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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남북으로 펼쳐지는 남해 바다의 조망이 일망무제..
거기에다!
암릉미가 곁들여진 산길을 걸음서
유배문학관이 자리하는 고장의 각별한 느낌까지 함께한 현장에서'
머문 하루 餘滴 ▣
☆ 일시 : 2024년 6월 6일.
☆ 산행코스 : 남해 외금마을~괴음산~송등산~납산~돗틀봉~돗틀바위~용문사~서포 문학공원~미국마을.
☆ 산행거리 : 14km.
코끼리마늘은 백합목 백합과에 속하는 커다란 구근 작물로 양파와 비슷한 맛이 나며,
일반 마늘보다 7∼10배 이상 크기가 커 ‘점보’, ‘대왕’, ‘왕 마늘’ 이라고도 불린다.
효능도 뛰어나 자양 강장, 근육 증강 및 암 예방 효과가 있는 스코르디닌(scordinin)의 함량이
일반 마늘보다 두 배 이상 많으며, 알리신 함량 또한 높아 살균 및 항균 작용은 물론
혈액 순환, 소화 작용, 당뇨병 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엔 '보랏빛 향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음서 경관작물로여러 지자체에서 야심차게 재배하고 있는 바!
대표적으로 강진 부흥마을과 완도 청산도에 가면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외금마을 복지회관을 지나 봉성마을방향의 임도를 따라가 '떡고개(남해지맥)'를 만나는 루트로 진행하지 않고
목장(남해군한우혈통유통단지)으로 향하는 임도길로 진행하다 되돌아와서 임도길을 이용했다.
그 길(목장) 역시나 산악회에서 가끔씩 이용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남해군 서면 연죽리에 위치하며 주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며 남해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동쪽은 남해읍, 북쪽은 고현면과 경계를 이룬다.
망운산(望雲山)은 구름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인데
주변 일대 운해(雲海)가 자주 형성되기 때문이다.
운해가 자주 발생하는 시기에는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정상에는 송신철탑이 있으며 노구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있기 때문에
자동차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망운산은 남해군 서쪽에 자리하며 남해 일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서 북쪽자락으로 화방사가 있고 남쪽으로는 용두봉(709m)과 학성봉(615m), 물야산(411.8m)으로 이어진다.
정상에서는 한려수도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며 북쪽 방면으로는 지리산 천왕봉과 노고단, 반야봉 등이 조망된다.
괴음산의 유래는 알 수가 없으나
한자를 풀이해 보면 '홰나무 괴(槐), 그늘 음(陰)' 자로 '홰나무의 그늘로 이뤄진 산'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만큼 홰나무가 많았었는지 또는 고령의 홰나무가 있었던 산인지는 알 수가 없다.
홰나무는 괴화(槐花)나무로 표기하는데 발음은 중국발음과 유사한 회화로 부르게되었다.
홰나무를 뜻하는 한자인 '槐'(괴)자는 귀신과 나무를 합쳐서 만든 글자이다.
회화나무가 사람이 사는 집에 많이 심은 것은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다.
그리고 서원이나 향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회화나무를 심어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 출처_네이버 백과 -
경상남도 남해군의 남쪽 남면 당항리 마을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617m).
북쪽 괴음산에서 남쪽으로 이동면 용소리와 남면 당항리로 이어지는 산줄기 중간에 있다.
『광여도』에 고동산 선재봉산(顧東山 船材封山)으로 처음 기록되며,
『동여도』에 봉산(封山), 『대동방여전도』에 송봉산(松封山)이 표기되어 있다.
봉산이란 숙종 이후 전선이나 조운선의 선재를 조달하기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한 국용 목재 생산처이다.
선재로 소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송봉산이란 명칭도 사용되었다.
이 산등성이에 소나무가 많이 서 있는 것을 어느 도사가 보고
산 이름을 송등산(松登山)이라 지어주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꾀꼬리 앵(鶯)자에 물 강(江)자를 쓰면서
'비 내리는 밤에 꾀꼬리 울음소리가 나고
꾀꼬리 눈물 같은 빗물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로 흘러내렸다고 전해지며,
"꾀꼬리의 눈물바다'로 불리우기도 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다.
'호구산 봉수대는 동쪽으로는 남해 금산 봉수에 응했고,
남쪽으로는 설흘산 봉수에 응했으며,
아울러 서쪽으로는 남해 이동면의 본 현에 보고하고 끝난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해현 산천조에 기록되어 있다.
납산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원(猿)으로 쓰는 바!
원숭이 원(猿)자와 원숭이의 옛말인 '납'자를 사용한 이유는
이 산을 북쪽에서 바라봤을 때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 봉우리에서 용문사 쪽으로 뻗은 지맥의 형태가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이라해서 호구(虎丘)산이라고도 불리운다
한자로 원숭이 원(猿)의 구성을 보면,
긴팔원숭이를 가리키나 흔히 일반적인 원숭이의 뜻으로 통용된다.
개 견(犬)과 옷 길 원(袁)으로 이루어지기에 그러하다.
형성 글자로 털이 덮인 긴 팔을 지닌 원숭이를 이른다.
옛말에서는 원숭이를 ‘납’ 이라 한다.
근대어로 오면서 납 혹은 나비가 보인다.
그럼 옛말의 ‘납’의 어원은 무엇인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올려놓는 나무를 도리라 하는바, 도리를 '납' 이라 한다.
그러니 높이 달려 있는 나무를 일컫는다.
이르자면 높은 나무에 잘 매달리는 짐승을 '납'이라 하고 거기에 재다,
재빠르다의 뜻을 더하여 ‘나비’라 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잔나비’는 오늘날에도 속담 등에서 원숭이란 말을 대신하여 널리 쓰인다.
생김새가 마치 배의 노(櫓)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노도는
(지역민들은 삿갓을 닮았다고 하여 '삿갓섬'으로 부른다)
남해군의 남쪽 상주면 양아리 앵강만에 있는 유인도이다.
벽련마을 서남쪽에 있는 섬으로 방패처럼 파도와 해적을 막아 주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도서이다.
조선 중기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한글 소설문학의 선구자인 서포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유배 와서
56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살았던 섬이다.
그는 이 섬에서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과 정경부인 윤씨를 위해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임진성은 통일신라시대 전후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남해도의 평산포 북쪽에 뻗은 낮은 구릉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발굴 조사에서 통일신라 전후 성벽의 축조 기법이 확인되었고,
성벽과 건물지, 집수지, 다수의 투석용 몽돌이 확인되었다.
성내 건물지, 집수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전후 시기의 토기편과 기와편, 청자편,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진성은 통일신라시대 전후에 왜구에 대비하여 처음 쌓은 것을
고려·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의 축조 수법과 출토 유물의 특징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 전후 이곳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근 상가리 마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성은 민보성(民堡城)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에 왜적을 막기 위하여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쌓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용문사부도군은 모두 조선 후기의 석종형부도 형태로서,
12기의 각 부도마다 승려들의 당호가 음각되어 있어
경남지역 석종형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5대 지장기도도량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 연천 심원사, 완주 송광사, 서산 개심사, 그리고 남해 용문사 이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육도(六道:지옥·아귀·축생·수라·하늘·인간세상)를 윤회하면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해준다는 구원한다는 보살.
대한불교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과 戒律을 관장하는 전계대화상을 지낸 쌍계총림 방장이셨던
고산당(杲山堂) 혜원대종사(慧元大宗師)!
포교에 힘쓰면서도 평생 수행자의 강직함을 지켜 ‘지리산의 무쇠소’로 불렸다.
한 번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섬이 없었고,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길 때는 단호히 거부해 붙여진 별칭이었다.
1998년 제29대 총무원장에 선출됐지만 이후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자
홀연히 자리를 떠나 주변을 놀라게 했다.
經律論 삼장에 두루 능한 종단의 대표적 원로로 수행과 함께
평생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禪農一致의 모범이 됐다.
쌍계사에 따르면 ‘봄이 오니 만물은 살아 약동하는데 가을이 오면 거두어들여 다음 시기를 기다리네.
나의 일생은 허깨비 일과 같아서 오늘 아침에 거두어들여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2021년 1월 23일 경남 하동 쌍계사에서 속랍 88세를 일기로 원적에 들었다.
입구에 작은 자유의 여신상이 눈길을 끄는 이곳은
독일마을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살던 교포들이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호구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대 중반부터 조성되었다고 한다.
독일마을에 비해 비교적 수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메타세쿼이아 길과 1950년대 미국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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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섬산행 이번트을 계속 이어가시는 유대장님 !
이번은 남해지맥자락의 크고작은 산들을 두루 산행하시면서 바닷뷰가 펼쳐져 조망도 넘좋으시고 큰더위도 없으신것 같아서 넘
힐링산행으로 마감 하신것 같습니다
마지막에는 남해의 독일마을이 아닌 미국마을도 다녀오시고 멋진하루을 장식 하신것 같습니다
산행하신 동안의 사진속의
비경과 풍광들 잘봤습니다
연하산방에선 홀로 다녀온 섬테마를
長文의 댓글로 함께해주시는 동부능선 대장님!
그저 감사드리며^^
조만간에
동행하는 날을 엮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