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중심에 선 최영과 이성계는 단행과 결단으로 맞섰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불가론을 주장했고, 최영의 요동 정벌 준비는 계속됐다.
조선시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이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성계의 정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풍문에 “이성계가 왕이 된다”는 말이 나돌자, 최영이 이를 꺼려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으나 마땅한 죄를 찾지 못해 요동을 치게 하여 명나라에 죄를 짓도록 만든 뒤 이를 핑계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요동 정벌을 시도했다.
당시 이성계는 요동 정벌 불가론을 들어 반대했다.
먼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불가하다. 셋째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간 사이 왜적이 침입할 수도 있다. 넷째 여름철에 갓풀이 눅눅해져 활을 쏠수 없고, 돌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추수가 끝나고 군량미가 넉넉할 때 출병하자는 절충안도 제시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는 계속됐다.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 군마 2만632필, 정병 3만8천830명, 종사원 1만1천634명으로 정벌군을 구성하고,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으로 보이게 했다.
우왕 14년(1388) 4월 6일 정벌군이 출발했고, 5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마로 강물이 불어나고 돌림병까지 퍼지면서 보급로에 차질을 빚자 정벌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도망가는 병사들까지 나왔다.
조민수와 이성계는 5월 13일 이후 두 차례 장계(狀啓)를 올려 회군을 요청하지만 최영은 감독관까지 보내 진군을 독려했다.
5월 22일, 이성계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고,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만일 상국(上國)의 지경(地境)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宗社) 생민(生民)에게 곧 화가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하게 하지 않으랴.”
이성계의 회군이 왕명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왕의 옆에 있는 악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회군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수하 장수들은 “동방 사직의 편안하고 위태한 것이 공(이성계)의 한 몸에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군사를 돌려 개성으로 향했다.
출처 : 영주시민신문(http://www.yj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