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리더의 표상 위대한 리더 이순신(2)
- 이순신 승리의 병법-
임 원 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전 해사 교수부장)
이순신 제독(이하에서는 ‘이순신’으로 약칭)은 어떻게 7년여 전쟁 기간 동안 치른 50여 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을까? 이제까지 우리 국민들은 이순신을 1당 100으로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이해하여 온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해전을 분석해 보면 명량해전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해전에서 이순신은 척수 면에서도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이제 이순신을 바라보는 관점,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싸워 이긴 무협지 주인공 같은 리더가 아니라 싸우기 직전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우세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 탁월한 리더였다. 아래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순신 승리의 병법을 네 가지 측면에 국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 – 전투력 집중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1592년(임진년)에 이순신은 총 4차례의 출전을 감행한다. 첫 출전인 제1차 출전에서는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 28척을 포함하여 총 91척의 함선이 동원되었다. 이는 자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소속 함선 대부분과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의 잔여 함선 모두를 총동원한 것이다. 최초의 승전보를 올린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본 함선 30여 척과 조우하여 그 가운데 26척을 격파했으며, 합포해전에서는 5척을 그리고 적진포해전에서는 13척을 만나 모조리 격파하였다. 이른바 91척 대 30척, 91척 대 5척, 91척 대 13척이라는 절대 우세의 해전을 벌인 것이다.
제2차 출전에서의 전과는 더더욱 놀랍다. 네 차례 해전에서 조우한 72척의 일본 함선을 모조리 전멸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의 두 해전에는 전라좌수영‧경상우수영의 함선 26척이 동원되었는데 사천해전에서 일본 함선 15척을, 당포해전에서 21척을 각각 격파하였다. 제2차 출전의 세 번째 해전인 당항포해전 직전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의 함대가 합세하여 총 51척의 통합 함대가 구성되었다. 조선 수군은 당항포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율포에서 8척을 각각 조우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이순신은 제2차 출전 중에 있었던 네 차례의 해전에서도 26척 대 15척, 26척 대 21척, 51척 대 26척, 51척 대 8척의 우세한 해전을 벌인 것이다. 조선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과 거북선의 질적 전투력 우위까지를 고려하면 그 우세의 정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제3차 출전 중에 있었던 한산해전의 경우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가용한 모든 함선이 총동원되어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과 거북선의 숫자는 55〜58척에 달했다. 당시의 일본 자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는 조선의 함선 세력을 판옥선 55척, 거북선 3척, 소선 50척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함선은 소선을 포함하면 총 108척이 참전한 것이다. 또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일본의 함선 세력이 판옥선과 크기가 비슷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총 73척이었다고 적었으니 척수 면에서도 조선 수군이 열세라고 보기 어렵다.
제4차 출전에서는 개전 이후 가장 많은 함선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조선 수군의 함선은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소속의 함선 총 180여 척이었다. 최종 공격 목표인 부산포에는 47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척수 면에서 조선 수군이 상당한 열세였지만 일본 수군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지 않고 육지로 올라가 조총 등을 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함선 세력의 수적 우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
만약 1592년(임진년) 제1차 출전에서 제4차 출전까지 동원된 양측의 함선 세력을 모두 모아 놓고 넓은 바다에서 결전(決戰)을 벌였다면 이순신은 이처럼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평소 조선의 함선 세력이 일본의 함선 세력에 비해 턱없이 열세인 것에 대해 늘 노심초사하였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함대만의 단독 작전을 결단코 벌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선 세력을 통합, 운영하여 전투력을 집중함으로써 구체적인 해전 국면에서만큼은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는 대부분 부대별로 분산되어서 노략질을 하다가 통합된 조선 함대를 만나 궤멸되곤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3년(계사년) 9월부터는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 충청수영 등 삼도의 모든 수군을 통합 지휘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되었다.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 이순신 승리의 핵심 병법이 아닐 수 없다.
적의 대장선이나 선봉 함선에 화력을 집중하라 – 화력 집중
‘전투력 집중’이 해전 전체국면에서의 전투력 운영의 원리라면 ‘화력 집중’은 구체적인 전투 현장에서의 무기, 무기체계 운영의 원리이다.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적의 대장선이나 선봉 함선에 가용한 화력을 집중하여 순식간에 격파하였다.
다음은 1592년(임진년) 제2차 출전 중의 당포해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왜선은 크기가 판옥선만 한 것 9척과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뉘어 정박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층루가 있는 한 대선 위에는 높이가 3, 4장이나 될 듯한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두르고 휘장의 사면에는 ‘황자(黃字)’를 크게 써 놓았습니다. 그 속에 왜군 장수가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지라,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곧바로 돌입해 들어가 용(龍)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 쏘게 하고 또 천자‧지자‧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아 그 배를 쳐부수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번갈아 쏘았습니다. 중위장 권준이 돌진해 들어가 왜군 장수를 쏘아 맞추었는데, 활을 당기는 소리에 맞추어 거꾸로 떨어지므로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그 왜장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적도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는데......”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자 가장 먼저 거북선을 일본 수군의 대장선을 향해 돌격시켰다. 그리고 거북선 뱃머리의 용(龍)의 입에 설치된 현자총통을 쏘아 기선을 잡고 이어서 현측에 설치된 천자‧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大將軍箭) 등을 발사하여 적선을 격파하였다. 그다음에는 갑판 위에서 허둥대는 일본 수군 장수와 병사들을 향해 철환과 화살을 마구 쏘았다. 마지막으로 화살을 맞고 바다에 떨어진 일본 장수를 건져 올려 목을 베었다. 가용한 화력을 일시에 적의 대장선에 집중하여 전광석화처럼 격파하고 적의 장수를 사살하여 효시(梟示)하는 해전 전술은 개전초기에 일본 수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일본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이중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임진년(1592년) 제3차 출전 중에 있었던 한산해전에서 사용한 학익진(鶴翼陣)은 판옥선의 선수와 현측에 배치된 각종 총통의 화력을 선두에서 진격해 오는 일본의 선봉 함선에 집중시키기 위한 진형법이다. 이순신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를 좁은 견내량으로부터 넓은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는 한편 일시에 학익진(鶴翼陣)을 벌여 선두에서 추격해 오는 일본 함선 2, 3척에 각종 총통의 화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순식간에 격파하였다. 이렇게 초전에 승기를 잡은 이순신 함대는 50여 척의 판옥선을 일제히 전진시켜 우왕좌왕하는 일본의 함선들을 각개 또는 협동 격파하여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겼다. 적의 대장선이나 선봉 함선에 대한 화력 집중! 또 다른 이순신 승리의 병법이다.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 주도권 확보
주도권이란 전장(戰場)에서 피동(被動)이 아니라 주동(主動)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전장(戰場)에서의 주도권 확보의 핵심 요소는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군(我軍)에게 유리한 시간과 장소로 끌어내거나,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선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년(1592년) 제1,2,3차 출전에서 벌인 9회의 해전에서 이순신은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순신은 언제나 먼저 적을 발견하고 그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해전을 벌여 일본 함대를 격파하였다. 제1,2,3차 출전 중에 치른 가장 큰 해전이었던 한산해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견내량의 좁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한산도 인근의 넓은 바다로 이끌어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견내량은 포구가 좁아 대선인 판옥선이 기동하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일본 수군은 해전을 하다가 불리하면 배를 포구에 대고 육지로 도망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년(1592년) 제4차 출전 중의 마지막 해전인 부산포해전에서도 해전 장소와 시간을 선택한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부산포에 50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절영도 앞 해상에서 이억기, 원균과의 작전회의를 통해 부산포 공격을 결정하였다. 부산포 앞 해상을 해전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부산포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부산포까지 조선 수군이 공격해 들어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함대의 공격에 놀란 일본군들은 배를 버리고 뒷산으로 올라가 조총 등을 쏘며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부산포 앞 바다는 그들이 원하는 해전의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불가사의한 해전으로 평가되는 명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전라도 장흥의 회령포에서 10여 척을 수습한 이순신은 300여 척의 일본 함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후퇴를 거듭하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과연 어디서 싸워야 승산이 있을까? 명량해전이 있기 하루 전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진에서 해남의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으로 진(陣)을 옮겼다. 명량 인근의 좁은 해협을 가로막으면서 해전을 벌이기로 작정한 때문이었다. 명량 인근의 좁은 해협은 300여 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선이 동시에 해전에 참여하기에는 가장 비효율적인, 13척밖에 안 되는 조선의 함선이 해협을 가로막고 해전을 벌이기에는 가장 유리한 해전 장소였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싸울 장소를 먼저 선택한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해상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사천‧남해 등지에 있던 일본 함대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전면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바로 봉쇄를 풀고 노량으로 이동하였다. 노량을 해전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순천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계속해서 봉쇄하면서 머물러 있을 경우 앞뒤로 협공을 당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라 – 지리(地利) 이용
이순신이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사례 가운데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 30의 열세 상황을 반전시켜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이다. 1597년(정유년) 7월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통제사 원균 또한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8월 3일 진주 수곡의 손경례(孫景禮) 집에서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8월 18일 전라도 장흥의 회령포(會寧浦)에서 전선 10여 척을 수습하고, 이진(梨津)을 거쳐 8월 24일 어란포(於蘭浦)에 도착하였다. 이순신의 함대는 8월 27일 어란포에서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처음으로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는다. 일본 함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순신은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으로 함대를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9월 15일까지 해전을 준비하며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4일 육지로 정찰을 나갔다 돌아온 탐망 군관 임준영(任俊英)으로부터 “일본 함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벌써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명량해전 하루 전인 9월 15일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진(陣)을 옮겼다. 진(陣)을 옮긴 뒤,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9월 15일)
이날의 일기에는 이순신이 왜 명량 인근의 좁은 해협을 해전 장소로 선택하였는지의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것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병법의 원리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130여 척의 일본 함선을 명량 인근의 좁은 물목에 가두어 130여 척이 동시에 해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실제로 일본 함대는 전체 300여 척의 함선 가운데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부네〔安宅船〕를 대부분 제외시키고, 판옥선보다도 훨씬 작은 세키부네〔關船〕 중심의 130여 척을 명량해전에 투입하였다. 이순신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 함선 130여 척이 조수를 타고 명량해협을 빠르게 통과하여 전라우수영 앞 해상에 진을 치고 있었던 조선 함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 전투 국면에서는 일본의 함선 130여 척 가운데 선두에 있던 31척이 조선의 함선 13척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양상으로 해전이 전개되었다. 명량 인근의 해협이 좁아 130여 척의 일본 함선이 모두 해전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명량의 입구까지 진출한 일본의 함선 세력이 300여 척이었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최초 13척 : 300여 척에서, 13척: 130여 척으로 그리고 실제 해전 국면에서는 다시 13척: 31척으로 그 열세의 상황이 크게 축소된 것이다. 비록 어려운 해전이었지만 조선 수군의 판옥선 13척은 에워싸고 있던 일본 함선 31척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명량해전은 조선의 판옥선 1척이 일본의 세키부네 3척 이상을 대적할 수 있는 질적 전투력 우위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전에서 좁은 해협을 해전 장소로 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13척 대 300여 척이라는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명량 인근의 좁은 해협 이른바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외에도 이순신은 언제나 수세(守勢)가 아니라 공세(攻勢)의 위치에서 해전을 벌였고, 정확한 정보 없이는 함부로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으며, 승리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해전을 치렀다. 이런 승리의 병법에 기초하여 그는 언제나 유리한,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해전을 벌여 전승무패의 승리 신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순신 승리의 병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끝>(월간<자유> 5월호 게재)
첫댓글 승리의 요인을 또 복습합니다.
일목요연한 옥고에 감사드리며 꼭 기억하겠습니다.
투고 요청이 있으니....20여년 전에 정립한 것이지만...다시 정리해 보게 됩니다. 저도 도움이 되네요....ㅎ
5월 게재한 글이군요..
많은 사람들이 많이 읽고 많이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배사님들께...특별히 ..올려드리는 글인데........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ㅎ
잘 정리된 내용으로 공부하니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의금부에서부터.....백의종군로 걷기....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도움이 되셨다니...감사하네요.....ㅎ
일심님의 강의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이배사님들...저에게 평소 많이 들으신 이야기이지요.....진해현감님...응원에 힘입어....저도 다시..시작한다는 마음으로..힘을 내어 보겠습니다...아자!......ㅎ
대령님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것 같습니다. 이제사 보아 죄송합니다. 여러번 읽겠습니다.
여수 갈 때마다...환대해주시는...여수지회장님이 계셔서....저도 힘이 납니다. 감사..감사....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