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승(金仁承)
일제강점기 「나부」, 「아틀리에 」, 「가락」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생 연도 : 1910년 1월 19일
사망 연도 : 2001년 6월 22일
본관 : 설성((雪城)
출생지 : 경기도 개성
대표작 : 나부(裸婦, 1937년, 캔버스에 유채), 화실(1937년, 캔버스에 유채), 봄의 가락(1942년. 147x207cm. 캔버스에 유채),
1910년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호는 지연(智淵)이다.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출신의 한국 서양화 1세대 화가로 구상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며 한국 아카데미즘 미술의 전통을 확립한 작가이다. 한국 근대 조각의 1세대 작가인 김경승이 그의 동생이다.
개성 제일보통학교를 거처 1925년 송도 고등상업학교를 입학한 그는 192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미술전에 「임진강철교」, 「뒷동산 풍경」이 입선될 만큼 이른 나이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32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学校〕 서양화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覧会)에서 「나부(裸婦)」로 입선하고 광풍회(光風會) 전람회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1937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참가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로 첫 특선을 차지했는데 제19회까지 연속 4회의 특선을 수상하면서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때 서양화 분야에서 추천작가가 된 심형구, 이인성과 함께 ‘추천 작가 3인전(三人展)’을 가졌다.
1943년에는 심형구,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과 함께 단광회(丹光會)를 조직하여 친일미술활동에 가담했다. 그해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기념하는 기록화인 「조선징병제실시」를 합작으로 제작했으며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개성여자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1947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55년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1957년 예술원 회원, 1960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서양화단의 구상 계열을 주도하는 작가로 활동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2001년에 사망했다.
김인승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49~87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김인승(金仁承)
출생 1910년 1월 19일 (대한제국 경기도 개성부)
사망 2001년 6월 20일(91세)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학력 도쿄 미술학교
분야 서양화
김인승(金仁承, 일본식 이름: 金城仁承(가나기 진쇼), 1910년 1월 19일~2001년 6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고 호는 지연(智淵)이며 본관은 설성이다.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명륜정(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김인승이 먼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에 3·1문화상을 수여 받았고, 1974년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렸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은 이같은 후기 작품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김인승, 붉은 원피스의 여인, 1965, 캔버스에 유화 물감
김인승, 여인상, 1966, 캔버스에 유화 물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