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집회
주 하나님
1. 창조의 주 여호와
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이현래목사님
성전을 지을 때 모두 자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왔다고 되어있다. 솔로몬의 성전 역시 마찬가지고 성막을 세울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헌금을 하는 자체가 예배다. 드린다는 것 자체가 예배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해도 지루하지 않다. 우리 교회 생긴 이후로 오랫동안 헌금 드린 것을 읽은 것 같다. 감사하다. 정말 늘 말하지만 누가 한지 모르게 그렇게 많은 헌금이 들어와서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여기서 예배를 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40년 전 25명의 대학생과 처음 모이면서 이런 생각을 했겠는가? 그때 아마 재승형제가 대구에 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있을 곳이 없으니까 부득이 제천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자취방이니까 있을 곳이 없었는데 재승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때까지 모르겠지만 머물 때까지 머무르자는 것이었다. 머무르는 것도 주님 안에 머무르면 이렇게 좋은 날이 오는 것 같다.
오늘이 있기까지 밑바탕이 되어 준 재승형제와 경선자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물론 내 아내는 내가 돈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밑받침을 해주었고, 대구에서는 재승형제와 경선자매가 뒷받침을 해서 오늘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늘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게 하셨다.
날마다 새롭고 늘 신기하기만 했던 지난날이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교회도 이런 경험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늘 새로웠다. 항상 언제든지 고루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이럴 수 없지 않겠는가? 생명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멈춰있는 것인데, 우리 교회는 멈추지 않았고 한 번도 서 있지 않았다. 자고 나면 달라지고 또 자고 나면 달라졌다. 이렇게 해서 나무가 자라듯이 이렇게 자란 것이다. 누가 예정한 것도 아니고 계산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자라온 것이다. 누구도 이렇게 자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한 것과 똑같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양사람들은 자기들의 잣대를 가지고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예상이 맞지 않았다. 다 틀리고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의 계획만 이루어졌다.
유월절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날 저녁 방에서 양의 고기를 먹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 양 고기를 먹고 애굽을 탈출해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갈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밑에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브레인들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그 일을 몰랐던 것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광야에 살고 있는 4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하지만 아무도 맞지 않았다. 왜 맞지 않는가? 자라나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물건 같으면 예상을 맞출 수가 있는데, 계속 살고 있으니까 예상이 맞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키가 클 때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갑자기 크는 아이도 있고 천천히 크는 아이도 있기 때문에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다. 신발을 사주면 금방 작아져버린다. 옷을 사주어도 금방 작아져버린다. 아무도 그것을 다 예상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렇다. 얼마나 신기한가! 처음부터 이런 집을 지어놓고 왔으면 우습지 않겠는가. 여기에 25명이 앉아 있으면 어떻겠는가? 딱 알맞게 사람이 있는 만큼 늘 집을 주셨다. 만약 우리가 만명이 된다면 만명이 들어갈 집을 또 주실 것이다.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신기하고 놀랍다. 누가 그분을 측량할 수 있고 누가 그분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무도 할 수 없다. 고향에서 같이 자라던 친구가 2명 남았다. 한 사람은 동갑인데 어제 왔다갔다. 또 한 사람은 지금 병원에 있다. 어제 전화가 왔다. 교회로 오려고 하는데 부인이 전화를 했는데, 준비하라고 한다며 연락이 왔다.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자네보다 더 살아야할 텐데 하던 친구이다. 세상은 모른다. 내가 그 친구보다 더 살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정말 건강한 사람이었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이다. 어렸을 때, 내가 100이면 100이 다 부러웠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만 골수암에 걸려서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몇 달 지나니까 어제 부인으로부터 그런 전화가 왔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지난번에 누가 와서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죽기는 내가 왜 죽느냐고 했다.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것을 사람이 알겠는가? 하나님이 아신다.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은 <창조의 주 여호와>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준비했다.
이번 집회가 3번인데 아주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문제를 말씀 드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들의 기초이다. 집은 기초를 한 번 하면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죽은 것이니까. 땅이니까 한 번 기초를 하면 집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잘했든지 못했든지 그 위에 집이 올라간다. 기초를 잘못하면 집이 허물어진다.
그런데 인생은 분명하게 완전한 기초가 있는데, 그 기초가 점진적으로 다져진다. 그래서 우리는 기초를 계속 다져야 된다. 하나님 말씀만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탄의 말도 세상에 있다. 끊임없이 그 기초를 흔드는 것이다. 우리를 흔들 때 나뭇가지를 잡고 흔드는 것이 아니고, 밑뿌리를 흔든다. 밑뿌리가 흔들리면 나뭇가지는 저절로 흔들리고 만다. 우리가 이 밑뿌리를 항상 든든하게 하면 흔들어보았자 이파리밖에 흔들지 못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자잘한 문제가 더러 있다. 이런 문제들은 흔들 수 있지만 뿌리가 든든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집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파리는 해마다 피었다가 진다. 그리고 벌레가 먹어서 약을 쳐놓았다. 드릴로 뚫어서 약을 넣었다. 그러면 1년 동안 견딘다. 그런데 뿌리가 살아있으니까 그 나무는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확실한 사람과 뿌리가 확실치 못하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달라진다. 뿌리가 있는 사람과 뿌리가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렇구나. 아무리 잎이 무성해보여도 뿌리가 없는 사람은 한 방에 나가고,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뿌리가 확실한 사람은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늘 지나가면서 사는 것이다. 이 뿌리가 확실해야 된다는 것은 생명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누가 세상을 창조했는가?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몇 번을 다져도 또 다져야 되고 또 다져야 되는 문제이다.
이번 집회에는 세 번, 창조의 주 여호와, 구속의 주 예수, 생명의 주 성령, 세 부분으로 갈라서 말씀 드릴 것이다.
성경은 맨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했다. 태초란 아무것도 없는 때라는 뜻이고, 하나님이란 엘(EL)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전능자”라는 뜻인데 없는데서 있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며. 천지란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마디는 전능자가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는 말이다.
성경은 맨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다른 말들은 이런 말이 없다. 우리는 늘 흔하게 듣는 말이고 흔히 있는 말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세상 지혜의 최고봉이라는 불경에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이 없다.
불경은 ‘이 뭐꼬?’로 시작한다. 불경에 들어가면 첫 번째로 의심하라고 한다. 뭔지 의심하라. 모든 것을 다 의심하라. 왜냐하면 진실이 아닐 수 있으니까, 실재가 아닐 수 있으니까 다 의심해 보라는 것이다.
교회를 가면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이것이 완전히 다른 점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니까 참 답답하다. 다 의심해 보라고 하면 그렇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무조건 믿으라고 하니까 아주 답답한 것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다.
태초란 아무것도 없는 때라는 뜻이고, 하나님이란 우리말로 엘(EL)이라는 말이다. 엘에서 엘로힘, 그 다음 단계를 거쳐서 여호와로 이름이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다. 그분은 그냥 존재로 계시지만 사실은 이름이 없고, 우리가 인식하는 이름이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이 인식하는 이름이 맨 먼저는 엘, 전능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엘로힘, 능력,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발전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엘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찾아 찾아 연역하면 그렇게 된다.“전능자”라는 뜻인데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천지란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마디는 전능자가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는 말이다.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전능자가 시작했다는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쉬운 말이 없다. 의심해보라. 어디까지 의심할 것인가? 끝이 없다.
우연히 생겼다. 우리가 그 우연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연이라는 것은 있기는 있는데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우연이 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얼른 생각하면 쉬울 것 같지만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온 인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철학자들이 동원되어도 우연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그런데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하는 말은 참 무책임한 말이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이다. 우연히 그랬다는 말은 정말 모르는 말이다.
저절로 생겼다. 이 말은 정말 억받치는 말이다. 저절로 생기는 것이 있는가? 여러분도 저절로 생기는 것을 보았는가? 못 봤다. 저절로 생겼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물어보면 모른다. 저절로 생겼다는 말이 쉬운 말 같고 알아듣기 쉬운 말 같지만 전혀 못 알아듣는 말이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저절로 생겼다는 말이다.
지상의 최고봉이라는 석가모니는 연기라는 것을 깨달아서 얘기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그것도 참 막막한 말이다. 인연으로 생겼다는 말이 얼른 보면 맞는 말이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내가 대구에 왔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대구에 왔다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인연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은 아니다. 인연이라는 말도 중간 토막만 얘기하는 것이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말이다.
세상에서 하는 말은 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말이다. 거기서 내 인생의 기초를 어떻게 놓겠는가? 이 땅을 파보아야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인지, 짓지 못할 땅인지를 알 수 있다. 요즘 큰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뚫어보아 암반이 있는지를 검사하고 집을 짓는다. 흙이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집(교회)을 지을 때 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니까 전혀 다른 상상하지 못한 땅이 나왔다. 이 대구지방에 없는 땅이 나왔다. 대구지방 어디도 화강암이 있는 땅이 없고, 전부 흙과 돌이 섞여진 땅이라고 한다. 땅만 파면 돌이 나온다. 교회 앞에 <길>이라고 쓰여진 돌도 이 땅에서 나온 돌이다. 땅을 파면 돌이 나오는 땅이다. 알고 보면 돈 안 되는 땅이다. 화강암이 나오면 아주 값비싼 땅인데, 대구지방에는 화강암이 없다고 한다. 용달형님이 토목전문가이신데 그 말씀을 하셨다. 땅을 팠는데 노란 황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질퍽한 땅도 아니고 물 한 방울이 없었다. 뭘 다져놓은 땅이었다. 저런 땅이 나올 줄 알았으면 지하를 크게 팠을 것이다. 여기는 분명히 물이 난다고 생각하여 지하가 위험하니까 반만 파자고 하여 지하가 적게 되었다. 그런데 밑바탕은 전혀 다른 땅으로 물 한 방울이 없다. 벽돌 깔아놓은 것 같다. 그런 좋은 기초 위에 집(교회)이 세워져있다.
기초가 무엇인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기초다. 기초가 애매모호하면 인생이 애매모호하다. 우연히 생겼다. 저절로 생겼다. 인연으로 생겼다. 다 애매모호하다.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 아무리 찾아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태초에 전능자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당장 이 교회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교회를 누가 만들었는가? 저절로 생겼는가? 우연히 생겼는가? 아니면 연기로 생겼는가? 이것은 분명하게 설계한 사람이 있고, 건축한 사람이 있고, 헌금한 사람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누구인가? 다 전능자들이다. 집을 지은 사람도 전능자고 집을 설계한 사람도 전능자고 헌금한 사람도 전능자다. 그 능력이 합해져서 교회가 지어졌다. 돈이 없이도 짓지 못하고, 설계자 없이도 짓지 못하고, 건축자 없이도 짓지 못하니까 전능자들이다. 전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신 이가 전능자다. 아주 가깝게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전능자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전능자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데, 아기를 낳았으면 엄마들은 다 전능자다. 아기를 만드는가? 아무도 만들 수가 없다. 여자들 밖에 낳지 못한다. 여자들은 전능자다. 아기 낳는 전능자다. 그러면 쉽다. 아기는 여자들 밖에 낳지 못한다. 남자는 낳지 못한다. 남자는 아기를 낳는데 있어서는 전능자가 아니다. 전능자라는 뜻이 이런 뜻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이, 그것을 보고 전능자라고 한다. 모세가 당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I am~"(나는 나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말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그 말이다. "I am the way.", "I am the thru.", "I am the life."다. "I am~" 다음에 뭐가 붙는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이 "I am~"이다. 나는 무엇이다. 붙이는 대로 된다. 전능자가 따로 없다. 우리가 다 전능자의 아들들이다. 전능자의 아들들이니까 전능자다. 어떤 면에서는 다 전능자다. 겁나는가? 겁내지 말라. 우리 자매님들이 다 전능자다. 아직 아기를 낳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낳아 본 사람들은 다 이해할 것이다. 여자가 아니고 누가 아기를 낳는가? 아무도 아기를 낳을 수가 없으므로 전능자다. 다 어떤 면에서 전능자들이다.
맨 처음에 아무 것도 없을 때, 전능자가 모든 것을 시작했다. 아기가 어디서 저절로 나오는가? 맨 처음에 아기가 없을 때 전능자가 아기를 낳았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아주 쉬운 말이다. 아기가 없었는데 아무도 없었는데 식구가 둘 뿐이었는데 여자가 아기를 낳아 셋이 되었다. 그 아기를 또 하나 더 낳으니까 식구가 넷이 되었다. 하나 더 낳으니까 다섯 명이 되었다. 그 아들이 커서 색시를 데리고 와서 장가를 갔다. 아들이 아기를 낳으니 벌써 일곱 명이 되었다. 창조가 이렇게 된 것이다.
성경에 있는 말처럼 완전하고 쉬운 말이 없다. 우연히 아기가 나왔다. 말이 되는가? 저절로 아기가 나오더라. 말이 되는가? 우리가 전혀 모르는 말이다. 달나라에서는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지구상에서는 모르는 말이다.
태초에 전능자가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 아주 쉽지 않은가! 이해가 안 되는 분을 손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것은 꼭 집고 넘어가야 된다. 너무 중요한 문제다. 이것이 없으면 한참 믿고 가다보면 안 되고, 또 한참 믿고 가다보면 안 된다. 맨 처음에 아무것도 없을 때, 전능자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
무엇이든지, 무엇을 하던지, 어디로 가든지, 모든 것은 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있다. 시작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면 시작하신 이는 언제부터 있었으며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바 된 것은 시작 하신 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모든 것은 다 시작이 있다. 시작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이 지구상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한다. 무언방자한 얘기다. 하나님밖에 그런 분이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 전능자를 헤아릴 수 없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지 불교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전능자라는 말이 아니다.
시작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늘부터 시작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는지 자세히 조사해보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시작이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물리학자다. 온 세상을 연구하고 알아보고 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너무 신비하니까.
시작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시작하신 이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이 질문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많이 한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결국 인간도 지은바 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지으신 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모르는 것이다. 가르쳐 주어야 알게 되고 남이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미루어 아는 것이다.
우리는 지은바 된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시작하신 이를 모른다. 아기가 자기의 시작을 아는가? 모른다. 태어나기만 했지 자기는 모른다. 사람이 굉장히 머리가 좋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자기의 시작을 아무도 모른다. 인간도 지은바 된 존재이기 때문에 지으신 이를 모른다. 당연히 모를 것이다. 지은바 된 존재가 지으신 이를 어떻게 알겠는가. 심지어는 자기를 낳은 부모도 모른다. 사람은 누가 나를 낳았는지를 묻는다. 낳고서 부모가 떠나 버리면 그 아기는 절대로 자기 부모를 모른다.
알고 보면 사람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를 낳아준 이도 모르는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남이 가르쳐주어야 안다.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이 네 엄마다, 네 아빠다, 이렇게 가르쳐주어야 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모른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모르는데 누가 알겠는가? 알 수가 없다. 경험으로 밖에는 모른다. 남의 말을 듣고 경험해보고 남이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경험해보고 아는 것이다. 내 스스로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젊은 날에 헤맬 때, 이것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알아지겠는가? 이것을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 말도 들어보고 저 말도 들어보았는데 모르겠더라.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봤지만 모르겠더라. 보면 볼수록 더 헷갈렸다. 답이 없는 것은 볼수록 헷갈린다. 나를 낳은 내 부모도 모르는 존재가 어떻게 모든 것을 지으신 이를 알겠는가? 내가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도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런 것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도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머리가 좋기 때문에 이런 것을 생각한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졌다. 뚱딴지같은 생각이다. 가르쳐주어야 알면서 가르쳐 주어서 알았으면서도 어머니가 가르쳐주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어서 알았다.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말했는가?
그런데 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하는가? 유대인들은 왜 이렇게 말했는가? 지금 내가 설명을 많이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밖에 나가면 아무도 이것을 모른다. 자기가 스스로 부모를 몰랐으면서도 스스로 부모를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누가 이것을 가르쳐주어서 이 말을 했는가? 이 위대한 말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위대한 말을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했는가? 그것이 특이한 점이다. 우리와 다른 점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백성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억류되어 400년 동안 노예가 된 종들이었다. 그들은 힘으로는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기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능력으로 바로를 제압하고 자기들을 탈출하게 한 “힘”을 만난 것이다. 즉 그들은 엘(전능자)을 만났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백성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억류되어 400년 동안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우리에게 백제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고려가 있었던 것처럼 그 사람들의 생생한 역사이다.
그런데 그들은 힘으로는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예가 어떻게 자기들 힘으로 나오겠는가? 자기들 힘으로 나올 수 있으면 노예가 아니다.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사실 알고 보면 일본이 망했으니까 해방이 되었지 우리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언제 상해임시정부에서 군대를 만들어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해방이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기회만 주었으면 될 것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너무 일찍 이겨버려서 안 됐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것은 자존심도 아니도 뭣도 아니다. 우리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다. 전혀 불가능했다. 우리 한국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으면, 유대인 같은 그런 백성이었으면, 전능자가 미군을 보내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기 때문에 그냥 진실하게 아는 것은 미군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서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아는 것이고,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군대를 만들어서 해방이 되어야 되는데 미리 나오게 하여 독립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능력으로 바로를 제압하고 자기들을 탈출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능자를 만난 것이다. 자기들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데 어떤 능력이 와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바로가 굴복하게 되었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식구들끼리 안에 들어가서 영고기를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애굽 사람들이 빨리 나가달라는 것이다. 어제까지 못나가게 하던 사람들이 빨리 나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왔다. 우리는 못 나간다, 뭣 좀 내놓아야 나간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반지도 갖다 주고 어떤 사람은 금목걸이도 갖다 주면서 빨리 나가라고 한다. 왜?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으면 자기들이 다 망하겠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라는 것이다. 억지로 싸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대대 후손들에게 말을 했다. 유대인들은 가정교육이 철저한 사람들이다. 가정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얘기하는 사람들인데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아버지가 자기가 산 일생을 아들에게 얘기해주고, 그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합해져서 성경이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가정교육이 아주 철저하다고 한다. 유대인이냐 아니냐, 순종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방법이 남자가 유대인일지라도 여자가 유대인이 아니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남자가 유대인이 아닐지라도 여자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라고 한다. 부계사회인 것 같으면서도 여자로 말미암아 유대인이 된다고 한다. 교육이다. 그 나라에서는 여자로 인해서 대가 이어져간다.
마태복음을 읽어도 그렇다. 족보는 남자의 족보이다. 그런데 그 족보가 돌아갈 때마다 여자가 들어가 있다. 네명, 다섯명의 여자가 있어서 족보가 갈라졌다. 강을 건널 때마다 다리가 있다. 그 다리가 여자이다. 그래서 건너가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대대손손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돈 벌러 돌아다니니까 교육을 못했을 것이다. 여자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그 이야기를 해주어서 대대손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토론토에 갔을 때 유대인 회당에 가보았다. 그 날도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필 그날만 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다. 모일 때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이렇게 해서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다. 이렇게 이렇게 광야를 넘어온 백성이다. 랍비가 나와서 역사를 말하는데 실감이 났다. 우리는 늘 얘기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지만 거기는 자기들의 역사를 직접 얘기하니까 실감났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백성이다.
그들은 “힘”을 만난 것이다. 무엇인지 모를 힘을 만났다. 자기들이 할 수도 없는 것을 하게 하는 힘을 만났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힘을 만났다.
이스라엘의 인도자 모세는 80세의 나이에 처가에서 양치기를 하던 중에 전능자를 만났고 그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가 바로 엘, 혹은 엘로힘, 즉 전능자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의 명을 따라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광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인도자 모세는 80세의 나이에 처갓집에서 양치기를 했다. 그때 누구를 만났다. 전능자라는 분을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나는 여호와다. 네가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하니까 내가 누구길래 바로 앞에 나가겠습니까? 내가 가면 바로가 내 백성을 놓아주겠습니까? 이랬더니 내 말을 듣고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본 것이다. 대체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물으니까 나는 여호와다. 나는 없는 것을 있게 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여 주신 것이다. 이 말을 믿고 애굽에 내려와서 바로 앞에 섰던 것이다. 처음에는 바로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엘로힘이 나오니까 여호와의 능력이 나오니까 할 수 없이 굴복했던 것이다. 여호와를 만났다. “나는 ~이다”이신 분을 만났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분을 만났다. 우리가 그런 분을 만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 분을 만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넘친다. 그런 분을 만나면 절망이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전능자가 있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분이 있다. 그러니까 담대해진다.
이스라엘이 저렇게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땅을 잃고 돌아다니면서도 왜 그 민족이 흩어지지 않고 모일 수가 있었는가? 이것 때문이다. 자기들이 경험했던 전능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여호와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전능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언젠가는 할 것이다. 지금 안 돼도 꼭 할 것이다. 이것이 소망이다.
이 역사는 그들의 시작이 되었고 기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라는 믿음은 이런 경험 위에 세워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이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하늘과 땅도 전능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달력은 유월절 그날부터 달력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달력이 아니고, 애굽에서 해방된 그날을 기념하는 거기서부터 1월이 시작된다. 이것을 영원토록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농사를 지으니까 절기 맞추기가 쉬워서 음력을 사용한다. 농사를 짓는 데는 대부분 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끄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때부터 해가 시작된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인생길을 가다보면 그 전은 내 생일 같지 않다. 내가 부름 받은 그 날이 내가 태어난 날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 받은 그 날이 자기들 달력의 첫 달이다. 그러니 이 백성은 특이하다. 우리는 태양력을 쓰느냐 음력을 쓰느냐인데 그들은 태양력도 아니고 음력도 아니고 자기들 민족이 해방된 날이다.
우리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8월 15일 그날로 우리 달력을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대로 그것을 지킨다면 우리는 그 날에 해방된 사람들이다. 이것을 대대로 후손이 말할 것이다. 태양이 이렇게 돌기 때문에 1월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해방된 날이 이 날이다. 대한민국은 이 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 좋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지키지도 않는다. 우리나라는 건국일을 지키지도 않는다. 미국은 독립기념일을 지킨다. 해방된 날 말고 우리는 국가로서 건국한 날이 있지만 건국일을 지키지도 않는다. 나도 잘 모른다. 하도 지키지 않으니까 다 모른다.
우리는 나쁜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은 기억하면 좋은데, 좋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나쁜 것만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아주 좋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일생에서 나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좋은 것만 생각하니까 참 행복하더라. 별이 빛나는 밤이면 밖에 나와서 가만히 혼자 생각하고 앉았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좋은 것을 생각한다. 지나간 내 인생의 역사에서 은혜된 것만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좋다. 늘 생각해도 좋다. 내 인생이 내게 딱 맞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배열해 주셨는지, 감사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 나는 이것은 내 인생에서 확실하게 경험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렀다. 나는 없었다. 없는 데 나를 불러내었다. 그날부터 나는 존재하게 되었다. 그분이 나를 부르신 날부터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분이 만일 부르지 않았다면 그냥 잡초 같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시작하신 이가 나도 마찬가지로 시작하셨다. 육신으로만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생을 다시 시작하셨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시작하십니다. 이 믿음! 이 경험! 이것처럼 놀라운 경험이 없다.
누가 나를 시작했는가? 분명히 엄마아빠가 나를 시작했는데, 그 일이 나한테 그렇게 감사하지 않다. 엄마아빠가 아니면 여러분이 어떻게 세상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엄마아빠가 나를 낳아주신 것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혹시 있는가? 있으면 참 미안하다. 그런 분이 있으면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고 나를 낳았겠는가?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고 한다. 산부인과 병원이 있는가? 옛날에는 애기를 낳다가 잘못되면 죽었다. 아기 낳는 것이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렇게 낳았는데도 감사가 안 되는데 뭐가 감사가 되겠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해방된 그것이 자기들에게 시작이었다. 이것을 우리 해의 시작으로 하자. 이런 백성들이다. 우리도 우리가 해방된 것을 우리 해의 시작으로 하자. 왜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 나는 엄마아빠가 나를 낳은 것을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다. 얘기를 듣고 알았다. 그런데 부르신 이가 나를 부르신 것은 내가 확실히 안다. 부르신 것은 확실히 안다. 그 부르심이 전능자의 부르심이었다. 그 부르심이 아무나가 부르신 것이 아니고, 전능자의 부르심이었다.
사기꾼이 나를 불렀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기꾼이 된다. 내가 누구한테 부름을 받았는가? 사람은 자라나면서 다 누구한테 부름을 받고 나간다. 어렸을 때는 집안에 있다가 좀 크면 친구들에게 불려 나간다. 좋은 친구에게 불려 나가면 그 친구처럼 되고, 나쁜 친구에게 불려 나가면 나쁜 친구처럼 된다. 알고 보면 다 부름이다.
전능자에게 부름 받은 사람은 아예 부름 받은 것 자체가 축복이다. 그때부터가 축복이다. 교회 가자. 이것도 부름이다. 교회 가자고 해서 교회 오는 사람들은 최소한 지옥은 안 갈 것이다. 교회에서 부르는 것은 참 축복인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불러야겠다. 어제도 보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많이 왔다. 친구라고 불러서 많이 왔다. 이런 식으로 부르면 사람들이 오지 않겠는가. 우리가 부르면 우리가 전능자가 된다. 최소한도 그 부분에서 전능자가 된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데 내가 부른다면 그 사람이 전능자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면 그 사람이 나의 구원자다.
나를 불렀던 친구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 친구가 나에게는 모세다. 그 친구가 나에게는 전능자다. 아무도 나를 불러낼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누구도 나를 용기 있게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를 불러내었다. 그 친구가 아니면 나를 불러내지 못한다. 나는 노화도 그 바닷가에서 물에 빠져죽지 않으면 다행이고 거기서 살다가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 친구가 불러서 나는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구원자가 불렀기 때문에 전능자가 불렀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는 것이 그냥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부름을 받고 왔다. 여러분은 망할 사람에게 부름 받고 온 것이 아니고, 행복한 사람에게 부름 받고 왔다. 자기가 행복하지 않으면 남을 부르지 않는다. 자기가 행복하니까 부른다. 행복한 사람에게 부름 받은 사람은 적어도 행복한 노선 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만 와도 일단 기차는 탔다. 자고 있으면 기차가 간다. 이런 사람은 나는 이제 안심이다. 나는 이제 됐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자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도 전능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구도 시작할 수 없는 이것을 누가 시작한 이가 있을 것이다. 그 시작하신 이가 전능자다. 전능자 없이는 시작될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이 믿음으로 살고 있고 소망을 얻고 있다. 전능자에 대한 믿음은 모든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될 삶의 기초다. 이 믿음 안에서 나로서는 불가능할 지라도 전능하신 이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이러한 경험은 조급한 중에도 여유롭게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까지도 살고 있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헤매고 다니면서도 독일에서는 600만이 학살당하고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그들은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았다. 왜? 전능자가 자기들을 불렀으니까.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는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소망이 있으니까. 그것이 없는 백성 같으면 진작 흩어졌을 것이다. 무엇을 믿고 기다리고 있겠는가?
전능자에 대한 믿음은 모든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될 삶의 기초다. 우연히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갈 것이다. 저절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절로 왔다가 저절로 갈 것이다.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끝까지 의심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능자가 부른 사람은 분명하게 소망이 있다. 지금도 소망이지만 앞으로 더 소망이 있다. 어떤 경우가 되어도 소망이 있다. 왜? 전능자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부름을 받을 것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신학교를 가니까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젊은 애들이 3년씩 기도를 하고 왔다는 것이다.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나이에 하나님의 종이 될 거라고 기도를 하고 왔을까하고 굉장히 존경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니까 뒤숭숭하게 모두 앉아서 얘기 하는 것을 들으니까 여기를 나오면 어디를 가느냐, 갈 데가 없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께 3년 동안 기도를 했다면서 갈 데가 없다니 하고 생각했다. 사람이 불러도 대책이 있어서 부르지 대책 없이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러분이 대구교회에 오면 불행할 것이라면 부르겠는가? 부르지 않는다. 내 친구가 대구교회에 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렀다면서 왜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지 그때는 이해가 안 됐고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3년 동안 기도 했다더니 뭘 기도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공연히 있는 사람을 공연히 부르겠는가? 일 없이 나를 불렀겠는가?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한 방에 같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마음이 늘 초초하고 불안했다. 하루는 나에게 李선생님 불안하지 않습니까? 한다. 뭐가 불안하냐고 하니까 자기는 마음이 항상 불안하다고 한다. 누가 쳐들어올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매트릭스 밑에 칼을 숨기고 있다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 올 것 같다고 한다. 감리교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공부도 잘하던 학생이었는고 자기 어머니도 권사이셨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하다. 소망이 없으면 불안하다. 어떤 경우도 전능자가 나를 불렀으면 내가 불안할 일이 없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나를 불렀다면 월급 걱정할 것이 없다. 월급을 얼마나 줄 것이지, 나를 몇 년 동안 부려먹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으면 망할 일이지 되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불렀으면 내가 삼성직원이 되었구나, 전능자가 나를 불러주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삼성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전능자다. 거기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이 믿음 안에서 나로서는 불가능할 지라도 전능하신 이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는 것이다. 잠언에 보면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다.”고 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이다. 일을 이루시는 이가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
기초가 확실하고 튼튼해야 집이 튼튼하다.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분명해야 목표가 있고 성취함이 있다.
기초가 확실하고 튼튼해야 집이 튼튼하다. 오늘 어떤 불행이 왔다. 오늘은 괴로움이 왔다. 오늘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왔다. 오늘은 괴롭겠지만 나는 전능자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내일이 있다. 오늘은 안 되지만 내일은 있다. 나로서는 안 되지만 전능자에게는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 죽은 후에까지도 소망이 있다. 죽으면서까지도 소망을 갖고 죽는 것이다. 왜? 소망이 있으니까. 기초가 확실하고 튼튼하면 위에는 좀 흔들리더라도 바람이 자면 자는 것이다. 항상 바람이 불겠는가?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분명해야 목표가 있고 성취함이 있는 것이다.
시작하신 이가 없으면 목표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목표는 목표라고 할 수가 없다. 전능자의 부르심 안에서 세워진 목표라야 그 목표가 완전하지 자기 혼자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래로 성을 만들었다가 허물었다가 장난하는 것이다. 인생은 장난할 시간이 없다. 어렸을 때 모래성 쌓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더 하면 안 된다. 커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 그렇게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우리는 부르신 이가 있으니까 목표가 있다. 목표에 도달해야 된다. 시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취함도 기대하게 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신부로 삼기로 한다. 어느 날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 모든 것이 놓아졌다. 신부로 삼겠다고 하신 이가 오죽 나를 가꾸어주겠는가? 남자들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아내가 화장을 잘하고 다니기를 원한다고 한다. 항상 예쁘게 보이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남자가 본인 자신보다도 자기 아내가 더 예뻐지기를 원하는데 염려하고 있으면 헛일이다.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남편들이 더 신경 쓰고 있으니까. 괜히 남편이 신경 쓰고 있는데 나까지 신경 쓰고 있으면 주름살만 생긴다. 이제부터는 자매님들은 안심해라. 남편이 더 신경 쓰고 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면 10년은 주름살 생기지 않고 젊게 살 수 있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생긴다. 이스라엘은 그 믿음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다. 나는 불가능할지라도 주님은 가능하다. 기초가 확실하고 튼튼하면 집이 튼튼하다. 반석위에 집을 지으면 튼튼하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분명하면 목표가 있고 성취감이 있다.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시작이 없다면 인생은 목표가 없으며 시작하신 이가 없다면 소망도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은 시작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망을 품은 백성인 것이다.
시작이 없다면 인생은 목표가 없으며 시작하신 이가 없다면 소망도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은 시작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망을 품은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아이들은 아주 최소한도 아무 것도 몰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이 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도 이 말은 다 알고 있다. 성경을 보지 않아도 이 말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여러 번 얘기 했으니까. 오늘 얘기했는데 또 잊어버리면 안 된다. 아주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했다. 이것 빼고 나면 성경이 그 다음은 안 된다. 이것이 있어야 말이 된다. 이것이 없으면 말이 안 된다. 이 말을 알면 성경을 다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모르면 다 알아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전능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무슨 목적으로 시작되었는가?
지으신 이를 대시하게 하려고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라는 것인가?
둘이 연합하여 이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됨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 전능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무슨 목적으로 시작되었는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 지으신 이를 대시하게 하려고. 어떻게 그 목적을 성취하는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 둘이 연합하여 이루려고.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된다.
이것을 모르고 인생을 살면 장님이 문고리 잡은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는 손에 잡혔던 것이 오늘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된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재수 좋기만을 바란다. 어디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 재수 좋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어제 내가 문고리를 한 번 잡아보았는데 오늘도 문고리를 잡게 해주십시오, 그 말이다. 눈이 어두우면 보증이 되겠는가? 어제는 잡았을지라도 오늘은 잡지 못할 수가 있다. 평생 기도하는 소리가 재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인생은 여유가 있고 보람이 있으며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능자를 계시하여 주셨음을 감사하자! 부모가 부모임을 알려주셨음을 감사하자!
시작을 알면 인생은 여유가 있다. 내가 지금 되지 않아도 여유가 있다. 뭣이 좀 안 되면 어쩔 줄을 몰라서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뭣이 좀 안되면 어쩔 줄을 몰라서 방황한다. 하나님이 있다면서 왜 그러냐고 원망한다. 교회를 다녀도 나는 왜 이러냐고 하더니 급하니까 온갖 불평이 터져 나온다. 여유가 없다.
그런데 나를 지으신 이가 있다. 전능자가 나를 지었다. 이것을 믿으면 여유가 생긴다. 교회를 오게 한 것도 전능자가 나를 오게 했다. 그러면 교회생활이 여유가 있다. 나를 부르신 이가 전능자다. 그러면 내 삶이 여유가 있다. 이웃집 사람이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는 것은 백발백중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생활이다. 이웃집 사람이 가든지 안 가든지 나는 전능자가 나를 지었으니까 전능자가 나를 불렀으니까 나는 여유가 있다. 보람이 있고 소망이 있다. 기다릴 것이 있다. 바라볼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바라볼 것이 없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없으면 소망이 점점 없어진다.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끊이지 않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전부 믿음으로 산 사람들 얘기이다. 여러 분들이 쭉 읽어보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쇠하지 않고 늙지 않고 소망이 끊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이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전능하신 자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능자를 계시하여 주셨음을 감사해야 된다. 대표적으로 그 백성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우리도 각자 다 전능자에 의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우리 것만 갖고는 너무 적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확실하게,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광야생활을 통해서 확실하게, 우리에게 전능자를 계시해 주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 우리 안에 있는 조그마한 씨이지만 확 커지는 것이다. 나도 내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면 나는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담대하게 얘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역사가 뒷받침을 해주니까 담대해진다. 친구가 나를 부른 것을 단순히 친구가 부른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세가 나를 불렀다가 된다. 왜? 성경이 그렇게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딱 뒷받침 해준다. 내 말을 뒷받침 해준다. 성경이 보증을 해주니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여러 분 모두도 뭔가 다 있을 것이다. 자기 혼자 하려니까 힘이 없고 쭈삣쭈삣한다. 그것이 아니고 성경이 보증을 한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보증을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전부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보증이다. 나는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보증인이 얼마나 큰가!
내가 재산이 없어서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갔더니 재산이 없어서 조금밖에 빌려주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다 보증서겠다고 우르르 나오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삼성 회장이 와서 내가 보증해주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지고 가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에게 보증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나 혼자 하는 일 같으면 힘이 없으니까 말하기가 쭈삣쭈삣할 수가 있다.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딱 받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렇게 살았고, 믿음으로 이삭은 이랬고, 믿음으로 야곱은 이랬고, 믿음으로 모세는 이랬다고 나온다.
성경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력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신 이의 은혜를 바라 봄이라고 했다. 상 주시는 이가 너무너무 크기 때문에 애굽의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놀라운 분에게 부름 받았고, 놀라운 분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냥 자기 힘으로 교회에 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전도를 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꼭 올 것 같아도 오지 않는다. 뺀질뺀질하게 오지 않는다. 얘기를 해보면 뭔가에 붙잡힌 것 같다. 우리 힘으로 교회에 온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올 때 아버지가 다 이끌어서 온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증인이 되어서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우리가 큰 소리 쳐도 되도록 받쳐주고 있다. 내가 누구를 믿고 이렇게 큰 소리를 치겠는가? 생각해보라. 내가 누구를 믿고 이런 소리를 하겠는가? 여러분을 믿고, 기라성 같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을 믿고 내가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내가 큰 소리를 칠 수 있겠는가?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가려면 보증인을 튼튼한 사람을 데리고 가면 다 빌려준다. 은행처럼 짠 곳이 없지만 보증인만 튼튼하면 빌려준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보증인만 있으면 돈을 빌려준다. 은행에서 나에게 늘 예금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오길래 내가 우리 교회 지을 때 돈이 모자랄 때 빌려줄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얼마든지 빌려주겠다며 얼마든지 갖다가 쓰라고 한다. 사실 알고 보면 나는 아무 것도 없다. 뭘 보고 그랬겠는가? 교회를 보고 그런 것이다. 그 교회는 실력이 있으니까 믿어도 된다는 것이지 나를 보고 누가 돈을 빌려주겠는가. 나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전능하신 이의 부름을 받았고, 전능하신 이가 뒷받침 하고 있다. 그 전능하신 이를 모르면 이스라엘의 기라성 같은 분들이 우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랬고 이삭은 이랬고 다윗은 이랬고 다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넉넉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가 넉넉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보증하고 있다.
전능자를 계시해 주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부모가 부모임을 알려주셨음을 감사하자! 여러분도 하나님께 이끌려 왔지만 하나님께 이끌려 왔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똑같다.
나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이끈다는 것을 몰랐다. 뒤에 알았다. 내가 죽을 자리에서 살림을 받았다. 다 죽는다고 했는데 살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지 모르겠다. 수년 동안 살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다는 이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까 이상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나가더니 하나님이 살려준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나만 몰랐다.
남부서 공안계 손형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 한 40명이 밥을 먹고 사니까 이웃사람이 이상한 집이라고 고발을 했다. 남부서 공안계 있는 형사가 나를 뒷조사하기 위해서 한달동안 노화도까지 가서 내사를 다 했다. 그리고 또 우리 고향 보성까지 가서 뒷조사를 하고 나를 찾아왔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목사님 뒷조사를 하기 위해 한달동안 돌아다녔고, 이러이러한 투서가 들어와서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살았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만 몰랐다. 이상한 일이다. 아주 중요한 일은 잊어버릴 때가 많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을 못했다. 어쩌다가 살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은혜가 안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고 생각했다면 그 몇 년 동안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런데 전혀 그것을 모르니까 그냥 간신히 살아가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가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시니까 내가 그것을 알았다. 내 인생이 그때부터 아신 바가 되었구나. 그리고 또 그 이전부터 아신 바가 되었구나. 이렇게 알아졌다. 내가 왜 그랬던가? 내 인생에 왜 그런 것이 들어왔던가? 이 생각을 해보았자 알 수 없으니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알아졌다. 왜 그랬던가가 다 알아졌다. 왜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았는지도 알아졌다. 이상하다. 왜 우리 아버지가 거기까지 이사를 갔는지도 알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전남 보성에서 완도 노화면까지 옛날 같으면 몇 날 몇 일을 가야 되는 곳이다. 거기까지 어째서 가셔서 나를 낳았는가? 그런데 그것도 알아진다. 아~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그렇게 알아진다. 신기한 일이다. 왜 내가 모르던 것이 다 알아진다. 아~ 그때 아버지가 이래서 이렇게 하셨구나. 망해서 나가셨다고 했다. 나를 거기서 낳으려고 망했구나. 이렇게 알아진다. 그러니까 해석이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너무 신기하다.
내 부모도 부모를 알려주어서 안 것처럼 나도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을 것을 알려주니까 아는 것이다. 여러 분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이것이 해석되지 않는다. 내 인생이 어떻게 해석되겠는가? 우리 아버지는 객지에서 고생을 많이 하시고 사람들에게 천대도 많이 받으셨다. 고향에 가면 집안에 제일 어른이다. 그런데 섬에 떨어지니까 그런 분인지 누가 알겠는가? 어디서 장사하고 굴러 다니나가 와서 장사하는 영감님으로 안다. 전혀 그런 것을 관여하지 않고 사셨다. 뒤로 알아보니까 그랬다. 고향에 가니까 우리 아버지가 제일 어른이다. 왜 그분이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그 섬에 살았던가? 그것도 알아지고 모든 것이 다 알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여러 분도 어느 날 가면 모든 것이 다 알아질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생각나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은 모르지만 모든 것이 생각나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이 다 생각나는 것이다. 젖 먹기 전까지 다 생각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이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다. 전능하신 이가 없다면 절망이다. 내가 아무리 뛰어보았자 벼룩이다. 인생이 뛰어보았자 벼룩이다. 별 것 없다. 전능하신 이가 있으니까 소망이 있다. 언제 해도 할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나를 인생으로 지었으면 나를 인생으로 사용할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다. 누가 가능한가? 누구든지 다 가능하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 그렇게 지어놓았다. 부르실 때 그렇게 불러놓았다. 누구나 다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안 돼! 그렇게 하지 말라. 안 되기는 뭐가 안 되는가? 하나님이 여기까지 불러놓으셨는데 안 되기는 뭐가 안 되겠는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무나 오는가? 아무나 오지 못할 자리에 왔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는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러 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불러다놓고 가만히 놔두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을 여러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소망과 기대가 끝이 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도 소망이 있다. 절망적 상황이 올수록 더 소망이 생기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올수록 더 기대가 생긴다. 나도 참 믿음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안수기도도 한 번도 못해보았다. 그런 믿음은 없는데 어떻게 이런 믿음은 있는지 모르겠다. 진짜 믿음 없는 사람이다. 예배당을 지을 것이다, 이런 믿음은 없는 사람이다. 이런 믿음이 없는데 하나님이 주셨다. 내 믿음 없는 것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신 것 같다. 너는 믿음이 없는 것을 다 알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 것 같다. 너 위장병이 있어서 금식 못하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금식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신 것 같다. 내 형편을 너무 잘 아신 것 같다. 내 형편에 딱 맞게, 내 눈높이에 딱 맞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것 같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실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 되겠는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부름 받아 왔으면 부르신 이가 책임지는 것이지 내가 한다고 뭐가 되겠는가? 안 된다. 한다고 하면 할수록 더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아주 잘 된다. 더욱 잘 된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속 이 자리에서 즐거운 얘기를 재미있는 얘기를 소망이 넘치는 얘기를 하자! 여러 분이 잘만 들어주신다면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생각하기 전에 아시고 구하기 전에 아시고 모든 것 이전에 저를 아시고 주님이 다 준비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또 알게 해주시고 또 알게 해주시고 주님만 남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만 알게 해주시고 축복만 알게 해주시고 당신이 행하신 길만 알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오직 주만 알도록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주님만 얘기하는 주님만 말하는 주님만 전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일생에서 오직 주밖에는 할 말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우리 교회가 주님 자신으로 충만해서 다른 것이 전혀 필요 없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수고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값진 예물을 드린 사람들, 주님이 다 축복해주시고 저들의 인생이 늘 복되게 해주시고 늘 감사로 넘치도록 은혜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께서 더 넘치는 것으로 더 은혜로운 것으로 더 아름다운 것으로 보상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하나님만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