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의 리듬/주민현
높이 던진 공이 잠시 멈추었다
빠르게 낙하하는 리듬으로
우리는 블루스의 리듬을 그런 식으로 배웠지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
붕, 떠오르는 감각보다는
잠시 멈춘 뒷모습만이 기억나는
블루스의 춤곡, 춤곡의 리듬
음악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하여 밤을 새던
우리의 기쁘던 나날을 기억하는지
“너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줘”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으므로
음악은 불길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어젯밤의 노래를 다시 만지는,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를 거듭하는 생활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스노볼을 흔드네
슬픔도, 회한도 아닌 그 무엇이 섞여 내리네
저녁도, 새벽도 아닌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블루스의 리듬 같은 건 잊어버리네
물속인 걸 모르는 물고기처럼
매일 저녁 블루스 카페에 모이는 우리는
더이상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기 위해서라네
블루스의 리듬엔 무엇이든 감출 수 있어
데뷔를 못한 가수도, 데뷔했으나
그저 그런 노래만 쓰는 가수도
여기선 모두 적당한 리듬에 젖는 손님들일 뿐
높이 던진 공이 공중에 멈추었다
떨어지는 리듬으로,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때때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네
엇박자, 실패한 리듬으로 뒤돌아보며
헤어지는 연인이나
몰래 개를 두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네
종이에 썼던 편지도, 가사도
이사할 땐 처치 곤란의 추억들일 뿐
그러나 스노볼 속에선
한낱 조각난 종이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지
흔들리며 명확해지는 풍경이 있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을 너는 쓴다네
파랗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어쨌거나 블루스의 리듬으로
킬트*의 시대/주민현
치마를 입은 남자들과 춤을 추었지
스코틀랜드의 어느 광장에서
치마는 넓게 퍼지고
돈다는 것은 계속된다는 거지
체크무늬, 백파이프, 퍼지는 담배 연기 속에서
가끔 멋진 남자를 동경하지
낮게 깔린 목소리도 그럴듯하게
그리 깊지는 않은 역사를 간직한
무늬의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치마는 소리 없이 돌고
돈다는 것은
돌면서 계속 새로운 무늬를 가진다는 거지
돌았니, 하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지
조용히 하라는 말도 들었지
치마를 입고 상스럽게 앉은 어느 날이었지
치마를 입고 함께 춤을 춘다고 해서
우리의 성이 같아지는 건 아니지만
한때 노동복이었던
치마를 입은 내가 스코틀랜드에선
남자여도 이상할 건 없지
체크무늬, 바둑알을 두기에도 좋은 타탄무늬
계급과는 먼, 복고풍의 치마를 입은 내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한때 노동자였던
사람들의 타탄무늬를 그리며
이 거리에서 우리는 모호하게 기워져 있지
깁다, 라는 것은 깊다는 것과 별 관계가 없지
킬트, 그리고 퀼트
그리 깊지는 않은 전통에 대하여
허리나 엉덩이 주변을 감싸는 천
또는 그런 손에 대하여
체크무늬의 치마, 우리를 깁지
*스코틀랜드의 남성이 전통적으로 착용한 스커트.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주민현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질 때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지
한쪽 눈을 감고 타도 좋아
기울어진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규칙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식탁을 멈추고서
부드러운 날씨로 상을 차리겠네
유치원의 문을 닫고서
푹신한 구름으로 운동장을 만들겠네
계산원이 없다면 마트는
항의와 전화로 창문에 조금씩 금이 가겠지
아무도 간호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보지 않는다면
공장으로 출근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일을 멈춘다면*
세상의 절반으로만 눈이 내리겠지
세상에 의자가 없다면
모두가 엉거주춤 서 있는 우스꽝스러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맨발로 길을 걸어가는 슬픔
세상의 절반이 멈춘다면
신호등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겠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녹슨 철봉에 귀를 대고 있으면
구름과 함께 천둥이 몰려오는 소리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
뒤돌아보면
마트에서 유치원에서 병원에서
엉거주춤 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눈을 감으면
운동장 위로 비스듬히 쌓아 올린 의자들
발로 차면 그 의자들 굴러떨어지는 소리
눈을 뜨면 기울어진 얼굴 위로
고독한 맨발 같은 눈이 내리지
* 아이슬란드 여성총파업의 날.
안과 밖/주민현
매일 저녁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지
바퀴 안으로 둥글게 말리는 바깥을 안고 달리는 동안
온몸에 하늘이 조금 휘감기는 것 같고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이면,
밤에만 마주치는 여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지
팔뚝에 일본어로 사시미, 라고 새긴 우락부락한 남자라든가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훔치는 연인들이라든가
이곳의 이웃들은 밤잠이 없는 것 같아
밤중에도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나 꿈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들려오지
골목은 미로와도 같아서 어둠 속에서는 언제나 미아의 감정을 느끼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따라 이 도시는 넓어진다
나는 자전거를 꺾어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나도 모르는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네
어제까지 식료품을 사고 자전거 페달을 굴리던 길에서
여긴 정말 처음 보는 멋진 곳이야
타로카드 점을 보는 아줌마가 미래의 신비한 일들을 펼쳐놓는다,
프링스산 싸구려 와인은 오늘의 자랑할 만한 기쁨이고
고독한 안주는 얼굴을 붉게 바꾼다
산책하는 여인과 남자가 괴팍하고 놀라운 감정에 빠져드는 동안
밤에만 마주치는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 어느 날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여자를 기억하는 건 누구겠니,
매일 저녁 굽 높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뿐
건물마다 편의점은 하나씩 있고 유행하는 과자는 돌림노래처럼 새로운 공간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고독과 자유와 익명의 도시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네
누군가 떠나면 누군가 돌아오는 도시의 불빛처럼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블루스의 리듬/주민현
높이 던진 공이 잠시 멈추었다
빠르게 낙하하는 리듬으로
우리는 블루스의 리듬을 그런 식으로 배웠지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
붕, 떠오르는 감각보다는
잠시 멈춘 뒷모습만이 기억나는
블루스의 춤곡, 춤곡의 리듬
음악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하여 밤을 새던
우리의 기쁘던 나날을 기억하는지
“너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줘”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으므로
음악은 불길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어젯밤의 노래를 다시 만지는,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를 거듭하는 생활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스노볼을 흔드네
슬픔도, 회한도 아닌 그 무엇이 섞여 내리네
저녁도, 새벽도 아닌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블루스의 리듬 같은 건 잊어버리네
물속인 걸 모르는 물고기처럼
매일 저녁 블루스 카페에 모이는 우리는
더 이상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기 위해서라네
블루스의 리듬엔 무엇이든 감출 수 있어
데뷔를 못한 가수도, 데뷔했으나
그저 그런 노래만 쓰는 가수도
여기선 모두 적당한 리듬에 젖는 손님들일 뿐
높이 던진 공이 공중에 멈추었다
떨어지는 리듬으로,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때때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네
엇박자, 실패한 리듬으로 뒤돌아보며
헤어지는 연인이나
몰래 개를 두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네
종이에 썼던 편지도, 가사도
이사할 땐 처치 곤란의 추억들일 뿐
그러나 스노볼 속에선
한낱 종이 조각도 하염없이 쳐다보게 되지
흔들리며 명확해지는 풍경이 있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을 너는 쓴다네
파랗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어쨌거나 블루스의 리듬으로
[ 주민현 시인의 약력 ]
주민현 시인
* 1989년 서울 출생
* 아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등단 : 2017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 ‘켬’ 동인으로 활동
* 시집 : 『킬트, 그리고 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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