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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수요일, -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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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정한 오늘의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유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유언이고,
복음은 주님의 유언이자 기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를 떠나며 원로들에게
유언으로 몇 가지를 신신당부하는데 명심하고 명심하라고 합니다.
“내가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있으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심하라는 두 말씀을 놓고 볼 때
앞의 명심하라는 말보다 뒤의 명심하라는 말이 더 낫지요.
앞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한 말을 명심하라고 하고,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겸손을 떨지 않고 자기 말을 듣고 자기처럼 하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함이 당연히 더 낫겠지요.
그리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고 직접 신신당부하는 것 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내가 할 바와 할 말을 다 하고 난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곧 하느님께 나머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김, 의탁.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고 가난이고 사랑입니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고 그래서 잘 되기를 아무리 바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당부까지입니다.
그다음은 내 역할을 내려놓고 퇴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의탁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이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사랑해주실 거라는 믿음의 의탁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녀를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표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처럼 청원과 의탁의 기도는 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하지만 떠나야 할 때가 오는데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당부, 의탁, 기도임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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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0년 연속 ** 브랜드 대상 수상. 피부 장벽과 뼈 기능, 면역력 강화를 한 번에…. 특허 출원, FDA(미국 식품 의약국) 등록 완료.”
이런 건강식품 광고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과대광고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브랜드 대상은 주관사에 돈만 주면 받을 수 있습니다. 특허 출원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특허받기 위해 심사를 요청했다는 것뿐입니다. FDA 등록 역시 수출을 위해 업체 정보를 FDA에 제출한 것이지, FDA가 효능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과대광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언론에서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광고는 정말로 많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역시 그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과대광고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에 대해 과대광고를 하는 사람 곁에는 필요에 의해 아첨하는 사람만이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이런 사람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더 높이려는 사람, 남의 좋은 점을 바라보면서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곁에 많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누군가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가능합니다. 내가 더 윗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내 뜻만을 주장하는 가운데에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마치 종 부리듯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계속해서 청원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진리로 거룩해져야만 가능합니다. 거룩해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내적으로 충만함을 누리면서 그들을 미워할 세상에서도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거룩함은 교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겸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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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때로는 기쁨이 미소를 만들어 내지만 때로는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틱낫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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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요한 17,11.12), 곧l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 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초대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사도 4,32).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를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이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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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을 양보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같이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래도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살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지 못했음을 탓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거룩함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됩니다. 그 기도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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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시간에 묻힌 한 사제의 삶’을 읽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혼자서 미국 횡단을 3번이나 하셨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유람선 사목을 하셨습니다. 1937년에 태어났으니 87세의 고령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수녀원이나, 양로원에서 청하면 기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신부님께서 1959년에 세례를 받을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 4가지를 질문하였고, 본인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세례를 받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노력했는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세례를 받기 전에 거의 3년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배우고 체험하여 마음 깊은 데까지 나름대로 신앙에 젖었기에 앞으로 때에 따라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거나 냉담하지 않을 것 같다. 설령 이 신앙에 회의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질문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보람을 변함없이 느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난생처음 가톨릭 신앙을 접한 순간에 받은 첫인상이 워낙 강했다. 마치 순간적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그간의 내 삶을 통해서는 도저히 체험하지 못하였던 기쁨에 휩싸였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늦게나마 가톨릭 신앙을 알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세 번째 질문은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세례성사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예”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은 ‘세례 받을 사람에게 본당 신부님이 요구하는 교리문답 325개를 완전히 암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교리문답 325개 항의 문제와 답을 한 자도 어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고, 많은 분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과 이유가 있어서 세례를 받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신앙의 깊이와 맛에 젖어 들었습니다.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 신앙이 점차 퇴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기도로 자라납니다. 신앙은 말씀으로 꽃이 핍니다. 신앙은 나눔으로 열매 맺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갈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지금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견하셨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도 예견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두 가지 청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과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듯이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기쁨도 찾아오고, 슬픔도 찾아오고, 즐거움과 분노도 찾아옵니다. 모든 갈등과 아픔을 벗어나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갈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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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특히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잠시 하나가 된다는 것에 관한 생각에 잠겨봅니다.
예쁜 도자기 화병이 있습니다. 그 화병은 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화병으로서도 예쁘지만, 꽃과 함께 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실 화병은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화병은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고운 흙으로 태어났고 청량한 물로 태어났습니다. 흙과 물은 함께 뜨거운 불을 견뎠고, 갈라지거나 깨지려 하는 두려움의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단련 후 예쁜 화병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제 흙과 물은 갈라질 수 없습니다.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다른 아름다움이 된 것입니다.
갈라질 수 없는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 하나 됨을 위해 견뎌낸 고통과 고난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과정에는 분명 우리가 함께 견뎌야 할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 기도하고 격려한다면 우리는 분명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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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쌍한 포⭘몬 빵들에….
4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빵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포⭘몬 빵’입니다.
편의점에 그 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대신해 줄을 서는 아빠도 있었습니다.
저의 지인은 편의점을 운영하십니다.
오랜만에 그분의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그 유명한 포⭘몬 빵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팔리는 빵은 그대로 쌓여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빵 봉지가 모두 뜯겨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포⭘몬 빵을 찾든 사람들은 빵을 찾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희귀 카드를 찾던 것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포⭘몬 빵은 버려져 무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버려진 포⭘몬 빵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카드만 빼가고 버려질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슬퍼했을까요?
우리도 포⭘몬 빵과 같은 경험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거나, 이제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돌아섰던 그 모든 잔인한 모습들 말입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우리 마음속 그런 아픔들이 하루빨리 아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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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거룩한 삶, 아름다운 떠남-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시기이자 5월 성모성월이요,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이요 신록과 꽃이 잘 어울어진 참 아름답고 신비로운 5월입니다. 5월의 한가운데 날인 오늘 5월15일이 참 각별합니다. 오늘은 세종대왕(1397.5.15.-1450.3.30)의 627째 탄일이자 스승의 날입니다. 민족의 위대한 스승인 세종대왕 탄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오늘은 불자들의 대축일인 부처님 오신 날인 석가탄일이고, 위대한 공주수도생활의 원조인 이집트의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세 분 모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 할만합니다.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사도행전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은 적절한 시기 위대한 스승들을 선물로 보내주시어 우리의 영원한 길잡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마침 스승의 날인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1.“참된 스승은 제자를 통해 다시 배운다. 고전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자란다.”<다산>
늘 제자를 통해, 고전을 통해,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겸손히 배우는 자가 참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삶의 스승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배움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참스승의 자세는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2.“옛것을 익혀 새것을 새것을 알게 되니 스승은 할 만하다.”<논어>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에서 새것을 깨달아 알아가는 일에 힘쓰는 이가 또한 참된 스승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 바오로, 부처님, 세종대왕, 파코미오, 옛 어른으로 소개된 다산 정약용, 논어의 공자 등 우리의 스승들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거룩한 삶, 아름다운 떠남으로 요약되는, 길이길이 향기로 남아있는 스승들의 삶입니다. 자취없이, 흔적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영원히 살아 있어 창공의 별처럼 빛을 발합니다. 모두가 거룩하게 사시다가 아름답게 떠나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의 좌표가 되신 분들입니다. 비록 거룩하게 아름답게 살지는 못해도 부끄럽게, 사악하게, 거짓되이, 남을 아프게 하며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 무대에서 자기의 배역을 놀랍게 훌륭히 해내신 스승들입니다. 과연 인생 순례 여정의 무대에서 나의 배역은, 역할은, 소명(召命)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결코 유일무이한 선물로 받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무하게, 무지의 어둠속에 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대자대비의 삶을 사셨고, 성 파코미오는 은수자로 시작하여 임종시 그의 수하에는 약 3천명의 수도자와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다 전염되어 346년경, 9월5일 56세로 선종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는 두분은 광화문 두 동상에서 보다시피 성군(聖君) 세종대왕(제가 전주 이씨 영해군파인데 영해군은 세종대왕의 17남)과 성웅(聖雄) 이순신입니다. 오늘 탄생일을 맞이하는 세종대왕의 애민사상과 한글창제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세종 평전에서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세종은 비굴한 사대주의자도 아니고, 배타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배합시킨 지혜로운 분으로,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와 개방적인 자세로 교류하여 공동번영을 꿈꾼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 였다는 것이 바로 세종의 진실이요 위대함이다.
세종은 토론과 여론을 존중하는 소통정치의 달인이고, 신분과 국적을 초월하여 인재를 발탁한 개방적 인사정치의 달인이고, 사회적 약자인 노비, 서얼, 죄수, 노인, 고아, 여성의 인권을 높인 복지정책의 달인이고, 천문, 역법, 수학등 과학기술문화를 진작시킨 과학의 달인이고, 중국음악과 민족음악을 조화시킨 음악의 달인이다.
경학과 역사학에 통달한 인문학의 달인이고, 법률에 정통한 법학의 달인이고,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길러낸 교육의 달인이고, 우리의 농업을 개발한 농학의 달인이고, 우리 땅의 약초를 개발한 의약의 달인이었다. 세종이 10학에 통달했다는 것은 굳이 비유하자면 오늘날 종합대학의 박사학위를 10개쯤 가졌다는 것과 비슷하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인품도 정말 놀랍습니다.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침착하고 굳세며 너그럽고 후덕했다.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어질고 자애로웠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타고난 천재에다 전인적 인품에 한결같이 백성을 내몸처럼 사랑했기에 이뤄낸 기적같은 현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고별기도와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주신 고별사도 감동적입니다. 두분 다 거룩한 삶과 아름다운 떠남이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다음 두 대목이 우리의 삶에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속에 살면서도 악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하나 진리로 거룩해지는 거룩한 삶 하나 뿐입니다. 거룩한 삶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떠남이요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오로의 고별사도 일맥상통하며 감동적입니다.
“내가 삼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여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여러분을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고별사를 마친후 무릎을 꿇고 기도한후 원로들은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니 고별사는 물론이고 고별장면도 감동적입니다. 47년전 6학년 제자들의 졸업식때 울던 모습에 울컥하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매해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는 지금은 60세의 제자들 몇명이 다음 5월19일 주일 오후에 저를 찾는다 했습니다. 스승의 노래, 어린이날 노래, 과수원길 세 노래를 준비해오라 당부도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떠나야 합니다. 바로 지금까지 소개한 스승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바오로의 가르침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말씀의 진리로 부단히 정화되고 성화될 때, 모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며 아름다운 떠남도 이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바오로 사도,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우리를 날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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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세상에 물들지 않음을
너머
세상을 물들임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어둡지 않음을
너머
빛남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믿지 않음을
너머
믿음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절망하지 않음을
너머
희망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미워하지 않음을
너머
사랑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악하지 않음을
너머
선함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불의하지 않음을
너머
의로움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죽이지 않음을
너머
살림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속되지 않음을
너머
거룩함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세상에 물들지 않음을
너머
세상을 물들임에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세상 깊숙이 스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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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나’의 뜻
‘하나’는 ‘비슷함’을 포함하여 많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합의나 조화를 나타낼 때도, 닮았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라고 쓰여 있으며, 같은 뜻으로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다’”(1코린 12,13)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본성의 유사성과, 아담이 우리 출생의 머리요 자연적 기원이라는 사실에 따라, 우리 모두는 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로서 부활하신 분의 죽음과 부활의 표상이 된 우리의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이 예시한 것에 따라 그분을 머리로 모시며 우리 각자는 그분의 지체이고 성령으로 난 썩지 않는 몸입니다(1코린 15,49-54 참조).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우리 자신의 터와 접촉하는 것은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이고, 불꽃과 접촉하는 것은 불과 접촉하는 것이다. 신적인 불과 우리네 신적인 불꽃 사이의 이러한 점화로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가? 그 열매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시간 감각이다. 그것은 영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새로운 시대, 메시아 시대, 마지막 때, 결정적인 때다. 그것은 실현된 종말론이다. 그것은 아래의 두 인용구가 말하는 시간 감각이다. 엑카르트는 아래의 두 성서 인용문을 바탕으로 설교를 작성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아시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때가 이미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밤은 물러가고 낮아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 ...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새옷으로 입으시오”
(로마 13,11-12.14)(16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재속 성직자의 개혁:
이러한 참사 수도회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몽트레회이다. 이 회는 라인 강 하류 지방의 중앙성당 평의원인 크산텐의 노르베르토(1082∼1134)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젊은 귀족으로서 하인리히 5세에게 봉사하고 있을 때 큰 기대를 보인 그는, 1113년에 재의를 받은 캄브라이 교구를 거절하였다. 그는 1115년에 돌연 자신의 모든 생활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아 그는 지크부르크의 베네딕토회 개혁 수도원을 거쳐, 그에게 성직자 개혁의 시급함을 지적한 어떤 은수사 밑에서 체류하였다. 그후 자신이 이 임무에 헌신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속죄 설교사로서 또한 순회 설교사로서 수년 동안 프랑스를 돌아다녔다. 이때 그는 민중 속에 만연되어 있는 이단과 싸울 기반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청빈을 통해 이단과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120년에 리옹 근처 프레몽트레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은 본래 수도자들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는 참사회원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이 수도회에 특별한 사명으로 성직자의 성화와 민중 가운데서의 사목과 설교를 지시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연구가 전제되어야 하였다. 이 새 “프레몽트레” 수도회는 1156년에 벌써 100개 이상의 수도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노르베르토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활동적인 생활로 전향하였고, 1125년에는 막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의 참사회원들을 대교구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동부지역을 새 임무 영역으로 주었다. 시토회의 회원들과 같이 프레몽트레회의 회원들은 이후 엘베 강 건너편 지방들의 선교와 개간에 많이 공헌하였다.(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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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17,11.15.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별 기도 중에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 부분입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깊은 연민과 배려가 속속들이 묻어나는 기도이며 모든 구절을 듣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 (17,11.15)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17,17) 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이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계시며, 그래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에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디 아버지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불러 뽑아 주님께 보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저희를 아버지의 다함 없는 사랑과 보호로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직 아버지께서 주님을 파견하신 분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을 반대하고 등지게 하는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과 그 유혹에서 홀로 이겨내기 어렵기에 예수님께서는 악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아버지께 간청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만이 우리를 세상의 악에서 우리 자신이 이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의식을 유지하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울타리이며 성채이며 피난처입니다. 그곳에서만 우리는 악에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살아야만 하기에 이 세상의 악에서 보호와 사랑이 필요함을 아시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는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세상의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선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진리가 우리네 삶 안에 살아 숨 쉬고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진리는 아버지이시고 아버지의 생각이 드러난 말씀이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알면 알수록, 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들으면 알아들은 만큼 우리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이고 진리와 하나가 될 때, 그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되고 자유롭게 하리라고 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거룩함과 분명 다릅니다. 그분들은 거룩함 그 자체이고 본성 자체가 거룩하신 분들이지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진리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살아갈 때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가 거룩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며 어둡고 거짓된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고 진리의 향기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우리 역시 그분들의 거룩한 사랑 안에 하나 되리라 봅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아버지의 사랑과 그 사랑의 표출인 생명의 말씀에 있으며, 그 말씀인 진리로 주님처럼 우리도 역시 기꺼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아버지에게 시작해서 아버지 안에서 마치게 됨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일러 주십니다. 아버지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오늘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과 친지, 이웃과 다른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나가 되고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오늘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자부적 사랑으로 권고한 바오로 사도의 고별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상기시키고 반향하고 있습니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사20,31~32) 우리 또한 사도 바오로의 마음으로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진리로 우리가 자유를 만끽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17,17)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의 자비가 늘 불자들과 모든 이와 함께 하길 바라며,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스승의 날을 맞아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길로 이끌어 주었던 모든 스승에게 감사드리며 평안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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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예수님의 ‘고별 담화’는 이제 남겨진 이들을 위한 ‘고별 기도’로 이어집니다.
늘 함께하였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가 오늘 복음의 내용이고,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한 ‘마지막 담화’가 독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만큼의 비장함과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와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이 주제들은 그리스 말 본문에 모두 명령형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보호).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성화).
‘보호’를 청하는 기도에는,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켜 주십시오.’라는 표현과 함께 “이들도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곧 ‘일치’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하고 권고한 뒤,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내부의 분열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화’는 하느님께만 속한 존재로 축성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어떤 존재를 거룩하신 하느님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 그분께 온전히 속하고 장애 없이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복음은 이 성화가 ‘진리이신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곧 우리를 성화시키는 진정한 도구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당부를 우리 삶 안에 구현할 때, 비록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존재는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내부의 분열에서 공동체를 보호할 때,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에 가까이 갈 때, 이를 당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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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제자들의 일치를 청하십니다.
그 일치의 모델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데
하느님처럼 하나가 됩니다.
요한 17장에서는 성령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이 말씀은
세 하느님의 위격이 일치하시는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른 위격이지만
한 분 하느님이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하나의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같은 모습을 추구하면서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일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경험합니다.
즉 이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면서
또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에서 거룩함은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제자들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제자들은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 속에 머무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보호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일치에 앞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먼저 머무르면서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치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서로 동등한 형제성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 자신이 거부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거부된다는 것은
상처로 다가오기에
나의 의견을 끝까지 고집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일치는 깨지기 쉽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나의 의견과 상관 없이
나의 행동과 상관 없이
하느님께서 나를 존중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의견에
자유롭게 귀를 열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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