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와 『선데이서울』
노평구 선생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학문의 가치가 무엇인지, 진리가 왜 소중한지를 일깨워주셨다. 선생의 최종 학력은 고교 중퇴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전국으로 번졌고, 배재고보 3학년 재학 중 학생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복학의 기회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군사정권이 출소한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복학·재입학 기회를 준 것과 비교된다.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막힌 선생은 1932년부터 두어 명 친구들과 함께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교육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한두 번 시내에 들어갈 때마다 종로의 서점에 들렀다. 그러던 중 1933년경 종로2가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파란색 표지의 『성서조선』을 만났다.
박문서관에서 『성서조선』을 접한 지 한두 해가 흘렀다. 1935년 어느 늦은 봄날 밤 23살 청년 노평구는 ‘니고데모와도 같이’ 양정고보(養正高普) 숙직실을 찾았다. 『성서조선』을 매개로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칼라일식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불꽃’이 전파되는 아름다운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무교회 기독교는 더더욱 ‘책의 종교’다. 노 선생은 김교신 선생 소개로 일본에 건너가 10년간 일본 무교회 성서집회를 대학 삼아 공부했다.
이 시기 선생의 독서 편력은 매우 풍성하고 다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치무라의 무교회 독서목록이 중심에 있었다. 나는 제도권 학교에서보다 노 선생께 배운 것이 많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웠지만, 공부하는 목적과 진리의 가치를 배운 건 선생으로부터였다. 선생과 함께 거닐던 종로와 무교동 거리는 추억의 캠퍼스다. 내게는 선생이 최고의 대학이었다. 고교 중퇴의 선생께 ‘대학의 정신’을 배웠으니 아이러니하다. 요즘 세상에 선생보다 학벌 낮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만큼 폭넓게 독서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선생의 유연한 사고도 독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노 선생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책 안 읽는 고학력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 과잉 시대다. 우리 교육의 실패를 방증한다.
독서란 영혼의 자유비행이다. 영어 브라우징(browsing)이란 말 그대로다. 사슴이 연한 나뭇잎을 뜯어 먹듯, 독서가는 내면의 허기와 갈증을 채우기 위해 책의 세계를 주유(周遊)한다. 울타리를 뛰어넘는 진지하고도 즐거운 방랑이다. 이 꽃 저 꽃 찾는 나비와도 같다. 우치무라도 그런 독서가에 속한다. 밀턴을 공부하다가 우치무라의 이름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는 삿포로 농학교에서 수산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였다. 그런데 영미권 밀턴 학자들이 편찬한 『밀턴 백과사전』(Milton Encyclopedia, 9 vols.)에는 일본 사회에 밀턴의 신앙과 문학을 처음 소개한 선구자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수십 년 공부해 겨우 흐릿하게 알아챈 밀턴 사상의 정수를 자연과학 전공자가 취미 수준의 독서로 꿰뚫어 봤다. 정말 놀랍다. 취미가 세계 수준이다. 울타리를 뛰어넘은 우치무라의 행보야말로 무교회주의의 진수라고 본다.
각설하고, 사람은 다 제각각이어서 노 선생과 우치무라의 뜻을 모두가 나처럼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학생 시절 어느 해 여름 성서집회에서였다. 점심 후 여럿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장교로 예편한 한 선배가 말했다. “군대에서 내무반에 앉아 『타임』 지 읽고 있는 녀석들 보면 참 아니꼽더라.” 그러자 당시 학생이던 임세영 교수가 대뜸 반박하고 나섰다. “그럼 『선데이서울』은 읽어도 되고 『타임』 지는 읽으면 안 됩니까?” 머쓱해진 그 선배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교신 선생은 도쿄고등사범학교 학생 시절부터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를 받아보고 국제정세를 자세히 파악했다. 1936년엔 미국 군사전문가 하우스 대령의 논설을 인용해 연합국과 추축국이 충돌할 때 연합국이 승리하리라는 분석을 ‘일기’에 소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3년 전이다. 해방되던 그날까지 일제가 패망할 줄 꿈에도 몰랐다던 허접한 지식인들과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대 일급 지식인이다. 쓰레기통 같은 식민지 지식사회에 핀 장미꽃이다. 하지만 『선데이서울』을 사랑한 그분에겐 김교신도 ‘아니꼬운 청년’이었을 것이다.
하긴 천지창조가 6천 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중세적 망상이다. 과학과 신앙의 양립을 확신한 김교신 선생이 들으면 놀라자빠질 일이다.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반지성·무지성으로 욕먹고 있지만, ‘무교회 너마저도!’라면 참담하다. 무교회도 또 하나의 교회로 후퇴한 걸까. 밀턴은 ‘the Reformation’ 대신 ‘reformation’이라고 썼다. 종교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노 선생은 ‘인간을 모르고 어떻게 신을 말할 수 있나?’라고 했다. 인간의 ‘상식’과 ‘학문’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구구단도 모르면서 미적분을 풀겠다고 나서는 꼴을 지적한 것이다. 고학력 시대엔 더욱 그러하다. 무교회가 『선데이서울』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