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堂山)이야기.
1. 당산 개요
옛날 해가 바뀌어 새해를 맞이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행하는 첫 번째의 문화적인 행사가 당산제를 모시는 일이었다.
마을의 성역인 당산에 깃들어 있는 당산신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마을의 태평과 풍요, 번영은 물론이요, 병마나 재액(災厄)을 막아주는 최고의 신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당산신앙은 일제(日帝)가 우리 문화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당산제를 비롯한 우리 고유의 무격신앙행위를 미신으로 매도하면서 금지, 타파하기 이전인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 자연부락 마을의 58%가 당산제를 지내왔을 정도로 가히 민족적인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산신은 마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운수를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안과태평(安過泰平)과 제액소복(除厄召福), 풍농풍어(豊農豊漁)와 자손의 번창을 가져다주는
하늘님을 대신하는 신으로 믿어 받들어지기 때문에 마을마다 자기 마을의 당산신을 정성스레 모시는 일은
평상시는 물론이요, 새해 들어 마을의 첫 번째로 행하는 큰 행사였다.
이는 마을이라는 사회공동체가 행하는 한결같은 염원을 축원하는 공동의 신앙행위로서
당산신에게 신심의 정성을 다하지 않음으로 해서 신의 노여움을 사 마을에 궂은 일이 발생하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병마와 화마 등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원시적 신앙의식이 주가 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신앙적인 일체성과 구심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며,
서로의 쌓였던 갈등도 말끔히 해소하고, 단합과 새로운 마음가짐은 물론이요,
애향심까지도 다져지는 효과를 얻는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기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것이 음복(飮福)과 제의(祭儀) 및 뒤풀이로 행해지는
줄다리기를 비롯해 풍물굿판 등 여러 가지 흥겨운 놀이마당을 통해서라 할 것이다.
2. 당산신 유래
우리 겨레 고유의 마을 공동신앙행위인 당산신 모시기가 언제부터 행하여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먼 옛날부터 있어왔을 원시적인 신앙행위의 형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며
그 흔적은 옛 문헌의 기록에도 보인다.
중국 진(晋)나라 때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소도(蘇塗 : 솟대)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시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 이렇게 하였으며 귀신을 믿되 나라마다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께 주제하되
이름을 천군이라 하였다.
또 모든 나라에 각기 별읍을 두고 이름을 솟대라 하여 긴 장대나무에다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받들었으며
모든 망명인이 이곳으로 오면 반환하지 않았고 도적질하기가 일쑤였다.
그들이 솟대를 세우는 뜻은 부도(浮屠)와 같은 점이 있으나 그 하는 일에 선과 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라 하였다. 마한은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에 충청, 전라도 지방에 있었던
삼한시대 부족국가형태의 나라로 54개의 읍으로 이루어졌으며,
후에 백제가 이곳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별읍이란 어떤 특수한 성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각 부족국가의 작은 마을을 뜻하는 말이며,
가을걷이 농사의 일이 모두 끝난 10월에 천군이라 부르는 사제를 뽑아 하늘님에게 감사의 제사를 이곳에서 지냈으며,
마을마다 긴 나무장대의 솟대를 세우고 그 위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신을 섬겼다고 하였다.
이 긴 나무장대의 소도가 오늘날의 당산지역에 세워지는 솟대일 것이며,
섬겼다는 신은 하느님을 대신하는 마을 수호신인 당산신인 것으로 여겨진다.
위의 문헌기록으로도 하늘님을 섬기는 천제와 마을 수호신을 받드는 당산제는
최소한 2천년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고,
까마득한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신앙제인 이 당산제야말로
순수 고유한 천신 신앙적 제의의 의식이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3. 당산신의 형태
당산신이 서의(棲依 : 깃들어 있음)하고 있는 신체의 형태는 지리적 자연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 원형에 있어서는 대체로 비슷하다.
당산신체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아름드리 노거수의 느티나무, 회나무, 팽나무 등의 생목이며,
죽은 나무는 당산의 신수(神樹)가 되지 못한다.
나무를 베어다 다듬어서 솟대로 세우는 경우가 더러 보이기도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노거수인 주당산을 도와주는 하위 보조신인 짐대, 수살대 기능의 경우다.
솟대나 입석 짐대는 풍수신앙과 무격신앙이 습합된 비보(裨補)의 기능과
병마, 잡귀 퇴치의 기능을 함께 하는 당산으로, 주당산을 돕는 성격의 하위당산(下位堂山)이다.
솟대 위에 오리를 조성하여 놓기도 하고 의인화하여 갓을 씌우는 곳도 있으나,
밋밋한 돌기둥의 입석 짐대가 가장 많다.
산간지역, 특히 소백산맥 주변의 마을들에 집중적으로 많이 보이는 원추형의 누석조탑(累石造塔)당산의 경우
주당산은 산신격(山神格)의 신목이다.
조탑당산도 풍수적인 수구맥이 기능을 하는 조탑을 제외하고는 할아버지, 할머니 조탑당산으로 조성되며
마을 입구의 도로를 사이하고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며 마을을 지키는 형태로 조성 배치되고 있다.
밑둘레 3~4m, 높이 3~4m 내외의 크기로 잡석을 조형미 있게 쌓으며
상단에 50cm 내외의 머릿돌을 세워 놓는다.
또 당산의 형태에서 건축물로 된 이른바 당집을 많이 볼 수 있다.
당산의 원형은 자연물체인 산, 바위, 큰 나무 등이었으며,
이들 자연물체들이 신체와 신단을 겸하였으나 비바람, 풍설 등으로
신을 모시는 일이 불편하여 신을 모시는 작은 당집이 생기면서
위패나 탱화를 모시는 신단이 자연물에서 신당(神堂)인 당집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된다.
이들 당집들은 처음에는 마을에서 멀고 높은 산정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점차 산 아래로 내려 왔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좀더 편리하게 마을의 주변으로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신단은 물론이요 위패(位牌), 신지(神紙), 무신도(巫神圖) 등과 제기류 등이 비치되었다.
이와 같은 당집형태의 당산은 산간지역이나 해안도서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당산은 마을의 주령 또는 그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다.
주령이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세의 주맥을 말한다.
이 주맥에는 마을의 운세와 생기가 응집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수호신이 거기에 깃들여 있어야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래서 마을의 가장 성스러운 성역으로 여긴다.
따라서 모든 부정한 것들은 이 근처에 접근하지 못한다. 마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주령에 모신 당산은 마을을 수호하는 산신격으로 당산신의 으뜸신이다.
산신격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라 부르며
그 하위격인 할머니당산은 마을 입구 등에 조성, 배치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마을의 지형이나 형편에 따라서는 웃 당산, 앞 당산, 중앙당산도 있고,
오방당산이라 하여 동서남북과 마을의 중앙 다섯 곳에 당산을 배치하는 마을도 있다.
또 마을의 서북쪽 등이 크게 트이어 허하면 그 곳에 나무를 많이 심어 당산 숲을 조성하여
안온한 마을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풍수적인 비보의 성격이 짙으며 방풍림의 구실도 하는 숲 당산이다.
4. 당산신의 역할
동구의 솟대나 장승이 동구벽사(洞口辟邪)의 기능으로 온갖 부정한 것,
잡귀, 괴질 등의 병마를 쫓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짐대는 풍수설에 의한 마을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이거나 화산형(火山形) 또는 가마솥형이어서
마을이라는 배가 뒤집히지 않고 순조롭게 운항하게 되고,
또는 화산이 마을에 비추어지지 못하게 짐대를 세워 액막이하는 비보적 기능을 하는 조형물이라 할 것이다.
이 두 기능이 마을의 안온함과 무사함을 가져다준다는 뜻에서 일치하므로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신앙체로 습합되어 민간신앙체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풍수신앙에서는 마을의 형국이 배의 형국일 때 마을이 번창한다. 하였으며
배가 잘 순항할 때에만 마을이 번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가 잘 순항이 되도록 짐대나 돛대 등을 인위적으로 설치하여 준다.
우리나라 전래의 마을에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마을이라는 마을들이 많이 보일 뿐만이 아니라
그런 마을들에는 어김없이 짐대석이 세워지거나 짐대로 설정되는 노거수(老巨樹)가 보인다.
주당산의 하위신장인 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외계로부터 부정한 것이나 사악한 잡귀,
그리고 병마와 역신(疫神)의 침입을 막아주는 동구벽사(洞口辟邪) 기능을 하는 장승과,
사찰 수호의 장승으로서 사찰과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와의 경계나 입구 등에 세워져
호법 수호와 살생 금지의 경계표 기능을 하는 장승이 있으며,
관로(官路)에 세워져 역참의 거리를 표시하고 길손을 보호하여 주는 이정표와 노신(路神)의 기능을 하는 장승이 있고,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주는 읍락비보 기증의 장승도 있다.
장승은 나무를 다듬어 사납고도 험상궂은 귀신의 얼굴로 조성한 목장승이 일반적이나,
내구적인 영구성을 위하여 석재로 조성한 석장승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이들 장승 중 마을 입구에 세워져 동구벽사의 기능을 하는 장승은 솟대나 짐대와 함께 주당산의 하위신장으로서
귀면의 사나운 얼굴이지만, 마을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없어 정들고 친숙한 수호신이다.
5. 당산신의 상징과 의미
마을에 조성되어 받들어지고 있는 당산의 대부분은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며, 부부당산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집안에서는 물론이요, 마을의 원로 어른이다.
마을 최고의 어른인 인간격으로 호칭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거리감을 좁혀 친근하게 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모든 어려운 일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원숙하고도 자애로운 분이어서
소망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정이 그 호칭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남과 여로 하여 한 쌍의 부부로 받드는 것은 음양화합에 의하여
생산, 풍요, 사랑이 마을 안에 풍만하기를 바라는 유감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당산의 신체가 아름드리 거수의 신목인 것도 장수성의 생명력과 풍요로운 삶을 뜻하는 것이다.
때문에 당산 신목이 늙어 고사되어 가면 그 영력도 감퇴된다고 여겨 그 옆에 새로이 좋은 수종의 나무를 심고
두 나무를 실로 연결하여 노거수 신목의 신령성과 장수성의 생명력이 어린 새 나무로 옮겨가도록 한다.
즉 당산신의 거처를 젊고 강성한 나무로 옮기는 것이다.
전라북도(全羅北道) 고창읍(高敞邑)에는 오거리(五巨里) 당산(堂山)이 있다.
상거리(上巨里)(동부, 천북동)의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중거리(中巨里)(남부, 중앙동)의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하거리(下巨里)(서부, 신흥동)의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북부인 교촌리(校村里)의 삼당산(三堂山)인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과 아들당,
그리고 중앙인 매일시장 안의 할아버지당 등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에 오거리당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중 중앙동의 매일시장 안과 남부인 중거리와 서부인 하거리의 할아버지당들은 높이가 각각 382cm, 367cm, 645cm 높이의 화강암 석간으로 세웠으며,
그 정상에 둘레 48cm내외의 갓이 씌워져 있으므로 '삿갓비석', '삿갓비' 또는 '갓당산'이라고 속칭되고 있다.
나머지 당산들은 자연석인데 비하여 이 세 당산만 화강암 석간으로 세웠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중앙동 할아버지당 매일시장 복판에 돌로 깎아세운 갓당산인데 정상에 둥근갓을 올렸고
6각 체부의 2단석주로 되어 있으며 석간(石竿) 하부전면(下部前面)에 아래와 같이 음각자(陰刻字)가 있다.
시주(施主): 김양봉(金陽鳳) 이명득(李明得) 차도욱(車道旭) 신광득(申光得)
화주(化主): 김성택(金聖澤) 차도평(車道平) 노귀련(魯貴連) 위은경(葦殷慶)
가경팔년계해윤이월초십일(嘉慶八年癸亥閏二月初十日)'가경팔년(嘉慶八年)'은
순조 3년(1803)으로 민속문화재로 이와 같이 절대년대가 밝혀져 있는 것은 드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 당산제(堂山祭)는 없어진지 오래되었고 개인으로 뜻있는 사람이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중거리 할아버지당은 중앙동 443번지 길가 이장(1968년 당시) 이태남씨집 앞에 자리잡고 있다.
약 60년전에는 이 일대가 당산터로서 주위가 넓었으며, 팽나무도 7∼8그루 있었고,
당집과 당산목 그리고 장신(장승) 세개가 서 있었다고 한다.
이 당산(堂山) 할아버지는 중거리를 지키고 있는 철륭(鐵輪大監)이라고 믿으며
제사를 모시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또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도 들고 마을도 무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6·25사변후 마을 공동의 당산제가 없어지고
이태남씨(李太男氏) 개인이 제일인 음력 정월 대보름 자정이 되면 떡시루만 해놓을 정도라고 한다.
사각석주의 정상에 네모난 갓을 올린 이 중거리 할아버지당에는
석간전면에 '천년완골 흘연진남(千年頑骨 屹然鎭南)'이란 글씨와 좌측상단에 '계해(癸亥) 삼월O일'이란
연월일이 음각되어 중앙동 할아버지당과 같은 해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거리 할아버지당이 서 있는 이곳 일대는 지번 584번지로 동소유지인 약 천평의 당산터이다.
해방되던 해까지 계속된 마을 공동의 이곳 당산제(堂山祭)는 철륭제향(鐵輪祭享)으로 지냈으며
제비(祭費)는 섣달 그믐전부터 시작한 걸궁(걸립(乞粒))으로 모은 전곡(錢穀)으로 충당하였다.
제일(祭日)은 구정(舊正)초하루 자정이며 마을의 연운(年運)이 좋고 질병과 재앙(災殃)을 물리쳐 달라고
당산제(堂山祭)를 지냈으며,
잘못 지내면 화재난(火災難)을 당한다고 하였다.
하거리 할아버지당은 645cm의 높이로 3개 중 제일 높으며,
서방 100cm 정도의 받침대에 구멍을 뚫어 꽂고 정상에 네모진 갓을 올렸으며
석간(石竿) 전면에 '진서화표 가경팔년계해삼월일(鎭西華表 嘉慶八年癸亥三月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3개(個)의 갓당산(堂山)은 같은 해 2월과 3월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진남(鎭南)'이니 '진서(鎭西)'니 하는 글로 보아 수구막이로 세웠고
'화표(華表)'라는 한자명은 용주(龍柱)를 화표주(華表柱)라고 한 데서 유래된 것 같다.
고창읍 오거리당산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위(五方位)에 당산을 모셔
읍내의 안녕(安寧)과 번영(繁榮)을 기원한 전형적인 예이며 그 신체로 암석을 모셨고,
'터를 누르기 위해 허술한 데 세운 짐대'(박판형(朴判炯) 담(談))이며,
도읍풍수(都邑風水)의 예로서 동쪽으로 진산(鎭山)인 방장산(方丈山)(반등산(半登山)), 북쪽에 성산(聖山),
동남쪽으로 모양성(牟陽城)에 둘러싸여 지세가 높고,
서남으로 바다를 향해 트인 고창읍의 지형을 행주형(行舟形)으로 보고
읍내(邑內)의 안정과 비보(裨補)를 위하여 중앙에 돛대(檣)를 세우고, 앞이 트이고
허한 남쪽과 서쪽에 각각 '진남(鎭南)'과 '진서(鎭西)'의 화표(華表)로서 세운
염승풍수(厭勝風水)의 대표적인 예가 되며,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성행하였던 지리비보사상(地理裨補思想)의 유물로도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같은 읍내안정을 위해 세운 돛대로는 경북 안동읍내 남문외 철장과 보물 제49호로 지정된
전남(全南) 나주읍내 동문외의 석장(石檣)이 있다.
고창(高敞) 오거리당산은 신체(神體)로서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을 각각 처음에는 자연석(自然石)을 섬겨 오다가
도읍풍수신앙(都邑風水信仰)에서 온 염승(厭勝)으로 세운 석장(石檣)이
세 곳의 할아버지당(堂)을 대신하고 솟대의 기능을 겸하게 된 예로서
거금 180여 년 전의 민간신앙의 습합체로 볼 수 있으며
아울러 '가경팔년계해(嘉慶八年癸亥)'라는 절대년도가 음각되어 있다는 점 등은
그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일환으로서도 고찰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