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28
1월7일[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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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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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ayEAe0ceRU
[성 바오로수도회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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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적한 어촌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가 벌써 4년이 넘어갑니다. 읍에서도 4~50분 더 들어와야 하니 적막강산입니다.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묻는 분들도 계시는데, 살아보니 좋은 점들이 참 많습니다.
훈훈한 이웃 인심이 참 좋습니다. 대자연 속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자주 뵐수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하루 해가 저물 무렵, 주님께서는 어김없이 제게 선물 하나를 건네십니다. 하루동안 얼마나 고생많았냐며, 황홀한 저녁 노을을 제게 펼쳐 보여 주십니다. 한폭의 그림같은 서녁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의 한 모퉁이를 구경하는 느낌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또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도심의 풍광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별이란 별들이 총집합해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연 시간에 배웠던 북두칠성이며 환한 금성이며...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인생무상함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크고 위대하심 앞에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아무리 난다 긴다 잘난 체 하지만, 티끌이요 먼지인 것을...
오늘 우리는 또 한 번의 성탄인 주님 공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구세주의 별빛만을 바라보며 멀고도 오랜 여행길을 충실히 걸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주님의 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밤만 되면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 결과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는 지상 최고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인생 최고의 목표를 이룬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구세주를 뵙게 되면 바치려고 준비한 귀한 선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보물 상자에서 꺼내, 막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 앞에 바쳤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날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느님께 청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의 마음으로 능력이 출중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좋은 것을 선물로 드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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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JynXpiqT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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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이 가진 것, 황금과 유향과 몰약>
오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동방의 세 박사가 먼 길을 걸어 태어난 메시아를 만나러 온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러한 희생과 투자를 했을까요?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일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바이브’는 2020년 개봉한 영화입니다. 외딴 눈 덮인 산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자살로 극심한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남자 동료와 함께 눈 덮인 외딴 산에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에게 힘과 지지의 기둥이 됩니다.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은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궁극적인 희생을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그녀는 자신의 가치와 생명 자체의 가치를 재평가합니다. 여자는 다쳐 더는 걸을 수 없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혼자 산에서 내려옵니다. 남자는 버티지 못하고 죽었지만, 여자는 어린 자신과 화해하고 의욕 있게 살아갑니다. 사람은 나 때문에 죽은 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죽은 이가 필요합니다. 그가 나의 메시아, 구원자가 됩니다.
이러한 체험을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는 존재와 머무는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있습니다. 성막으로 치자면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세 군데서 참다운 예배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은 ‘원하는 능력’인데, 십계명을 황금 대신 원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생각과 기억, 의지를 주님께 바치는 향이 바쳐져야 합니다. 뜰에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했던 예수님처럼 자기 육체를 죽이는 몰약이 바쳐져야 합니다. 이 세 예물이 없다면 주님과 머물며 그분이 나의 삶의 의미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 성화 작가인 심순화 가타리나 화백은 어느 날 매일 성당 다녀오고 작업에만 매달리며 은둔자처럼 생활하고 성화 작업만 하는 데 지쳐 폭발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고, 다른 사람들이 의미 있게 바라보냐며. 그때 비명을 지르자 마음속에서 아주 잔잔하게 “의미가 있지! 너는 나를 그리고 있단다. 내가 가는 길은 끝이 없단다.”라는 조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침묵의 소리를 듣는 순간 커다란 폭풍이 멈추고 잔잔한 호수가 된 것처럼 평화로워져서 죽을 때까지 성화 작업을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수원교구 매주 주보에 실을 그림을 그리는데 1년을 그리고 나서 2년을 더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버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걸려서 그림에 차질이 생기면 안 돼서 사람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꿈에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절벽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거의 힘이 빠져 혼자 힘으로는 보따리를 들고 오를 수 없어 “도와주세요!”라고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키 큰 아저씨가 위에서 보따리를 들어주었고 두 손이 자유로워진 심 작가는 온 힘을 다해 끝까지 올라가 바닥에 쓰러지자 키다리 아저씨는 절벽을 끝까지 올라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예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너무도 생생하여 바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더 살아야 할 이유, 포기하지 않을 힘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그러나 내가 육체와 생각과 마음이 전부 주님을 만나고 싶은 것 하나로 모일 때 가능합니다.
그분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길 때 그분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황금은 십일조로, 유향은 광야에 나와서, 몰약은 육체를 절제하며 오직 그분만을 바래야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그러면 우리는 자신 있게 “나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완전히 봉헌되지 않은 채 그분을 만나면 그분은 우리에게 이용당하십니다. 그러니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들고 꾸준히 그분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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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에 걸쳐서 공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는 것과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하신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요?
1) 하느님의 자비로운 다스림
하느님의 나라란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과 같은 한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통치(다스림)가 온전히 실현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통치, 다스림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거부감을 갖습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무력과 억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통치는 세상 권력가들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주 자비로운 통치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예전에는 자비롭지 않으셨다가 갑자기 자비롭게 되셨다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이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도외시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돌보신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
(1) ‘변두리 인생’도 보살피시는 하느님
예수님이 보살피신 사람들의 부류에는 우선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이 있습니다. 당시 통념에 의하면 병자는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이고, 마귀 들린 이는 악마에게 잡혀 있는 사람이며, 나환자란 죽음의 맏아들에게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멸시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서 도외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서,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치유하고 고쳐주심으로써 다시 하느님 백성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편견도 제거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두고서 본인의 죄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병이 반드시 죄의 결과는 아니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필연적으로 죄의 결과로 간주하는 편견을 타파하십니다(요한 9,1-3 참조) 또한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와 여인들은 온전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던 유다인들의 관습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를 어른들의 본보기로 내세우십니다.(마르 10,13-16 참조) 또한 사람취급도 못 받던 여인들이 당신을 따르도록 하시고, 남편이 아내를 소박할 수 있던 것을 금지함으로써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던 여자들을 옹호하십니다.(루카 16,18 참조)
(2)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죄인을 가까이 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한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예수님은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 하시고(루카 19,1-10 참조),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2,13-17 참조) 또한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당신의 발을 향유로 닦아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카 7,36-50 참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아파 사람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셨습니다.(요한 7,53-8,11 참조)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하신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함으로써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신앙에 근거해서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죄인들과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느님 곁에 단호하게 머물려고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하느님의 적대자들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경건한 이들에게 죄인들과의 접촉은 단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허용될 뿐입니다. 더구나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경건한 이들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식사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식사 참여자들 모두에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경건한 이들의 통념에 거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이것은 율법에 충실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사공동체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인상 깊은 사건으로 비추어졌고, 반대로 그의 비판자들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행동을 비유들을 통해서 정당화하는데, 그 비유들은 하느님 스스로 죄인들에게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 가까이 모여왔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투덜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이어서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과 잃었던 양의 비유가 뒤따릅니다.(루카 15,1-31) 다른 비유들에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왕으로(마태 18,22-27), 빚을 탕감해주는 채권자로(루카 7,41-43),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심판자로(루카 18,9-14), 무한한 자비와 능가할 수 없이 큰 호의를 베푸는 포도원 주인으로(마태 20,1-15)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죄를 지어서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인간들을 찾아가시고, 죄인들에게 관대하게 용서를 베푸는 분으로 선포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 자신의 행동과 하느님의 행동이 상응한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 안에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실현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3)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산상수훈에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폭력적인 보복의 법칙에서 떠나고, 악을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요구,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마태 5,38-47)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5)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5.48)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요청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한다면,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완전성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분노 속에 멸하지 않다는 점이 속한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들 서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 하느님은 분명 복수의 하느님은 아닐 것입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게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따돌림 받는 이들은 물론 죄인들까지도 버리지 않고 당신 품에로 불러들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드러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날 수 있도록 가난한 이, 죄인들을 품어주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이 준비했던 황금, 유향, 몰약과 같은 것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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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제2의 성탄이다. 그것은 주님의 탄생 신비에 대한 몰이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신 분이다. 이렇게 주님의 공현은 성탄의 신학적 내용을 확대해주고 깊게 해 준다.
오늘 박사들에게 나타난 별은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 별은 그들 여행의 안내자 역할 외에 더 나아가 그들을 꼼짝 못 하게 이끄는 자석과 같다. 오늘의 전례는 예루살렘 대신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 이제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땅끝까지 쏟아부어야 할 새로운 예루살렘은 교회이다.(교회 1항)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복음 선포와 교회 각 지체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반면에 유다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을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메시아께 경배드리러 가지는 않았다.
복음에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다. 이때 헤로데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여기서 헤로데는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어딘가를 알아본 뒤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만나 경배한다.(마태 2,4-12 참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다. 복음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 즉,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그를 해칠 계략을 짜지만, 멀리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예수께서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찾고 알아본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1절)
복음에서 별은 동방박사들을 예루살렘에까지 인도한 후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기가 있는 곳 위에”(9절) 머문다. 이 별은 하나의 혜성으로도 생각했지만, 그 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 별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내적 빛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요한 6,44 참조)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둘째로 마태오는 별의 표징 아래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했던 발람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제 구약의 계약이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그분의 빛은 이미 온 세상에 빛난다. 왜냐하면, 이교도들도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계시하신 뒤 감추심으로써 당신을 다시 찾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프고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빛을 받아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헤로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폭군에게 그리스도를 살해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헤로데와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 수가 없다. 만일 빛이 스며든다면 모든 것이 붕괴한다. 왜냐하면 “숨은 생각들을”(루카 2,35)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들의 나라 동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을 더욱더 널리 확산시켜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보다도 동방에서 그 빛이 더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빛에서 빛으로”(2코린 3,18) 옮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밝은 빛처럼 변화시켜 더욱더 깊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또한 영원한 영광중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뵙기를 갈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의 공현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항상 찾아 만나 뵙게 되는 것은 주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가능함을 잊지 않고 순간의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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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동방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안내한 것도, 예루살렘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으로 안내한 것도 별이었습니다. 별은 처음부터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곧장 베들레헴으로 안내하지 않고 왜 예루살렘에 들르게 하였을까요?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들러 헤로데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박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 뒤에, 별은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합니다. 동방에서 본 별은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별과 동방 박사들의 모습을 통하여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알려 줍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삶이라도 예루살렘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의 종착지도 예루살렘입니다. 봉사를 통하여, 교우들과 맺는 좋은 관계를 통하여 얻는 기쁨도 예루살렘에서 얻는 기쁨일 뿐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얻으려면 베들레헴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봉헌되는 미사에는 베들레헴으로 안내하여 주는 은총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비가 미사 안에 담겨 있습니다. 만일 미사를 드려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말씀을 ‘듣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말씀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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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1-6)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뜻’을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동방’은 보통 페르시아나 아라비아로 생각하는데, 박사들이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또 얼마나 먼 곳에서 왔든지 멀지 않은 곳에서 왔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모두 몇 명인지는 모르는데, 예물이 세 가지이기 때문에 세 명으로 생각합니다. ‘별’은 그들을 인도한 천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성경에서 천사를 ‘별’로 표현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묵시 1,20) 그런데 별은(천사는) 왜 베들레헴으로 직행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멈추었을까?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공적으로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동방 박사들 자신들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통치자였던 헤로데가 ‘메시아 강생’을 공식 확인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이미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동방 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메시아 강생 소식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알려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있었지만, 눈을 감은 채로 찾고 있었던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박사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고, 그 아기가 자신의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어둠을 밝히는 빛을 꺼버리려고 시도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동방 박사들의 말을 믿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쪽’에 있는 ‘사탄의 작용’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9-12)
별은 정확하게 아기가 있는 집으로 박사들을 인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는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뒤에는 어떤 집으로 옮겨가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라는 말은, “별의 인도로 ‘드디어’ 메시아를 뵙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은, 인간들을 구원하러 와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예물이고, 또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과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바친 예물입니다. <박사들이 바친 예물들은, 아마도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생활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로서는 갑자기 이집트로 피난 가게 된 것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무척 난감했을 텐데, 박사들이 바친 예물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가정을 피신시키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박사들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까지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신앙인이 되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신앙인이 되는 순간에 이미 각자 한 사람의 동방 박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바치는 예물들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들과 같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예물이고, 나의 신앙과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예물”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바쳤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얼마나 정성을 다 바쳤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마르 12,41-44) 동방 박사들이 바친 값비싼 예물들과 ‘같은 가치’가 있는 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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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수많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필리핀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미사가 끝나면 어린이들은 성당 마당에서 마음껏 뛰놀았습니다. 비가 오면 웃통을 벗고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햇살이 나오면 옷을 말려 입고는 다시 또 신나게 놀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저는 어린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어야만 했습니다. 시골길이라 땅이 험하고 어두워서 위험했으니까요.
랜턴을 하나씩 쥐여 주고 서로 손을 잡고 어두워진 길을 걸어가는데, 중간 중간 물웅덩이가 있었고 가축들이 싸놓은 배설물도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오면 두세 시간이 훌쩍 넘어갔어요.
그러니깐 그 아이들은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걸어 성당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다음 주일 미사에 참석한 아이들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걸어와 미사를 드리고 뛰노는 아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이지 소중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아이들이었어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그들의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비행기도, 자동차도, 기차도 없는 험한 길과 다리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를 생각해보면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산과 고개, 넓은 벌판을 넘어야 했을 거예요. 그토록 메시아 예수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겠지요.
한편 헤로데 왕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부류의 극단적인 믿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천상의 것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귀히 여기며 값진 선물을 드리고 기쁘게 돌아가지요.
반면 헤로데 왕은 천상의 것이 아닌 지상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에게 지상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언젠가 사라질 것에 대한 욕심에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가득하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요?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일이란 매우 쉬운 일이지요. 긴 여행을 할 필요도 강을 건너거나 언덕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든 감실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뵐 수 있고 손수 예수님의 몸을 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성당에 나오기까지 사소한 귀찮음의 언덕을 넘어야 하고 미움의 강을 건너야 하며 시기, 질투와 같은 일상적인 장애물들 또한 이겨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달콤한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여러 장애물을 잘 이겨내고 마침내 예수님 앞에 선 동방박사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수많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넘고 넘어 마침내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정성 어린 경배를 드릴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즐거워하시며 우리를 축복해 주실 테니까요.
맞아요! 우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찾아 나선 동방박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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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영기 바오로 신부님]
<동방박사는 누구?>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公顯)이란 ‘공식적으로 나타내 보이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의미합니다.
삼왕이라고도 칭해지는 동방 박사 세 사람(가스팔, 멜키올, 발타살)은 이방인들로서 구세주 예수님을 처음 뵙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머나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마태 2,1 참조) 그 별의 인도를 따라 힘든 순례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해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정성껏 준비한 선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합니다.(마태 2,11 참조)
저는 주님 공현 대축일만 되면 독일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라인강 옆에 자리 잡은 웅장한 쾰른 대성당을 보며 동방 박사 세 사람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찬란한 황금 유골함과 오늘 복음의 장면을 그린 병풍형 그림을 봤던 순간이 항상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의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 제국에서 활동하던 천체에 지식이 깊은 동방박사들이 별자리를 살피던 중 유난히 빛나는 큰 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구세주의 탄생에 관한 예언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스라엘을 비추는 그 큰 별빛을 따라 기나긴 여정을 하게 됩니다.
성경과 율법을 모두 암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학자들은 오히려 메시아 탄생을 모르고 있었고(마태 2,3-4참조) 이 이방인들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메시아 탄생을 믿고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는 것은 구원의 땅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구세주 탄생인데도 이방인들에게 즉 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 소식을 듣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임신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미사를 참례하고 유아세례를 받고 복사를 서고 예비신학생 모임을 다녀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이 아닌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하며 사제가 된, 신앙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헤로데와 율법학자 같은 저에게 동방박사 같은 이교인들은 제가 일하는 성라자로 마을에 많이 찾아와 구세주의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전하고 가십니다.
머나먼 미국 한인사회에서도 오고, 경상도 전라도에서도 오고, 가톨릭 단체가 아닌 소방서, 경찰서, 일반 기업과 공공기업에서 우리 마을의 한센병 가족들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정성껏 준비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하고 가십니다.
저는 또 다른 예수님인 우리 한센 가족들과 매일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는데, 오히려 머나먼 곳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이 우리 마을의 예수님을 알려주고, 깨우쳐주고 가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이방인들이었던 동방 박사들에게 구세주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웠듯이 저도 성라자로 마을을 찾는 저보다 더 커 보이는 많은 방문객에게 알량한 자존심도 상하고 주님께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함을 금하기 힘들 때가 너무나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동방 박사의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루하루 구세주 예수님이 비추시는 별빛을 잘 따라가고 주님께 올바른 예물을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감동을 주는 예물을 바쳐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를 위해 공적으로 드러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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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한태호 미카엘 신부님]
“지금 내 신앙의 여정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는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온 세상에 구원의 빛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주님 공현대축일을 지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빛을 향한 동방박사들의 간절한 바람과 도전의 여정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삶의 질이 변화되고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멀리하며 무감각한 모습으로 자신만을 위한 길을 걸었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을 통해 하느님을 찾기 위한 새로운 길을 걷게 합니다.
지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이웃에게 무관심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이런 믿음의 여정을 멈추지 말고 항상 움직이며 날마다 새롭게 출발하여 하느님을 찾는 그런 멋진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목적지에 도착해 예수님을 경배한 그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심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을 만나 경배드릴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빛을 향해 떠나고, 주님께 경배드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야 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간절한 삶을 통해 주님의 뜻대로 살아 주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배드립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늘 주님을 찾아 나서는 간절한 바람과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한 힘찬 여정을 시작합시다.
“지금 내 신앙의 여정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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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유기영 바오로 신부님]
<약함과 순명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우리의 주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유다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우리의 왕이시며 주님이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세 가지 예물을 아기예수님께 드립니다. 참 왕이심을 알리며 황금을,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유향을, 참 인간으로 오셨음에 감사하며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동방박사들은 아기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오셨음을 온 세상에 선포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임금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보여준 첫 모습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또 다른 공현 사건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과 예수님의 세례인데 이 역시 그분의 힘을 보여주거나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 기적은 성모님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세례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왕이시지만, 공현 사건을 통해서는 약함과 순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이후의 삶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으로서 권능과 왕으로서 권위를 드러내기보다는 순명과 섬김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함을 통해서 권위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만의 선의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유혹을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배운 사람들입니다.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 첫째가 되고자 아등바등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꼴찌더라도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는 삶이 가장 높고 가장 크신 분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을 향한 첫 발걸음임을 말입니다.
새롭게 주어진 2024년을 살아가면서, 참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명과 섬김의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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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에게는 꽤 많은 만년필이 있습니다. 총 27자루의 만년필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펜촉(닙)이 굳기 때문에,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해 많은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 나오지 않는 만년필이 한 자루씩 늘어갔습니다. 매일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조금씩 굳어서 나오지 않게 되는 만년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나오지 않는 만년필을 다시 잘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척하면 됩니다. ‘만년필 세척 도구’를 이용해서 세척하면 처음처럼 다시 잘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세척이 잘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미지근한 물에 하루 정도 담가두면, 그 안에 있던 잉크들이 흘러나오면서 막혔던 부분이 뚫리게 됩니다.
2023년을 보내면서, 가지고 있는 만년필 모두를 세척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잘 나오는 만년필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죄도 이렇지 않을까 싶더군요. 우리 안에도 죄의 찌꺼기가 계속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미사를 통해 소죄는 사해지지만, 죄들이 쌓이고 쌓여서 미사만으로 부족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봅니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깨끗해지자마자 또 곧바로 죄를 짓는 우리의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더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만년필의 잉크가 굳으면 하루 종일 물에 담가 두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오랫동안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 없이 주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아닌 죄에 찌들어 있다면, 불안함으로 인해 세상 안에서 기쁨의 삶도 살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이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주님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어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에 대한 어떤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동방의 별만을 보고서 먼 여행을 떠났던 동방 박사들의 노력을 우리는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그에 반해 헤로데는 동방 박사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닌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죄에 찌들어 있는 삶에 더 큰 죄를 더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그는 무죄한 아이들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더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 죄가 아닌 선을 따르는 삶,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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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별>
마태오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그분의 별>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오 2,2)
빛을 거슬러
어둠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어둠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그분의 별
어둠에 무릎 꿇지 않고
빛을 좇는 사람은
끝내 만날 수 있는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비추는
그분의 별
하늘을 가리고
땅을 움켜쥐려는 사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한걸음 밖에 있어
닿을 수 없는
그분의 별
땅을 딛고 서있되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은
끝내 품을 수 있는
기쁨과 희망 가득한
곁을 내어주는
그분의 별
바로 곁에 있어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있는 듯 없는
크지만 어렴풋한
그분의 별
아득히 멀리 있어도
보고파 하는 사람은
끝내 볼 수 있는
없는 듯 있는
작지만 또렷한
그분은 별
그분께서 오시니 오히려
그분을 지우려는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그분께 가는 길
이내 감추는
그분의 별
그분께서 오시니 기꺼이
그분을 맞으려는 사람은
끝내 찾을 수 있는
그분께 가는 길
밝히 드러내는
그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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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별을 바라보라!” (Respice Stellam!)>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순례 여정-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알렐루야-,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동에서 그의 별을 보고 주를 조배하러 왔도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은 복음전 화답송 후렴과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을 하루종일 노래기도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아버지의 집을 향해 평생 내적 순례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2024.1.7.일 주님 공현 대축일, 밤12시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여니 한 눈 가득 들어오는 흰눈 덮인 대지에 푸른밤 하늘에 선명히 빛나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었습니다. 요즘 잠깨면 맨먼저 찾는 북두칠성입니다. 별을 보고 시작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에 문득 떠오른 오래전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였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病)이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무려 26년 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쓴 시입니다. 벌써 1988년 수도원 초창기 부임하여 1989년 종신서원에 사제품, 그리고 1990년부터 정주하여 오늘 35번째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에 강론을 쓰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당신이 상징하는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자 영원한 연인인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히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영혼의 하늘 안에 빛나는 수호천사의 별이, 주님의 별이, 희망의 별이, 진리의 별이 되어 살고 싶은 열망은 여전하며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아마도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잘 보셔요. 내 영혼의 하늘 안에 언제나 영원히 빛나는 주님의 별, 수호천사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을!
“별을 바라보라!(Respice Stellam!)”
어제 월피정중 복음 나눔시 원장 수사로부터 우리 오틸리엔 선교 베네딕도 연합회의 예레미야 총 아빠스의 모토란 말을 듣고 참 반가웠고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이에다 부제로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순례 여정”을 덧붙였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복음은 허구라지만 함축된 진리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인간 누구나에 잠재해 있는 구도자의 원형(原型)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궁극의 진리이자 빛이자 길이자 희망이신 하느님을 찾는 영원한 구도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누구나 별을 찾는, 별을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작금의 대부분 현대인들처럼 주님의 별을, 희망의 별을, 진리의 별을 잊어버릴 때, 잃어버릴 때 방향의 길을 잃어 시작되는 불행이자 비극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복음 나눔시 제가 언급했던 요지의 내용입니다.
“아, 별을 잊어버린,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별이 상징하는바 희망이요 길이요 진리입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별이 아니라, 깨어 끊임없이 간절히 찾는 구도자에게 은총의 선물처럼 계시되는 주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찾아야지 결코 누가 찾아줄 수 없는 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희망의 순례 여정 중 희망의 순례자이자 구도자에게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희망의, 진리의 별들이요 찾지 않으면 사라져 캄캄한 절망의 하늘이 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 하늘에는 무수한 희망의 별들이, 주님의 별들이, 진리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지요? 캄캄한 절망의 하늘은 아닌지요?
간절히 깨어 있는 영혼들에게 참 좋은 주님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은 가톨릭 교회이고 매일미사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별도 없을 것입니다. 또 함께 살아가는 참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도반들보다 더 좋은 별도 없을 것입니다. 한두개의 별이 아니라 저 마음 하늘에는 참 무수히 빛나는 주님의 별들입니다.
희망의 순례 여정중인 희망의 순례자이자 구도자에게 주님을 가리키는 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활짝 열린 구도의 순례 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별따라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찾았던 이들은 먼 이방의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신비가 환히 계시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단 가톨릭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온세대, 온인류에게 활짝 열려있는 구원의 순례 여정을 상징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는 주님의 별,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별이, 희망의 별이, 진리의 별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 박사들이야말로 영원한 구도자,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10년 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 중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우리 각자 삶의 순례 여정은 죽어야 끝납니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순례 여정은 수년쯤 걸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아,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희망의 구도자요 순례자이자, 진리의 구도자요 순례자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구원은 평생 순례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 산전수전,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시련과 고난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을 고비도 도중하차할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막판에 한눈 팔다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 곤경에 처했지만 은총으로 별따라 베들레헴에 궁극의 목적지에 도착하니 참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묘사가 은혜롭습니다.
‘그리고 그 비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갔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행복합니다. 날마다의 미사전례를 통해 궁극의 목적지 도착을 앞당겨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전례중 여러분은 무슨 예물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알려드리겠습니다. 신망애(信望愛) 삶의 보물도 좋고 진선미(眞善美) 삶의 보물도 좋습니다. 있는대로 정성껏 봉헌하면 그 몇배로 더 축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성공적 순례 여정을 마치고 금의환향합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 순례여정은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시 평범한 일상에서 다시 시작된 내적 순례 여정이요 예전의 그들과는 판이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깊은 체험이 바탕이 됐기에 더욱 깊어졌을 내적 순례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이나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을 상징합니다. 제가 체험한바 평생 희망의 순례 여정중 주목하는바 네 공통적 요소입니다. 1.목적지, 2.이정표, 3.도반, 4,기도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목적지는 베들레헴이었고 이정표는 주님의 별, 그리고 도반들입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발타살, 카스발, 멜키올 세 도반의 동방박사들이요, 이들은 함께 하는 여정중 필시 기도도 바쳤을 것입니다.
제 산티아고 순례시 목적지는 산티아고 대성전이었고, 수백개의 이정표를 따라 갔으며, 두 도반이 있었고 때로 다양한 도반들도 함께 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에도 매일미사에 매일강론, 그리고 시간경도 도반들과 함께 바쳤습니다. 걸을 때는 묵주기도, 그리고 가장 많이 바쳤던 다음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힘차고 빨랐던 발걸음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 도반들은 희망의 이정표 역할도 했고 최상, 최고의 영원한 도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히 함께 계시는 주님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 이정표 따라 제대로 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으니 평생 도반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순례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더불어 수도형제들과의 제 수도순례여정은 죽어야 끝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도반인 수도형제들과 함께 하는 매일공동전례의 이정표 따라 죽어 주님의 집에 이를때까지 계속될 순례여정입니다.
참 좋은 수도 형제들은 도반들이 됨과 동시에 희망의 이정표 역할도 하니 성가정 수도공동생활의 축복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 수시로 확인하는 삶의 순례 여정중 시점(時點)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한 주님의 현역의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삶의 환상이나 허영,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던 내용입니다.
저로 말하면 늘 말하지만 하루로 하면 오후 4:30, 계절로 하면 초겨울 지금쯤 되어보이네요. 참으로 이런 자각이 깨어 환한 의식으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도반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며 하늘나라 천국의 영원한 선물 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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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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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
<또 하나의 성탄!>
오늘 복음(마태2,1-12)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공현대축일은 유다 베들레헴 그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그분의 신성(神性)이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고, 구세주의 탄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님공현대축일을 '또 하나의 주님성탄대축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려온 유다인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을 통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러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 표지입니다.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님을 만난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보물 상자를 열고 그들이 가져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이는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에 대한 감사예물'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감사예물로 바친 황금은 예수님이 '참임금'이심을, 유향은 예수님이 '참하느님'이심을, 몰약은 예수님이 '참사람'이심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3,5-6)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이를 약속의 공동 수혜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빵과 포도주의 형상인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탄생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경배하러 나갑시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예물을 드립시다!
말과 행동으로 감사예물을 드립시다!
세상의 빛이 되고, 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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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8pzsA5Hx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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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언제든지
열려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걸어온 길은
하느님 탄생을
기뻐하는
경배의
길이었습니다.
목적지 또한
이미 시작된
경배의
한 부분일뿐입니다.
저마다의
사연들을 안고
우리는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서로의 길이
우리에겐
선물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의 빛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빛을 향해
걸어 가고 있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선물은 이와 같이
가장 소중한 것을
내밀고
건네는
기쁨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삶을 우리들에게
건네십니다.
하느님 탄생을
뵈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됩니다.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에겐
끊어지지 않는
은총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참된 경배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에서
멀어질수록
하느님의
성탄에는
더욱 가까워집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서
머무시며
당신 탄생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는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살고 계시기에
선물은
구원이 되고
구원은 보편적인
사랑으로 드럽납니다.
힘찬 시작을
알리는 사랑은
이미 우리
길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쁘게 뵙고
기쁘게
내어드리는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경배해야 할
이유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삶을 사랑하게
하시는 주님께
온 마음으로
경배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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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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