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곡리 공소(칠울 공소)
간략설명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를 굽던 교우촌
지번주소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188-1
도로주소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4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불렸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지며, 성당 앞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다.
갈곡리 교우들은 1936년에 마련한 공소 강당이 6.25 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자 옛 강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김창석 타대오 신부와 미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55년 1월 현재의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공소 성당을 건립하여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 · 봉헌하였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된 갈곡리 공소는 오랜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됨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의정부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의정부교구는 교구의 대표적 공소로 초기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갈곡리 공소의 칠울 강당을 개보수하여 2008년 11월 20일 축복식을 가졌다. 오랜 세월로 낡고 불편해진 강당의 기본적인 외관과 틀은 보존하면서도 지붕과 바닥 공사 등을 새로 해 신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성당 맞은편에 아담하게 흙집으로 보수된 칠울 강당은 한 번에 10-30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으며, 주일학교나 단체에서 피정 · 연수 등을 할 수 있다. 매월 둘째 주일 오전 9시에 공소 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된다. [출처 :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의정부교구 순례길 안내,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