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명산방' 변규화님(1)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봉명산방(鳳鳴山房)'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이곳을 찾아 붙여준 이름이다.
고려말 학자 이첨이 지리산을 찾아와 지은 시에 '산 중의 산'이라 하여
'봉황명(鳳凰鳴)'이라 쓴 구절이 있다.
거기서 따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으로 '봉명산방'이란 이름을 지었다.
불일암, 불일폭포, 불일평전의 '불일(佛日)은 보조국사가 이곳에서 수도정진,
깨달음을 얻은 것을 기려 국왕이 '불일(佛日)'이란 시호를 내린 데서 유래한다.
이곳 야영장을 돌본 '돌쇠'님은 아주 '봉명공화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봉명공화국의 왕궁은 오두막집이다. 억새 이엉에다 벽 전체가 나무로 된 나무집이다.
자세히 보면 흙벽에다 디딤나무를 붙인 다음 그 위에 한 자 길이의 짤막하고 가느다란 나무를 촘촘하게 붙여 놓았다.
뜰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 돌을 쌓아올린 석탑군의 '소망탑(素望塔)'이 있다.
아기자기한 돌탁자와 나무의자 등이 봉명공화국다운 모습이다.
불일평전을 이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가꾸면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봉명산방 방주는 변규화(본명 변성배)님이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지리산의 이름난 털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 오두막에 정착한 것은 지난 78년 10월1일이다.
어언 23년의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살고 있다.
그는 이 오두막에 정착하기 앞서 불일폭포 위쪽의 상불(上佛)에서 10년 가까이 토굴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실제 산중생활은 30년이 넘는다.
변규화님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정상적인 학교 생활과 사회 진출의 과정을 밟았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군에 입대하여 36개월을 복무하고 만기제대했다.
그리고 기업체에 입사,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60년대 초 미모의 규수와 결혼, 남부럽지 않은 '서울 생활'을 누렸다.
그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자 이름난 인텔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했고,
사랑스러운 아들도 한 명 두었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서울 생활을 뿌리치고 지리산중으로 뛰어들었을까?
이 의문에 대해 그는 뜻밖의 이유를 들려준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되는 일이 없었다. 회사 자체가 얼마 못가 파산하고는 했다.
나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찾아왔던 불일암(불일폭포 위의 작은 암자)에 공부를 하러 오게 됐고,
상불에서 토굴생활(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정진)을 했다.
그러다 이 오두막에 인연이 닿아 아주 머물게 됐다."
그는 지리산에서 '공부'하는 동안 지리산이 너무 좋아졌고, 자신의 삶터가 곧 지리산이라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토굴에서 10년을 '공부'하여 깨친 것이 지리산의 자연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청담 스님 등 이름난 고승 아래서
공부를 하느라 스님 생활도 3년 동안 했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아닌, 지리산의 자연세계로
귀의했고, 불일평전 '봉명산방'에서 영원한 자연인으로 살게된 것이다.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데는 인간의 본성에 맞춰 살아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회생활을
통해서 명예나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명예나 돈을 떠나면 인간은 자연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명예보다 자유를 택했고, 물질적인 풍족보다는 자연세계의 정신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신선세계가 별 것이겠는가.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아름다운 숲과
더불어 마음을 비우고 살면 그것이 곧 무릉도원이자 신선세계일 것이다.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한번씩 그의 서울 부인이 다녀가고는 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서울말씨가 산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서울 생활을
계속하던 그의 부인은 지난 86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들 변성호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안고 불일평전 아버지에게 왔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으로 성장, 원광대를 졸업한
광주의 규수와 결혼했다. 그 아들 부부는 봉명산방 별채에서 살며 불일평전의 대를 잇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불일평전 2세는 서울로 떠나갔고, 지금은 변규화님 홀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지리산의 자연세계가 언제나 그와 함께 있다. 지난 주말 찾아간 필자
일행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어보니까 산이 불쑥불쑥 자라나!" "예?" "저기 봐요.
나무들이 저렇게 자라니까 산이 자라는 것이나 같지!" "...!" 우리 일행은 과연 변규화님다운
말이라며 감탄했다. 그렇다. 그는 지리산과 말동무하기에도 너무나 바빠 이 산을 결코 떠나지
못하고 있다.
*<부기(附記)>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제3권에는 변규화님의 아들인 변성호와 광주의 규수 김덕선이
불일평전에서 인연을 맺기까지의 숨은 얘기를 담은 '불일평전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다.
변성호는 지난해 서울 국악예술학교 행정직원으로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김덕선은 지난
달 같은 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고 있다. 변규화님과 각별한 사이인 국악인 박범훈교수가
변성호의 장녀를 수양손녀로 삼고 있다. (2001년 3월28일)
# '봉명산방' 변규화님(2)
불일평전에서 30년 산중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변규화님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꽤 오랜 세월이 흘러도 20여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데 있다.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하기만 하다. 신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될 수 없는 일이다.
변규화님은 필자와 단 둘이 대화를 할 때는 신비한 얘기도 곧잘 들려준다. 자신의 일상사에
대한 진솔한 얘기들을 거리낌없이 들려준다.
그가 들려준 많은 얘기들 가운데는 자연에 귀의하는 독특한(?) 방법도 있다. 달밤에 옷을
홀랑 벗고 달빛과 함께 뜨락을 거닐며 자연에 동화된다는 것이었다. "혼자 있을 때가 좋아요.
홀로 휘영청 쏟아지는 달빛에 실컷 취하는 것이지요. 아무도 없으니 무슨 거리낌이 있기나
하겠소. 나는 홀랑 벗고 이 뜨락을 거닙니다.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 완벽한 자유가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이나 같지요."
30년 산중생활의 경지를 속세의 속물이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불일평전
에서의 이런 삽화만으로도 그이의 낙시유거(樂是幽居), 곧 그윽하고 궁벽한 곳에 사는
즐거움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이는 매처학자(梅妻鶴子), 곧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아 지내는 선비와도 같다. 그이의 천진한 웃음에서 상마지교(桑麻之交),
곧 뽕나무와 삼나무를 벗삼아 지내는 경지를 보는 듯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1487년 지리산을 찾았던 남효온(南孝溫)은 기행록 '지리산일과'에 특이한
한 스님의 얘기를 썼다. 산길 40리를 걸어 어렵게 도착한, 감나무 대나무에 둘러싸인
보암(普庵)의 주지승 도순(道淳)이 그 주인공이다. '도순은 문자를 배우지 않고 도를
닦아 불법을 깨쳤다는데, 그는 "나밖에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 말하며,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늘 음경(陰莖)을 내놓고 생활했다.'
지리산에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정진하여 도를 깨쳤다. 서산대사와 벽송대사 진각선사 등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지리산에서 생활한 스님 가운데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다. 무기(無己)라는 이름의 이 스님 행적을 보면 참으로 완벽한 자유인이다. 집도 절도 없었지만,
"어떤 자가 집을 세웠건 내가 들랑거리기에 거리낌이 없노라"고 큰소리쳤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그 기록이 있다.
'중 무기(無己)는 호를 스스로 지어 대혼자(大昏子)라 하였다. 그는 지리산에 은신하여 30년을
살면서 장삼 하나를 벗지 않았다. 해마다 겨울과 여름이면 산(절)에서 나오지 않고 뱃가죽을
띠로 졸라맸다. 봄과 가을에는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했는데, 하루에 서너 말의 밥을 먹어치웠다.
한 자리에 앉으면 열흘이 넘고, 일어나서 갈 때는 선시(禪詩)를 소리 높여 불렀다. 한 절에 유숙할
때마다 선시 한수씩을 남겼다.'
중 무기가 남긴 선시 가운데 그의 면모를 능히 짐작케 하는 '무주암' 시가 전해온다. '이즈음 본래
머물 데가 없었는데 / 그 누구가 이 집을 세웠네 / 지금은 오직 무기(無己)가 있어서 / 가기도
머물기도 거리낌이 없어라.' 이 무기란 인물은 누구였을까? '지리산 박사' 김경렬옹은 진각(眞覺)
선사가 아니었을까고 추측했다. 진각은 보조국사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사양하고
지리산에 들어와 꽁꽁 숨어버렸다.
진각선사 혜심(慧諶)은 스승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같이 지리산에 들어와 삼정봉 무주암에서
오랫동안 머물었다. 오늘의 송광사 전신인 수선사의 제1 세조사가 지눌이고, 제2 세조사가
진각이었다. 보조국사는 상무주에서 '선은 고요한데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아니하며,
해와 달이 고른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을 깊이 갖고 분별을 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는 글을 읽는
동안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에 숨어든 진각은 '산중길'이란 이런 선시를 남겼다. '산길은 끝도 없으나 / 맑은 바람
걸음마다 일어나고 / 천봉 만봉을 두루 밟고 다니는데 / 상수리 나무만 이리저리 얽혀 있네 /
시내에서 발을 씻고 / 산을 보면서 눈을 밝히네 / 부질없는 영욕 꿈꾸지 않으니 / 이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그렇다. 맑은 바람 걸음마다 일어난다면 홀로 지리산을 아무리 걸어간들 어찌
피로하거나 외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002년 1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