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陵, 朝鮮最高의 惡后 文定王后의 陵
泰陵은 朝鮮 제11대 왕 中宗의 제2繼妃 文定王后 尹氏의 陵으로 康陵(明宗과 仁順王后의 능)과
함께 1970년 史蹟 제201호 ‘泰陵∙康陵’으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7월 ‘서울 泰陵과 康陵’으로
공식명칭이 변경되었다.
文定王后는 中宗과 같이 묻히고자 중종의 제1계비 章敬王后 尹氏(문정왕후의 9촌 고모)의
능(西三陵禧陵) 옆에 있던 중종의 靖陵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지금의 三成洞 宣陵(成宗과
繼妃 貞顯王后의 능) 옆으로 옮겼으나 지대가 낮아 丁字閣까지 홍수피해가 빈번하여 묻히지
못하고 지금의 孔陵洞에 안장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明宗은 당대의 地官이며 예언가였던 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한 말에 따라 문정왕후를 태릉에 禮葬하고 훗날 자신도
바로 옆 康陵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정왕후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中宗의 靖陵도 單陵으로 太祖의
健元陵, 端宗의 莊陵과 더불어 朝鮮王 三單陵의 하나가 되었다.
태릉은 王妃의 單陵이나 왕의 陵을 능가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조성되었는데 文定王后가
中宗-仁宗-明宗 三代에 걸쳐 50여 년간 王妃와 大妃로서 國政에 깊숙이 개입하여 중국 唐의
則天武后, 淸의 西太后와 비견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능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文定王后는 坡平 尹氏 之任의 딸로 小尹의 尹元老는 오빠, 尹元衡은 동생이다.
中宗이 反正으로 왕위에 올라 왕비가 된 端敬王后는 반정을 반대한 逆賊 愼守勤의 딸이라고
廢位되고, 繼妃 章敬王后 尹氏가 世子(仁宗)를 출산하고 山後病으로 昇遐하여 중종 12년
17세(13년 年下)의 文定王后(1501~1565)를 제2계비로 맞이하였다(王室은 世祖 때부터
內命婦를 장악한 坡平 尹氏의 영향력이 컸었다고 한다).
仁宗이 世子일 때 東宮 放火事件(灼鼠의 變)이 있었으며, 1545년 仁宗(章敬王后의 子)이 재위
8개월 만에 昇遐 (문정왕후가 毒殺했다는 說)하고 12세의 明宗(文定王后의 子)이 즉위하자
母后로서 垂簾聽政을 했다.
동생 尹元衡(小尹)을 領議政으로 앉히고 尹任(장경왕후의 오빠) 등 大尹을 몰아내는 乙巳士禍와
良才驛壁書事件을 일으켰고, 尹元老까지 賜藥을 내려 제거하였다.
윤원형과 기생출신 妾室 鄭蘭貞의 橫暴, 賣官賣職과 苛斂誅求에 더하여 ‘民心이 天心’이라고
극심한 凶年까지 들어 임꺽정 등 民亂이 일어나고 乙卯倭變(倭寇가 70여 척의 배로 全南
남해안지방 습격) 등으로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