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석인(武石人)은 검을 차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는 전형적인 무관의 형상이다. 이러한 무장상의 기원은 중국 당대 황제릉의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왕릉에 관검석인상이 조성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현・정릉(玄・正陵)에는 갑주(甲胄)에 검을 찬 무석인의 형상이 조각되었다. 이는 조선 태조 건원릉에 계승되었으며, 제27대 순종 유릉(裕陵)까지 지속되었다. •무석인(武石人)은 문무백관을 상징하고, 왕릉의 강력한 수호와 국왕의 살아생전 군사력을 상징한다. 다른 이름으로 무인석(武人石) 혹은 무석(武石)이라 한다. •무석인은 능상 하계에 한 쌍을 마주 보도록 배치하고 남쪽 조금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투구와 갑옷의 유행에 따라 원주충갑형(圓胄衷甲形), 첨주피박형(簷胄披膊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원주충갑형(圓胄衷甲形) 무석인은 투구로는 원주를 쓰고, 갑옷은 충갑을 입은 유형이다. 투구는 호항(護項)이나 뒷드림이 부착된 원주를 착용하였는데 주로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조 건원릉(健元陵), 태조 정비인 신의왕후 제릉(齊陵), 정종 후릉(厚陵), 태종 헌릉(獻陵) 무석인이 그 사례이다. •첨주피박형(簷胄披膊形) 무석인은 투구로는 첨주를 쓰고, 갑옷은 어깨에 피박까지 두르는 유형이다. 무석인상의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오랜 기간 조성된 유형이다. 중종비 장경왕후 희릉(禧陵)부터 효종비 인선왕후 영릉(寧陵)에까지 조성되었다. •무인상은 투구, 갑신(甲身), 갑군(甲裙), 포두(袍두), 골미(골미), 배갑(배갑) 등의 장착구가 빈틈없이 조각되었으며, 그 안에는 산자문(산바문), 어린문(어린문), 구름문 등을 화려하게 부조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혼재된 유형이 등장하며 영조비 정성왕후 홍릉(弘陵), 현륭원(추존 隆陵) 등에 이르러서는 사실적인 양식이 조형되었다. •무석인상은 원칙적으로 원(園)이나 묘에는 조정할 수 없었는데, 조선후기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의하면 소상에는 무석인과 석마는 세우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실제로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영조의 손자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 정조 원자인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등에는 무석인이 설치되지 않았다. |
•문석인(文石人)은 홀(笏)를 가슴에 모아 쥐고, 관모를 쓰고 허리에 각대를 두르며, 소매가 크고 길이가 긴 관복을 입은 전형적인 문신의 형상이다. •문무백관을 상징하고, 왕을 수호하고 왕릉을 장엄하는 대표적인 석조물이다. •능묘 문석인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태릉(泰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왕릉의 홀을 들고 관복을 입은 문석인상이 조성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현정릉(玄正陵)에 이르러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석인이 출현하였다. •조선 태조 건원릉(健元陵)에 계승되었다. 다른 이름으로 문인석(文人石) 혹은 문석(文石)이라 한다. •문석인은 능상 중계에 한 쌍을 마주 보도록 배치하며, 남쪽 조금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복의 유형에 따라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의 문석인은 복두를 쓰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관복인 공복을 입은 형상이다. 복두공복형 문석인은 태조 건원릉부터 제25대 철종 예릉(睿陵)까지 가장 오랜 기간 조성된 유형이다. 뒷면에는 복두의 양 뿔과 늘어진 관대 자락을 조각했다. 현륭원(추존 융릉)과 제21대 정조 건릉(健陵)에 이르러 금관조복형 문성현이 변화되었다.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 문석인은 금관을 쓰고 조복을 입었는데, 조복이란 나라의 대사나 조칙을 반포할 때 입는 대표적인 의례복이다. 금관조복형에는 패슬, 후수, 패옥 등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복두공복형보다 복잡하고 매우 유려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복두공복형과 금관조복형이 혼재되는 형태로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실적인 양식이 발달하였다. •문석인상은 조선 예학의 발달과 함께 왕릉뿐만 아니라 원, 묘에까지 배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크게 발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