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의 삶
'죽을 때까지 일을 놓지 말아라...'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다. 무엇인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따는 것은 비단 건강에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은퇴후에는 더욱 그렇다. 취미, 공부, 운동, 봉사활동 등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일들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은퇴후가 아닐까.
홍보대행사 인터 퍼블릭 릴레이션스의 김기태(43) 이사는 스코어 90대의 평범한 주말 골퍼다. 골프 구력은 3년.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장을 찾고, 한 달에 한두 번 필드에 나간다.그의 만년(晩年)의 꿈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전세계 골퍼들의 선망의 대상인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코스 등 세계 유명 골프장을 순례하는 것. 더 정확히는 골프와 좋은 코스들을 매개로 오랜 벗들과 살아온 인생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골프는 흔히 인생에 비유되는 게임이다. 1996년 미국의 저명한 골프 칼럼니스트 제임스 도드슨이 골프 스승인 나이 여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2차 대전 참전 시절 처음 골프를 배운 스코틀랜드의 유명 코스를 돌면서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쓴 논픽션 「마지막 라운드」를 읽고 나서, 그런 계획을 세우게 됐다는 김이사는 “당초 친구 내외와의 부부동반 골프여행을 구상했지만 와이프가 골프에 관심이 없어 계획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도드슨의 아버지는 당시 10년 만에 재발한 암과 투병 중이었고, 골프 여행에서 돌아온 지 두 달여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열살일 때부터 “골프가 어려운 건 똑같은 샷을 두 번 다시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며 “골프의 묘한 점은 필사적으로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원하는 게 오히려 멀리 달아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아들은 이 골프 레슨을 통해 인생의 이치를 터득했고,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선물로 스코틀랜드 골프여행을 제안한다.
스코틀랜드는 골프의 발상지. 탤런트 강석우는 「마지막 라운드」를 읽고 “내 인생의 지표 같은 책”으로, “어느 골프장에 늙은 나와 장성한 내 아들이 석양에 단둘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고 쓴 일이 있다. “「골프다이제스트」지가 해마다 발표하는 톱 코스 1백곳 중 절반 정도를 포함해 모두 1백곳을 ‘답사’할 생각입니다. 오래 몸담았던 전 직장 오리컴의 동료들, 대학 시절 서클 친구들과 이 환상적인 여행 얘기를 해 봤는데 다들 좋아하더라구요.”
그는 중학교 2학년생인 무남독녀에게 짝을 맺어주고 나서 예순 안팎에 이 여행을 실행에 옮길 작정이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돈, 시간, 친구, 건강. 돈은 라운드당 20만원씩 골프장 경비로 2천만원을 잡을 때 다해서 5천만원 정도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액수. 시간은 여행 중간 중간의 휴식기간을 포함해 3년 잡고 있다. 친구는 물색 중이고, 건강은 골프로 다지고 있다.
“노후에 먹고사는 문제는 연금을 여러 개 들어 해결했습니다. 와이프와는 의논이 됐구요. 지금부터 부지런히 이 ‘가욋돈’을 마련해야죠.” 골프여행은 그의 노년 프로그램이다. 이런 노년 프로그램은 노후의 4중고(四重苦)인 빈곤, 질병, 역할 상실, 고독에서 벗어나는 데 유용한 장치다. 노년에 대비하는 재테크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나머지 문제들에 대한 해법은 아니다. 김이사의 골프 여행은 이 문제들을 돌파하는 데 효과적일 뿐더러, 경비를 마련하다 보면 빈곤 문제는 그에 앞서 해소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이와나미서점 편집부가 펴낸 「정년 후」(이진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는 스스로 짠 프로그램에 따라 ‘정년 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스스무는 도쿄공고를 나와 오키전기에 22년 동안 근무하고 시나가와 공장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평생 그의 일은 금형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일을 대부분 수작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기계를 이용해 금형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오십 줄에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임시 직공으로 출발해 2년 동안 공장 몇 곳을 전전하며 새 기술을 익혔다.
귀국 후 미국계 기업에서 컨설턴트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지만, 중병을 앓던 아내가 세상을 등지자 일흔아홉의 나이에 중국으로 향한다. 2차 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죄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하기 위해 ‘실버 자원 봉사’를 떠난 것. 여든여섯이 되기까지 11년에 걸친 봉사활동 기간 엄격했지만 혼신을 다한 지도로 그는 중국인들로부터 아버지처럼 존경받았다.
그의 사례를 다룬 작가 시로야마 사부로는 노년의 해외 자원봉사자의 조건으로 건강, 배우자의 이해, 남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 파견될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 등을 꼽는다. 그는 이런 ‘정년 후’는 순서로는 제2의 인생일지 몰라도 내용면에서는 첫 인생에 필적하거나 능가할 수도 있는 값진 삶이라고 설파한다. 이들에게 정년 후는 더 이상 인생의 덤과 같은 ‘여생(餘生)’이 아니다.
자식이 앓았던 난치병 담도폐색증 덕에 ‘담도폐색증 어린이를 지키는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일본의 지방공무원 이시마루 유지로는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이 책에서 “정년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외친다. “내게 정년은 생활영역이 일부 축소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년은 정신의 자유를 빼앗길 때 시작되는 내적인 현상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갖는 한 정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정년 전의 삶의 방식과 살아가는 자세가 정년 후를 크게 규정짓는 것은 아닐까?”
40대 전반에 문공부 장관을 지낸 윤주영(74)씨는 십여 차례 사진전을 연 현역 사진작가. 1979년 오십줄에 접어들어 관직에서 물러나며 우연히 든 카메라 덕에 사진은 그의 ‘제2의 인생’이 됐다. “수명 연장에 불과한 노년의 생존은 무의미하며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이라야 진짜 삶이다.”
늦깎이지만 현대사진문화상 등을 수상하는 등 창작욕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그의 변이다. 키즈카와 케이 日 리츠메이캉大 교수는 「정년 후」에 실은 글에서, 정년 후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상에 ‘생기’가 감돌아야 한다고 말한다. 생기의 원천으로 그는 취미, 학습, 자원봉사, 스포츠 등 네 가지를 꼽는다.
토론토 교민사회에도 은퇴후에 더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공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66년 이민와 줄곧 토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던 한경섭씨(한국일보 '김운영이 만난 사람' 10월29일자소개)는 은퇴후 92년년부터 토론토대학에서 역사를 공부, 올해 2편의 역사논문집을 완성했다.
예비역 공군 준장 출신에 고급공무원을 지낸 최명균씨는 고희를 한해 앞둔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은퇴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뒤늦게 피아노와 컴퓨터를 배우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서예를 연마하고, 골프 등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27년간 취미로 목공을 해온 교민 최광휘씨(57)는 목재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올라있을 정도 매주말 '목공소'를 방불케 하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윈저체어제작에 여념이 없는 그는 앞으로 은퇴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골동품가구 복제에 뛰어들 계획이다. 그는 목공취미 외에도 스테인드글래스 기술도 갖고 있다.
이들 외에도 교민사회에는 은퇴후 해외선교여행을 떠났거나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수 있다. 그동안 바쁜 개인생활로 인해 하지 못했던 선교활동을 자녀들을 다 키워놓은 뒤 부부바 함께 해외로 떠나거나 신학교에서 목회자 수업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은퇴생활이 가장 의미있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따면 미리 은퇴를 준비한다는 사실이다.
(Canada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