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면적 : 65,000 km2 인구 : 약 300만명(201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 약 16,000 달러(2013년 IMF 자료) 시차 : 한국과 7시간(섬머타임 적용시 6시간) 통화 : 리타스(Litas) 1litas = 3.45 euro 인종 : 리투아니아인(약 83%), 러시아인(약 6%), 폴란드인(약 6%) 등 종교 : 로마카톨릭(약80%), 러시아정교(약4%) 등 언어 : 리투아니아어 기후 : 온화한 대륙성 기후 정부형태 :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 산업구조 : 전체 GDP중 서비스산업(약 68%) 제조업(약 28%) 농업(약 2%) 등 부존자원 : 토탄, 호박, 철광석, 임산자원 역사 리투아니아 역시 라트비아와 마찬가지로 발트인(레트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와는 다르게 자신들의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1230~40년 사이 민다우가스에 의해 리투아니아가 하나로 통합이 되었고, 1253년 7월 6일 민다우가스 왕의 즉위식이 있었던 날은 지금도 국경일로 지켜지고 있다. 민다우가스 왕은 리투아니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 뒤로는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기독교화가 가장 늦게 된 나라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14세기초 게디미나스 공작은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빌리우스로 옮기게 되었고, 그러면서 리투아니아는 더욱더 발전을 하게 되었다. 14세기 후반 요가일라왕은 원래 리투아니아 공작 출신이었으나 폴란드의 왕이 계승 공주와 결혼 하면서 폴란드의 왕이 된 인물이다. 요가일라왕에 의해 1386년 리투아니아의 국교가 카톨릭으로 지정 되었고, 이때부터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의 연합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인물이었던 비타우타스 대공장은 카톨릭국가, 폴란드와의 연합이 아닌, 독립된 리투아니아를 꿈꾸고 있었다. 1410년 폴란드의 타넨베르크 지역에서 있었던 독일십자군과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도 요가일라왕과 비타우타스 대공작이다. 비타우타스 대공장 통치 당시(15세기 초) 리투아니아 국토는 현재의 리투아니아 지역과, 벨라루스, 우크라니아 까지에 이를 정도로 그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루블린 조약에 의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한나라로 합쳐지게 되었고, 귀족들 사이에 폴란드화 바람이 불게 되고, 점차 리투아니아의 세력은 약화되게 되었다. 18후반 주변 강대국이었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세차례에 걸쳐 분할을 맞게 되는데 마지막 3차분할(1795년)로 인해 리투아니아 전체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발트국가와 마찬가지로 1920년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얻어 내게 되고, 또다시 1940년 소련에 강제편입, 1991년 마지막으로 독립을 이뤄내게 되었다. 뷔타우타스 성당 카우나스 대 성당 카우나스 대성당
조국의 독립운동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위하여 가득채운 추모 비
카우나스 구시가지에 있는 구 시청사
트라카이성 뷔타우가스대공작이 축성
리투아니아의 심장 대성당과 광장
1918년 쏘련으로부터 독립 하기위하여 650km 인간의띠 출발점 이시점에서부터 에스토니아까지지
성 안나 성당 구시가지에 있는 어떤 카페 거리의 악사
구시가지 게다미나스 언덕 대부분 성당과 교회 약70%전체의거리 게다미나스 으게다미다스의거리
대통령 궁{우리나라의 청와대)
한국 식당 에서 저녁회식
성당 교회가 대부분이다
우리여행단이 투숙했던 호텔의 조각 작품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룬달레 궁전 장미 정원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약 1/10크기)
벤쿠버에서 인터넷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사진 한장 올리는데 2분이상 시간이 소요되어 가장 볼만한 상트 페트르부르크는 서울에서 사진을 올려야 할것 같군요 정말 한국이 인터넷의 최강국 임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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