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내리는) 날 시모음 4)
눈 오는 날 /현곡 곽종철
하얀 눈이 펑펑 휘날리는 날
그대는 내 마음을 십팔 세 소녀처럼 돌려놓고
온 세상을 한 폭의 동양화로 칠하면서
어느새 오는 봄 멈추게 하고
나목에도 순백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네.
비단결처럼 하얀 몽촌토성 길
산책길 따라 홀로 발자국 남겨보네.
뽀드득 뽀드득거리는
태곳적 소리를 듣노라면
허전함도 잊은 채
철학자인 냥 사색에 잠긴다.
그대가 차분하게 내려오니,
잠을 자듯 천지는 평온하고
그대가 소리 없이 찾아드니,
먼 길 떠나버린 임 생각에 잠기네.
그대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새색시처럼 살포시 앉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대의 여유로움에
나 아닌 우리를 생각하며
그대의 순백(純白)함에
세상사에 찌던 마음 씻어 버리고
그대의 포근함에
온정(溫情)마저 느껴지네.
그래서
강아지마저 그대를 좋아하는가보다.
눈 오는 날의 회상. /황우 목사 백낙은(원)
아득한
옛 생각이
날개를 펴고
둥실 날아오른다.
추억은
함박눈으로 쌓이고
소슬한 겨울바람에
어디론가 어지럽게 날아간다.
처마 밑 고드름
낙수 되어 흐르고
그리움은 강물처럼
내 영혼을 타고 흐른다.
눈 덮어쓴 나무들
유령처럼 뽀드득 거리며
발자국 남기고 떠난 꿈길엔
회한의 눈보라만 스친다.
눈 오는 날 /유화
실력이 없어
지워질 때까지
그냥 멍하니 바라본다.
언젠가는
너가 쓴 시의 약속처럼
기어코 오겠지
아니 오면
네 말에 또 속은 샘치고
기다려야겠지
인생은 순백하다고
아니 그냥
멍하니 보고 있어야지
속는 게 무슨 큰 죄겠어.
지워지는 게 무슨 죄야.
오직 믿었던 것뿐.
그래 어쩌면
거짓말을 보태야
알 수 있는 투명한 진실
그 사랑, 경계 없는 경계
눈오는 날에 /이한명
길을 찾아 길을
떠났던
저문 겨울의 새벽 뜨락은
모락모락 피어 오르던 그리움에
왈칵 눈물을 쏟아내던
그 언제적의
쓴 소주잔 같았을까
잊으라 잊으라 하며
스스로 녹아
흩뿌려진 눈송이들이
바람으로 돌아 와
앉은
저 겨울 빈 나뭇가지 끝
채워도 채워도
끝나지 않는 목마름은
새벽길 어디선가
서성이던
바람같았을까
눈꽃으로 돌아 온
겨울
바람이었을까
바람소리 지나간 쓴 술잔이었을까
눈 오는 날에 /임영조
눈이 내린다
분분하게 떠도는 소문처럼
차고 흰 포고령이 내린다
이 겨울 어수선한 지상을 보며
하늘은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침내 결단을 내리듯
헐벗고 추은 산과 들을 덮는다
이미 잘 못 산 생애와
스스로 절망한 자는
과거를 표백하듯 망각하라고
그 다음 다시 시작하라고
이 세상 모든 흉허물을 지운다
날을 세운 바람은
무시로 눈사태를 몰고 와
키가 큰 것들만 사납게 난타한다
함부로 날뛰지 말고
침묵하라! 근신하라!
채찍 소리 날리며 몰아세운다
이제 완전한 백지 상태
하얀 고요가 장악한 나라
너무 넓어 눈 시린 여백 위에
맨 먼저 무슨 말을 써야 할까
도무지 엄두가 안 나거든
그 자리에 선 채로 백치나 되자
눈먼 사랑으로 뭉쳐진
눈사람처럼.
눈 내리는 날2 /한상숙
뽀족한 솔잎끝도
살포시 감싸안는
부드러운 님의 마음 닮고 싶습니다
오물에 더럽혀진곳
마다않고 다가서시니
차별없는 님의 마음 배우고 싶습니다
사람의 교만이 만든
경계의 선도 무너뜨리고
순백의 마음으로 감싸주시는
님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순결하지 못한 마음으로
님에게 첫 발자국 남겨놓고
돌아서서 밤새도록 괴로움에
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눈 오는 날 /임명자
아직은 불씨로 남아
꽃으로 피어 있는 것
묻었던 가슴속
새 한 마리
촛불로 타오르며
낯선 시간 속으로 날아간다
꽃잎 지고
떨어진 꽃잎 위로
촛불은 다가와
새까만 심지만 가물거리며
남은 추억을
흰 눈 속에 묻는다
눈 오는 날 /김옥진
시방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눈위에 또 눈이 내리고 있어요
꼬옥 닫혀진 문틈 사이로
나는 눈이 오는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누워 있어도
시방 밖에는 애들이 놀고 있습니다
눈싸움하는 소리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강아지랑 꼬마랑 친구되어 놀아도
나를 불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누워 있기로 했습니다.
눈 오시는 날 /지철승
서러움 없이
아픔도 없이
눈이
저리 오시네요
차가운 입김을 휘휘 몰아쉬네요
하얀 혀로
낼름 세상을 삼켜버릴려고요
저리도 눈 오시는 날
먼데 있는 친구가 그리워져요
첫사랑 얼굴이 떠올라서
우뚝우뚝
눈꽃만 바라보다
하얀 꿈을 꾸네요
눈 오시는 날
눈 내리는 날 /손정모
휘잉휘잉 울어대는
유리창 너머로
솜털 같은 눈송이
하늘 자욱히 흩날린다.
혼탁한 세상
순백으로 바로잡겠다며
시린 눈발
여린 알몸으로 내닫지만
나부끼는 바람결마다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겠다며
불복한 눈초리로 희번덕거린다
밤새도록
유리창 파랗게 얼어
한숨마저 눈꽃으로 피어오르면
가슴을 쓸어 내리며
멀리
창 밖을 내다본다.
싸락눈 내리는 날 /임수경
새벽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어제의 조각
동네 녀석들은 쌓이지도 않는 것들을
뭉치려 두손을 모두고 있는데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고
손위의 모든 온기를 거둬드리며
힘껏 장풍(掌風)을 흉내내 본다
살짝 피하며 손위로 착륙하는 조각 ; 방울
떠나버리면 이렇게 쉽게 녹아 없어지는 것일까
후 불어 날리지 못한다면
굳이 얼굴을 가리고 입을 가득 부풀어 올리며
찌뿌릴 필요가 없겠지
소설(小雪)의 날에 낯선 제비 울음소리가 시선을 당긴다
동변상련(同病相憐) ;
초가 지붕 처마 밑 미처 떠나지 못한 한 미련한 것이
이른 새끼를 깠나 보다
눈 오는 날엔 1 /배월선
아무 것도 할 게 없을 때
눈은 온다
눈은 모든 잡념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저 고요한 신의 한 수
그래도 그렇지, 그건 영 아니지, 싶을 때
세상살이 아주 팍팍하다 싶을 때
눈은 질끈 눈감고 온다
사각사각 거리며 온다
봐라, 눈도 너무 억울하다 싶으니까
대번에 판을 뒤엎고 보는 거다
하얗게 덮어버리는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없던 일로 하자는 거다
백기를 들고도 태연한, 깨끗한 것의 속내
다시 봄꽃 한 번 피워보자는 거다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는 거다
눈 오는 날 /강진규
무심결에 눈을 돌리면
내가 서 있는 세상
어디쯤
잊어 두었던 그리움인가
불현듯 땅에 떨어지면
내 마음에 매달리는 눈발
시간은 쌓이고 쌓여 굳어버린
아픔의 실핏줄
아직 내 몸에 남아 있는데
세월이 남겨 놓은,
세월이 그려 놓은
그곳으로 추억은 물들어
다시 시간을 쌓고 있는가
눈이 오시는 날 /박이도
오늘도 개꿈으로 밤을 지새우고 깨어나 창밖을 보니 눈이 오시네.
어느 산골에서의 아침, 까치인사에 깨어나 유쾌한 하루를 들녘에서 보냈을 때처럼 눈이 오시네.
눈이 오시는 날엔 강아지처럼 뛰어 나가고 싶다.
초등학교 교정으로 달려가 아이들과 어울려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
포레의 레퀴엠이 흐르는 이 아침은 형언할 수 없는 세월의 비애감悲哀感)이 설화(說話)같이 내 마음을 적시는구나.
왜인지 까닭 모를 눈물이 흔해졌다.
눈 오는 날 /김선옥
하늘에서 표백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온 세상 더러운 것 세탁하려나 봅니다
눈보라 휘몰아치니
허접스러운 잡동사니도
금세 하얗게 되었습니다
산과 들 그리고 마음조차 깨끗해집니다.
이럴 때면
고즈넉한 찻집에 마주 앉아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를
바라보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무작정 길을 나서면.
그 사람 불쑥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날입니다.
눈이 쏟아져 내리던 날 /용혜원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던 날
우연히
그대를 만날까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또 웃으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들입니다
거리에서 만난 연인들은
쏟아져 내리는 눈이
둘만의 사랑을 축복한다는 듯
눈빛마저 호수같이 맑습니다
거리에서 만난 상인들은
쏟아져 내리는 눈 속에서
또 하루를 연명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향하여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짓이 애처로웠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던날
거리에서 우연히
그대를 만날까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치듯 밀려오고 밀려갔지만
그대는 없었습니다
내리는 모든 눈들이
내 마음에 눈물이 되어
젖어들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나는 몸실이 났습니다
꿈속에서도
그대를 만날까
눈 속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