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 에 지역 출판을 말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있었다. 할 말은 가득한데, 표현할 글재주가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욕심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을 뱉어봤다. 어려운 시기에, 그것도 출판 관련 잡지를오랜 세월 결간 없이 출간한 관계자들의 수고가 경이롭다. 창간 25주년 특집호에 지역을 다룬 기획은 더 고맙고.
.
.
나는 대구의 출판인이다
.
학이사는 대구에 있다. 흔히 말하는 지역출판사다. 식구 다섯 명의 작은 출판사이지만, 늘 지역에서 ‘책으로 즐겁게 어울려 놀기’를 꿈꾼다. 작가와 독자, 책방과 함께 책을 통해 즐겁게 지낸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서로 다독여주는 이웃과 어울려 그들의 삶과 생각을 즐겁고 기쁘게 엮는다. 그래서 ‘대구에 산다, 대구를 읽다’라는 말을 출판정신으로 삼는다. 창사 70년이다. 학이사의 전신 이상사가 대구에서 출판을 시작한 지 올해로 70년이 되는 해이다. 1954년 1월 4일, 대구에서 출판 등록을 하고 지역출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날이다. 6.25 전쟁으로 피란을 왔다가 전쟁이 끝나도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필자도 그 역사의 반 이상을 함께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오직 지역에서 책과 함께 살았다.
지역에서 출판을 한다는 것
지역출판의 역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사람과 그들이 빚어낸 문화를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는 데 있다. 사라지는 지역의 콘텐츠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일, 그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 지역출판사다. 그래서 “지역에 좋은 출판사가 하나 있는 것은 좋은 대학이나 언론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지역출판사이고, 그 결과물이 지역출판물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출판을 하는 데에는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당장 경험 있는 인력을 구하는 일부터 신입직원의 교육, 물류와 유통 등 모든 게 수월치 않은 게 사실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모든 일이 경제적 수치와 통계로만 표시되는 세태에서 지역출판사가 그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아주 미미하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지역출판사가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역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이다. 지역출판인들의 역할은 단순히 책을 엮어내는 것 이상이다. 그들은 그 지역의 진정한 삶을 발굴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지역의 삶을 기록한다고, 지역출판사의 출판물이라고 하향적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2020년, 대구가 코로나19로 봄이 송두리째 빼앗긴 시절에도 그랬다. 당시에는 다시 봄을 맞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암울했다. 언론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참담함을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위해 경쟁하는 듯하였고, 다른 지역 사람들조차 대구와 대구 사람에게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는 대구에서 오는 응급 환자까지 거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고민했다. 그 어둡고 암울하던 시기에 지역출판사가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 결과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구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던 시기에 희망의 등불이 필요했다. 어려운 시기에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버티고 있구나, 하는 희망을 빨리 건네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던 시민들의 상황을 알아보고, 목숨을 걸고 환자를 이송하고 치료하던 의료진의 다급함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서둘러 직업이 다른 시민 50명을 선정해 원고 청탁을 했다. 마음이 급해 카카오톡으로 취지와 청탁서를 보냈다.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생업을 할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글로 마음을 풀어내니 속이 시원하다며 오히려 출판사를 위로했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의료진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생사가 달린 전쟁터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의료진에게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글로 적어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고민하다가 생각대로 부탁했다. 우려와는 달리 그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흔쾌히 허락했다. 코로나 현장에서 일하던 의사와 간호사, 구급대원 등 35명 의료진의 생생한 현장의 느낌을 사진과 함께 원고로 주었다. 그래서 뉴스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사투 현장을 책으로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코로나19 대구시민의 기록 『그때에도 희망을 가졌네』와 대구 코로나 현장에서 헌신한 의료진 35명의 목소리를 기록한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코로나를 기록한 책으로 언론에서 크게 소개했다.
혼란한 상황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대구의 기록물은 이렇게 출간됐다. 책이 출간되자 참여 필자와 독자의 반응이 뜨거웠다. 중앙 언론은 물론 똑같은 어려움을 겪던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책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람의 이동마저 쉽지 않던 시절에, 모두가 우리 대구를 피하던 시절에, 지역의 재난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일을 지역출판사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고 길을 만든다. 지역출판사의 역할을 찾고, 지역민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함께 가려고 노력한다.
책을 매개로 어울리는 일
시민을 대상으로 ‘학이사독서아카데미’를 개설해 제대로 읽기를 공부하며, 독서동아리 ‘책으로 노는 사람들’과 매달 만나 동서양 고전을 읽는다. 우선 내가 사는 지역에서 책으로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책의 날에는 시민과 함께 책과 장미를 들고 만나는 ‘대구, 책으로 마음 잇기’행사를 열고, 문학작품 배경지 기행을 하고, 독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완행열차 타고 책 읽기’ 캠페인을 한다. 이렇게 지역민과 어울려 책과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은 학이사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지역출판사를 응원하는 일도 한다. 어느 병원의 도움을 받아 시행하는 이 독서대회에서는 전국의 지역출판사 책만을 대상 도서로 시행한다. 이 독서행사에서 특별한 것은 ‘기업 독서상’이다. 대구시내 기업 15곳이 자신의 기업 이름을 걸고 지역출판물을 읽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 시상식에는 기업 대표가 직접 시상을 하게 해서 기업의 독서문화에 관심을 갖게 한다.
서평교실 ‘학이사독서아카데미’는 모두가 책 읽기를 통해 행복하자며 시작한 일이다. 글쓰기 수업이 아니다. 모두가 생산자만 공급하는 시대에 우리는 훌륭한 소비자를 양성하기로 했다.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공부를 하자며 모였다.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서평쓰기다. 가입 조건도 없다. 무조건 선착순 열다섯 명이다. 대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3개월을 공부한다. 2023년까지 9기를 배출했다. 과정을 수료하면 자연스럽게 공동 서평집을 엮을 수 있는 수준이 된다. 강사는 각 과정을 잘 할 수 있는 선배가 봉사로 맡는다. 과정을 마친 수강생은 독서동아리 ‘책으로 노는 사람들’ 회원으로 활동한다. 매월 한 차례 만나 동서양 고전을 번갈아 읽고 토론한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시절에도 거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자의 위치에서 카카오톡으로, 후에 줌이 보편화되면서 줌 토론회로 계속했다. 난세를 이기는 데는 독서뿐이라는 믿음, 그렇게라도 단절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학이사독서아카데미 설립 목적 중 하나는 지역에 펼치는 독서운동이다. 지역을 위한 길이자, 궁극적으로 출판사를 위한 일이다. 지역의 대표 일간지 <매일신문>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회원들이 읽은 책을 서평으로 소개하는 ‘내가 읽은 책’이란 코너를 매주 연재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했다. 2023년 12월까지 335회, 7년에 걸쳐 시민들에게 회원이 읽은 책 335권을 소개했다. 이런 독서운동 중에서 특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학이사 금요북토크’이다. 독자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행사다. 독자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작가를 모시고 찾아간다. 처음 시작하던 2022년에는 ‘골목에 찾아온 저자’라는 이름으로 10회를, 2023년에는 ‘찾아가는 동네책방’이라는 이름으로 동네책방을 찾아 10회를 진행했다. 2024년에는 학이사 창사 70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역출판 70주년’이라는 이름을 걸고 10회를 시작했다.
저자와 독자, 출판사와 책방이 책을 매개로 지역에서 함께 어울리는 일이다. 이렇게 지역에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행사를 통해 우리 지역에도 이렇게 좋은 작가가 있고, 우리가 사는 골목에 책방이 있고, 출판사가 있다는 걸 지역민에게 알린다. 그러면서 지역작가와 지역출판물, 우리 동네 책방을 아껴달라고 부탁한다. 책방과 독자의 반응이 뜨겁다. 지역출판사는 이렇게, 혼자 또는 함께 지역을 위해 활동한다. 혼자서 힘이 부치면 같은 입장에서 일하는 출판사들과 힘을 모으기 위해 연대한다. 전국 지역출판사들이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모인 한국지역출판연대가 그것이다. 2017년 제주에서 연 ‘제1회 한국지역도서전’ 개최를 시작으로 해마다 전국을 권역으로 나눠 찾아가는 도서전을 개최한다.
우리 스스로 지치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다. 비록 타 업종에 비해 규모는 작을 수 있지만 지역출판사가 지역에서 하는 역할이 왜 소중한지, 왜 지역이 지역출판사를 아껴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관심을 갖게 한다. 책을 통해 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이 진정한 문화의 도시, 책의 도시가 되는 길을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지만, 많은 게 미약하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한두 명의 직원과 함께하며 북 치고 장구를 친다. 무엇을 기획하고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생성된 기록물이나 출판물을 담당하며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도서관이나 행정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출판사, 도서관, 작가, 독자가 지역에서 어울려 책과 놀 수 있는 터전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부탁하기도 한다.
다시, 지역출판의 부흥을 꿈꾼다
어떻게 하면 이 소중한 지역출판물을 생산하는 지역출판사가 자긍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까? 결론은 하나다. 출판사 스스로의 노력에 중앙정부나 지방차치단체의 지원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민이 지역 책으로 즐겁게 어울려 놀 수 있고, 출판사가 지역 사회에 더불어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지역출판물을 지역민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도록 도서관과 서점에 비치해야 한다. 조례로 정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 애써 만든 책이, 지역문화콘텐츠가 독자에게, 그것도 지역독자에게조차 전달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역도서관에서도 전체 도서 구입 예산에서 지역책 구매에 일정 부분을 할애하면 좋겠다. 또 지역서점에서 지역 책을 구매하는 독자에게는 독서 인센티브를 주는 등 서점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서점이 사라진다면, 책의 실물을 보고 만지는 기쁨이 없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일상은 팍팍해진다. 그렇다. 지역에서 작가와 출판사, 서점, 도서관, 독자가 어울려 제각기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역사회와 지역민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출판사 재직자나 취업 희망자를 위한 출판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다. 안타까운 것은 지역에서는 돈을 주고도 출판 교육을 받을 곳이 없다. 그렇다고 서울에 가서 배운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대구·경북 지역에는 대학에 출판 관련 학과가 한 곳도 없다. 더불어 직원이 많은 출판사가 없어 전문 인력의 유동이나 경험을 공유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진흥원)에서 전국으로 찾아가는 출판교육을 실시해야 할 이유다.
대구는 그나마 다른 지역에 비하면 다행이다. 대구출판산업단지가 있고, 출판산업지원센터가 있다. 2022년까지는 출판산업진흥원에서 위탁을 맡아 출판교육이 진행되었다. 참가하는 교육생을 보면 얼마나 시급한지 알 수 있다. 부산과 울산을 비롯해 멀리서 새벽차를 타고 교육을 받으러 온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각 지역에 거점 도시를 정해서 찾아가는 출판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대구와 경북 지역은 대구출판산업지원센터를, 경남 지역은 부산이나 울산, 전남 지역은 광주를, 전북 지역은 진흥원 본원이 있는 전주를, 충청권은 대전이나 충주를, 강원권은 원주나 춘천 등을 거점으로 삼아 찾아가는 출판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주 역시 마찬가지다.
2024년 새해를 맞아 우리는 다시 꿈꾼다. 저마다 위치한 지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기를, 지역에서 만든 책으로 지역민 모두가 행복하기를. 그래서 다시, 지역출판의 부흥을 꿈꾼다. 다 함께.
신중현 (도서출판 학이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