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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묵상글 ( 성령 강림 대축일. -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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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지금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내려오시면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찰까?
이것이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저에 대해 하는 성찰이고,
제가 우리 공동체들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나에게 내려오시길 바랄까?
우리 공동체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길 바라는 공동체일까?
우리는 영성 생활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고,
감히 영성 생활 공동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런데 영성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정신(spirit)을 사는 삶,
성령(Spirit)을 사는 삶이 아닙니까?
성인들 특히 프란치스코는 영을 많이 강조했고 성령으로 살았습니다.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이니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이니
기도와 헌신의 영(spirit of prayer and devotion)에 관하여 얘기했고,
영이 아니면 하느님 아버지도 성체 안의 주님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생애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으로 깨달았고, 충만했고, 이끌렸습니다.
육의 영이나 심지어 악의 영에 이끌리는 우리와 그래서 달랐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육의 영 또는 더러운 영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세상 욕망과 세상 욕심이 많고,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 떼 속에서라도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떠날 줄 알아야 하는데
훌훌 떠날 줄 모르고 더럽게 집착하고 안주합니다.
또 악의 영에 이끌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정도를 넘어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인 한 존재를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일치의 정신 또는 사랑과 일치의 영은 아니 계시고,
미움과 분열과 파괴의 영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집을 나왔던 악령이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은 깨끗이 비어 있었고,
그래서 일곱 마리의 악령을 더 데려왔다는 비유와 같은 겁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성령께서 머물 곳이 우리 안에 없기도 하지만
성령을 모셔 들이지 않았기에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설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치를 갈망해야 합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은 증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열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잘난 체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덕이 악습을 몰아내게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動搖)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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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 아르스에 위치한 작은 시골 교회 사제였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 본당에 다니는 한 자매님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얼마 전에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안네 성인은 “남편은 구원받았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인, 남편이 지금 연옥에 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리 난간에서 물로 떨어지는 순간에 참회했어요.”
자매님은 성인의 말씀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지금을 더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씀은 단순히 이 자매님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무한의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 안에서 회개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던 이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어떤 자살자의 장례 미사를 부정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것인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측면에서는 ‘괘씸하고 못된 놈’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며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빨리 하느님 나라 안에서 당신과 살도록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함을, 또 그 사랑에 온 희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사랑이기에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령 강림을 통해 그 사랑이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통해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9장에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소년의 아버지가 “주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 완성을 위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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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로버트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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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고 함께 현존하시며 동행하시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고요한 모습’, 곧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곧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협력자’이시오 우리의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 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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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은 ‘보호자’(파라클래토스)라는 뜻과 함께 ‘변호자’, ‘협력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증언할 때 지혜로써 변호자가 되어주시고, 직무를 감당할 때 능력으로서 협조자가 되어주시며 증거적 삶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시는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 것을 우선하던 마음을 천상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험한 유혹에도 견디게 합니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미사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만큼 그에 걸맞은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혜, 통찰(깨달음), 의견(일깨움),용기(굳셈), 지식(앎), 공경(효경), 경외(두려움)을(이사11장 참조) 얘기하고, 갈라디아서에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아주 다양하고 오만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고 하는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참례를 그저 의무로만 했고, 짧은 미사를 가느라 어린이 미사에만 갔는데 이제는 미사에 맛 들여 매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의 눈물도 흘립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는데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주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 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래토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 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언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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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가장 연장이신 분이 87세 이었습니다. 가장 젊으신 분이 77세 이었습니다. 77세 회장님이 막내로서 역할을 다 해 주었습니다. 음식도 주문하고, 술도 주문해 주었습니다. 77세면 어디 가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인데, 그날은 형님들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저는 전임 회장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갔습니다. 경험과 연륜이 높으신 회장님들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경청의 자리였지만, 어찌 보면 제가 면접을 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회장님들은 제게 몇 가지 질문을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이 가지고 있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는 단기, 중기, 장기의 플랜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희망이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와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에서 멋진 사제들을 보내 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와 부주임 신부님은 서울대교구에서 최상급의 사제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본당 교우들의 전체 세대수를 파악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구역미사를 함께 하고, 다음에는 가정 방문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당을 지켜 오신 분들에게 새로 온 신자들이 조금을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지순례도 가고, 본당 체육대회도 하고, 전 신자 여름 캠프도 가고, 송년모임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의 주소록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본당 사제로 있을 때는 ‘신자수첩’을 만들었습니다. 신자수쳡에는 본당의 사목방침을 수록했습니다. 본당의 조직도를 넣었습니다. 기도문을 수록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넣었습니다. 전임 사목회장님들과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한 것이었습니다. 87세의 연세에도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은 20대의 청년과 같았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하늘에서 성령의 은사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서 성령 7은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60을 갓 넘은 사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지켜왔던 본당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희망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오랜 이민 생활에서 축적된 삶의 지혜와 용기를 보았습니다. 77세 막내 회장님께서 이런 모임을 자주 갖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부부동반으로 만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굳이 저녁시간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굳이 예루살렘이 아니어도 되듯이, 만남의 시간이 굳이 저녁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의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만남을 통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의 진정한 의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강림의 커다란 의미는 ‘하나 됨’이라 생각합니다. 분열과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 신분과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사도들의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는 나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관계가 분노와 미움, 욕심과 질투입니까? 아니면 평화와 기쁨, 용서와 사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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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 생일이 언제일까요? 12월 25일. 그러면 교회의 생일은 언제일까요? 바로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성령 강림으로 인해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협조자’라고 합니다. ‘협조자’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협조자는 누군가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협조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지요. 꼭 슈퍼맨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성령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복음 선포가 시작된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복음 선포가 무엇일까요? 예수 믿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선포입니까? 믿음 천구, 불신 지옥. 이러면 선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선포가 아닙니다. 복음 선포는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러면 나만 잘 살고, 나만 기도 열심히 하면 되겠네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등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누구의 몫일까요? 신부인 제 몫입니까? 그렇기도 합니다만 여러분의 몫이기도 합니다. 세례 때 여러분은 약속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대로 살겠다는 말이고 동시에 복음을 드러내겠다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려 할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고, 사랑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두렵기도 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이 흔들릴 때, 지치고 쓰러질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가만히 나를 돌아보고 사랑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성령께 기도합시다.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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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이란
제가 있는 곳은 성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지도 있고 피정 센터도 있고 봉안당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조율하는 직원분들도 많습니다.
교우분들에게 이곳은 성지와 피정 센터와 봉안당의 역할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직장인 것입니다.
직장은 출근과 퇴근이 있습니다.
특히 퇴근은 늘 즐겁습니다.
저는 퇴근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퇴근이란 일을 두고 집에 가는 것이다.
퇴근은 일을 집에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퇴근은 일을 모두 마친 뒤 집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일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퇴근은 일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고 갈 줄 알아야 충분한 힘으로 다시 돌아와 또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퇴근하세요. 일은 두고 가세요. 잘 충전하고 다시 또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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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진실된 사과’와 ‘용서’
오늘 주님께서는 ‘보내다’와 ‘용서’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총 ‘보내다’는 곧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는 또한 너희를 보낸다."
두렵지만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것, 목적 없는 방황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보내려는 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 스스로를 가둔 좁은 문을 열어 주시고, 나의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영혼을 깨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며 ‘용서’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용서와 화해’, 모두가 그 필요성을 공감하지만 가장 실천하기 힘든 숙제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에는 언제나 불일치와 갈등이 존재합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친구를 배제한다면 결국 내 옆에는 어떤 친구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지금 이 시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입니다.
‘진실된 사과’와 ‘용서’
말로는 용서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실수를 알면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더구나 사과할 용기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함께 하실 때만이 ‘진실된 사과’와 ‘용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활짝 문을 여십시오. 모든 사람이 내게 다가올 수 있도록 문을 여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위해 문을 여십시오.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없는 삶은 간난하고 죽어가는 삶과 다름없습니다. 이기적인 영혼은 오염된 웅덩이에 파묻힌 영혼과 다름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보내다’ 곧 ‘-가다’는 의미는 단지 미사에 참석하는 것뿐 아니라 나 보다 나약한 사람들,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 나를 해하는 사람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용서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움은 영혼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 새로움의 실천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성령의 은총을 받고 주님의 계획에 함께 동참하여 보십시오.
성령의 하느님,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다른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 나를 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2. 다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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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 충만한 삶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습니다. 길을 찾습니다. 빛을 찾습니다. 희망의 길,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의 빛을 찾아 새벽 강론 쓰기전 세상 소식을 대략 일별해보기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나 대부분 어두운 소식들입니다. 지극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교황님의 홈페이지 뉴스를 보며 희망을 발견합니다. 어제는 교황님이 이태리의 베로나 도시를 방문하여 말씀하신 여러 내용들의 제목이 신선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예수님과 함께 파도를 거슬러 앞으로 나가십시오.”
베로나의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미래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베로나 시민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그리고 타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눕시다.”
베로나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고백성사가 고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베로나의 사제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온전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성령충만한 삶을 청하겠습니까?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성령뿐입니다. 사랑의 성령, 생명의 성령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마름을,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이어지는 성령강림 부속가 기도는 얼마나 좋았는지요! 앞부분만 잠시 인용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없는 이의 아버지, 은혜를 주시는 이, 마음들의 빛이여.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흐뭇한 안식이여”
참 좋은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목마른, 성령에 배고픈 우리들입니다. 도저히 성령이 아니곤 해결될 수 없는 목마름, 배고픔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임을 배웁니다. 주목할 것은 공동체에 주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인 듯 하나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둘의 독서와 복음을 보세요. 모두가 공동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누가 성령의 사람입니까?
첫째,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오순절이 되어 사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며, 불꽃 모양으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습니다. 실감나게 묘사되는 성령강림입니다. 놀라운 것은 불통의 공동체가 소통과 더불어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마침내 모여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성령입니다. 이래서 공동체가 중요한 행사나 회의때에는 “오소서 성령이여” 성가 142장이나 494장을 부르기도합니다. 공동체가 바치는 참 좋은 기도입니다. 오늘 시간되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비상한 성령강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을 잘 아시는 주님은 참으로 겸손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성령을 선물하시어 불통과 분열의 공동체를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로 바꿔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분열의 사람이 아니라 일치의 사람입니다.
둘째, “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여럿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요, 직분은 여럿이지만 같은 주님이요, 활동은 여럿이지만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요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공동체를,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을 위해 쓰라 선물로 받은 은사임을 깨닫는 다면 자랑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요 교만은커녕 저절로 겸손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은사와 공동선의 사람이자 동시에 감사와 겸손의 사람입니다. 감사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셋째,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파스카 주님이,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복음을 보십시오.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은 공동체 가운데 오시어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기쁨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이런 주님의 평화와 기쁨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빼앗아 갈수도 뻬앗아 올수도 없는 평화와 기쁨이요 이는 순전히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넷째,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동시에 파견하시며, 또 성령도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공동체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부단히 평화와 용서의 사도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선물이요 과제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과제입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1.‘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2.‘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3.‘평화의 기쁨의 사람’입니다.
4.‘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성령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고,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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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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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성령강림 대축일은 예수 부활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로써 교회가 설립되었고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얼’, ‘숨결’, 바람’, ‘거룩한 영’ 등으로 표현됩니다. 성령은 생기를 주는 물,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힘, ‘하느님의 영’이라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구원을 가져도 줄 수 있는 특은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은혜는 백성들을 일으키는 힘과 예언의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그후 신약시대의 은혜는 성령이시며 견진성사로 특은을 받습니다.
‘협조자’, ‘보호자’, ‘위로자’의 뜻을 지닌 파라클리토이신 성령은 인간의 마음안에 참 평화와 화목을 불어 넣어 주시고 지혜를 주시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와 사랑을 주십니다.
성령은 새생활, 즉 사랑의 생활, 평화의 생활, 능력의 생활을 만드는 동력입니다. 마치 전기가 TV화면에 들어가면 그림을, 냉장고에 들어가면 얼음을, 에어컨에 들어가면 찬 바람을, 온풍기에 들어가면 열을, 제습기에 들어가면 건조한 공기를, 용접기에 들어가면 접착을, 형광등에 들어가면 빛을 만들어 내는 여러가지 현상을 조성하는 힘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생활에 나타내는 하느님의 활동이요, 인간안에 꿈틀거리는 신의 정신작용, 신풍, 신바람입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는 확증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도 사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성의 도움 없이는 알기 힘든 복잡성을 지닙니다. 사랑만 있고 이성없는 결혼이란 위험한 결합이듯, 단순한 신앙만으로 성령취득된 주장도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을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을 무당, 박수 신접자등이 내리는 잡된 신령이나 귀신과 혼돈하는 일이 이스라엘에도 많았기에 엄중한 경계를 강조하였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 혹은 사람의 심령에 담겨 있는 마음의 기운, 즉 사람의 주관이나 생각속에 작동하는 모종의 기운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란 그의 사고방식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음받은 상태입니다.
물이 낮은 계곡에 고이듯 성령의 은총도 겸손한 영혼 안에 고입니다. 그리고 물이 비탈의 경사가 급할수록 더 빨리 쏟아져 내리듯 마음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 더 쉽사리 주님께 다가가 그분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받습니다.
성령으로 인도되는 사람에게는 세속이 없는 것 같고, 올바른 생각을 하며 자신 안에서 갖가지 행복을 맛보고,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성령은 우리가 얻어맞아 완전히 부서질 때 우리 스스로를 쌓아올린 담들, 상처들, 업적들이 부서져 무너질 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되새기며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또한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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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양떼 속에 나타나신 성체
독일-1516년
퀼른 (Köln) 근처에 있는 렐링하우젠(Rellinghausen)의 나이 많은 주임신부가 1516년 7월 25일에 새벽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순간 그는 감실이 부숴져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도둑이 들어와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합을 훔쳐간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 경건한 지방에서는 결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러한 범죄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
신부와 신자들의 슬픔은 매우 컸다. 사람들은 성당으로 급히 몰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저지른 이 커다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열렬히 기도하였다. 또한 모두들 믿음에 가득차서 그 잃어버린 성체를 바로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증거나 표시를 내려 달라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하느님께 드리는 이 공동의 기도는 기적으로 그 응답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바로 1516년 7월 26일에 한 젊은 양치기가 성당으로 달려와 성체를 찾았다고 전하였다. 아침에 그가 양떼를 목장으로 몰고 갔을 때 양치기는 그곳에서 놀랍게도 양들이 숲속 깊은데로 모여들더니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방울로 불러도 매질을 해도 평소에 그렇게 온순했던 양들을 더 이상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이 양치기가 그 수풀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신앙심이 없는 도둑이 낮에 이곳에다 버렸던 성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곧바로 주임신부와 온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를 따라 목장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어린 양들이 경배를 드리는 듯 그들의 창조주를 에워싸고 있었다.(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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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성령 강림 대축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부활 시기 내내 봉독된 요한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견주어 ‘부활 사건’을 길게 서술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을 통하여 또 다른 단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됨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서의 성령 강림은 부활과 성령을 함께 연결시켜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의 ‘숨’(영)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됨을 선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는 성령 강림이 오순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성령 강림이 부활의 직접적 선물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새 창조의 특성이 소통과 일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이들이 마치 하나의 언어를 쓰듯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데, 이는 소통과 일치야말로 성령의 일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임을 표명합니다.
제2독서는 언어뿐 아니라 각자의 은사와 직분 그리고 활동이 다르지만, 교회 구성원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룸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는 소통과 일치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실체인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피폐하게 하는 것은 오해와 불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모욕과 비난, 굴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참된 소통과 이해, 포용에서 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 말씀들은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소통과 이해, 그로 말미암은 일치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먼저 소통과 이해가 보장되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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