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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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뱁티스트 전통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춘천을 찾았습니다. 부는 바람에 물결을 뒤집으며 흐르는 소양강이 흐르고 있는 곳, 그 강변에는 평화의 공원이 있습니다. 6.25 전쟁시 일어난 춘천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곳입니다. 전투의 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조각해 놓고 평화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평화의 공원 맞은편 2층 건물에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가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그 태생 때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에 입각하여 평화와 화해의 분명한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물론 한반도에서 지금 유령처럼 출몰하고 있는 정치적, 외교적 실패로 인한 전쟁 위기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들의 전쟁이나, 평화, 화해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실현되는 평화와,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사역으로서의 화해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 뚜렷하겠지요.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이 땅을 위협하는 전쟁을 반대하고, 화해를 통한 평화를 추구합니다. 종교에서 얘기하는 전쟁, 평화, 화해와 같은 의미들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 나라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전쟁과 불평화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이 그동안 추구해 온 평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조금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아나뱁티스트. 한 개의 대형교회에 몇 만 명이 출석하고 있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에서 국내의 아나뱁티스트 신자가 100여 명 안팎쯤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Korea Anabaptist Center)의 넓은 창가에는 푸르른 강물과 평화공원이 내려다보였습니다. 센터에는 김경중 총무와 인턴으로 센터일을 돕는 박지원 씨가 있었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올 무렵 한 여성 외국인이 바쁘게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나가던 데보라 씨였습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이하 KAC)에서 하는 일은 먼저 선대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여정을 담은 책이나 아나뱁티스트와 관련한 여러 자료를 출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아나뱁티스트와 관련한 서적이 60여권 정도인데, 이곳에서만 23권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겠지요. 또 다른 일은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교육에 힘쓰는 것입니다. KAC의 모든 사역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대의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 프로그램(Kingdom builders) 역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섬김과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들은 “섬기면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노나이트 선교부(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와 더불어 국내외 아나뱁티스트 관련 교회, 공동체, 단체, 학교 등에서 섬기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MCC에서 국내로 자원봉사자를 파견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해외로 보내기도 합니다.
또한 KAC는 국내의 개인, 단체, 교회들과 함께 연대할 뿐 아니라 MCC 같은 해외의 메노나이트 교회와 선교 단체들과도 협력해서 사역합니다. 아나뱁티스트의 뿌리에서 파생된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 등의 그룹들이나, 한국아나뱁티스트연합회(WKAF), 한국교회공동체협의회 등의 단체들이지요. 정리하자면 자료출간, 교육, 섬김, 네트워크를 주 사역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김경중 총무에게 재세례파(Anabaptist)에 대해 묻자, 재세례파라는 명칭은 ‘종파’, ‘분파’라는 섹트(Sect) 개념이 강해 부정적인 정서가 있어 잘 안 쓰고, 아나뱁티스트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아나뱁티스트가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는 먼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6세기 가톨릭에 반대해 루터와 츠빙글리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이 개혁을 온전히 성공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국가교회의 틀을 극복하지 못한 종교개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개혁보다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다시말해 ‘교회’를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당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거의 모든 시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제도적 관문이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지만 과연 그 사람이 제자도나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거나, 거듭남이나 회심 경험을 갖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는 가지고 있지만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있는지를 회의하게 된 것이지요. 유아세례를 받은 모든 시민이 다 그리스도인인데, 그리고 종교개혁도 이루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도덕적 삶의 기준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을 고민하게 된 소수의 사람들은 결국 신약성서에 근거한 완전히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진정한 회심이나 거듭남에 대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스승인 츠빙글리와 함께 성서연구를 시작하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스승이 말한 내용과 성서의 가르침이 다른가.’ 유아세례는 그 의문의 정점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모두 개혁교회인데도 여전히 유아세례를 행하면서 기독교국가체제(Christendom) 안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525년 1월 21일 최초의 성인 세례를 베풀었고, 그 주체는 스위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기존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국가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국가교회 입장에선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밖에 없었겠죠. 또한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는 국가교회 체제하에서 주민등록을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세금을 징수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로부터도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날 이후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들은 재산 몰수, 체포, 고문, 처형 등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비극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증가했고, 비밀리에 실천되었던 그들의 신앙은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1527년부터 시작된 박해 속에 제세례신앙운동을 반대한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는 1531년 “제세례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가르침이 곧 이 나라를 뒤덮을 것 같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가득 찬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다. … 비록 이런 두려움이 전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나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온 세상은 그들에 의해 동요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홀쉬, 제바스티안 프랑크의 『연대기, 일기 및 주석 성경』(Zeytbuch und Geschychtbibel))는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츠빙글리조차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영향력에 놀라 이 운동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는데, 가톨릭 정부와의 갈등은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밖에 안 된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훌드리히 츠빙글리의 업적』(Huldreich Zwinglis Samtliche Werk))
이들은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정체성을 성인세례를 바탕으로 한 “신자들의 교회”라고 주장했으며, 기독교의 뿌리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 개혁(radical reformation)을 표방하며 제자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개혁교회”, 또 하나님의 명령과 국가의 명령이 상충할 때는 세상의 권세에 무조건 충성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유교회”를 주장했습니다. 자유교회는 당시에는 상당히 도전적이고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가 않지요.
또 하나는 “평화교회”입니다. 성서에 네 이웃을 사랑함은 물론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어떻게 전쟁에 나갈 수 있는가. 국가가 벌인 전쟁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자기가 먼저 죽더라도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원수를 위해서라면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원수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죽일 수 있느냐’는 단순명쾌한 논리였던 겁니다.
당시 유럽은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관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이 있고, 하나님 나라 도래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지, 어느 지역에 산다고 해서 이방인이고, 그래서 그들은 지옥가고, 우리는 천국 간다는 그런 주장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수가 어딨냐, 내 안에서도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삶의 행실을 통해 믿음의 열매는 드러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고 강압적으로 폭력을 써서라도 개종을 시키거나 죽이려 하는가. 그러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느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잡혀가 법정에 설 때 이들은 직접 법정에서 자기 변호를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변론의 근거는 성서였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암송한 성서의 말씀으로 변론을 했는데, 토씨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따르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성서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지요. 인쇄술이 발달해 성서보급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성서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를 먼저 읽은 사람, 읽고 깨달은 사람이 주축이 되어 성서를 가르치곤 했는데, 이들과 배우는 사람들은 성서를 아예 통째로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들 신앙의 기준은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성서 해석도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서 성서중에 충돌하는 부분이 있으면 신약을 따랐고,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을 따랐습니다. 성서에서 예를 들자면 구약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는가를 보고 따랐던 것입니다.
김경중 총무는 두터운 책을 하나 꺼내왔습니다. 『순교자의 거울』(Martyrs Mirror)입니다. 순교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사연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군데 군데 내용의 설명을 돕는 그림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도 크게 회심한 후 감동을 받아 작업을 했다고 하더군요.
김 총무는 책을 펼쳐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흑백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냥 보기에는 별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200년 동안 4,000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죽어갔어요. 처음 2~30년 동안 그 중 반이 죽었지요. 이들은 잡히면 모진 고문을 받고 화형당하거나, 수장을 당합니다. 숨어 있다가 잡힌 이들은 사형장으로 가는 그 길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순교당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찬송을 부르고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써둔 메모나 편지를 전달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은 24세였던 에나가 처형당하기 전 15개월된 아들을 부탁하면서 남긴 편지를 전달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편지에는 아들이 커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당부하는 내용인데, 읽으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또 하나 보여준 그림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처형장으로 가는 길을 마지막 증언의 기회로 삼으려 하자 이번에는 혀에다 굵은 나사를 박아 말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화형을 시켰는데, 그것을 본 아들이 그 순간 기절해 버렸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어머니의 모습은 불에 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 재가 남은 그곳에서 불에 녹지 않은 나사, 어머니의 혀를 뚫었던 나사를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지도자 선출 방법은 오늘날의 방식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국가 교회의 무수한 탄압을 받았는데 박해의 기간 동안 많은 리더들이 죽게 되자, 그 안에 있는 평신도들 중에서 삶이 올곧은 사람이 회중들의 추천으로 리더로 세워졌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많이 배우거나 하지 않아도 성령을 받아 하나님 말씀을 대변하는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자를 리더로 세웠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 대장장이였다가 ‘말씀의 종’으로 세워진 클라우스 펠빙거(Claus Felbinger)입니다. 그도 선교여행을 떠났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1560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러한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제일 먼저 가르칩니다. 글자를 알게 되면 성서를 읽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김 총무는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 아나뱁티스트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마치 다른 나라에서 다른 기준을 갖고 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김 총무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범적이었던 아나뱁티스트가 그에게 “악한 생각 하지 말고 좋은 생각하는 거 잊지 말아라.”하면서 그냥 한마디 툭 던지는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김 총무가 본 그들은 대부분 거짓이 없고 솔직하며 안팎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아나뱁티스트들은 유럽에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게 되면서 신앙과 양심을 찾아 이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형제도, 농토도, 국가까지도 버리고 떠났습니다. 받아주는 곳이라면 아주 척박하고 열악한 곳이라도 떠났습니다.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받아주는 나라에 단 두 가지 요구상황을 말했습니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테니, 살인에 참여하게 하지 말라. 아이들은 우리 신앙의 방식대로 교육시키겠다.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서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놓았을 때 국가가 그들의 삶과 신앙에 간섭을 하면 미련 없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들이 이주해 간 곳은 주로 유럽에서 시작해서 러시아나 북미, 남미지역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있는데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도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6.25전쟁 후 메노나이트(Mennonite)신자들이 들어와서 구제 사역을 하고 돌아갔는데 특히 어떤 메노나이트 신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만 소개하고 활동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가끔씩 ‘메노나이트’,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요?”하고 물으면 “제 이웃에게 물어보시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면 맞을 겁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입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않고, 주변에 보이는 삶의 태도를 보고 그리스도인인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대략 170만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센터가 시작되어 사역을 한지는 이제 12년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것은 6.25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1951년 미국의 구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을 도왔던 메노나이트 선교부(MCC)는 구제활동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한국 내의 독자적인 메노나이트 구제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52년부터 1971년까지 20여 년간 MCC는 주로 구제, 구호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다른 교회 선교사들처럼 교회를 개척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주력했습니다.
김경중 총무는 과거 한국에서 활동했던 메노나이트 선교사님들의 일화 중에 뱃길도 불편한 울릉도까지 가서 구호 물자를 나눠주면서 자신들이 메노나이트라는 것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본 즉, “울릉도로 들어가는 바닷길은 순탄하지 않는 적이 많은데, 언젠가 불교 스님이 포교를 위해 울릉도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육지와 단절된 울릉도는 종교 활동이 없어 불교를 알리는데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교회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기독교신자여서 포교를 접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궁금해진 스님은 울릉도에 어떤 사람이 왔고, 왜 교회가 이렇게 많냐고 물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을 너무 잘 돌봐주었고, 좋은 사람들이라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선교의 패러다임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목적으로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에 무관심했다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는 조건으로 교회 나오라.’고는 안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들의 삶과 생활태도를 보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갖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들은 경산지역에 전쟁고아들을 위한 메노나이트 직업중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대안학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메노나이트 직업 중고등 학교생활을 통해 영향을 받고, 메노나이트 선교사님들의 영성과 삶의 양식에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1971년 이 학교도 문을 닫았고, MCC는 한국 활동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국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국을 떠나 당시 전쟁 중이던 베트남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땅 한평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두 다 주고 떠났습니다. 대구에 있는 ‘가정복지회’도 이들의 도움이 기반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들과 만난 사람들의 기억과 사진들 속에만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이 쏟아 붓고 간 선한 발자취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겨 주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필요를 채워주면서 갈등과 분쟁이 있을 때에는 조정과 중재에 나서는 평화사역으로 선교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추구했던 성서적 교회의 회복 운동은 한국 땅에서도 성서적 교회 회복을 위한 모임으로 그 명맥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1월에 시작된 춘천의 예수촌교회는 신약교회를 표방했던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첫 번째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서울의 은혜와 평화교회, 그리고 최근에 예수촌교회에서 분립한 예수마음교회 등이 생겨나면서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점점 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의 양식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국내외적으로 점점 더 많아지면서 한국 아나뱁티스트 펠로우십(KAF)이 결성되어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의 양식을 확산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습니까. 자연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세월도 흐릅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아나뱁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춘천 소양강 흐르는 물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봄이 온 천지를 덮을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꿈꾸고 모색하는 평화의 기운 또한 한반도를 가득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글_이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