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육군 8만이 도와줘도 끝내기 어려운 전쟁이었습니다.
오히려 조선 육군에 5만 정예병이 있었다면 전쟁은 명군 도움 없이도
빨리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죠.
게릴라로 왜군 발을 묶고 남해안으로 내몰순 있지만
그걸 바다로 내모는 것은 공성을 할 수 있는 정예파워이며.
그럴 파워가 조선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군을 경상도와 남해안가로 몰아냈음에도 전쟁은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료를 가지고 하고 싶은 얘기는.
조선 육군에 정예파워가 없었던 점이 의병과 수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길게 끌었다는 것입니다.
임란당시 조선의 정예파워 부재의 육군은
용호군, 응양군의 수도방어 정예병만 4만 이상을 보유한 고려와 확연히 비교 되는 것으로.
이는 대규모 전쟁에서 국가의 안전을 중국에 의지하려는 사대주의의 영향이 크고요.
반대로 문치군약의 시대에도 육군에 비해 수군만은 건재했던 것은.
태종때 쓰시마정벌은 몽고때 일본침략을 교훈삼아
명이 간섭하기 전에 때린다는 성격이 강했는데.
이처럼 수군은 왜구 정도는 명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잡는다는 생각하에서
꾸준히 키워졌던듯 합니다.
조선주변의 육지세력으로는 명, 여진뿐인데.
대규모 육군침략의 경우로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여진 침략뿐으로, 이때는 명의 힘을 빌리고.
(그런거 바라고 사대했던 것이겠죠)
해상의 침략은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수군의 유지.
이게 임란전까지 조선의 근본노선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개돼지도 군적에 올라와 있는데 전국에 십수만이 있었다는 공염불 외울 것도 없고요.
명나라가 한게 몇번의 승리밖에 없다 이런 소리가 정답일 수 없습니다.
사대하면서 명나라와 사이가 좋고, 여진은 아직 약한 상태에서
제3의 강한 육전상대가 있으리라는 예측을 못했기에.
조선중기 군대는 왜구 정도를 막기위한 왜구를 위한 군대였기에
어려운 전쟁이 된 것입니다.
당대 세계최강 군사력의 거란 10만대군(소배압군) 정도는 20만8천을 출전시켜 몰살시켜버린
고려시대의 육군 파워가 두고두고 아쉬워지는 임란때 조선육군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뭐요? 그래봐야 사대 잘하고 소중화 자처해도 고려보다 무역이 왕성하지 못했다인데. 무역하기위해서 철저하게 사대하고 조공했다면 고려는 뭐요? 고려가 조선처럼 중국에 엎드리지 않고도 무역은 더 잘했는데. 하는 말씀에 무슨 논리가 있오? 뭔 소리요? 사대 더 해서 뭘 얻었다는 것이오?
참고로 전쟁 개시 직후 대구에는 5만 병력이 모입니다 그리고 서애집과 쇄미록 같은데도 나오지만 전라도의 경우 용인에서 패한 6만의 군대 말고도 최원이 이끈 4만 병력이 나옵니다 충무공 장계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전라도만도 10만이군요 참고로 경상도의 경우 군무에 종사하는자가 20만이 넘는 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임란 이전에(물론 제대로 전투에 도움이되는 자가 적어서 문제지만)
글 제목이 뭡니까? 지금 군적 얘기하는게 아니라 정예병 얘기하는 겁니다. 개돼지도 올라온 군적 얘기가 아니고요. 상주에 5만이 아니라 10만이 모이면 뭐합니까? 서울에서 지휘관 안내려온다고 뿔불이 흩어져버리는 오합지졸이 전쟁에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와키자카 1600명 기습받고 흩어져버린 5만은 무슨 의미가 있고요. 정예병을 얘기하는겁니다. 당시 조선인구가 600만~1000만 선이라면 장정만 150만이 넘습니다. 이들을 군적에 다 올린들 제대로 나가 싸울 10만이 없는데 그 150만이 숫자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으?해서 몇만 모이면 뭐하냐고요. 1600에 깨지는데.
그리고 반박을 하려면 사료좀 내놔 보시죠??혹시 어디서 본 역사자료들만 믿고 저한테 논쟁을 하는 것입니까??그리고 유성룡보다 16세기의 상황을 더 잘아냐고 따졌는데 제가 참고한 자료들 대부분은 유성룡의 기록내지는 보고입니다 뭐 10만 얘기 나오자마자 이미 무시하고 나가는 것을 보면 참...조선군 편제와 임란직전 복무 숫자를 보면 저렇게 나옵니다 물론 전마 숫자가 저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웬만하면 다큐좀 보시죠. 유성룡 종손이 직접 나와서 1594년 시무차자 원본 넘기면서 기록이 나와있는 자리 찍어가며 화면에 원본 그대로 보여줍니다. 1594년에 보인까지 합쳐서 23000이라는데. 어디서 들은 풍월로 1594년에 122000이라 주장합니까? 출처가 어딥니까? 유성룡 종손이 책 들쳐가며 그 자리찍어서 나온 수치인데. 님이 더 정확합니까. 종손이 원서 들고 찍어준 자료가 더 정확합니까?
서애집 9권 서 총병 유정에게 주는 글을 보면 "대개 전라도의 여러 가지 군정(軍丁)을 호수로 계산하면 83,685명이고, 충청도에 40,530명이고, 경상도에 94,056명인데 이것은 평상시 정원입니다"이건 전쟁시를 기준으로 한 말이 아니라 평상시 동원 병력을 기준으로 말한 것입니다
유성룡님이 1594년에 쓰신 시무차자에 군적에 오른이 14만5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예병을 얘기를 해주세요. 경상도에 9만병력이 뭘 했습니까? 9만이 제대로 동원해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라면 왜 임란 최후의 전투인 가까운 울산성 치러갈때 1만만 딸랑 갑니까? 왜군이 각지 병력 모아서 진주성으로 10만 돌진할 때 왜 뒤에서 모두 구경만 했습니까. 제때 동원하기 힘든 그림속의 숫자 얘기 백날 떠들어서 뭐합니까. 낼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전투 벌어져도 동원 못하는 병력. 모래 호남의 관문이 날라갈 지언정 동원할 수 없는 숫자상의 병력. 그게 정예병입니까?
명은 조공 무역만 인정해서 조공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도 이런 식으로 떼돈 법니다. 또 조공 바치면 그것보다 많은 하사품이 나옵니다. 덕분에 정화의 원정이 중단된것도 이걸로 공물 바치는 나라가 늘어서... 재정부담이 팍팍 늘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하사품이 조공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뭐요? 그래봐야 사대 잘하고 소중화 자처해도 고려보다 무역이 왕성하지 못했다인데. 무역하기위해서 철저하게 사대하고 조공했다면 고려는 뭐요? 고려가 조선처럼 중국에 엎드리지 않고도 무역은 더 잘했는데. 하는 말씀에 무슨 논리가 있오? 뭔 소리요? 사대 더 해서 뭘 얻었다는 것이오?
참고로 전쟁 개시 직후 대구에는 5만 병력이 모입니다 그리고 서애집과 쇄미록 같은데도 나오지만 전라도의 경우 용인에서 패한 6만의 군대 말고도 최원이 이끈 4만 병력이 나옵니다 충무공 장계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전라도만도 10만이군요 참고로 경상도의 경우 군무에 종사하는자가 20만이 넘는 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임란 이전에(물론 제대로 전투에 도움이되는 자가 적어서 문제지만)
글 제목이 뭡니까? 지금 군적 얘기하는게 아니라 정예병 얘기하는 겁니다. 개돼지도 올라온 군적 얘기가 아니고요. 상주에 5만이 아니라 10만이 모이면 뭐합니까? 서울에서 지휘관 안내려온다고 뿔불이 흩어져버리는 오합지졸이 전쟁에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와키자카 1600명 기습받고 흩어져버린 5만은 무슨 의미가 있고요. 정예병을 얘기하는겁니다. 당시 조선인구가 600만~1000만 선이라면 장정만 150만이 넘습니다. 이들을 군적에 다 올린들 제대로 나가 싸울 10만이 없는데 그 150만이 숫자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으?해서 몇만 모이면 뭐하냐고요. 1600에 깨지는데.
모두가 용인전투 조선군을 5만이라 하는데. 6만은 어디 자료인가요? 밝혀주세요.
그리고 반박을 하려면 사료좀 내놔 보시죠??혹시 어디서 본 역사자료들만 믿고 저한테 논쟁을 하는 것입니까??그리고 유성룡보다 16세기의 상황을 더 잘아냐고 따졌는데 제가 참고한 자료들 대부분은 유성룡의 기록내지는 보고입니다 뭐 10만 얘기 나오자마자 이미 무시하고 나가는 것을 보면 참...조선군 편제와 임란직전 복무 숫자를 보면 저렇게 나옵니다 물론 전마 숫자가 저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웬만하면 다큐좀 보시죠. 유성룡 종손이 직접 나와서 1594년 시무차자 원본 넘기면서 기록이 나와있는 자리 찍어가며 화면에 원본 그대로 보여줍니다. 1594년에 보인까지 합쳐서 23000이라는데. 어디서 들은 풍월로 1594년에 122000이라 주장합니까? 출처가 어딥니까? 유성룡 종손이 책 들쳐가며 그 자리찍어서 나온 수치인데. 님이 더 정확합니까. 종손이 원서 들고 찍어준 자료가 더 정확합니까?
서애집 9권 서 총병 유정에게 주는 글을 보면 "대개 전라도의 여러 가지 군정(軍丁)을 호수로 계산하면 83,685명이고, 충청도에 40,530명이고, 경상도에 94,056명인데 이것은 평상시 정원입니다"이건 전쟁시를 기준으로 한 말이 아니라 평상시 동원 병력을 기준으로 말한 것입니다
유성룡님이 1594년에 쓰신 시무차자에 군적에 오른이 14만5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예병을 얘기를 해주세요. 경상도에 9만병력이 뭘 했습니까? 9만이 제대로 동원해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라면 왜 임란 최후의 전투인 가까운 울산성 치러갈때 1만만 딸랑 갑니까? 왜군이 각지 병력 모아서 진주성으로 10만 돌진할 때 왜 뒤에서 모두 구경만 했습니까. 제때 동원하기 힘든 그림속의 숫자 얘기 백날 떠들어서 뭐합니까. 낼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전투 벌어져도 동원 못하는 병력. 모래 호남의 관문이 날라갈 지언정 동원할 수 없는 숫자상의 병력. 그게 정예병입니까?
명은 조공 무역만 인정해서 조공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도 이런 식으로 떼돈 법니다. 또 조공 바치면 그것보다 많은 하사품이 나옵니다. 덕분에 정화의 원정이 중단된것도 이걸로 공물 바치는 나라가 늘어서... 재정부담이 팍팍 늘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하사품이 조공보다 많았습니다.
음냐... 대체적으로 전략님이 예로 드시는 임란말의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군의(의병포함) 상당수가 공중분해된 이후의 시기입니다. 임란 직전이나 임란초반과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여기엔 선조의 정치적 의도도 다분히 깔려 있습니다. 전후 책임소재를 둘러싼 완력이죠.
1594년 수치입니다. 임란말기는 아닙니다. 임란초기에 상황이 많이 달랐다는게 무슨 의미인지요.
다시 말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다큐" "테레비"를 토론중 증거롤 꺼내는건 자기 자신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짓, 즉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초딩짓' 이 돼겠습니다. 그당시 기록과 여러 상황과 장계를 비교해 보는게 중요합니다.
님은 자료나 가지고 있습니까. 걍 역스가 아니라 유성룡님 종손이 유성룡님 시무차자 원서를 들고 나와서 자리 지대루 찍어준 원본 기록입니다. 아는게 없고 들은게 없다면 나서지 말고 겸손이라도 하세요.
역스를 자료로 제출하는 것부터가 오류 입니다.;;;;; 제발.
시무차자가 무슨 책인지나 알고 오류를 들먹입니까? 오류라고 하려면 남보다 잘 알고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건 지 설명할 정도는 되야 하는데. 남들 논쟁한다고 모르면서 무조건 끼어보려는 근성이 참 안돼 보입니다. 스스로 지식이 빈걸 탓하세요.
2차때 수도털린건 절대 이야기 안하는 클라스!
합단 때 고려의 추태는 절대 이야기 안하는 클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