈슈슝!
수십 개나 되는 검은 구슬, 벽력탄이 임단하를 겨누고 쏘아져왔다.
임단하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벽력탄이라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뇌화곡(雷火谷)에서 만들어낸 비폭천산뢰(飛爆千散雷)라면 사정이 다르다. 하나의 벽력탄이 터질 때마다 극독 염명독(炎命毒)을 바른 솔잎 같은 독침 수천 개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조추상은 득의의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날개가 달려있어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임단하는 즉시 호신강기를 펼쳐 몸을 보호했다.
꽈꽈꽝!
폭발이 일어났고, 임단하는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 피했다.
과연 비폭천산뢰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변의 낙엽들이 일제히 불이 붙어 화르륵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폭풍우에 휘말리듯 뒤집어졌다.
임단하는 얼굴 옆으로 비껴 지나가는 독액의 기운을 느꼈다.
훅 하고 코 끝으로 풍겨오는 지독한 냄새를 맡자 순간적으로 앞이 어찔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호신강기를 팟! 뚫고 들어와 그녀의 어깨에 박히는 독침 하나.
"내가 잊고 얘기를 해주지 않았군. 특별히 뇌화곡에 부탁을 했지. 독침은 어떤 호신강기라도 뚫을 수 있게 만년한철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야."
임단하는 피가 배어나오도록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속전속결뿐이다.
독이 전신에 퍼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이 악독한…… 좋아, 모조리 없애주마!"
가슴과 허벅지에 또다시 하나씩 독침을 맞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곧바로 네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조추상을 비롯한 네 사람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크캇캇캇! 세상에 가장 좋은 구경이 불구경이라더니 정말 기가 막히군!"
"자신을 너무 과신한 게 실수였다, 계집!"
낙엽이 타면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상대가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아닌, 피와 살로 뭉쳐진 사람인 이상 비폭천산뢰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검은 연기 속에서 눈부신 장미꽃 수만 송이가 일시에 피어올라 활짝 만개(滿開)하는 것이다.
'뭔가 잘못됐어?'
생각은 길지 않았다.
장미꽃에서 뿜어져 나온 자욱한 빛무리가 귀왕 제수륭과 상산쌍마의 몸을 휘감았다.
쉬익!
그들은 어떻게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화, 화무신관! 미……믿을 수 없어……."
예리한 빛 한 줄기가 그들의 미간을 뚫고 뒷통수를 빠져나갔다.
뭉클!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포물선을 그렸을 때는 이미 세 사람의 몸은 차디찬 주검이 되어 낙엽 위에 파묻혀 있었다.
임단하는 검은 연기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추상은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임단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뭘 착각해도 한참 착각한 거야. 대막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워지는 내가 이 정도로 꺾인다면 지나던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 아니겠어?"
조추상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물러서는 꼭 그만큼의 거리로 임단하는 다가들고 있었다.
"자, 잠깐만!"
조추상은 친근함을 나타내려는 듯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보는 사람에게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주면…… 서문화가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 몰라도 내가 그 두 배, 아니 세배를 드리겠소!"
임단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열네 살 때부터 살인을 시작한 뒤로 네 손에 죽어간 무고한 생명의 숫자가 아마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라지?"
그녀의 음성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지만 조추상에게는 마치 땅 속에서 자신의 발목을 움켜잡는 저승사자의 목소리로만 들렸다.
임단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잘 걸렸어. 굳이 서문 맹주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너 같은 놈은 꼭 내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었거든."
그녀의 손에 들린 화무신관의 끝이 조추상의 가슴을 향했다.
"각오해라, 조추상! 이변이 없는 한 네 목은 아주 순식간에 땅에 뒹굴게 될 테니까."
그 순간, 조추상의 눈에는 악독한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생쥐의 눈빛이었다.
"죽어도 혼자 죽지는 않겠다, 계집!"
고함소리와 함께 조추상은 양손을 모아 앞으로 쭉 내밀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느새 뽑아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길이 다섯 치 정도 되는 짧고 끝이 뾰족한 검이 들려져 있었다.
쉐에엑!
그의 신형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임단하의 몸을 덮쳤다.
푸슝!
죽봉 끝에서 화려한 한 송이 장미가 피었다.
그 어떤 방어식도 화무신관의 빛을 막을 수는 없다.
푹!
조추상은 한 줄기 빛이 자신의 이마를 뚫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우욱!
입술을 꾹 깨물어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쩡그랑!
비명 대신 손에서 떨군 검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여, 여보……."
검은 옷을 입은 미부가 조추상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들어 가슴에 보듬어 안았다.
임단하는 쓸쓸한 얼굴로 미부를 내려다봤다.
"당신은 조추상의 아내?"
미부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속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조추상의 씨를 배고 있나?"
미부는 화들짝 놀라며 임단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제, 제발! 우리 아기만은……."
미부는 배를 감싸안고 창백하게 질린 낯빛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임단하는 휙 돌아섰다.
"이십 년쯤 지난 뒤에 그 아이가 부친의 복수를 하겠다면 내 이름을 말해줘. 내 이름은 임단하! 화령귀객 임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