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 관련 책 한권을 읽고
-교계의 대기업 총수들을 향한 미션을 가져야할 것-
대한민국의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지난 10월 25일 향년 78세로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 28일(수) 오전에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엄수 된다. 이건희 회장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책 한권을 읽었다.(사진) ‘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향하고 있다.’, ‘삼성 경쟁력의 핵심, 이건희의 신념과 열정’, ‘내가 밤잠 못 이루는 이유를 아는가!, 최고만이 살아남는다. 집중과 선택으로 돌파하라!’는 책 표지 글을 단 홍하성 저 한국경제신문의【이건희】란 책에서 이건희란 삼성의 최고 총수의 출생배경과 성격, 업적, 그의 일생과 더불어 삼성 가에 대해 알게 된 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 회장에 대한 빛과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세계경제에 성공기업의 모델이 된 분이라는 것이다. 한국경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제주역의 세대교체를 통한 새 순환 및 거듭남의 계기가 될지에 대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마누라 빼고는 다 바꾸라.’는 말을 한 일에 대해 화두가 되었다. 그 말에 대해 어떤 이는 세상에는 변해서는 안 되는 것, 변하지 않아야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의 성공신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정치인의 입지전,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끝내 꿈을 이룬 젊은이의 성공담, 신체적 장애를 넘어 감동적 사랑의 주인공이 된 남녀의 순애보는 소중한 일이 된다.
선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삼성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의 2세로서 삼성이란 거대집단을 선대회장만큼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이병철은 대구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무역회사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건희 위로도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으므로 그의 어머니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어린 이건희를 돌보기가 어려워 젖을 떼자마자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낸다. 갓난아기 때부터 친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컸다. 이후 대구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까만 통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쩌다 흰 고무신이 생기면 아끼려는 마음에 한 구석에 숨겨놓을 정도였다. 안 먹고 안 쓰는 근검절약하는 그의 집안은 증조모 때에 400석 지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거기다 조부는 100석을 더 늘려 500석까지 만들었다. 이를 각각 이병각 300석, 동생인 이병철이 200석씩 물려받았다. 대구 시절 그의 집안은 두 평짜리 방3개, 세평짜리 방 한 개 등 4개의 방에 모두 열다섯 남짓이 살았다. 이병철 내외의 3남 5녀, 그리고 일꾼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건희 위로는 맹희, 창희 등 두 형과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등 네 명이나 되는 누나와 여동생 명희가 있었다.
이병철은 좀 더 크게 사업을 하기 위해 1947년 5월 서울로 상경한다. 이건희가 종로의 혜화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 9월 28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며 서울이 수복되자 마산으로 내려갔다. 부유한 집안이라 비싼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었던 이건희는 내성격인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체질로 장난감을 뜯어보고 다시 조립해보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었다. 그 취미는 줄곧 지속되어 카메라, VTR, 심지어 자동차까지 뜯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으로 가서 보고 배우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형들이 먼저 가 있는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은 라디오 시대를 지나 TV시대에 접어들어 공영방송인 NHK와 민영방송들이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다. 일본의 미쓰시타 전기가 필립스와 합작으로 만든 흑백TV가 할부 판매를 통해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이었다. 부유층에서는 세탁기와 냉장고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을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후진국으로 여기고 있어 민족차별이 심했다.
친구도 없어 외롭게 지냈고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한 가운데 민감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보니 그는 일본유학시절 1,200~1,300편에 이르는 영화를 볼 정도로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관에서 보냈다고 한다. 3년 유학시절에 또 하나의 관심은 레슬링이었다. 당시 일본은 프로레슬링의 전성시대였다. 그 외에도 미식축구, 탁구, 승마, 골프 등을 통해 체력을 다져 나중 이틀씩 밤을 새우고 10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막내인 이건희를 몹시 귀여워한 부친은 와세다 대학 상과 출신으로 연세 대학에 합격해 이미 등록금도 내고 교과서까지 다 사놓은 상태에서 이건희도 와세다 대학에 보냈고, 이후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보내 경제학과와 부전공으로 매스컴 학을 공부하게 한다.
25세가 되는 1966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당시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와 연애시절을 거쳐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이건희 삼성비서실에서 견습 사원으로 근무했다. 그의 업무는 조간신문을 보고 삼성관련 기사를 찾아 붉은색 밑줄을 치는 일로 아버지 이병철이 한눈에 찾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인 첫 직장 <중앙일보> 즉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1971년 1월, 이병철 회장의 집무실에서 해서(楷書)에 조예가 깊었던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갈 것이다.’고 유언장을 직접 작성했다.
1976년, 도쿄 암 연구센터에서 이병철 회장의 위암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는 중앙일보 이사에서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본관 28층의 이병철 회장 집무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인 경영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에게 물려준 교훈 중에 나무 닭을 뜻하는 ‘경청’과 ‘목계’가 있다. 원유전쟁에서 첫 실패를 하고, 3남의 그룹 승계에 대한 견제 등에 시달리며 방랑의 시절을 보낸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은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제2창업과 아버지를 극복하기에 회장에 취임하며 비서실의 재구축을 한다.
비서실의 병폐를 극복하고 제2창업 시기의 문제점들을 본다. 빅딜 삼성가의 분할한다. 벌써부터 18조에 대한 상속세 문제가 나오고 있다. 세계질서를 보아서도 삼성은 국민적 기업으로 스웨덴처럼 국민적인 사회적 합의에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편법이나 꼼수를 부린다거나 회피를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본다. 자기책임을 다하고 정당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라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 재벌 총수들 평균 수명은 77세라고 한다. 대기업 총수들이 점집을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들도 죽음의 이후의 삶에 대해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후의 생명문제해결은 물론, 진정한 기업의 경영 원리에 대한 방향이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대 재벌이라고 해도 어떻게 보면 끝없는 야망에 불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진리로 채워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 성공, 명예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 가지고 내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대기업 총수도 내세 문제해결은 딱 한가지라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건희 회장의 족적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차제에 교계는 대기업 총수들을 향한 미션을 가져야할 것이다. /여수=정우평 목사, 010-2279-8728【교계소식】문서선교후원계좌 우체국 500314-02-264196 정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