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에 관한 시모음 5)
내원암 가는 길 /이상국
산수유 숨어 피는
돌부리 산길
사다리만한 구름다리 건너
전경초소 같은 새시 집에서
구리 기와 시주 받는 파마머리 보살아
내 그것으로
암병 든 우리 형님 일으킬 수 있다면
니네 절지붕을 모두 내가 이겠다
이런 마음이 흙탕물 같았는지
울산바위 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에라 이 되다 만 눔아" 소리치며
소나무 가지 눈을 털어
목덜미를 후려치네
혼자 가는 길 /강문숙
내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 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탁치며 걸어 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 당기는지
가시는 길 /우공 이문조
아카시아 향기 흩날리던 날
푸른 오월 해 그름
세상과 이별한 아버지
아들 딸 칠 남매 많기도 한데
단 한 명의 배웅도 못 받으시고
병상에서 쓸쓸히 떠나셨네
홀로 와서
홀로 가는 인생이라지만
임종도 못한 자식들
가슴에 한이 됩니다
남들은
천수를 누렸다고
호상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식들 가슴에는
대못이 박혔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꽃상여라도 태워 드려야 하는데
달랑 곽 하나로
온몸 꽁꽁 묶인 채로
땅속에 묻히던 날
눈물이 앞을 가렸지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편히 가세요
그리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꽃잎 가는 길 1 /박이현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길
걸어가 보자.
잠시 꿈이었고
기쁨이었다고
말하지말자.
낙화 자유로우니
연민에 들지도 말자.
꽃잎 받으며 빈 지난해 소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지도 말자.
우리의 날이 흩어진다고
애석해 하지도 말자.
마음 다해 기도문을 외우고 나면
꽃잎처럼 위안이 내려온다.
다시 올 봄이 있고
계절 내내 피어나는 꽃잎 있으니
허박한 은자隱者로나 남을 일이다.
내원암 가는 길 /목필균
수락산 내원암 가는 길
숨이 차다
가파른 바위에 박혀있는 계단
비척거리는 마음 한 자락
바로잡아 몸을 세운다
돌계단 올라설 때마다
생각이 달아나고
생각이 다시 들어설 무렵
돌계단은 더 가파르게
앞으로 다가선다
숨이 목까지 차오를 때야
들어서는 천수경 독경소리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천년 묵언수행 중인
미륵 부처님이
치맛자락 여미시며
내려다본다
산으로 가는 길 /김길남
맑은 태양을 머금은 3월
어딘가 가까이서
다가오는 봄의 소리
멀리 아지랭이 가물거리고
소월의 진달래가
개화를 준비하면
누군가의 마음은
산 바람처럼 부푼다
도시의 소음과
단조로운 일과를 잠깐 떠나
멀고 가까운
산들이 손 짓 하는대로
산으로 간다는 것은
하염없이 즐거움이
솟아나는 맛이러라
아루샤 가는 길 /고명
이상하다 이 집,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만 같다
토방에 엎드려 게으르게 졸고 있는 누렁이와
벼슬을 치켜 들고 거만하게 마당을 거니는
장닭, 암팡진 엉덩이 흔들어대며
암내 슬슬 온 동네에 풍기는 씨암탉까지
낯익다, 생각날 듯 말 듯 기억의
저 편 빨래줄에 널어 논 허름한
빨래들이, 엄마 옷자락 뒤에 숨어
손가락을 빨며 빠꼼히 쳐다보는 흙강아지
동그란 눈이, 누구더라
누구더라 어디선가 꼭 본 얼굴
혹 내가,
살았던 집일까 아이도 낳아 기르며
털부숭이 어느 사내와 그냥 행복했을까
세렝게티 끝없는 평원에 붉게
노을이 내리는데
고개를 길게 빼어
내다본다 저녁 연기 오르는
외딴 집
저기 낯익은 흙마당 안쪽 어디, 봉숭아 채송화
수줍게 꽃잎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
내 잃어버린 이름을
자꾸 손짓하여 부르는 것만 같아서
혼자 가는 길 /오경택
만남이 아름다운 것처럼
이별도 아름답기를 바랐습니다.
설레임으로 가슴 벅찬 만남이었다면
추억조차도 가슴 뭉클한 이별이고 싶었습니다
만남에 눈시울 붉어 졌다면
이별도 애잔할지 언 정 웃음인줄 알았습니다
會者定離(회군정리)라
만남은 이별을 전제 한다지만
離者定會(이자정회)라
이별은 재회를 예고했으면 합니다
아름답기를 바라는 이별은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북망산 돌아드는 그 황량하고 먼 길을
북한산 자락에서 배웅하는 날
함께 갈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걸
비로소 처음 알았습니다
당신과 함께 오르던 이 길을
오늘도 혼자서 내려 옵니다
당신과의 재회는 환각이었습니다.
모악산 가는 길 /석란 허용회
나무가 가지를 흔들어 바람을 부르고
이별 연습이라며 색동옷 갈아입혀
인연줄 끊어 놓는다.
낙엽은 쪽빛 깊은 하늘을 무대삼아
삐라같이 앞마당에 섧게 내려앉아
단풍제 안내장만 보여주고 떠났다.
행사장 가는 길, 논과 밭은
‘좋은 계절은 즐겨야 한다’며 마실만 쏘다니니
이 똥 냄새가 물컹 씹힌다.
벌써, 산 허리에는
해 묵어 등 빛이 히끗한 지네들이
오염물을 토해가며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고 있다.
초청장 없는 등산객도 지네의 행렬에 섞이다 보면
지네의 다리가 되었다가 불청객이 되었다가
그래도 산행은 행복하다.
모두가 동료같고 연인같고
모두가 친구같고 가족같다.
꽃지 가는 길 /심시인
서해 바닷가 꽃지가는 길
길섶에 배롱꽃 환하게 웃고
산 비얄 미인송 자태 고운데
인생같은 굽은 길 돌아서면
저 멀리 할아비 할미 바위
맨발로 마중 나오시는데
지는해 바다에 풍덩 빠저
저녁노을이 차암 곱더라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더라
도솔암 가는 길 /김준태
미황사 대웅전
목탁소리 사라지고
앞마당 한 켠
잿빛 법의 한 자락
실바람 한 끝
슬어 안고 떠난다
뜨락에 멈춰 서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산 벚나무 힘껏
기지개 켜며
꽃망울 하나씩 준비하는데
청람 빛 산죽들
양 손 벌리고
산허리 보슬비 모아
은주렴 만드는 시간
딱따구리
날카로운 부리 세워
집 짓는 시간
각북 가는 길·1 /서지월
天地玄黃의 등굽은 길 가다보면
거기 무공해 미나리단들이
下午의 산자락 베고 누워 마지막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모습 더욱 파릇하고
北邙 아니라도 억새풀들 모여 웅웅거리는 떼서리는
꼭 저승의 하늘 위 울부짖는 승냥이
몸짓 같아만 보이는 산그늘 반쯤 접힌
이 가라앉은 길 풀어가다 보면
돌멩이 하나에도 먼지가 묻어 있으며
꽃 한 송이에도 더운 피 서려있는
먼저 간 사람들의 때절은 땀냄새가 이제는
바람에 불려 갔거나
냇물에 씻겨 떠내려 갔거나 아니면
비낀 놀구름 위에 얹혀서 아직도
못다 푼 恨의 응어리 공중에 둥둥 띄우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생각의 끈을 따라
가파른 저 고개 넘어야 할 뿐
뒤돌아 온 시간만큼의 重量感을 등에 지고서.
함께 가는 길 /김준태
사람들은 저마다
멀리멀리 가는 길이 있습니다.
더러는 찔레꽃이 흐드러진 길
더러는 바람꽃이 너울대는 길
더러는 죽고 싶도록 아름다운 길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울며 쓰러지며 그리워하며
멀리멀리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여 우리 사람들이여
우리들은 혼자서 혼자서 간다지만
노래와 울음 소리 속으로 바라보면
결국 우리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함께 만나고 함께 보듬고 가는 것입니다.
워싱턴 가는 길 /홍문표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떡갈나무
그 밖에 이름 모를 잡목들이
우거진 숲 속에
더러는 알몸으로 그냥 누워서
지겨운 삶을 던져버린 자유도 있다
옥수수 밭 행렬
싱싱한 육질의 지표에
거대한 양식이 지천스럽다
기차는 내륙 깊숙한 지점에서
할딱거린다
별안간
인디안의 휘파람소리
서부로 달리던 역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지난다
링컨이 가고
케네디가 가던길
포토맥 강가엔
눈이 쌓이고
멀리 의사당 꼭대기엔
하얀 비둘기 한쌍이 선회하고 있다.
함께 가는 길 /우공 이문조
밀어주고
당겨주며
걸어도
힘든 인생길
당신 없는 길
생각만 해도
아득해.
아이들한테 가는 길 /감태준
일곱 살 여덟 살, 나를 닮은 아이들이
역에 나가 우는 것은
내가 철길을 따라 너무 먼 도시로 온 탓이다
내가
도시를 더듬고 다니다가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잃어버린 탓이다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찾는다 해도
이젠 같이 놀아줄 수 없이 닳아빠진 얼굴을
나는 차마 내밀 수 없는 탓이다
안개 속에 묻히는 철길을 바라보며
또 어디 몇 군데
연탄재같이 부서지는 마음아
눈 오는 이 밤 따라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우는 것은
내가 저희들한테 돌아갈 기약마저도 없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