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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봄, 이무렵의 모리가문은 나가토의 오우치 가문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으나
당시의 국력은 오우치 가문이 강하여 모리 가문이 의존하고 있는 형세 였습니다.
하지만 모리 가문의 당주 모토나리님은 약소한 모리 가문을
쥬코쿠(일본 중부 지역)의 패자로 만들고자 하셨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아키국을 침략한 아마코군을 섬멸하고
오히려 곧장 아마코의 영국인 이와미로 진격하셨습니다.
이때 모리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이 공격을 염려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모토나리님이 햐마다국 침공에 투입한 병력은 1100여명에 불과했고
당주와 장남이 영국을 비우고 출진하는 것이라 급변이 일어나면
가문이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토나리님은 가신들에게 아키국 방비를 맡기고 출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키를 비우고 출진하시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인근국 깃카와 가문에 서신을 보내 무역협정을 맺고 친교를 쌓았습니다.
1545년 여름, 모토나리님과 다카모토님의 모리군이
이와미의 햐마다 성을 공격하였는데
햐마다 성은 야마코 가문의 가신 시지 미치우지가
500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마코 가문의 당주 아마코 하루노부님은
야마코 가문의 주력군 5000여명을 데리고 동쪽으로 진출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하루노부님은 주코쿠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는데
배후의 오우치-모리 연합이 있어 불안해 하셨습니다.
오우치 가문은 규슈 진출을 염두하고 있었기에
양국의 이해가 맞아서 화평이 이루어졌으나
모리 가문은 합의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노부님은 동쪽으로 진출하기기 전에
소규모 병력으로 모리의 아키국을 침입하게 하여
아키국에 타격을 줌으로서 야마코 가문이 진출하는 동안
모리 가문을 내정 및 방비에만 힘쓰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설사 그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모리군은 격퇴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소모될 것이기에
약화된 병력으로 이와미국을 침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리 모토나리님은 하루노부님의 허를 찔러 곧장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시지 미치우지는 하루노부가 회군하여 돌아올때까지 수성하고자 했으나
장기전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모토나리님은 성을 포위하고 바로 공성하였고
결국 시지 미치우지 휘하 500여명의 야마코군은 전멸하고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리 모토나리님은 센고쿠 다이묘로서 거듭나셨습니다.
한편 하루노부님은 모리군의 이와미 침략 소식을 듣고
군대를 회군하고자 하셨으나 곧이어 햐마다 낙성 소식을 들으시고는
그대로 서국 공략을 진행하였습니다.
그의 가신들이 말하길
"도노, 침략자 모리를 언제 구축하시려는지요."
라고 하니 하루노부님이 말씀하시길
"곧 겨울이 오니 작전을 수행하기 불리하다.
허나 모리가 나의 지모를 찔렀으니 나도 모리의 허를 찌르고자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모리군은 이와미국 평정을 실시하며 주변국들의 정세를 관망하였고
그렇게 반년이 지나 1546년이 되었습니다.
1546년 봄, 모리 모토나리님의 삼남 다카가게님이 무장으로 임관하셨습니다.
아직 이남 모토하루님이 임관하지 않으셨지만
다카가게님은 중국의 병법과 무예를 좋아하셔서 약관의 나이에 상당한 수준에 이르니
이에 모토나리님이 다카가게님을 임관시키고 아키국 방비를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1546년 봄,모리 가문은 아키와 이와미 2국을 지배하는 전국 다이묘 가문이였습니다.
넓어진 영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모토나리님은
치국에 능통한 장남 다카모토님께 분국법 제정 준비를 맡기셨습니다.
한편으로 전국의 난세를 감당할 수 있게끔 병법도 익히게 하셨습니다.
1546년 정월,아마코의 일부 아시가루들이 월경하여
이와미국 변경 마을들을 약탈하고 물러감으로서
야마코 가문과의 긴장은 고조되었고
모리가문은 야마코 가문의 반격에 대비하여 이와미국으로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하지만 모리 가문의 국력을 전쟁에만 집중시키면 안된다고 다카모토님은 생각했고
모토나리님도 그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하셨습니다.
앞으로 모리 가문은 발전하기 위해 무수한 전쟁을 치뤄야 할 것이며
그 전쟁에 동원될 자금은 아무래도 자국내의 소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키국의 발달한 해운업을 바탕으로 외국과의 무역을 장려하여
쓰시마섬과 다네가시마섬에 수군을 먼저보내어 해상무역로를 확보하고
상인들을 보내어 무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먼저 일본과 제일 가까운 조선과의 무역을 개시하였는데
쓰시마와 조선 동래에 상점을 세우고
이와미국에서 생산되는 금과 은으로 면포를 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사들인 면포들을 일본에 유통시키기 위해
타국과의 외교활동도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시코쿠의 쵸소카베 가문과 무역협정을 맺었고 이어 당주의 딸을 맞이하여
이남 모토하루님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모토하루님의 부인이 매우 아름다운 분이셔서
결혼식 다음날 아침에 모토하루님이
이토가문이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합니다.
쵸소카베와의 유대가 강해지자 그 다음으로 큐슈의 이 가문에 사신을 보내어
무역협정을 맺고 이토 가문의 딸과 삼남 다카가게님이 혼인하게 하였는데
다카가게님의 부인은 매우 사려 깊으신 분이셔서
다카가게님의 신중하고 냉철한 성격과 잘맞아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화목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1546년 여름,이와미 국경인근에 대규모의 아마코군이 배치되어
긴장이 고조되던 무렵에
아키국의 다카가게님은 빈고국에서 놀라운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빈고의 깃카와 가문이 아마코 가문과 비밀협정을 맺고
조만간 아키국으로 침입할 것이란 것이었습니다.
하루노부님은 아키와 이와미가 서로 보조하는 것을 알고
그 관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깃카와 가문과 모리 가문을 남북으로 분할점령하기로 약조한 것이었습니다!
이 협정은 이미 1545년 가을에 비밀리에 맺어졌으며
깃카와는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병력을 비밀리에 모으고
모리가문과 겉으로는 무역을 맺으며 야심이 없는 척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흘린 것은 깃카와의 가신 중 하나로서
모리 가문과 무역으로 이익을 얻던 자였는데
비록 깃카와의 녹을 받긴 하나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난세라
깃카와는 주종의 관계를 맺고
모리와도관계를 맺은 것 이었습니다.
하여튼 모리가문은 아마코와 깃카와의 책략을 입수하긴 했지만
모리 가문으로서 곧 다가올 남북의 적을 동시에 막기에는 군세가 부족했습니다.
이와미의 경우 그래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야마코를 상대하기에
수천의 병력을 배치해 놓았지만
그럼에도 야마코의 군세는 이와미의 모리군의 1.5배 정도 되었고
깃카와의 대공세를 맡게 될 아키의 경우
다카가게님 휘하 500여명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카가게님은 이 정보를 이와미의 모토나리님께 보내고
자신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빈고로 가는 도로 인근에 매복하여
깃카와 가문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이 지나기 전에 깃카와 가문은 모리 가문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모리 가문은 이 소식을 오우치 가문에 알리고 동맹으로서 참전을 부탁하였고
오우치 가문은 이를 수락하여 참전하고 스오에 3000여명의 증원군을 모집하였습니다.
1546년 가을, 다카가게님은 아키국 국경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깃카와가 모리 가문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침략군 대부분이 빗추국에서 집결했다가 출진하게 되어
빈고가 사실상 텅 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깃카와 가문이 아마코와 비밀 협정을 맺었을 때에
깃카와는 동진을 목표로 하여 주변의 무라카미 가문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기에
빗추국에 주력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리를 침공하기전에 무라카미에 시위할 필요가 있었기에
빗추로 병력을 집결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빈고국이 비긴 했지만
어차피 깃카와의 군대는 곧 빈고를 통해 아키로 쳐들어 갈 것이었고
아키국의 모리군은 반격은 커녕 아키국 지키기도 벅찰 지경이었기에
모리와 깃카와의 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빈고국은 일개 가신의 가병들이 치안을 맡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깃카와의 대공세가 확실한 상황에서 다카가게님은 과감하게 400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곧장 빈고의 후추성을 급습하였습니다.
이 공격에 후추성 수성장 엔도 사다무네는 황급히 자신들의 가병들로 성을 지키며
빗추에서 막 빈고로 들어온 깃카와 가문 당주 깃카와 오키츠네님의 군대에
전령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다카가게님이 후추성 공격준비를 끝냈을 때,
깃카와군 4000여명이 후추성에서 3일거리에 있었습니다.
이에 다카가게님은 맹렬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니
공성준비에서 낙성까지 불과 한나절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리군은 후추성을 지키던 엔도 사다무네와
그의 휘하 가병 60여명을 모조리 몰살하였고
빈고에 비축된 깃카와의 연공 수입과 조세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다음,
성에서 철수하고 국경을 넘어 아키성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 매복하였습니다.
깃카와군이 후추성을 탈환하러 쳐들어왔을 때,
후추성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에 남기로 한 일부 모리군 정예병들과
빈고국의 친모리계 무사들을 성에 남아서 깃카와군을 상대하였습니다.
그들이 포상을 위해 남았는지 무사로서 죽을 자리를 찾고자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깃카와군의 대공세에 맞서 용맹히 싸워
깃카와군 1개부대를 괴멸시키고 1개부대를 패퇴시켰지만
하늘을 뒤덮는 듯한 화살세례와 깃카와군의 파상공세에 중과부적으로 결국 패하고
3명 빼고 모두 전몰하였습니다.
그 중 2명은 그야말로 목숨이 겨우 붙어있을 정도로 부상당한 상태에서 사로잡혀서
깃카와군에게 고문당했는데
깃카와군은 그들에게서 모리군의 정보를 캐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1명이 문서를 전하고는 죽었고
나머지 한명은 다카가게군이 어디로 퇴각했는지 알려주고 죽었는데
문서에는 모리 가문과 무리카미 가문이 비밀협정을 맺어
깃카와군이 아키 국경을 넘으면
무라카미군이 빗추를 급습하기로 약조했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한명이 알려준 곳은 아키 국경 산악지역으로서
아키성과 멀어지는 정반대의 길 이었습니다.
이 정보들을 얻은 깃카와 오키츠네님은 4000여명의 군사중 1000여명을 빗추로 보내
빗추의 수비군 500여명과 합하여 도합 1500여명의 병력으로 무라카미를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3000여명의 병력으로 아키 산악 지역으로 진출하여
다카가게님의 모리군을 색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오키츠네님 휘하 가신들 중 일부가 곧장 아키성으로 쳐들어가자고 제안하니
오키츠네님이 말씀하시길
"만약 그 애송이를 남겨두고 아키성으로 곧장가면
그 녀석이 다시 빈고를 치고 우리의 보급과 연락을 끊고 무슨 장난을 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야전에서 그놈의 군대를 섬멸한다면 아키성을 무리하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다.
설사 그 애와의 싸움에서 약간 시간을 쓰더라도 아카의 모리군을 섬멸한다면
아키성이나 이와미의 모토나리가 무슨 수로 아키국을 지킬 수 있겠느냐.
그리고 지금쯤이면 아마코가 약조대로 이와미를 치고 있을 것이니
여기서 다소 시간이 걸려도 모토나리가 당장 아키국을 지원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아마코 가문은 1546년 봄에 소규모 병력으로 이와미 국경에서 약탈을 감행하여
모리 가문을 도발하고 한편으로 모리 가문의 군사력을 염탐하였습니다.
1546년 늦여름에 깃카와 가문이 모리 가문에 선전포고를 하자
아마코 가문은 2개군 4500여명의 병력을 모으고
가을에 이와미국을 침공하니
1군은 나이로 시게모치 휘하 2040여명 이었고
2군은 야마코 가문 당주 야마코 하루노부님 휘하 2460여명 이었습니다.
하루노부님은 1군으로 하여금 이와미의 농경지와 광산을 분탕질하게 하여
모리 가문의 경제력과 영국 장악력을 약화시키게 하고
2군은 1군이 휩쓴 길을 통해 안전하게 진출하여
최종적으로 1군과 2군이 동시에 햐마다성을 공략할 계획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다카오카 가문의 등장으로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다카오카 가문의 당주 다카오카 모토타카님의 군대가
야마코 가문의 호키국의 이웃국인 이나바국을 장악하고
수천의 병력을 주둔시켜 긴장을 형성하자
하루노부님은 호키국 방위가 마음에 걸려 먼저 2군을 이끌고 호키국으로 돌아가고
1군에게 명하고 호키로 퇴각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이로 시게모지의 1군은 광산을 분탕하러 깊숙히 침입한 상태에서
퇴각명령을 받았고
그들이 퇴각하려고 할 때에 퇴로를 모토나리님의 군대가 막고 있었습니다.
한편 모리 모토나리님은 깃카와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한
아키를 지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고
한편으로 이와미를 분탕질한 아마코군을 이와미의 모든 모리군을 동원하여
섬멸하고 싶었지만
이와미 평정이 끝나지 않아서 치안군으로 최소한 1000여명의 병력을
전투에서 제외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가 될 다카모토님만큼은 전투에 반드시 참전시켰습니다.
모토나리님의 군대는 시게모치의 군대가 광산지역으로 진격하게끔 길을 터주었고
그들이 광산지역에서 본국으로 퇴각하려고 할 때에 길을 막고 공격하였습니다.
아마코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격하였고
모리군은 이와미를 침략한 적을 한명도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양측 궁수들의 사격전으로 시작된 전투는 양측이 한바탕 크게 싸우다가
모토나리님과 다카모토님 휘하의 하타모토들이 양익에서 돌격하자
마침내 아마코군이 무너졌고 모리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사냥하였습니다.
그 살육의 사냥에서 야마코 1군이 섬멸되었으며 대장 시게모노도 참수되었는데
모토나리는 아마코군의 목을 모조리 베어
햐마다 성에 효수했다가 이와미 국에 조리돌렸습니다.
시게모노는 전투 전에 휘하 장수들에게 말하길
"만에 하나 이 전투에서 우리가 패하더라도 살아남은 자들은
반드시 이와미를 탈출하여
주군께 합류해야 하오.
허나 집단으로 뭉쳐서 벗어나려 한다면 반드시 적에게 잡힐 것이니
소규모로 흩어져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면서 탈출을 도모해야 할 것이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퇴각으로서 적의 이와미 지배에 타격을 주는 것이고
또한 적군은 우리 때문에 군대를 계속 투입하고 주둔함으로서
이로 인해 모리의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니
결국 깃카와님과 하루노부님의 전쟁수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투후 구사일생으로 목숨건진 일부 아마코군은
시게모노의 말을 받들어 광산지역쪽으로 물러나 분탕질을 하며 퇴로를 탐색했습니다.
모토나리님은 아마코군 잔당 토벌에 소규모 군대를 광산지역에 파견하여
1546년 겨울내내 소탕작전을 벌여
1547년 봄에 완전히 섬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소탕작전을 벌이는 동안 아마코 가문의 동향을 살피면서
이와미 평정과 군대 재정비와 아키 구원전을 준비하였습니다.
한편,1546년 늦가을,아키국의 다카가게님의 군대는 매복하다가
한때 오키츠네님의 깃카와군이 매복지역에 진입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공격하거나 도발하지 않고 눈치채지 못하게끔 물러나왔습니다.
하지만 또 한때 오치츠네님의 수색작전에 진로가 차단되어 나아갈 수 없게되자
대담하게도 깃카와군을 도발하고 유인하니 깃카와군이 그들을 잡으려고 집결하게되자
퇴로가 생겨 무사히 빠져나오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다카가게님은 빈고국에 공작을 하여
마침내 1546년 겨울에 빈고국에서 잇키(반란)가 발생하여
1200여명의 농민군이 후추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 잇키는 후추성에서 전몰한 모리군에서 살아남은 1인이
다카가게와 연락하여 벌인 일이었습니다.
이에 오치츠네님은 수색작전을 중단하고 빈고국으로 회군하여 농민군을 섬멸하였으나
깃카와군도 1000여명이 전사했으며
또한 빈고국 평정을 위해 수비군도 배치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다카가게님은 아키국으로 물러났으며 또한 추가로 병력을 징집하여
1000여명의 수성군을 아키성에 배치하고 수성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오치츠네님은 후추성에서 농민군을 섬멸하고 농민군의 목들을 효수하고 조리 돌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리 쥐새끼 같은 놈들!
너희 같은 새끼들을 몰아죽이고 말려죽일 것이다!"
그리고 질풍같이 군대를 이끌고 아키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오키츠네님의 분노는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로도 뻗여서
나가노 스케타다 휘하의 깃카와 해군 35척이 아키항의 뱃길을 막아서
모리가문의 해양무역 수입을 끊었습니다.
이에 고바야카와 사네나오의 휘하 해군 45척이 해상포위를 뚫고자
출격하여 해전을 치뤘으나
깃카와 해군은 수적 불리함을 노련함으로 극복하고 모리 해군을 패퇴시키니
이 해전에서 모리 해군은 30척을 잃었고 깃카와 해군은 25척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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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마코가 아니고 아마코입니다^^; 첨엔 오타인지 알았는데 계속해서 야마코라 쓰시길래 ㅎㅎ;
잘보고있습니다 해전도 스샷으로 있었으면하는 아쉬움이..ㅋ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네요
보한재:수정했스빈다.
위대한 카이사르:아무래도 대규모 해전을 치룰때 등장시켜야 할듯...,
카르눈,sunup11:감사합니다. 연재의 힘이 되는 말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