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학 시인편 . Ⅳ>
================ 1987년 11월의 新川 / 낙동강 / 뿌리 / 꽃이 그려준 자화상 / 실려 가는 소나무 / 선운사 / 불영사 / 망매가 / 국화 / 날치 / 호랑지빠귀 우는 밤 / 밤기차 / 거문도 동백나무 / 자작나무와 술 한 잔 / 우수(雨水) / 맹도견 / 오아시스 / 아버지의 검지 / 울릉도 / 그리운 모닥불 / 백수 / 밤새 무슨 일이 / 물 /
1987년 11월의 新川 / 안상학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 선
가로수는 하나 둘 가을 흔적을 지우고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 현수막은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남약국 앞 버스정류소 무인 판매대에서
문득 주워든 때 지난 조간신문
사람들이 표표히 떠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현수막에 붙박힌 무표정한 이름들이 웃고 있다.
순간 사회면에서 비상하는 철새들
왜가리 청둥오리 두루미 고니떼 무리
을숙도에 잠시 머물다 북상할 거라는 단신(短信)
저 썩어 흐르는 신천에도 철새는 날아올까
검은 물만 흐르는 신천 가득
철새는 날아올 수 있을까 날아와
저렇게 시린 발목을 담그고 있어낼까
신천을 가로지른 철교 아래
신천동 산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와
영세민 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철새무리
장화를 신고 오물을 건지는 아저씨, 철새
수건 머리 쓰고 돌 나르는 아줌마, 철새
허접쓰레기 소각하는 할머니 철새, 할아버지
철새, 매캐한 연기는 바람부는 방향으로 누워 흐르고
하천둑에 붙박힌 녹색 깃발은 제자리 펄럭임을
하고 있다 정오 한때
낮은 하늘에 걸린 전투기 한 대 여전히
철새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식어버린 밥을 먹고 모닥불 가에 모여든다
천변 봉제공장 여공들은 잠시 은행잎처럼
몇몇은 담장 밑에 옹송거리며 앉아 있고
더러는 노점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고 있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햇살 속에서
낙엽들만 철새처럼 와그르르 몰려다니는
저 썩어 흐르는 신천은 무사해도 되는가
무사해도 되는가
*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낙동강 / 안상학
저 강이 더 흘러가기 전에
기억해둬야지 은모래
발가숭이들 은어 몰던 은빛 여름
금모래 미루나무숲 키 큰 그늘
머리 풀던 갈대바람 금빛 가을
저 강이 더 흘러오기 전에
마음에 새겨둬야지
빨래터 그 눈부시던 무명천 물결
월남치마 말아 올린 어머니의 허벅지
찰랑이던 물살
새로 산 고무신 숨겨둔 곳 잊어버린
아이들의 울음소리
드넓은 모래밭 재첩들의 집
기억해두어야지
저 환한 강이 더 흘러가기 전에
그 때 놓아준 어리디 어린 칠성뱀장어까지
마음에 새겨두어야지
저 어두운 강이 더 흘러오기 전에
아슴한 기억 속으로 흘러간 그 종이배까지
저 강이 더 흘러가기 전에
저 강이 더 흘러오기 전에
뿌리 / 안상학
나는 어느 텃밭의 꽃이었을까
상추 사이 자란 봉숭아를 뽑아 던지며
나는 내 발밑을 생각해본다
내 뿌리는 왜 이렇게 말갛게 바람에 씻기고 있는 걸까
나는 어느 꽃밭의 잡초였을까
원추리 초롱꽃 사이사이 잡초를 뽑아 던지며
나는 내 뿌리를 생각해본다
내 발밑은 왜 이렇게 삼베 타래처럼 하늘거리고 있는 걸까
뽑힌 것일까
아니면 아예 땅에 뿌리내리지 않았던 것일까
무얼 알았다면
텃밭에서 꽃을 뽑고
꽃밭에서 잡초를 뽑는 구별과 선택 사이에서
내가 문득 내 발밑의 뿌리를 생각할 턱이 없다
아배 어매가 이 세상에 나를 낼 적에
텃밭의 봉숭아
꽃밭의 잡초로 내지는 않았겠지만
내 뿌리는 아직 허공이다 끝내
허공에다 뿌리내린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아직 살아 있을 턱이 없다
꽃이 그려준 자화상 / 안상학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예뻐하는 것이 네 전생이란다
그렇다고 손 안에 넣지는 말아라손 안에 가두는 순간
후생에서는 그 아름다운 전생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꽃이라든지, 혹은 그 무엇이든지
지금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네
후생이라면 끔찍하지 않니
후생에서 아름다운 전생을 두고두고 만나 보려거든
제발 손 안에 거두어 보듬어라
말하자면, 똥이라든지, 혹은 그 무엇이든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꽃들의 세계에선 지금 네가 꽃일지, 미안하게도
꽃들이 킁킁대며 네 냄새를 맡고 있을지
하지만; 아마도 꽃들은 내가 다음 세상에는 없어서
나를 더 이상 못 그릴 것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꽃들이야말로 내가 못하는 뿌리내리기를 터득한 지 이미 오랜 화상아니겠는가
실려 가는 소나무 / 안상학
내 사주에 나는 소나무를 닮은 갑목(甲木)이라는데
비록 박토에 뿌리박고 있지만
아무리 목이 말라도 강으로 걸어가는 법이 없는
고집 센 소나무라는데
트럭에 실려 가는 소나무 보면
겨우 옮겨 살 만큼 뿌리와 흙 새끼줄로 친친 동이고도
팔자 좋아라 누워 가는 소나무 보면 은근히 부러워진다
새 땅에 옮겨 앉아 새로 살아볼 수 있는 저 소나무처럼
나도 어디 참한 땅 옮겨 앉아 팔자 고쳐볼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도 이내 마음 고쳐먹는 것은
내 인생에도 물줄기 쳐들어올 날 있으리라고
하마나 하마나 버텨온 삶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박토는 고사하고 물도 흙도 없을 것만 같은
높은 산 바위에 걸터앉아
신선처럼 살아가는 소나무도 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선운사 / 안상학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 세상 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그렇다지,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 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불영사 / 안상학
새가 날아오른다
그림자는 땅에 두고 간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부처는
그림자를 연못에 두고
산등을 타고 올라가 바위가 되었다
대웅보전 앞
삼층 석탑은
원래 그림자를 갖지 않았다
초파일 무렵
아홉 번째 용을 타고 들어간 선묘는
여승의 그림자로 남았다
산신당앞 할미꽃은
제 그림자를 물고
오체투지 삼매에 들었다
몸을 땅에 묻은 돌거북은
그림자의 집착을 벗은 대신
절을 등에 지는 고행을 얻었다
새는 하늘에 있었고
그림자는 땅에 있었다
새는 새였고 그림자는 그림자였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풍탁 / 안상학
하늘에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연꽃 마음 내걸고 바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연꽃잎 입에 물고 여인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람을 앞세운 여인이 스며오면 꽃잎 날리며
바람을 안고 함께 울던 왕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사이에 땅속에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혀를 뽑힌 채 천년을 살았습니다
바람을 부르던 물고기도 없이 천년을 울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와서 노래하던 여인도
여인을 안고 울던 왕도 잊은 채 천년을 살았습니다
바람을 기다리며 살던 그 때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할 혀가 없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 풀어놓고 연꽃 피워 노래하던
그 때가 좋았다고 속삭일 목소리도,
하늘을 부여잡을 손도, 나를 아는 연인들도 이젠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바람을 기다리는 사랑만은 남아 있습니다
망매가 / 안상학
어머니 잃고 시를 얻었다
화살 하나 심장에 꽃은 채
삼십 년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왔다
종종 시만 조금 아픈 듯 힘겨워 했다
누이동생 앞세우고는 그런 시도 잃었다
심장에 불화살 꽂은 채
한 삼십 년은 또 너끈히 걸어갈 테지만
더 아픈 시는 없을 것 같다
사진 속 멀쩡한 누이처럼
무통분만의 시만 남아 이렇듯 서러울 것이다
국화 /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아무래도 쓸쓸할 것만 같아
올해는 나도 마음의 가지를 치지 않기로 한다.
상처만큼 더 웃으려드는 몰골 스스로도 쓸쓸하여
다만 한 가지 끝에 달빛 닮은 꽃 몇 달고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슬픔을 위문하며
서리라도 마중하러 새벽 길 가려한다.
날치 / 안상학
포식자에게 쫓겨 달아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지느러밀 날개로 날아오른다
살았다 아니, 죽었다
그 순간을 기다린 또 하나의 포식자
매서운 갈매기의 발톱이 너의 심장을 낚아챈다
너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날치여, 바다의 박쥐여
어떤 새들이 바다에 가서 죽는가
너에게는 하늘이 곧 무덤이다
마침내 발은 가지지 않아서 다행한 짐승아
나는 날개도 아가미도 없어서
이 땅에 발 떼면 죽는 줄 안다
호랑지빠귀 우는 밤 / 안상학
호랑지빠귀는 왜 우나
원고 마감 코앞에 두고 시는 없고
지나간 일기장을 들추다가
한 줄짜리 끼적거린 메모에 눈이 먼다
-기적소리를 듣고 슬피 우는 새가 있다
내가 쓴 글일까
아니면 어느 책에서 옮겨온 것일까
출처도 없고
검색창에 물어봐도 딴전이다
취중에 쓴 글일까
머릿속 가슴속 다 뒤져도 낯선 이 문장
시 한 편은 참하게 감추고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새
슬쩍 깃털 하나 뽑아본다
-기적소리를 듣고 슬피 우는 시가 있다
원고 마감 독촉 전화를 받고 진짜 시는 없고
하, 거, 참,
기적도 없는데 호랑지빠귀는 왜 저리 울어쌓나
밤기차 / 안상학
칠흑 같은 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마에 붉 밝히고 달리는 것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멀리서 기다리는 그대에게
쓸쓸하지 말라고
쓸쓸하지 말라고
내 사랑 별빛으로 먼저 보내는 것이다
거문도 동백나무 / 안상학
아궁이가 있었을 적
거문도 동백나무는 대체로 땔감이 되었다
세상 추울 때 꽃 피워 불 밝힌 것도 모자라
아궁이에서 온몸으로 꽃이 되었다
능호관은 아내의 영결사에서
아무리 추워도 꽃나무는 때지 않은 아내를 추모했다
측은지심 지키려는 마음 아내가 도와준 것이다
하나는 꽃의 마음이었고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자작나무와 술 한 잔 / 안상학
홀로 술 마신 적 있었던가. 아주 오래 전
사랑을 잃고 술잔 기울인 적 있었던가
자작나무처럼 저 자작나무처럼
태백준령 전설 안고 저잣거리 내려와
희디흰 피부도 잃고
곧고 정하던 몸가짐도 잃고
나날이 여위어가는 시청 앞 가로의 자작나무처럼
저 자작나무처럼
따뜻하던 눈보라도 잃고
상큼하기만 하던 높새바람도 잃고
지상에서 가장 먼저 햇살을 이마로 받던
그 기억도 잃어버리고
숫제 그 청청하던 잎부터 말라가는,
포도에 드리운
그림자조차 말라가는 저 자작나무처럼
홀로 술을 마신 적 있었던가. 아주 오래된
사랑을 안고 술잔을 기울인 적 있었던가.
우수(雨水) / 안상학
오늘은 늦은 점심을 해먹고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춥고 바람은 아렸습니다
새로 생긴 무덤 두 개가 추워보였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들은 겨울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습니다
산 너머 마을까지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다 말라버린 것 같은데, 다 얼어 있는 것만 같은데
이 게 무언가, 성질 급한 버들강아지 몇 마리
물기 없는 가지에 머리를 묻고 옹송그리며 저녁잠을 청하고 잇네요
오늘 내일 비는 당연히 돌아온다는 듯이 내리기라도 하면
버들강아지들은 머리를 털고 줄을 지어 냅다 달려 갈테지요
맹도견 / 안상학
나는 걸어 다니는 눈이다
눈이 안 보이는 내 사람이 두들겨 맞아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
몸 밖의 눈이다
입이라고 짖어서는 안 된다
이빨이라고 드러내서는 안 된다
누가 먹을 것을 주어도 절대 침 흘리지 말야아 한다
오직 내 시신경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에
길 일러주는 나는 눈일 뿐이다
길 아니면 가지 않고
신호 아니면 건너지 않고
물길이라면 버틸 줄 아는
단 한 사람에게 쓰일 수 있는 눈이어서 나는
굶어도 좋고 밟혀도 좋고 손가락질 받아도 좋다
빗길을 걸어가서 보고 싶은 사람 만나게 해주고
눈길을 걸어가서 사랑을 만질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눈 어두운 내 사람의
일정한 보폭을 가진 눈만이라도 좋다
적절한 마음을 가진 눈만이라도 좋다
오아시스 / 안상학
낙타가 뒷발 버티고 서서 새끼 낳던 오아시스에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새끼를 받던, 쿠피야 쓴 사내는 집으로 돌아가고, 히자브 두른 여인은 그네 타는 어린 아이 두엇 헐렁한 질바브에 거두어 갔다.
건초를 먹는 낙타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우리에는 새끼를 낳은 낙타가 긴 목을 늘이고 갓난 것을 핥았다.
새끼가 도리질하듯 머리를 몇 번 털자 비로소 고개를 들어 긴 목을 초승달 모양으로 가다듬다 이내 고개를 숙여 건초더미를 뒤졌다.
늦은 저녁을 먹는 그 길고 곧은 목으로 별이 미끄러져 내리는지 검은 눈시울에 자꾸만 반짝이는 것이 맺혔다 떨어지곤 했다.
이윽고 새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래를 밟으며 첫 걸음을 뗐다. 어미의 젖이 퉁퉁 불어 있었다.
아버지의 검지 / 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번 한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울릉도 / 안상학
너는 어느 먼 전설 속 이 땅이 험한 바다를 표류할 때 거대한 해일파도에 가라앉을까 연백인지 만경인지 늠름하게 섰다가 허리 밑을 잘라 평야를 만들어놓고 금강인 양 설악인 양 아름다운 얼굴로 동해나 먼 곳 수자리 떠난, 동해나 깊은 곳 파도 막으러 떠난 그 봉우리가 아니랴. 그러기에,
너는 한반도의 심장이다
너 없으면 이 땅은
무슨 수로 매일 아침
뜨거운 태양을 길어 올리랴
용암 같은 피 고동치게 하랴
너는 한반도의 허파다
너 아니면 이 하늘은
무슨 수로 하루 종일
새들을 노래하게 하랴
꽃들을 향기롭게 하랴
너는 한반도의 젖꼭지다
너 아니면 우리들은
무슨 수로 이 저녁에
목젖을 축이랴 그 품에
편안한 꿈 꿀 수 있으랴
동해나 깊은 너 아니면
동해나 먼 너 없다면
무슨 수로 오늘 하루
지는 해를 편안히 보낼 수 있으랴
밤도 깊어 아침 해를 기다릴 수 있으랴
그러기에, 너는 어느 먼먼 전설 속 장백산 머리에 있던 으뜸 봉우리였는지도 몰라 이 땅이 온통 불가마 카오스에 휩싸였을 때 네 스스로 뜨거운 목을 쳐 천지 만들어 식혀놓고 동해나 차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그, 오늘도 맑은 바람에 마가목 이마 씻는 울릉아, 부드러운 는개로 해국화 입술 적시는 울릉아
그리운 모닥불 / 안상학
우리는 한 때 모닥불이었다
하나둘씩 모여 불씨를 키우고
한 무리 한 떼 모여 불꽃으로 피어
하나 되어 어깨를 겯고 세상을 따뜻하게 불러모았다
우리는 한 때 모닥불이었다
하나가 연기로 사라지면
둘이 불꽃 속에 뛰어 들었고
둘이 한줌 재로 사라지면
열이 불쏘시개로 불꽃을 키웠다
세월이 흐르고
희끗희끗 눈발이 닥치자
하나 둘씩 모닥불에서 걸어 나갔다
숯이 되다만 검은 얼굴로
물을 끼얹은 듯 물기어린 눈빛으로
산산이 부셔져 세상 밖으로 걸어갔다
모여서는 무쇠도 불꽃이 되던 모닥불
세상을 따뜻하게 불러 모으던 그리운 모닥불
불이 되지 못한 연기만 피어올라
이젠 날벌레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모닥불
그리운 모닥불
그 많은 불씨들 뿔뿔이 흩어져
어느 눈발 속을 걸어가고 있을까
다시 모닥불이 되는 따뜻한 꿈을 꾸고 있을까
백수 / 안상학
요즘 아내의 방문 여닫는 소리 자꾸만 크게 들린다.
도대체 뭘 해요 쿵, 뭐 좀 어떻게 해봐요 쿵,
부글부글 속 끓다가도 끽, 뭐라 목젖을 잡아당기다가도 끼익,
한숨 한 번 내쉴 양이면 그마저 문소리에 끼여 끽,
문소리가 격해질수록 나는 벙어리가 되어간다.
쿵, 하는 문소리 사그라지는 틈으로 아내의 목소리
아이더러, 아빠 식사하세요 해, 하는 말 엿듣고 눈물난다.
아내에게
꽃은 이 땅에 쉬어가는 바람 같은 것
바람은 이 땅을 떠나는 꽃 같은 것
사람은 이 땅에 쉬어가는 꽃 같은 것
꽃은 이 땅을 떠나는 사람 같은 것
나 그대에게 쉬든
그대 나에게 쉬든
사랑은 이 땅에 쉬어가는 바람 같은 것
바람은 이 땅을 떠나는 사랑 같은 것
삶은 이 땅에 쉬어 가는 꽃 같은 것
꽃은 이 땅을 떠나는 삶 같은 것
나 그대에게 꽃으로 쉬든
그대 나에게 바람으로 쉬든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살아갈 때
향기도 번지고 홀씨도 나는 일
흔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바람 아니랴
밤새 무슨 일이 / 안상학
누굴까
동사무소 앞 환경미화용 초대형 화분
그저께 심어놓은 꽃배추들을
마구 뽑아 던진 이는 누구였을까
배추농사 접은 농민이었을까
뿌리 뽑힌 정리해고자의 취중 발산이었을까
무어라 말하며 죄다 뽑았을까
꽃배추 한 포기에 씨펄
꽃배추 한 포기에 개 같은
꽃배추 한 포기에 니 죽고
꽃배추 한 포기에 내 죽자, 했을까
저런 마음이 한도를 넘으면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는 걸까
사람을 어떻게 하기도 하는 걸까
동사무소 직원들 다시 심으며 뭐라 말할까
꽃배추 한 포기에 씨펄
꽃배추 한 포기에 개 같은 놈들, 할까, 아니면
꽃배추 한 포기에 그래그래
꽃배추 한 포기에 이래라도 풀어야지, 할까
문득 꽃배추 뽑은 그 마음이 내 맘 같기도 하고
다시 심는 마음이 내 맘 같기도 한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이른 아침
꽃배추들 뿌리째 널브러진 길
물 / 안상학
내 어딜 가도
세상 고르게 하고 싶었니라
웅덩이 채우고
갈라진 곳 메우며
하늘도
산도
다 받아들여
골고루 폈니라
돌 던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