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부르는 이 노랜
엿 같은 가수들을 씹는 노래
웃기지도 않는 가요계에 그 꼴에
꼭두각시 되어 놀아나는
그들의 손에
소리 나지 않는 마이크를 볼래?
자질 없는 가수가 판 치네
오로지 돈만 쳐 발라 판 내네
썩어 가는 가요계 이 판도에
생각 없는 빠순이들도 판사네
나 그 보다 키가 작아
나 그 보다 잘 생기지 않아
비록 그 보다 춤은 못 추나
랩은 더 잘 할 수 있다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자신감이 있기에
나는 이 노래 이 비트에
뻐끔뻐끔되는 붕어들을
씹으려 하는데,
왜 내 생각이 틀렸냐?
도저히 이 노래 못 듣겠냐?
그럼 너 따위 수준의 귓구멍은
신문지 구겨서
잠시 막아 두는 건 어떻겠냐
아니면 뭐 내가
다른 노래 틀어줄까?
지오디 클릭비 뭐 이런거?
자, 가수란 어떤 사람인가
노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너희 빠순이는 모르겠지
춤 잘 추면 가수 아닌가.
헷갈리지 긴가 민가
도무지 어찌 된 일이,
부르는 놈보다
안 부르는 놈이 더 많지.
가수라는 이름과는 이미 저 만치 떨어져서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패션 상가 앞에서
춤추는 애들하고,
방송국에서 춤추는 니들하고,
도대체 다른 뭐가 있냐고?
그러고도 니들이 가수라고?
내가 지금 부르는 이 노랜
엿 같은 가수들을 씹는 노래
웃기지도 않는 가요계에 그 꼴에
꼭두각시 되어 놀아나는 그들의 손에
소리 나지 않는 마이크를 볼래?
자질 없는 가수가 판 치네
오로지 돈만 쳐 발라 판 내네
썩어 가는 가요계 이 판도에
생각 없는 빠순이들도 판사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음악 문화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받쳐
노래를 부를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너에게.
박삿갓.
-입대하기 하루 전.
언더에 있는 힙합 뮤지션에게
현범이 써준 가사.
창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은선의 뺨을 간질였다.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늦잠을 잔 아침. 나른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은선은 기지개를 켜고 머리맡
에 놓여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은 열시를 조금 지나친 곳은 가리키고 있다.
거실로 나가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머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잠을 자서 그런가... 그러가 문득, 지난 밤 성훈과의 과
음이 떠올랐다. 얼큰하게 취해서 택시에 올랐던 그. 별 탈 없이 잘 들어갔겠지.
두통약을 먹으려 약상자를 꺼냈지만 영양제와 비타민 뿐, 두통약은 찾을 수 없다. 약상자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그녀는 주방으로 걸어
가 냉장고를 열었다. 십여 개의 맥주들 사이에 끼여 있는 생수를 꺼내 마시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눕힌 채 TV를 틀었다. 지난
밤에 방송 되었던 프로그램이 다시 돌고 있다.
연성이 연출하고 있는 Special Tonight.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니? 자식... 연락도 한 번 안하고.'
스튜디오 어디선가 팔짱을 끼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예능피디가 꼭 교양피디 같은 표정을 하고 있
다고 놀린 적도 많았는데...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 속에 잠기려는 찰나,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이 그녀를 붙잡았다.
“네, 이은선입니다.”
그냥 ‘여보세요’라고 해도 되는 것을... 일상에 묻어있는 직업병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나, 나 진광이.”
“응,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어제도 봤으면서.”
오랜만에 듣는 친한 동생의 목소리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제를 떠올렸다.
어제... 성훈씨랑 여의도에서 만났다가 신촌으로 자리를 옮겼고... 아, 그 Bar에서 진광일 만났지. 되살아난 기억에 자신감을 얻은 은선의 어
조가 한층 높아졌다.
"아, 미안... 방금 일어나서 정신이 없네. 그래, 웬일이야?”
*
진광의 댄스스쿨이 있는 신촌의 어느 카페.
입구에 나타난 은선을 향해 진광이 손을 흔들어보였고, 은선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었다. 혼자 왔을거란 예상과 다르게 진광의 옆엔 어떤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의 존재는 은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은선은 진광의 맞은 편 의자를 조심스레 빼어 앉았다.
“늦었어?”
“아니. 우리가 좀 일찍 왔어요.”
“그래.”
은선은 진광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많이 낯이 익은데... 작고 쫙 찢어진 눈 하며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상.
“너... 현범이야?”
그녀의 물음에 진광은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렸고, 남자는 그나마 들고 있던 얼굴을 푹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못 알아봤잖아. 인마, 태닝은 어디서 해가지고 와서 이 모양이야? 얼굴이 반쪽이네?”
“큭... 누나, 얘 배타다가 어제 왔어.”
“응? 배?”
“이 새끼가... 돈 버는 데는 노가다랑 배 타는 게 최고라고 해서...”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하는 현범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상황 파악을 한 은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배-? 난 또 뭐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온 줄 알았지.”
“살까지 타서...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 더 안 좋게 됐잖아...”
“태닝이 아니었구나.”
“아 누난 돈 주고 이렇게도 해요?”
그을림을 지나쳐 새카맣게 타버린 현범의 피부. 속상해 하는 현범의 모습에 더 이상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은선은 진지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들과 인연이 닿은지도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8년.. 참 기특한 시간이었다. ‘마이너
리티’ 시절, 취재 차 만났던 가출 청소년들을 이렇게 반듯하게 세워놓았으니... 춤과 노래가 하고 싶어 집을 나왔다 했던 두 녀석은 그 열정
을 버리지 않고 지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진광은 백업댄서로 있다가 제 이름을 내건 댄스스쿨을 차렸고, 현범은 홍대 클럽에서 언더
밴드로 활동하고 있다. 흐뭇했다. 자식처럼 느껴지는 동생들이, 제 나름대로 성공 한 삶을 살고 있다하니.
은선은 미소를 길게 늘어트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보자고 했어?”
“아, 그게...”
“누나, 누나 하는 일에 나 좀 끼워 줘요.”
대답을 망설이는 진광을 제치고 현범이 입을 열었다.
“일? 무슨 일.”
“누나 매니지먼트 한다면서. 나 취직 좀 시켜 줘요.”
“어, 어떻게 알았어? 나 매니지먼트 하는 거... 이것도 어제 내가 얘기 했었어?”
은선이 묻자, 진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밴드는 어쩌고.”
“그거, 그거 진작에 때려 치웠어요.”
예기치 못했던 현범의 대답. 그렇게 목을 매며 하고 싶어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니...당황한 은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언제...”
“...2년 됐나...? 씨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도... 언더에서 얼마나 받겠어... 돈벌이가 되야 말이지. 곡을 쓸래도 돈이 필요한데... 연습은
그냥 길바닥에서 해? 연습실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내가 너무 고지식했었니?”
“왜, 이제 와서 후회 돼? 방송 한 번 못 꽂아준 게?”
“..........”
“바보... 나도 자존심 있어. 누나가 방송 타게 해준다 했어도, 내가 거절했을 거에요. 어차피 오버 올라가도 돈 못 버는 건 뻔한 걸. 내가 면상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은.”
“현범아...”
“알어. 누나 무슨 말 하려는지. 어쩌겠어. 세상이 그런 걸. 노래의 ‘노’ 자도 하나 모르면서 얼굴 믿고 나온 개자식들 가짜 소리는 음악이고,
면상 구린 내가 내는 생소리는 말 그대로 개소리 된다는 거... 알아요.”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얼굴만은 생생하던 녀석이었는데... 쓸쓸해져버린 현범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은선은 가슴이 아팠다.
“나, 그래도 도움 많이 될거야. 내 주위엔 다 음악하는 놈들이니까... 응? 누나, 나 이 얼굴로 다른데 취업도 못해.”
“...월 이백. 캐스팅 디렉터. 어때?”
"...누나...”
“아냐, 그냥 네가 소속가수로 들어올래?”
“미쳤다... 됐어요. 누나 쫄딱 망해 그럼.”
"괜찮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벌어놨으니까.“
“이은선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나 했더니... 결국은 돈이었어?”
침울하던 현범의 목소리는 다시 예전처럼 장난스러워졌지만, 그의 눈 속에 비치는 눈물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꿈을 잃어버린 스물여섯... 가슴이 아팠다.
"근데 누나. 월 이백...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
“쇼 프로만 연출하다가... 드라마 감독을 하겠다고?"
넘치는 여유를 거만함으로 내보이고 있는 50대 중년 남자의 책상 앞에 연성이 정자세로 서 있었다.
은선이 넘겨주고 간 드라마 진행을 위해 들른 SBC 드라마국 국장실. 깐깐한 윗사람들과의 대면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꺼림칙하다.
"이은선이랑 몇 년이나 일했나?"
"방송국 입사하자마자 이선배님 밑에 있었습니다. 5년 됐습니다."
“5년... 그럼, '더 뮤직'을 같이 했겠군."
"그렇습니다."
"...드라마국에선 말야. 8년을 썩어도 작품 하나 맡을까 말까거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드라마를 해보겠다고? 너 보다 경력 많은 놈들도 야외촬영 나가서 조명 들고 있어. 그런데도 하겠다고?"
"이선배님이... 맡기고 가신거니까요."
"선배님이라..."
"제게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허. 너한테? 이은선이가 너한테 부탁을 했어?"
어이가 없다는 투의 코웃음.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 '이은선'이란
이름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연성의 자존심은 그 다음이었다.
"16부작 미니시리즈. 8회, 아니 6회 안으로 시청률 15% 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15%라... 자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
"보나마나 그것도 이은선한테 배운 거겠지."
".........."
"대본은 받았겠지."
"그렇습니다."
"6회 안으로 15%. 잊지 마."
"감사합니다."
"나가 봐."
절에 가까운 인사를 하고 답답했던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안과 밖의 공기는 그야 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의 심장을
꽉 조이고 있던 무언가도 제법 느슨해졌다. 목을 조르고 있던 타이도 느슨하게 잡아맸다. 정말, 이제는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
연성을 바라보는 드라마국 피디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었
다. 그러는 게 옳았다.
그가 예능피디로 남아있을 시간도 이젠 3일. 5월 개편과 함께 현재 맡고 있는 토크 쇼 'Special Tonight'을 조연출에게 넘겨주고, 드라마국
으로 넘어와 드라마 제작에 착수하기로 되어있다.
할 일이 많다. 예능국에서 그가 맡고 있는 직위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드라마국으로 짐도 옮겨와야 한다. 예능국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친숙한 얼굴들이 그를 스치며 멀어진다. 멀어진다. 멀어진다...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님에도 따라붙는 정이란 이렇게 무섭고
진득한데, 그녀는 이런 고통을 어떻게 홀로 견뎌 냈을까.
이은선이란 사람을 알고지낸지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독해, 정말. 독해."
"해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어디서 한 잔 하고 오셨나 봐요?"
쓸쓸한 혼잣말을 되받아치는 목소리에 발끝을 향해 있던 연성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예능국에 도착한 그의 앞에 서 있는 긴 생머
리의 여자. 그녀를 보자 울상을 짓고 있던 연성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이럴 땐 그도 똑같은 남자였다. 미인 앞에선 어쩔 줄
을 모르는 바보 같은.
"아, 어쩐 일이세요?"
"저녁 좀 얻어먹으려고요."
"저녁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연예 기획사 신은 기획의 기획실장 차은주. 그녀의 제안 아닌 제안에 당황한 듯 연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하세요?"
"아, 그게 아니라..."
"그럼 다음에 얻어먹죠."
"아, 그게 아니라..."
"그럼 약속 있으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제가 대접해도 될까요?"
"네?"
연이어 당황해 하는 연성이 귀여웠는지 은주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입가에 패이는 보조개가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을 찰나, 연성은 그의 손에 닿은 은주의 접촉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은주의 입장에선, 그저 쪽지를 전해주려 했던 것이었는데 예민하게 반응하는 연성 때문에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연성을 바라보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뭡니까?"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더라고요. 방송국에서 만날 중식만 시켜 드셨을텐데, 오랜만에 칼 질 한 번 하시죠?"
화사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뒤돌아버린 그녀. 연성은 그녀가 자리를 완전히 떠난 뒤 한참이나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신피디 그래가지고 어디 장가나 가겠어? 여자 앞에선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떠니 원."
멍한 표정의 연성을 놀려대는 동료들. 민망한 듯 좌우를 급하게 돌아본 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다.
*
그녀가 예고했던 대로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은은한 불빛의 조명과 음악회에 가서나 들을법한 익숙치 않은 클래식. 드라마국장
을 만나느라 오랜만에 찾아 입은 정장과 매우 잘 어울리는 실내다.
웨이트리스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테이블엔 은주가 늘 그랬듯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녀의 옆엔 한 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를 가진 스무 살
남짓의 여자가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연성은 웨이트리스가 빼주는, 은주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늦게...왔나요?"
예의상의 질문. 은주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알맞은 시간에 오셨어요."
"아, 예... 그런데 이 분은 누구..."
"아, 인사드려. SBC 'Special Tonight' 신연성 피디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김연경이라고 합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몇 시간 전 드라마국장 앞
에서의 그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녀를 보며 연성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지나쳐요. 이런 인사는."
연성의 다정함에도, 연경은 쉽사리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무슨 커다란 걱정이 있나... 조금은 겁을 먹은 듯한 연경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연성은 은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쁜 아가씨네요. 은주씨 동생인가요?"
"후훗.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저희 기획사 히든카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데뷔시킬 아이에요."
"이번에도 대박 나시겠는데요? 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제 곧 데뷔를 할 것이란 은주의 말에 연성의 얼굴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
만, 덜컥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신은 기획 그 곳에서 배출해낸 대스타가 벌써 수십이다. 배우 전문 양성소에서 가수 양성에 손을 뻗은지 겨우 3년. 짧은 시간 동안의 신은
기획의 발전은 경이에 가까웠다. 요즘 잘나간다 하는 배우들은 모두 신은기획 소속이었고, 연예지망생들이 그리는 꿈의 기획사가 바로 신
은이었다. 신은을 통한다면 정상에 서기란 시간문제. 하지만 그렇게 빨리 스타가 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폰서(Sponsor). 신은 소속의 연예인들 그 배후에는 적게는 하나, 많게는 수도 없는 스폰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공중파는 물론 지방과 케
이블 피디는 물론이고 정재계 주요 인사까지 신은기획이 손을 내밀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 일은 모두 기획실장인 차은주의 손을 거쳐 이루
어졌고 바로 지금, 비일비재했던 신은의 활동이 연성의 앞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곧 데뷔할거라는 신인 여가수. 아니 배우일지도 모르겠다.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아름다운 연경을 은주가 연성에게로 밀었다.
"몇...살이죠?"
"열 아홉이에요."
연경의 대답에 연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아직 스물이 채 못된 아이는 또 얼마나 두려했을까.
다시는 연경을 쳐다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연성이 눈을 뜨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바로 연경의 눈이었다.
'아저씨도 똑같아...'
경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경의 초점 없는 눈빛이, 연성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신피디님, 이번에 드라마 하신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연성이 토끼눈을 하고 은주를 다급히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기색의 은주는 와인으로 목을 축여주는 여유와 함께 전 보다 더한 미소를 곁들
여 천천히 대답했다.
"그야... 신피디님에 대한 제 관심해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실은, 우리 연경이도 그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거든요. 모르셨죠?"
"그야... 캐스팅은 조연출 담당이니까요... 저는 아직 조연출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열아홉이지만, 깊어요. 아주. 생각하는 게."
연경의 등을 쓸어내리는 은주.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체 연경은 떨리는 몸을 겨우 부축하고 있었다. 연성의 눈엔 그게 보였다.
식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볼 일이 있다며 일어난 은주는 뭔지 모를 눈빛만을 연경에게 남기고 떠났다.
".........."
".........."
아무런 대화도 없이 설익은 소고기에 닿는 칼 소리와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 오가는 테이블 위에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쪽은 연경이었
다.
“호텔이 좋겠죠?"
딱 한마디. 연경의 입에선 딱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뭐?"
"잘나가는 피디신데, 호텔은 무리 없지 않아요? 자주 가시는 곳 있을 거잖아요. 거길로 가죠."
".........."
연성은 양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팔 하나를 올려 이마를 받쳤다.
"나는 말이죠, 나는 서른 두 살이에요. 아가씨보다 열 세살이나 많아. 띠 하나를 빙 두르고도 한 칸을 더 갔어."
".........."
"더 중요한 건 말야. 나한텐 아가씨만한 남동생이 있어. 걔도 열아홉인데, 학교를 다녀. 열심히 다녀. 아주."
".........."
"지금 넌. 이것도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인가?"
".........."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농담이라도 하지 마. 오해 받어."
".........."
"안 하겠다고 해. 기획사에서 시켜도 안 하겠다고 해. 누구나 그래선 안 되지만, 아가씬 더더욱 안 돼. 아가씬, 아직 어른도 안 됐잖아."
"어른의 기준이 뭔데요?"
처음으로 연경의 눈빛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그녀의 눈빛. 열망에 젖어 있는 눈빛이라면 좋았을 것을... 안타
깝게도 지금 그 눈빛은 분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른이란 게 뭔데. 어디까지가 애고, 어디서부터가 어른인건데. 삼촌뻘, 아빠뻘, 아니 그 이상 되는 아저씨들도 그냥 여자라면 좋
아. 그냥 여자라면 좋아서 넥타이 풀고 벨트도 풀어. 그 아저씨들, 피디님 보다 나이 많아요. 어른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 아저씨들
앞에서 난 어른인건가?"
되돌릴 수는 없을까. 지금도 무심히 지나가고 있는 그 존재를. 시간...이라는 그 존재를 붙잡아 다시 되돌려 보낼 수는 없을까. 곰곰이 생각
하다보면 방법이 나올까. 정말 할 수 있을까. 상처 받기 이전으로, 이 세상을 알기 이전으로,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로, 이 아이를 데려다 놓
을 수는 없는 걸까.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이룰 수 없는 상황. 신연성. 그의 삶에 대한 회의를, 처음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
“아이돌로 나가요.”
“현범아... 누나 돈 벌자고 이 일 하는 거 아니잖아.”
“알아요. 알아. 누나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그러니까 아이돌로 나가야 돼요. 그룹이든 솔로든 상관없이요.”
“난 애들 데려다가 장사하고 싶지 않아. 현범아.”
E.S 엔터테인먼트의 첫 기획회의. 벌써 두 시간 째 현범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은선이었다. 두 사람 의견 조율도 이렇게나 어려운데, 진
광과 성훈마저 있었다면 또 얼마나 머리가 아팠을까. 본격적인 사업에 앞서 구체적인 플랜을 구성 중이던 두 사람은 어긋나버린 의견을 맞
추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비주얼과는 상관없이 음악성과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캐스팅하려는 은선과, 곧 죽어도 비주얼만큼은 화려한 고등학생을 캐스팅해야 한
다는 현범. 은선은 아이돌을 고집하는 현범을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이 뭐가 중요해... 가수는 노래야. 실력이라고.”
“나 잊었어요?”
착 가라앉아버린 현범의 목소리에, 은선은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힘없이 불을 당기고, 한숨을 쉬듯 연기를 내뿜었다.
"후-. 현범아, 넌... 넌 운이 없었던 거야. 널 지원 해 줄 사람을 제 때 못 만나서...“
“누나, 나 앨범 제의 받은 적 있어요.”
은선은 시야를 가려버린 희뿌연 연기를 황급히 지워내고 다시 현범의 얼굴을 찾았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의 눈동자. 가슴이 꽉 막혀온
다.
“그런데 왜 안했어?”
“잘 들어요. 언더밴드도 유명한 애들은 꽤 유명해요. 나도 그랬었구요. 그런데 그 유명세라는 게, 그리 높지 않아요. 내 이름을 떨칠 수 있
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구요. 언더에선 그래요. 아는 사람들끼리만 아는 거죠. 그런데 오버로 올라가면 있죠. 똑같아요. 오버로 가도, 방
송 타도, 아는 사람만 안다구요. 대중이 아니라, 마니아. 그 사람들. 그 사람들 관심만.”
“..........”
“그래서 결국은 다시 돌아와요. 열에 아홉은 돌아와요. 다시... 언더로.”
“..........”
“대중 관심 못 받으면, 성공 못해요. 마니아... 서태지만큼 생기겠어요? 서태지만큼 극성 맞겠냐구요. 음악성으로 마니아만 만들고, 그 안에
서만 음악 하는 거. 성공한 거 아니잖아요.”
그가 매달리고 있었다. 애원하고 있었다. 자꾸만 가슴을 조이게 만드는 현범의 눈. 그리고 그의 말. 그리고 ‘대중’이라는 단어.
방송에서 있어서 대중은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방송을 매스 미디어(MASS-MEDIA)라 칭하지 않는
가.
은선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현범을 쳐다보기가 창피해서였다. 명색에 피디였다는 여자가, 방송의 목표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은선의 머릿속에, 낮은 시청률에 허덕이고 있을 피디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상이 되어 스쳐지나갔다.
“공감을 얻어야 음악이죠. 되도록 많은 공감을...”
은선이 다시 눈을 떴을 때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담배를 끼고 있지 않은 손으로 현범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그녀는 웃었다. 네가 나보다 낫다-라는 말을 함께 해주면서.
“누나 특이 한 거 좋아하잖아.”
“특이 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특별 한 걸 좋아하는 거야 인마.”
“그렇게 만들 봐요 그럼. 아이돌. 감히 아이돌이라 말 할 수 없는 아이돌.”
“..........”
“요즘 아이돌은 우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이돌이에요. 아이들의 돌(Doll). 애들의 인형이요. 애들이 바라는 대로 만들어지고, 바라는 대
로 움직이고, 바라는 대로 살아주는. 식상해요. 이제 그런 인형. 세상은 변해요. 그 세상 속에서 사람들도 변해요. 획기적인게 필요해요. 그
렇게 순종하기만 하는 재미없는 인형 말고, 그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누나가, 아니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아
이돌이에요.빈틈없는 걸로요. 한없이 상업적이면서도 음악성으로 무장한 아이돌이요.”
“...맘에 들었어. 네 논리. 그래. 해보자.”
"그럼요, 저는 내일부터 이 건물 근처 고등학교 먼저 돌게요. 그리고 진광이네 학원에도 애들 꽤 있으니까 거기도 한 번 보고요."
"네 맘대로 하세요."
은선은 현범의 머리를 헤집어 놓고 가방 깊숙이에 밀어 넣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두 시간 사이에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 와있었다. 또 확인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일한 음성메시지. 궁금함에 전화를 걸어보니 성훈의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신은 기획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네서 주최하는 가요제에서 심사위원을 봐달라더라. 그냥 거절하려다가 네 이름 넣어놨어. 네 전화번
호 가르쳐줬으니까... 열시쯤에 전화 올 거야.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머뭇거림도 없이 시작 된 성훈의 이야기. 궁금증 하나만을 남긴 채 그의 메시지는 끝이 났다.
알기는 뭘 알아... 성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은선은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귀찮은 일 떠넘긴 건 아닐테고... 대회 가서, 떨어진 애들이나 주워 오라는 건가? 중요한 일 있다고 안 나오더니, 이건 또 뭔 소린데? 그녀
는 휴대폰을 신경질 적으로 집어넣었다.
“왜 그래요?”
“내가 이제 물로 보이나 봐.”
“네?”
“진성훈씨. 오늘 기획 회의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중요한 약속 있다고 가버리고는...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잖아. ”
“뭐라고 하셨는데요?”
“날 더러... 신은 기획 오디션 심사위원을 보라네.”
“신은 기획 오디션이요?”
“신은 기획에서 대회 하나를 미나 봐. 성훈씨한테 심사위원 자리를 하나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나를 넣었어.”
첫댓글 신은기획 오디션에서 아이돌으로 쓸만한 아이들을 뽑으라는 뜻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