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세대를 섬기는 기독교세계관 운동 유경상(Christian Thinking Center 대표)
몇 년 간 개혁주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세계관 운동(이하 기세운동)을 비판하는 이야기들이 지속되어 왔다. 작년 말부터 ‘복음과상황’을 통해 연재되는 김기현의 글은 그러한 기독교세계관논쟁(이하 기세논쟁)을 소위 말해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면 기세논쟁의 요지가 무엇이며 어떠한 비판들이 있어왔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글을 중심으로 기세논쟁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앞으로의 기세운동에 대한 바램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기세논쟁에 대한 아쉬움
먼저 김기현의 글을 읽으면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글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그의 주장들 가운데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한 구석이 점점 답답해지고 점점 실망감이 커져 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를 통해 기세논쟁의 도전도 경험했지만 동시에 기세논쟁의 아쉬움도 볼 수 있었다.
필자가 기세논쟁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는 2004년 있었던 기독교학문연구소와 복음과상황이 공동 주최한 “기독교 세계관은 아직 유효한가?”라는 포럼이었다. 그 포럼을 다녀 온 후 참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수혜자로서 평생 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에서 간사일과 공부를 했고,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DEW 기독학술교육동역회에서 기독교세계관 강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기독교 세계관 훈련 간사로 막 섬기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것은 이제 활활 타기 시작한 불에 기름이 아닌 물을 붓는 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는 기세논쟁을 통해 큰 도전과 유익을 얻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다양성과 실천성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성이라 함은 기독교세계관은 'the Christian Worldview'가 아니라 ‘a Christian Worldview'라는 것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들)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함은 나의 세계관을 점검하고 균형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다른 기독교세계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세계관의 다양성에 대한 강조는 김기현의 말처럼 ‘다양한 세계관의 상호 보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복음과 상황>, 2007년 1월, 116).
한편 실천성에 있어서도 큰 도전을 주었다. 김기현은 “성경을 살아내는 신자의 삶은 그 권위와 진위를 입증하는 증거다. 성경을 증언하는 증인된 삶이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했다(<복음과상황>, 2006년 12월, 92). 그를 포함한 많은 기세논쟁자들이 내러티브, 즉 이야기를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로서 고백하는 세계관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세계관이 다를 때 그 사람의 진짜 세계관은 무엇인가? 그 사람의 말이 아닌 행동과 삶이 진짜 세계관이다. 실재성 없는 기독교세계관은 ‘앙꼬 없는 찐빵’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큰 문제를 시사한다. 필자는 주로 기독교 세계관 강의와 훈련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일을 주로 해 왔는데 그러한 훈련이 어떻게 실재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사역해 왔다. 기세논쟁은 이를 위한 큰 자극요소가 되었다.
기세논쟁은 기존의 기세운동이 간과했거나 소홀히 했던 부분들을 지적하고 주목하게 해 준 것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기세논쟁 자체가 기세운동의 새로운 축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와 아쉬움을 내포하고 있다.
필자가 바라보는 기세논쟁의 한계와 아쉬움의 결정적인 예는 그들이 기존 기세운동을 적나라하게 비판 했던 내용들, 즉 다양성과 실천성으로 대표되는 문제들에 있어 그들 역시 그 문제만 지적했을 뿐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비판은 있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던진 비판은 부메랑처럼 다시 그들에게 돌아온 셈이다.
다양성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개혁주의 세계관외의 다른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反(반) 혹은 非(비) 개혁주의 세계관을 정리하는데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필자의 눈에는 기세논쟁이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다양성의 인정은 보이지 않고 기존 기세운동과의 대립과 심지어 단절의 현상만 보인다. 또한 실천성에 대해서 그와 관련된 한국이라는 컨텍스트를 강조했지만 김기현의 주장에는 그의 세계관이 그의 사역과 삶 가운데 어떻게 실재화되며, 어떻게 한국적인 컨텍스트를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그림이 뚜렷해지길 기대했다.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을 바탕으로 다양성과 실천성에 충실한 모델까지 제시해 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실재성을 반영하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요컨대, 기세논쟁이 설득력을 얻고, 그들의 주장대로 새로운 기세운동을 전개하길 원한다면, 기존 기세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설령 기세논쟁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한국적 상황에 충실한 기세운동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했다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 세계관과 어떻게 다른지, 그들의 세계관을 한국이라는 컨텍스트 가운데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세논쟁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필자의 주된 관심사는 기세운동의 연장선 가운데 앞으로의 기세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인가이다. 필자는 기세논쟁자들처럼 기존의 기세운동 자체가 폐기되거나 혹은 재활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세논쟁자들이 지적했던 그 문제들은 비판의 내용들이며 기존 기세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한계라기보다 앞으로의 기세운동을 이어갈 사람들의 과제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어떠한 면에 더 집중하고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를 분명하게 차이가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기독교세계관 훈련 간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고, 목회자, 간사, 선교사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돕는 일임을 피부로 느껴 왔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있어 말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몇 가지 제안들을 함으로써 기세운동에 대한 바램과 기세논쟁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기세운동을 위한 몇 가지 제언
첫째, 다양성에 충실한 기세운동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상호 긴장과 협력은 세계관이 지향하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에도 유용하다. 어느 한 모델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은 타자와 자신에게 백해무익하다”(<복음과 상황>, 2007년 1월, 115).
다양성에 대한 김기현의 글은 기세운동에 있어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동일한 관점을 가지면서 필자 역시 앞으로의 기세운동이 이론적인 면에서도 동시에 실천적인 면에서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가길 소망하고 있다.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성의 궁극적인 의미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성 논의에 있어 기세논쟁의 아쉬움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양성에 대한 주장만 있을 뿐 실제로는 다양성보다 대립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세계관을 ‘A’라고 한다면 그 외에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이 있음을 주장할 경우 ‘non A'(비판 or 대립)라고 설명하기보다 ‘B,' 'C,' 'D'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동일한 ‘세상’에 대한 A라는 이해와 적용 외에도 B, C, D 등의 다양한 이해와 적용이 있음을 보여 줄 때 그가 이야기했던 다양성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기세논쟁은 그들의 세계관이 개혁주의 세계관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혹은 “왜 개혁주의 세계관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들의 세계관은 정확하게 무엇이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모델과 방향 제시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세운동’의 유익은 그 다양성이 자신의 세계관에 충실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들은 그 가운데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도울 것이다. 또한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의 강점은 무엇인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하고 정립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의 첫 번째 관심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세운동의 의의는 각자의 기독교세계관(a Christian Worldview)이 성경적 세계관(the Biblical Worldview)로 나아가도록 상호긴장과 상호협력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이 주는 또 다른 유익 중의 하나는 다른 세계관을 배려와 존중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세계관만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다름을 넘어 오해와 갈등과 심지어 대립을 낳게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관이 아닌 상대방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쉽게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될 때가 많다. 이것이 바로 배려와 존중의 자세일 것이다.
다양성에 있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실천에 있어서의 다양함이다. 다양성은 이론적인 면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이 적용되는 다양한 삶과 일터의 현장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실천의 다양성은 학자는 학문의 영역에서, 정치가는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 운동가는 사회참여의 영역에서, 교육자는 교육의 영역에서, 출판인은 출판의 영역에서, 가정주부는 가정의 영역에서 등 다양한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과 고민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영역에서만 기독교세계관이 적용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각자의 소명이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고 거룩한 부르심인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서도 다양성은 자신의 영역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실천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와 존중의 자세로 대하도록 도전한다.
요컨대 기세운동의 다양성은 이론과 실제 두 영역에 모두 적용되어져야 하며, 그것은 자신의 세계관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실천성에 충실한 기세운동
아브라함 카이퍼가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라고 할 때 ‘삶의 체계’(life system)는 곧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계관이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삶으로서 나타나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기세운동의 시작과 끝은 실천성에 있으며, 그에 대한 주요 평가 역시 실천성의 유무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세논쟁이 제기한 기세운동의 핵심적인 한계는 ‘실천성의 결여’라 할 수 있다. 김기현은 그 원인을 이야기의 부재, 한국이라는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음 등에서 찾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서 삶의 변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세계관이 “실천과 동떨어진 이론, 실천을 대신하는 이론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따름을 막아서는 이론”(<복음과 상황>, 2006년 12월, 90)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실천 없는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실천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이론적인 면에 대해 등한시 하거나 무시하는 경우 또한 발생할 수도 있다. 김기현도 이와 같은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며,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복음과 상황>, 2006년 12월, 90) 그러나 그가 정정훈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지적했던 것처럼 책 읽고,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무조건 관념적인 것이며, 그것이 ‘실천 없는 이론’만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론 없는 실천’이라는 또 다른 극단을 양산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세미나, 강의, 스터디 등의 활동을 통해 기세운동에 동참하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활동을 관념적인 것이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세미나, 강의, 스터디를 통해 생각의 변화와 삶의 실천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가 최고의 관심사였다. 물론 그러한 활동이 실천과 무관하게 지적인 유희로 빠지게 될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그러한 활동들 자체가 관념적이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히는 것은 목욕물 버리다 아기까지 버리는 격과 다를 바 없다. 세미나, 강의, 스터디는 여전히 기독교세계관의 이해와 실천을 돕는 유용한 교육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외에 다양한 실천방안들이 더 제시되어야 할 과제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붙잡아야 한다. 둘 다 중요하다. 김기현의 말처럼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무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훈련과 교육은 무시되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비판받을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그의 말처럼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래서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요컨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론 없는 실천’과 ‘실천 없는 이론’이라는 두 극단이지 ‘이론이냐 아니면 실천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기세운동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는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라고 생각한다. 기세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이기에 실천을 강조해야 하지만 또한 실천을 위해 동시에 이론적인 기반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론과 실천의 통합을 위해서는 두 영역 사이를 이을 수 있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 다리의 역할은 기독교세계관을 잘 이해해서 또한 잘 실천하도록 하는 일이다. 필자는 그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독교적 훈련 내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만이 아닌 지키게 하는 교육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르쳐...”는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며, “...지키게 하라”는 것은 이해를 바탕으로 행함으로 나아가도록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세계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서 기독교세계관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세계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에 하나가 되지 못하거나 막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우리가 그러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과 강의 등을 통해 가르치는 교육은 받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지키게 하는 교육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의 통합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독교적 사고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세계관 교육은 그 실천성에 대한 변함없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what"에 대한 교육에만 집중했을 뿐 “how"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기독교세계관을 교육한다는 것은 기독교세계관을 실천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변적인 것으로 인식될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의 통합이라는 기세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중의 하나로서 다시 고려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기독교세계관 교육과 훈련은 지속되어야 하며 다만 지금까지 이론 중심의 교육에 그쳤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실천 중심의 교육으로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기세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에서 부터 지키도록 하는 것까지가 교육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셋째, 교육에 충실한 기세 운동
실천성에 충실한 기세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크다. 따라서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 가르침이 비록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what"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인지, 그 용어를 모르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청소년, 청년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독교세계관,’ ‘기세운동,’ ‘기세논쟁’ 등의 의미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그 가르침에 "what"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how"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됨으로써 가르침이 ”지키게 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세계관 교육의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세계관 교육이 되도록 하기 위해 두 가지 사항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평이성과 현장성이다.
‘평이성’이라 함은 쉽게 전달하자는 말이다. 김용주의 말대로 기독교세계관은 “노동자나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복음과 상황>, 2007년 6월, 169.) 기세논쟁을 포함해 지금까지의 기독교세계관과 관련된 글은 한마디로 너무나 난해하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려운 학문적 용어를 볼 때 학자들의 전유물 마냥 여겨지기도 한다. 기세운동이 대중화(학자들의 영역을 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는 방향)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 도전과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에 있어 평이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평이성라고 해서 표현만 쉽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독교적 용어가 아닌 세상의 언어로 바꾸는 것처럼 기독교세계관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어린이, 청소년, 직장인, 가정주부, 대학원생 등 각자의 상황에 맞게 그들만의 친숙한 용어로 전달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중요한 메시지라 하더라도 한국어로 아무리 외쳐 봤자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중요한 메시지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것이 힘든 작업일지 몰라도, 이를 통해 듣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이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독교세계관을 이해’하도록 돕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이성이 실천으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써 기독교세계관의 이해를 돕는 것이라면 보다 더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장성’의 고려가 필요하다. 현장성이라 함은 사람들의 실질적인 필요(felt needs)를 고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학교 교사의 현실문제 중의 하나는 커리큘럼 및 교재개발일 것이다. 크리스천 부모로서의 실질적인 문제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성경적으로 잘 양육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청소년들의 실질적인 필요는 술, 담배, 인터넷, 게임, 공부, 친구관계 등의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의 문제와 실질적인 필요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현장성을 고려한 기독교세계관 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이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겪고 있는 현장의 문제들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실천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곳곳에서 기독교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 중 많은 학교들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을 표방하며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낸시 피어시가 그녀의 책 ‘완전한 진리’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일부에서는 학교를 홍보하는 일종의 마케팅 차원에서만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 학교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인해 잠시 시들했고 정체된 것 같았던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교육이라는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세계관의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기세운동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세운동의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육에 있어서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세계관의 실천성, 즉 이론과 실천의 통합을 이루는 대안으로서 교육을 다시 고려하자는 필자의 제안과도 부합된다. 또한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은 기세논쟁자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한국의 컨텍스트, 특히 공교육과 교회교육의 상황을 고려한 기세운동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요청하는 곳마다 기독교세계관 강의사역이 필자의 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년 말부터 대부분의 강의가 청소년 선교단체나 중고등부, 학교에서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다름 아닌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관심이다. 따라서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은 곧 자라나는 세대를 섬기는 기세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낸시 피어시는 “완전한 진리”에서 다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 목회자, 교사, 청소년부 지도자로서 우리는 청소년들이 강력한 문화적 역류에 휩쓸려 가는 모습을 줄곧 목격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다만 “가슴의” 신앙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사상의 유혹에 대처할 만큼 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신자들에게는 “머리의” 신앙-세계관 과 변증의 훈련- 또한 필요한데, 이는 그들이 가정을 떠날 때 접하게 될 다양한 세계관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위함이다. 그들이 일찍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을 할 경우, 나중에 동료 학생들이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소수파에 속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적어도 싸울 기회라도 얻게 될 것이다. 청소년에 게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도록 훈련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에 필요한 필수 장비가 된 것이다.”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이라 할 때 그것은 차세대와 교육이라는 영역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교육이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그것은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됨을 존 듀이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듀이의 실용주의 세계관이 교육철학이 되어 교육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더 나아가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사회 전반 곳곳에 그의 세계관이 어떻게 파급되었는지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 이것은 기세운동이 사회전반에 확산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고려하고 배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기세운동이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론적인 면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그 이론을 교육적인 면에 적용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교육은 기독교세계관의 이해와 적용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기독교세계관을 실천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존 듀이가 그랬던 것처럼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된다면 삶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 기독교세계관의 영향력이 확산되어 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넷째, 신앙에 충실한 기세 운동
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 못지않게 고려되어져야 할 기세운동의 방향은 ‘신앙’에 대한 것이다. 교육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필자가 생각하는 기세운동은 우선 계몽운동이다. 생각이 변하면 삶이 변하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해서 또는 생각의 변화를 이루지 못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교육을 통해 가르쳐 지키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세계관 훈련 내지 교육은 더욱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아직도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인지 들어보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기세논쟁만 운운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던 한 목회자의 푸념이 기억난다.
그러나 살다보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분리될 때가 많다. 안다고 해서 그것이 행함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세운동은 계몽운동을 넘어 성령운동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세계관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일수록 신앙과 멀어져 지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성령충만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삶의 변화를 도우시지 않으면 기독교세계관의 이해와 적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계몽의 영역 역시 성령님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생각과 삶의 변화를 위해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데 이를 위해 더 열심히 훈련받고 교육받아야 하며 동시에 말씀과 기도 생활을 비롯한 경건의 생활에도 힘써야 한다.
개인적으로 기세운동을 하면서 경건의 생활보다 지적인 경향으로 치우칠 때가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런 모습 때문에 경건과 지성을 분리하거나 혹은 반지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기세운동을 하면서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지만 동시에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고 실천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나의 삶을 풍성히 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기세운동에 있어 지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앙에 기반을 둔 지성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계몽 운동과 동시에 성령 운동으로서의 기세운동이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세운동이라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이해와 적용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러한 변화에 대한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김기현이 “세계관은 제자도이다”라로 정의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복음과상황>, 2006년 12월, 88.) 따라서 기세운동은 혹은 교육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기독교세계관 교육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제자훈련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세계관이 지금의 제자훈련 가운데 녹아져서 성경적인 관점을 회복하고, 말씀적용의 영역을 삶과 일터의 영역으로 확대해 가도록 하여, 생각과 삶 모두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제자를 양성하는 훈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의 주일학교를 비롯한 교회교육에 기독교세계관 교육이 접목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이를 감당할 교회 지도자 및 교사들이 준비되는 것과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교재개발 역시 앞으로의 기세운동에 있어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교육에 충실한, 특히 교회교육에 충실한 기세운동이 된다면 지금까지 학자들 중심의 기세운동이 확장되어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 교사들까지 참여하는 운동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교회가 기세운동의 전초기지가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기세운동의 비전 - 기독교세계관으로 무장된 차세대 양성
대학교 1학년 때 철학과 교수님들의 ‘신 비존재 증명’에 대한 강의와 한총련의 리더들이도 한 철학과 선배들의 영향으로 인해 신앙에 대한 회의가 찾아 왔었고 결국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는 위기가 찾아 왔었다. 그 때 신앙을 회복하고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임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세계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포함한 기독교세계관 관련 서적들이었다. 그 경험은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방황하던 시기에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기독교세계관과 관련된 일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되었다.
필자의 궁극적인 비전은 가정, 학교, 교회에 기독교세계관 훈련 프로그램과 교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직 뚜렷한 열매로 내세울 것은 많질 않지만 주어진 상황 가운데 교육과 신앙에 충실한 기세운동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한 예로서 지난여름에 실시한 청소년 세계관 프로그램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실천성, 평이성, 현장성에 충실함으로써 교육과 신앙에 초점을 둔 기독교세계관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용인에 있는 한 교회의 청소년 여름 수련회로 운영했다. ‘세계관 학교’라는 이름 대신 ‘청소년 크리스천 싱킹 캠프’(YCTC : Youth Christian Thinking Camp)라는 이름으로 2박 3일 동안 38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했었다. 아이들에게 생소한 ‘세계관’이라는 용어 대신 ‘생각’이라는 익숙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세계관의 내포적인 의미를 잘 전달함은 물론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세계관의 정의와 역할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법칙”을 통해 술, 담배, 성, 외모 지상주의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어떠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 간단한 핵심 원리를 제시하고 그룹 토론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삶을 점검하도록 도왔다(생각의 중요성 인식). 또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창조, 타락, 구속의 안경으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실천할 사항들은 무엇인지를 정리하고 실천 계획을 스스로 세워 보도록 했다(기독교적 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뉴 에이지 생각을 아이들에게 친숙한 문화의 예들을 들어 설명하고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정리하게 하였다(변증). 마지막으로 창조 타락 구속의 렌즈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이드 했다(소명).
캠프를 마친 후 아이들의 소감문을 받았는데 대부분 아이들이 생각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삶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평가를 하였다. 참 보람된 일이었고 앞으로도 부족한 부분을 계속 보완해 감으로써 위에서 제시한 실천성, 평이성, 현장성에 더 충실해 가는 캠프를 운영할 계획이다. 그 중 한 학생의 소감을 소개한다.
“4시간 버스를 타고 힘들게 도착한 삼척, 바닷가에서 놀고 한숨자고 일어나서부터 본격적인 수련회가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너무 열심히 놀아서 강의하실 때 졸며 어떠나 싶었는데 강의 내용이 되게 현실적이어서 인상 깊었다. 솔직히 여태껏 수련회를 가면 강의를 듣기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는데 이번 수련회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서 참 좋았다. 특히, 생각의 중요성, 생각을 바꾸는 것에 따라서 결과가 바뀌는 것을 보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직접 실감해보고 배우니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화연 중3)
글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기세논쟁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기세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시도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기세논쟁을 통해 긍정적인 도전을 받고 인식의 지평이 넓혀진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기세운동을 재활용 취급하는 그들의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또한 최근의 기세논쟁이 지금의 기세운동의 상황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또한 공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판이 기세운동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에게서 기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안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세운동의 수혜자이다. 그로 인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고 소명을 발견했고 그것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애정이 더 각별한 것 같다. 2004년 기독교세계관 포럼에서 한 목사님께 포럼이 끝난 후에 “그래도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지속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기세운동은 침체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래서 기세논쟁의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격다짐이 아니다. 필자 주변에는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기독교세계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더 나아가 기세운동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헌신하는 동역자들도 있다. 그들의 헌신과 섬김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었고, 그러기에 나 역시 기독교세계관이 주었던 도전과 유익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기세운동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들린다. 사실 필자역시 기세운동에 대한 아쉬움과 한계들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극복해 가야할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것을 본 사람으로서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는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의 유익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들을 비판거리로 만들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요 책임이라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현명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는 것처럼 80년대 초반에 시작된 기세운동 역시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고 있다. 따라서 왜 자라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장하고 성숙되어져 가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세운동에 참여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기세운동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들리기를 희망한다. 기독교세계관의 이론과 실천의 통합을 이루는 다양한 모델 내지 대안들이 제시되어 가길 바란다. 비록 그 이야기가 온전한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 미숙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비판하기보다 그들의 노력에 격려를 보내고 함께 상호보완하고 협력해 가는 방안을 찾아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길 소망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전반에 걸쳐 다양성과 실천성에 충실한 기세운동이 활성화되어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맺는다.
* 필자소개 유경상 - 경북대 철학과 졸, IVF 학사 -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졸 - CTC(Christian Thinking Camp) 대표, VIEW-DEW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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