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수요기도회 2024. 3. 2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27:45-54
<가상칠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은 이렇습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27)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막 15:34)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 19:30)
제 7언의 말씀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삼 시였습니다(막15:25). 이 시간은 현재 시간으로 오전 9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후인 제 육 시(12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제9시에 걷히게 되었고(3시경) 그때 주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려 여섯 시간 넘게 십자가에 달려 계시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9시경),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한 것입니다(시22:1절).
이 절규는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캔자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 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 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공급이 안 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추어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몸무게로 인하여 서서히 찢어지는 손에 박힌 못 주위,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으려고 발에 힘을 주면, 찢어지는 발의 아픔이 계속 더해지며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견디고 견디다 못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씀이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고통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팀 켈러(1950-2023)는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리디머 교회를 설립하여 대형교회로 키운 유명한 목회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40여 권의 신앙 서적을 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이 2022년까지 최소한 28권에 달할 정도로 한국에서 많이 읽히는 베스트셀러 목회자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책 ‘인생 질문’에 보면, 켈러 목사가 예수의 사명감을 너무도 중시한 나머지 그의 인간적 고뇌에 대해서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켈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기도의 위대한 모범이다. 예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자신의 감정과 갈망에 대해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복하신 것이다. 그분은 경건한 척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 번이나 아버지께 차라리 구원 계획을 피하고 싶다고 말한다. 꾸밈이나 숨김이 없다. 그러면서도 주저 없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뢰신다. 기도의 기본 취지는 하나님의 뜻을 굽혀 내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뜻을 빚어 그분께 맞추는 데에 있다.”
저도, “기도의 기본 취지는 하나님의 뜻을 굽혀 내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뜻을 빚어 그분께 맞추는 데에 있다”라는 켈러 목사님의 결론에 100%의 동의합니다. 다만 한 가지, 예수님의 순종을 강조하다 보니 죽음을 앞둔 인간 예수의 깊은 고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것은 “주저 없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뢰신다”라는 언급에서 드러납니다.
성경만 주의 깊게 읽어봐도, 예수님은 “주저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다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저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겟세마네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예수가 주저하신 것을 세 가지 정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도하러 나가시기 직전에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4: 32-36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주저 없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고” 고민하셨습니다.
이번 주 초(2024. 3. 22), 러시아의 공연장을 기습해 총과 수류탄으로 무려 137명(부상자 수는 180명 이상)을 학살한 무장괴한들이 잡혔습니다(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는 이 조직의 아프가니스탄 지부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 조직원이 이번 테러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검거 영상은 SNS를 통해 확산됐는데, 검거된 범인이 공포에 질려 떨면서 무릎 꿇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수백 명을 학살한 간이 부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을 지닌 인간의 모습입니다.
둘째,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저 없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려 했다면 이렇게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겠는가?
셋째, 예수께서 잠자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 38)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약해서 자기가 마셔야 할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마음에는 원이로되”가 아니고 “육신이 약하도다”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육체와 감정을 지닌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당할 육체적 고통이 두려워서 자신의 사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켈러는 예수의 순종에 주목한 나머지 죽음을 앞둔 예수의 인간적인 슬픔, 고민, 절망감 그리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켈러의 말대로 그가 “주저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면, 애당초 기도하러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겟세마네 사건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예수의 순종에 역점을 두면서 그의 인간적 고뇌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 보듯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신성을 중시한 나머지 그의 인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는 신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인간 예수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처럼 예수의 인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장면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장면에서의 예수의 고뇌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육신을 지닌 예수의 인간적 고뇌에 공감해야 합니다.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마음 깊이 느낄수록 그분이 감당하신 사명이 더욱 돋보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고통에 더 많이 공감할수록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은혜에 더욱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려 여섯 시간 넘게 십자가에 달려 계시던 예수님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한 것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버리셨나이까>
또 한편,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진실을 담고 있는 고백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에도, 또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씀으로 들려주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또한, 하나님은 그의 아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요1:2).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 제자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을 가끔 들려 주셨습니다(요6:16-29, 16:32).
그런데 단 한순간,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아들을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하나님은 이때 예수를 아들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셨습니다(죄를 뒤집어쓴 희생제물 – 아사셀 염소).
실로 예수님은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의 대표자로서 이 진노를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진노의 심판을 그 아들에게 부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절)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닌 내의 죄를 지시려고>
이처럼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버려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아니 바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멜 깁슨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약물 중독으로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십자가의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35세에 구원을 체험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날부터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100% 복음영화를 만들어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브레이브 하트’로 아카데미 영화 감독상과 제작상을 받은 후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작 후원자(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벤허’처럼 간접적인 종교 영화도 아니고 직접적인 예수 영화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고 모두 반대했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한 수난의 이야기만으로는 영화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 역사상 영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대화를 하며, 영어자막을 쓰는 그런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할 수 없이 멜 깁슨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라도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멜 깁슨은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기로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 2,500만 불(약 280억)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는 ‘이제 멜 깁슨은 망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되던 첫날 얼마나 많은 관객이 몰렸던지, 첫날 수입이 2,360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작 첫날 투자한 모든 제작비를 환수하게 되었습니다.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었고 강도와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습니다. 타락했던 자들이 돌아왔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호주, 이슬람 국가까지 회심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을 가장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영화가 반유대인의 정서를 자극한다고 영화상영 반대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이 영화 시사회에서 유대 출신 기자가 영화감상 후에 멜 깁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의 견해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멜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나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나의 죄 때문에 그분이 이런 수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사야 53:5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바로 우리가, 아니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더 많은 영혼이 구원받아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고난을 받아야만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고난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말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난을 기꺼이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 그대로 사도 바울은 일평생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헐벗고 굶주리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힌 담이 무너지는 순간>
마27:51-52을 보면 주님이 운명하셨을 때에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시대(성전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복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림자 시대(성전은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끝이 나고,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히9:9). 이제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9:24, 10:20).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을 통해서만 속죄하던 구약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엡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 속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 나의 구원을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예수님께서 이처럼 처절하게 고통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버리심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그 죄의 대가를 철저히 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요3:18. 롬6:6).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바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임을 알고, 용서받은 죄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드러내는 새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