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는 기원전 18-기원후 660년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서 발전한 나라로, 기원전 18년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과 함께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이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나라가 빨리 발전하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여 한강 주변을 통합하고, 율령을 발표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였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황해도 일대와 마한의 전 지역을 확보하고,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활동 무대를 넓혔다. 또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일본의 고대 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475)하고, 성왕 때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겨(538) 나라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을 일시 되찾았으나, 동맹국인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오히려 관산성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무왕과 의자왕 때 부활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백제는 고구려와의 관계 때문에 도읍을 천도한 결과 건국~개로왕시대에는 위례(지금의 서울), 문주왕~성왕시대에는 웅진(지금의 공주), 성왕~의자왕시대에는 사비(부여)가 도읍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의 주요 유적들이 이들 3개 지역에 잔존해 있다. 서울에 백제고분군(석촌동 고분군),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주에 송산리 고분군, 공산성, 부여에 부소산성, 궁남지,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 등이 주요 유적으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전라남도 익산시가 또 하나의 도읍지로 거론되고 있다.
첫 도읍지인 위례는 지금의 서울 한강이남 올림픽공원 근처로 백제(석촌동) 고분군,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의 유적이 잔존하며 백제의 첫 도읍지와 관련된 '백제', '위례', '풍납', '몽촌' 등의 지명들이 존재하고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芳荑洞)에 있는 백제 초기(3세기 초에 축조된 토성터로 사적 제297호이다.
둘레 약 2.7km, 높이 6~7m이다.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목책(木柵)구조와 토성방비용 해자(垓子)로 되어 있는 특수한 토성구조임이 밝혀졌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풍납리토성·서울삼성동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2기의 합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복원가능한 원통형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백색연질토기·갈색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토제어망추·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다. 그중 문살무늬(格子文)·승문(繩文)을 새긴 두드림무늬(打捺文)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器臺土俑)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그 외에 중국 서진(西晉)시대의 갈색 회유전문도기 파편도 이 토성의 축조연대가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이 밖에도 구릉과 구릉 사이의 저지대에서는 5 m 두께의 흙을 차례로 쌓아 만든 판축(板築)·움집·지하저장혈(地下貯藏穴) 흔적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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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 송파구 풍납동(風納洞)에 있는 백제 초기에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사적 제11호이다.
남북으로 2km, 동서로 1km, 높이는 7~8m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일부만 복원되어 있다.
원래 둘레 3,740m에 이르는 규모가 큰 평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2,679m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데, 내부는 돌이 거의 없고 고운 모래로 쌓아 올렸으며, 외부의 경사면이 2단으로 축조된 흔적이 남아 있다. 북벽의 높이는 약 8m이고, 기초 부분의 너비는 약 30m이다. 동벽 외부가 깊어진 것은 축성용 채사(採砂)로 인한 것 같고, 동벽에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는 네 곳은 성문자리인 듯하다.
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鐎斗)가 2개 발견된 뒤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1966년 토성 내 포함층(包含層)의 일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와 기와의 분포를 알게 되었다. 1996년 토성의 동북쪽 구역의 조사에서는 지표 4m 정도 아래에서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전기의 집터를 비롯해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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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구석기 시대 유적이나 청동기 시대 유적도 발견된 곳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공주가 역사에서 알려진 때는 백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백제시대에 웅진성)이 잔존하고 있다.
공산성을 방문한 날(2015년 7월 29일), 공주는 축제분위기였다. 백제유적지들이 2015년 7월 4일 독일 Bonn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시대의 유적들이 모두 세계문화유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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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고분군은.백제 임금들의 무덤들로, 공산성 맞은 편에 있다. 발굴된 고분들은 모두 7채로, 1호분에서 5호분까지는 자연돌을 사용한 천장식 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아 만든 벽돌무덤이다.. 특히 6호분은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 고분으로 유명해졌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 중에 알려진 무덤으로. 2천여 점이 넘는 유물이 옛날 묻혔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큰 고분이다. 무덤 내부는 남북 4.2m, 동서 2.72m고 바닥에서 천장까지는 2.93m로 사람들이 충분히 드나들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공산성은 금강을 북쪽에 두고 언덕 위에 세워진 백제의 궁성이다. 공산성은 고려 시대 이후 불린 이름이고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렸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문주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새로운 궁성을 쌓았다. 궁성 안에는 동성왕 때 만들어졌다는 큰 연못자리인 연지가 남아 있다.
마지막 도읍지인 사비는 지금의 부여이다. 백제 성왕 16년(538년)에 웅진(공주)에서 천도하여, 660년에 신라에게 멸망할 때까지(즉, 제31대 의자왕 때까지) 120년간의 도읍이었다. 조용히 가족이나 친구들과 백제의 흥망을 생각하면서 관광할 수 있는 추천할만한 관광지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을 맞이하여 최후를 맞이한 백제인들의 눈물이 스며 있는 통곡의 땅이다. 학창시절의 역사시간에 낙화암의 절벽에서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투신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되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서 부소산성, 왕궁으로 추측되는 왕궁터, 궁남지,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해발 1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구릉으로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입구부근에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인 삼충사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지가 있다. 불탄 쌀이나 콩들이 발견되는데 바로 군량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낸 흔적이다.
부소산성 가장 꼭대기의 사자루는 달을 바라보는 서편을 향하여 자리하고 있고, 근처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정복당할 때 의자왕의 수발을 들던 3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다.
낙화암 근처에 고란사가 있다. 백제 시대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3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이 암자는 부소산 낙화암 아래 백마강이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고란사 선착장
백마강 유람선, 이들 선박은 구드레유람선 선착장-고란사를 운행한다. 약10분정도 걸린다.
백마강변에 있는 구드레유람선 선착장.
백마강
궁남지는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조원(造苑)이다.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져서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에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1)을 모방하였다”는 기사는 바로 이 궁남지를 두고 말함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이고 있다.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되고 기와 조각이 흩어져 나와 이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2)에 따르는 원지(苑池)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주춧돌이 별궁 건물의 흔적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근처에는 3단으로 짜 올린 팔각형 우물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또 무왕 39년(638)조에 “3월에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궁남지에서 뱃놀이도 즐겼던 듯하다. 계획적인 인공 연못인 이 궁남지는 물을 능산리 동쪽의 산골짜기에서부터 끌어온다.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로 들어가는 길가에 있는 고분군이다. 현재 총 7기의 고분이 이곳에 있는데 부여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백제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비시대의 왕이 여섯이니 대강 그 수가 비슷하지만 무덤의 대부분이 도굴당하여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처음 발굴을 시작한 1호분에서 고구려 무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신도가 무덤 내부에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교류 및 당시 백제 문화에 도교가 수용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1993년에 능산리고분군의 한 진흙 수로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금동대향로이다. 이것이 발견되면서 백제뿐 아니라 우리 고대의 공예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라고 이야기되었으니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1호 고분
백제금동대향로(부여박물관 소장)
백제문화단지 내 벽에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설명그림
백제금동대향로에 새겨진 5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정림사지
는 부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백제 건축물이다. 백제 때의 유구가 거의 남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터 탑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이 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 중국 역사서인 『북사』의 ‘백제전’에는 ‘寺塔甚多’라고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수도인 부여 땅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정림사터 탑뿐이다.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터는 1942년에 절터를 발굴했을 때에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그런데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그때까지는 이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백제 때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고려 때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발굴에서 찾아 낸 백제와 고려 때의 기와 조각들과 벼루, 소조불상 조각 등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오층석탑은 일본 탑 건축에도 많은 영향을 줘서 일본 호류 사의 탑은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쌍둥이처럼 흡사하다. 그러나 오층석탑의 하단 비석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으로 글자가 있어 백제의 멸망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지 않고 백제를 흡수할 수 없었을까?
정림사박물관내에 있는 정림사 관련 모형
부여박물관 http://buyeo.museum.go.kr/home.do
백제의 멸망으로 대부분의 유적들이 파괴, 소실되어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부여에 백제문화단지가 조성되어 백제의 유적을 재현하고 있어 매우 반가운 일이다.
백제문화단지는 3,276천㎡(100만평) 규모로, 백제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7년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조성되었다. 공공시설인 사비성(왕궁, 능사, 생활문화마을 등),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민자시설인 숙박시설(콘도,스파빌리지), 테마파크, 테마아웃렛, 체육시설(대중골프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국내 최초로 삼국시대 백제 왕궁을 재현한 곳으로 왕궁과 사찰의 하앙(下昻)식 구조와 청아하고 은은한 단청 등 백제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에 근거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곳으로 꼭 한번쯤은 가 볼만한 곳이다.
백제문화단지 http://www.bhm.or.kr/html/kr/
부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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