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숭실대학교 운동장. 70년대 차범근, 허정무와 함께 이름을 날렸던 왕년의 축구스타 신현호(49) 숭실대 축구부 감독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린다. 광문고교와의 연습시합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점잖게 수인사를 나눴는데 사람이 바뀌었다 싶을 정도로 ‘다혈질’이 터져나온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위치선정을 잘못한 선수들에게는 벼락 같은 호통이 날아든다. 경기상황을 주시하는 가운데에도 유종희(33) 코치에게 쉴 새 없이 주문을 던진다.
오후 2시. 초여름이라지만 벌써 30도를 웃도는 더위. 운동장의 지열과 선수들이 뿜어내는 체열이 더해져 이곳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찜통이다.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10여 통의 이온음료는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모두 동이 났다. 선수들은 아예 아이스박스를 세수대야 삼아 머리를 담근 채 흔들어 댄다. 때때로 ‘맨땅’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이들의 젖은 머리에 내려앉았다. 선수들은 가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이내 감독과 코치의 지적사항을 말없이 듣고 있다.
“○○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안 되면 디펜스 때 머리라도 디밀어야 하는 것 아니야?”
“….”
너 같은 새끼가 무슨 뽈을 차
요즘은 7월 전국체전을 앞두고 서서히 훈련강도를 높여가야 할 시점이지만 오늘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경상계열 단과대의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운동장이 하나뿐인 처지라 학교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날 훈련은 뒤로 밀린다. 요즘에야 흔치 않은 일이지만 과거엔 운동장 사용을 두고 일반 학생들과 축구부 간의 ‘불상사’도 빈번했다. 그럼에도 숭실대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운동부가 축구부 하나뿐이므로 학교측의 지원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타대학의 경우 정규 멤버를 제외하고는 선수들이 학비를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학비가 전액 면제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운동장 사용이 여의치 않은 오늘은 가볍게 몸을 푼 후 50미터 전력질주에 들어간다. 가뿐하게(?) 45회만 왕복. 매번 7초 안에 들어와야 한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차는 듯한데 선수 하나가 이 정도는 ‘체조’라며 웃는다. 50미터 왕복이 끝난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엔 2백 미터 왕복. 구리고교 견습생 하나가 선배들의 연습량을 따라가지 못해 혼쭐이 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질비질 흐르는데 골대 앞에선 온몸을 감싸는 두꺼운 골키퍼 유니폼을 입은 김수연(4학년), 김민규(2학년) 선수가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공을 막는 훈련 중이다. 맨땅에 넘어질 때 충격이 만만치 않다. 모래사장이라도 작게 만들어달라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한 번 쓰러졌다 일어날 때마다 어지러운 듯 공을 잡고 멍하니 웅크리고 있다. 낫소 축구공 위로 땀이 뚝뚝 떨어진다.
“너 같은 새끼가 무슨 뽈을 찬다고 그래?”
오후 훈련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유종희 코치의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선수들의 훈련태도가 느슨하다는 것이다. 뙤약볕 아래에서 주구장창 뛰기만 해야 하는 선수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잔디구장 하나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우리나라의 축구선수들이 할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일한’ 훈련은 체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땅이 나쁘니까 자꾸 체력이 강조될 수 밖에요.”
잔디구장은 많은 대학축구 선수들에게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도화성(4학년) 주장은 “전국대회 때 4강에나 들어야 잔디구장에서 시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평생 잔디구장 한 번 밟지 못하고 졸업하는 대학 선수들이 대부분”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월드컵이 끝나면 대학선수들도 마음껏 잔디경기장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단다. 오히려 1인당 2천1백 원씩 내고 2시간 동안 사용하고 있는 효창운동장이나 무료로 개방해 달란다. 무슨 당구장도 아니고, 참내.
숭실대학교는 축구를 잘하기로 손꼽히는 대학 중 하나다. 지난달 울산에서 열렸던 ‘힘멜코리아배’ 전국대학축구대회에서 우승했을 정도다. 그러나 숭실대가 ‘전통의’ 축구명문은 아니다. 이번 우승이 꼭 10년 만의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고-연대로 집약되는 ‘축구명문’의 틈바구니 속에 타학교가 비집고 나와 우승컵을 안은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도연 선수의 죽음, 그리고 우승
하지만 이 우승의 환호 뒤에는 ‘이름 없이’ 명을 달리한 한 선수의 죽음이 있었다. 미드필더 고 김도연(20) 선수. 지난 4월 강원도 속초에서는 봄철대학축구연맹전이 열렸다. 축구계가 온통 ‘월드컵’ 이야기로 난리법석을 치는 가운데, ‘언제나 그렇듯’ 관중도 없이 쓸쓸하게 치러진 대회였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지난 4월 17일. 조선대와의 조별 예선전이 치러진 날이었다. 이날의 운동장 사정에 대해 유 코치는 “운동장이 아니라 완전히 자갈밭”이었다며 울분을 토한다.
“전반전이 끝나고 보니까 선수들이 많이 다쳤더라고요. ‘너 왜 그러냐, 태클했냐’ 물었더니 ‘아까 넘어졌잖아요’ 그러는 겁니다. 그런 데서 어떻게 시합을 합니까. 황사바람도 엄청났어요. 공을 차면 되돌아올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후반 23분. 교체선수로 투입된 김도연 선수가 공중볼을 다투다 충격을 받았고 곧 쓰러졌다. 그러나 이때 경기장엔 구급차도 간호사도 없었다. 간호사는 사고 직전 빈혈로 쓰러졌고 구급차는 간호사를 싣고 사라진 상황이었다. 소방서 구급차가 긴급출동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열악한 운동장 조건, 무리한 대회운영과 부실한 사고대비가 부른 ‘타살’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대회는 중단됐지만 언론은 이를 외면했다. 숭실대 선수들은 “월드컵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달 후 숭실대 축구부는 “도연이 몫까지 뛰자”는 투혼으로 마침내 감격의 우승을 일궈냈다. 이 ‘눈물겨운 논픽션’이 몇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국내 축구사상 최초로 발생한 경기 중 선수 ‘사망사건’은 결국 그렇게 잊혀지고 말았다.
열악한 운동장 조건은 수많은 부상선수를 양산하는 데도 한몫한다. 정명진(4학년) 선수는 발목 부상으로 6주 진단을 받고 재활훈련 중이다. 벌써 14년째 축구를 해온 그는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고교 3학년 때는 허리와 무릎 부상으로 유급까지 해야 했다. 지금까지 큰 수술만 두 번, 손가락 발가락은 벌써 숱하게 망가져 왔다.
“고등학교 때 다친 데 대학 와서 또 다치고 하면서 고질적인 병으로 굳어가는 거예요. 다 낫고 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지요. 지금 한창 뛰어야 할 4학년인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부상 선수는 코칭 스태프에게도 큰 걱정거리다. 숭실대는 현재 5명의 부상 선수 가운데 주전이 셋인데 이들을 그냥 쉬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유 코치는 가슴이 아프다.
“아파서 경기 못하겠다는 녀석 발로 한 대 뻥 차고 뒈지려면 운동장에서 뒈져라 그럽니다. 저도 명색이 지도자인데 가슴이 왜 안 아프겠어요? 하지만 4학년들은 진로문제 때문에라도 무조건 뛰어야 해요.”
그런가 하면 이런 경우도 있다. 아프면서도 끝까지 경기에 나가겠다고 우기는 일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아픈 다리를 멀쩡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기가 엉망이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급기야 코치가 “너 아파, 안 아파? 너 하나 때문에 다른 애들이 다 죽어야 돼?”라며 다그쳐도 괜찮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다. 허나 이 단말마의 ‘플라시보 효과’는 끝내 선수를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이끌고 만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악한 운동환경보다 더 열악한 것은 이들의 미래일 것이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이들의 장래는 무모하고 불투명하다. 이들은 ‘최고’였다. 처음 공을 찼던 그날 이후 이들은 내내 자신이 속한 팀의 ‘스타 플레이어’였다. 이미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쳐 대학 문을 뚫고 들어간 만큼 이제 프로 선수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그건 착각이었다. 전국 50여 개 대학의 축구선수들 중에서 프로무대에 설 수 있는 인원은 해마다 많아야 20명 안팎이다. 팀 당 채 한 명도 어려운 실정이다. 프로구단이 좀더 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국내 프로축구단이 모두 10개 팀인 상황에서 프로야구단이 8개 팀, 선수인원이 적은 프로농구단이 8개 팀인 점을 감안하면 더 이상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축구 말고는 길이 없는 이들
혹자는 “사법시험 준비한다고 모두 법관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며 ‘게임의 법칙’을 내세우지만 이건 애초부터 공정한 조건이 아니다. 이들은 축구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철들기 전부터 공만 차 왔고 평생 축구 말고는 생각해본 것이 없었다.
지방 모 대학 축구부 출신의 박 아무씨(28). 그는 대학에서 촉망받는 축구 선수였다. 비록 썩 빼어난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신입생 때부터 주전자리를 꿰차고 지역에선 제법 손꼽히는 선수로 통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축구인생에 회의를 갖게 된 것은 2학년 겨울 무렵이었다. 날고 기어봐야 자신의 학교까지는 스카우터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술, 담배를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이러다 축구밖에 모르는 놈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되더라고요. 얼마 안 돼서 무릎에 물까지 차더라고요. 최악이었죠.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헤어지자는 거예요. 그러다 그냥 휴학계를 내고 공익요원으로 입대했죠. 그리곤 끝났죠. 지금은 후회도 많이 되지만요.”
축구를 그만두고 이일 저일 손대 봤지만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직 젊은 나이라며 위안을 삼고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방황’밖에는 해답이 없는 ‘그의 20대’가 아닐까. 기자는 4학년 주전 골키퍼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당장 진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그에게 프로에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의외로 대답은 담담했다.
“안 되면 실업팀이라도 가야죠. 배운 게 없으니까 다른 일도 못하고 공부랑 좀 병행을 했어야 했는데…. 답답하죠. 운동 그만두면 다 막노동하고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안 좋은 길로 빠져들더라고요. 안타까워요. 지금까지 투자한 게 얼마인데….”
실업팀의 사정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평생직장 개념’으로 운동선수를 뽑았던 과거와 달리 IMF 이후에는 ‘1년 계약직’으로 바뀌었다. 이를테면 ‘비정규 노동자’인 셈이다. 유 코치 역시 젊은 시절 잠시 축구를 떠나 일반기업체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좋았던 경험”이라고 돌이키지만 그는 결국 다시 축구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아무도 일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울었다니까요. 부장이 와서 ‘야, 너 무역학과 출신인데 무역에 대해 아는 게 뭐야’ 그래요. 그래서 사고 파는 것 아닙니까 그랬죠. 나중에는 우리 회사에서 일 잘 배운 표본이라며 신입사원 교육 때 앞에 나가 이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잘 다니다가 과장이 운동한 놈들 운운하는 바람에 욱해서 때려치웠지만.”
2006년 월드컵은 없다
이런 현실에 대해 신현호 감독은 사회체육의 저변확대를 강조한다.
“사회체육이 활성화되면 어렸을 때는 축구를 즐기고 놀다가 재능 있는 애들이 차차 위로 올라가면서 직업축구인으로 태어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프로페셔널이에요. 공부 포기하고 온 인생을 축구에 걸었다가 실패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문제는 다시 유소년 축구의 체질이 개선되지 않는 한 우리 축구의 미래가 없다는 ‘확신’으로 되돌아온다. 신 감독은 ‘조급함’이 ‘조로증에 걸린 축구선수’를 만들어내는 현실을 개탄한다.
“유명한 프로선수들이 반드시 유소년 축구 지도자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유소년 축구 감독의 경우 안 잘리려고 무조건 ‘이기는 축구’만 하고 있어요. 자세와 기본기를 다져가며 18세쯤 됐을 때 열매를 딸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정작 그 나이가 되면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지요. 이렇게 가다가는 2006년 월드컵 때는 아시아권에서도 힘들 겁니다.”
기자가 축구 선수들을 취재하면서 다소 당황했던 건 선수들 스스로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한편으로 ‘적자생존의 논리’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해도 탈락한 자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십수 년간 축구에 인생을 바쳐오면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축구를 해왔다는 사실이 지금도 문득 문득 후회가 된다는 어느 ‘탈락자’의 고백이 훗날 이들의 푸념이 되지 않도록 월드컵 열기의 1백분의 일, 아니 1만분의 일이라도 이들의 ‘후반전’을 위해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오로지 ‘살벌한 현실’이 되어버린 저들의 ‘공놀이’가 안쓰러운 건 기자가 너무 순진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