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9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1
마의노인은 하후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후성은 그 순간 마의노인의 허리춤에 한 자루의 자색빛이 도는
도(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보았고 마의노인은 이러한 하후성을
유심히 살폈다.
'흐음.'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후성은 도저히 무공을 연마한 사람같
지 않았으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하여 깊이를 느낄 수가 없
을 정도였다.
마의노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과연 대단하다. 무공을 익힌 흔적을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
으니 이는 전설상의 무학경지인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른 것이
아닌가? 과연 환영신룡답다.'
마의노인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허험! 실례지만 좀 묻겠소이다. 소협께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
이 맞소이까?
하후성은 그만 난처해졌다.
"환영신룡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소생의 이름이 하후성인 것은 맞
습니다."
그의 대답에 마의노인은 반색을 하며 너털웃음을 졌다.
"헛헛헛! 정말 반갑소이다. 노부는 예전부터 소협의 쟁쟁한 소문
을 들어왔소이다. 진작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기
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는 포권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노부는 하북 팽가장(彭家莊)에서 온 자전신도(紫電神刀) 팽수위
(彭袖位)라고 하오."
하후성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슬쩍 자전신도 팽수위의 왼쪽 허리
춤에 있는 자색도를 바라보았다.
'음. 이 노인이 바로 당금 무림의 사대세가 중 하북 팽가의 두번
째 고수 자전신도였구나.'
하후성은 비록 무림에 처음 나왔지만 그동안 소림사에서 천기선사
로부터 현무림의 전통적인 문파(門派)와 각 무가(武家), 그리고
전대고수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이 있었다.
최소한 삼백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사대세가는 다음과 같았다.
하북(河北) 팽가장(彭家莊).
강서(江西) 남궁세가(南宮世家).
사천(四川) 당가장(唐家莊).
산동(山東) 악가장(岳家莊).
그들 사대세가는 각기 특이한 무공으로 수백 년 간 일맥을 유지해
온 무림세가로써, 사대세가의 세력과 영향력은 각기 성(省)을 지
배할 정도로 컸으며 당금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성세와도 비교
할 정도였다.
하북 팽가도법(彭家刀法).
이것은 너무도 유명하여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라면 무림의 일
절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도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
전신도 팽수위는 현 팽가장의 제 이 가주(第二家主)였다.
하후성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호호호! 숙부님, 저희들도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의 뒤에서 마치 은방울을 울리는 듯한 짜랑짜랑한 교소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홍의소녀가 그에게 방긋 웃고 있었다. 또한
그 뒤로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도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호
감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저희들도 같이 합석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게 하십시오."
하후성이 담담하고 부드럽게 승낙하자 홍의소녀는 대뜸 활짝 웃으
며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일부러인지 살이 맞닿을 정도로 찰싹 붙어 앉았으므로, 하
후성의 코에 처녀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겼다. 반면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은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자전신도 팽수위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
음치며 말했다.
"허허! 하후소협, 노부가 이 젊은이들을 소개 하겠네."
그는 먼저 홍의소녀를 가리켰다.
"소협의 옆에 앉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 계집애는 바로 노부의
조카일세. 별호는 홍의은편날수(紅衣銀鞭 手) 팽소령(彭素鈴)이네.
허허... 지독한 말괄량이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걸세."
팽수위의 말에 홍의소녀 팽소령은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대
뜸 반발했다.
"어머! 숙부님, 그 무슨 말씀을... 제가 어디 말괄량이에요?"
그러나 팽수위는 짐짓 위엄스럽게 말했다.
"이 녀석아! 더 이상 심한 소리 듣기 전에 입이나 닫아라."
팽소령은 과연 찔리는 데가 있는지 입을 다물었으나 귀여운 입술
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팽수위는 이번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이 약간 검은 청년을 가리켰
다.
"이 아이 역시 노부의 조카일세. 그리고 저 계집애의 오빠이기도
하지."
갈의청년은 즉시 일어나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소제 흑금강(黑金剛) 팽의천(彭義天)이라고 합니다"
"아, 팽형이셨군요."
하후성이 답례하고 나자 팽수위는 얼굴에 화색이 감도는 황의청년
을 가리켰다.
"이 젊은이는 바로 태양장(太陽莊)의 소장주(少莊主)인 적인금붕
(赤印金鵬) 황보무룡(皇甫武龍)일세.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중 손
꼽는 고수이니 잘 사귀어 보게."
적인금붕 황보금룡은 일어나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하후형."
팽수위는 마지막으로 백의소녀를 가리켰다.
"이 낭자는 황보문연(皇甫文娟)이라고 하네. 황보소협의 여동생이
지. 설금옥향(雪琴玉香)하면 음률(音律)과 미모로 모르는 사람이
없지."
황보문연은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아이, 노선배님도......."
그녀는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함을 느끼고는 감히 하후성을 바라보
지도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사뿐히 인사했다.
하후성이 답례하자 팽수위는 호탕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후소협, 여기 있는 이 네 젊은이들은 모두 사귀어볼만 하네."
적인금붕 황보무룡이 빙긋이 웃으며 나섰다.
"솔직히 말해 소제는 하후형의 위명을 듣고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
되었으리라 생각해 왔었소. 그러나 막상 보게 되자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한 것 같소이다."
하후성은 그만 고소를 짓고 말았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군. 강호초출(江湖初出)인 내가 어떻게 이
렇게 유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후성은 생각할수록 괴이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그 환영신룡이란 자는 누굴까?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인물인 것같은데.......'
제 9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2
다시 계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두 명의 인
물이 올라섰다.
그들은 극히 대조적인 흑의노인과 자의소녀(紫衣少女)였다.
흑의노인은 약 육순(六旬) 정도의 나이에 음침한 인상으로 전신이
깡마른데다 넓은 흑삼을 입었고 두 눈은 움푹 패였으며 안색마저
창백하여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기이하게도 일문종주(一門宗主)다운 위엄
이 풍기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자색의 피풍을 어깨에 둘렀으며 입고 있는 자의는 경장차
림이었는데, 눈이 유난히 맑고 피부가 백옥같이 깨끗하여 매혹적
이고 산뜻한 용모였다.
흑의노인은 주루 안을 둘러보다 자전신도 팽수위를 발견하고는 흠
칫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반색했다.
그는 곧 팽수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팽수위도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났다.
"허허허...! 이거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가주(家主)이신 천수겁천
(天手劫天) 당환성(唐幻星)대협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왕림하셨소이까?"
흑의노인, 즉 천수갑천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담
담히 말했다.
"팽형이 오는데 어찌 노부라고 빠질 수 있겠소."
"하하하! 이리 앉으시오. 아뭏든 몇 년 못본 새 당가주의 경지는
더 새로워진 것 같소이다."
당환성은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노부의 암기(暗器) 따위야 팽형의 자전십팔풍에 부딪치면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될 텐데 그 무슨 농담이오?"
팽수위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원, 당가주야말로 무슨 농담을......."
이어 그는 당환성의 옆에 있는 자의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낭자는?"
당환성의 음성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진아(眞兒)야, 인사 드려라. 이 분은 팽가의 제 이 가주(第二家
主)님이시다."
그러자 자의소녀가 곱게 절을 했고 팽수위는 펄쩍 뛰었다.
"아니! 이제 보니 낭자는 바로 당옥진(唐玉眞) 낭자가 아닌가?"
"네, 노선배님."
자의소녀의 음성은 꾀꼬리처럼 고왔다.
"허어! 세월 참 빠르군. 그때 왔을 때는 귀엽고 깜찍한 어린 소녀
였는데 벌써 이렇게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다니."
자의소녀 당옥진은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먼저 자리에 앉았던 일행들, 특히 젊은이들이 다투어가며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젊은이들은 활기차고 명랑했으며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아까부터 주루 안이 환하다 했더니, 이제 보니 절세의
기남기녀(奇男奇女)들이 모두 모여 있었군."
하후성은 이제껏 당환성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차 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에 대해 감탄을
느꼈다.
'음. 이 노인의 인상은 매우 특이하구나. 겉으로 보면 음산하고
냉혹하게 보이는데 실제의 내면은 매우 강직하고 정 많은 협사(俠
士)의 기질을 가지고 있구나.'
당환성은 뒤늦게야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그의 뛰어난 풍모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팽형, 이 분 소협은 뉘시오?"
그가 묻자 팽수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당가주, 내 천하의 기재 한 분을 소개하겠소."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당가주, 혹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을 아시오?"
"환영신룡!"
당환성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어찌 그를 모르겠소? 출도한 지 반 년도 못되어 대막삼흉(大
漠三兇), 관외오마(關外五魔), 음산이절(陰山二絶), 동백십살(桐
栢十殺) 등의 마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미 전 무림을 경동시켰거
늘,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팽수위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당가주, 왜 그렇게 눈치가 없으시오? 이 분 소협이 바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이시오."
"아!"
당환성은 탄성을 발함과 동시에 곧 경외심을 나타내며 황급히 포
권지례 했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소이다. 하후소협. 이 늙은이가 미처 고인을
몰라보았소."
"무슨 말씀을. 당대협."
하후성은 얼떨결에 답례는 했지만 입가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환영신룡이 된 셈이군.'
자의소녀 당옥진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변화로, 그녀는 당
가장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면서 세상을 고고하게 내려보았고 특히
남자에 대해서는 이유 없이 깔보고 경시해 왔었다.
그런데 눈같이 흰 백의를 입고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신비한
청년 환영신룡, 그를 보자 그녀의 방심(旁心)은 온통 뒤흔들리고
만 것이었다.
하후성이 풍기는 기운은 그야말로 꾸밈이 없는 천성이었으나 또한
그 기운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마력적인 것이었다.
그 특이한 기질은 소림의 천기선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한 것
으로써 정작 본인인 하후성만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환성은 호감어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소협도 천풍보(天風堡)에 가시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구료?"
하후성은 흠칫했다. 얼마 전 흑의문사 위전풍의 말이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천풍보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그랬지.'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도 실상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 이들같이 신분이 높은 자들이 모두 천풍보로 가는 걸로
보아 필히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위전풍, 그 사람을 만날겸 한
번 가보자.'
"허허허! 정말 반갑소이다. 실로 이번 길은 소협같은 기인을 만나
게 되었으니 헛되지 않았소이다."
당환성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은 곧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다. 그
들은 모두 기분이 좋았으며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만 하후성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오해된 것이니 만큼 씁쓸한
기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하후성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후성이 만사무불통지(萬事無佛通知), 즉 모르는 것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문(文)이고 무(武)고 하후성의 바다같이 넓은 지식은 그
들에게 경외지심까지 느끼게 했던 것이다.
'역시 환영신룡은 일대기재다!'
중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전혀 모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당옥진, 황보문연, 팽소령 등 절세 미모를 갖춘 명가의 세
소녀들의 하후성을 향하는 눈빛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
으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향한 세찬 불꽃이었다.
하후성. 그는 출도하자마자 꽃(花) 밭에 둘러 싸이고 만 것이었
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오 년 전(四十五年前).
무림에 일대 선풍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한 명의 소년영웅(少年英
雄)의 출현 때문이었다.
종리자허(鍾里子虛). 이것이 소년영웅의 이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십오 세에 불과했으나 놀라운 무공을 소유
한 그는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삽시간에 강북무림을 휩쓸었다.
강호의 무수한 고수들이 소년영웅 종리자허의 쌍수(雙手) 아래 추
풍낙엽같이 거꾸러졌다. 실로 무림에 돌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더
우기 그에게는 타인이 따를 수 없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醫術)이
있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죽은 사람조차 살수가 있다고 전해
졌다.
그는 출도 후 십 년간 적수를 찾지 못하고 대남강북을 종횡하며
빛나는 무명을 날렸다.
그리고 그는 강남제일미(江南第一美)로 미와 재를 떨친 남궁세가
의 금지옥엽 남궁영미(南宮永美)와 혼인을 했으며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거대한 보(堡)를 건립하여 정착했다.
이름하여 천풍보(天風堡).
이것은 또한 현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인 일장이보(一莊二堡) 중
의 하나이기도 했다.
종리자허는 그 후 천풍보에 수많은 고수들을 받아들여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무당파와 함께 호북무림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태을성수(太乙聖手) 종리자허(鐘里子虛).
그는 무림의 거성(巨星) 중 한 명이랄 수 있었다.
천풍보(天風堡).
무창성 동쪽 십 리(十里) 밖에 광활한 대지를 접하고 세워진 거대
한 보(堡)였다.
근 오만 평에 달하는 방대한 대지 위에 천풍보의 층층거각과 지붕
이 즐비하게 늘어섰으며, 높이 삼 장(三丈)의 성보와 주위에 깊고
넓게 파여진 호보하는 실로 장관이었다.
게다가 천풍보 주위에 빽빽이 자라있는 송림(松林)은 그야말로 볼
만한 절경으로 웬만한 무림고수는 천풍보의 위세만 보아도 기가
질리고 말 것 같았다.
천풍보의 영빈청(迎賓廳)은 하나의 광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대
하고 넓었다.
좌석만 해도 수백 석인 데다가 그곳에서는 지금 근 오백 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영빈청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무희 이십 여 명이 멋들어진 춤을 추
고 있었다.
흥겨운 가무음곡이 들리고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 큰 소리로 축하하는 소리, 함성소리 등이 영빈청을 한껏 쾌
활하고 호탕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왜?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천풍보는 이토록 군웅들로 흥청거리는
것일까?
천풍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 오늘이 바로 그의 육십 회갑(回
甲)일로 사해에 위명을 떨친 종리자허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전
중원의 군웅들이 축하객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것은 태을성수 종리자허의 위명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종리자허의 회갑일은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편 하후성은 영빈청의 한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적인금붕 황보무룡과 대작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지기처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보무룡은 하후성과 안 지 불과 반나절 밖에 안된 처지였으나
하후성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설사 자
신의 한 쪽 팔을 떼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친밀한 기분이 드
는 것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이런 기분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황보무룡은
술을 호기 있게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하후형, 소제는 진정 궁금하오. 실례가 아니라면 사문이 어디신
지 알려줄 수 있겠소?"
하후성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황보형, 실제 소제의 무공은 대단한 것이 못되오. 소제는 단지
한 무명노인에게 몇 수 무공을 배웠을 뿐이오."
황보무룡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후형이 정히 숨기려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어 그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하후형의 실력이 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소제의 무공은
어디 가서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하후성은 다시 멋쩍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때 그의 눈에 네 명의 노소가 영빈청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
였다. 두 명의 노인과 한 청년, 그리고 백의미소녀였다.
앞장 선 두 노인 중 오른쪽은 전신에 백삼을 입고 있으며 나이는
약 오십 정도였는데 용모가 지극히 청수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안
색이 창백했다.
그러나 반면 두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섬뜩하게 빛 나고
있었으며 왼쪽 허리에 기형(奇刑)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선 노인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위맹하게 생긴 칠순 노
인이었다.
그는 적포장삼을 입었으며 등 뒤에는 적(赤)과 청(靑)색의 두자루
쌍창(雙槍)을 메고 있었는데 얼굴은 자색빛이었고 긴 수염을 마치
교룡처럼 꼬아 기르고 있었다.
두 노인은 매우 상반되는 인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종
주(宗主)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뒤에 따르는 남녀는 모두 미남미녀였고 똑같이 백의를 입고
있었다.
청년은 이십이, 삼 세 정도의 준수무비한 용모와 날카롭고 명확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고, 소녀는 눈이 번쩍 뜨이는 절세가인이었다.
나이는 약 십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는 눈, 코, 입술 등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얼굴이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게
흠이었다.
동중매화, 아니 설중매화(雪中梅花)같이 고결한 미를 발산하고 있
다고나 할까?
하후성은 그들을 관심있게 관찰했다.
'음, 저들 두 노인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다. 특히 저 오른쪽의 백
의노인의 두 눈빛을 보건대 무서운 고수임이 틀림없다. 이곳 천풍
보에도 지금 수많은 고수가 있지만 그 누구도 저 노인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하후성의 관찰은 극히 예리했다. 이때 황보무룡이 웃으며 물었다.
"하후형, 저 분들이 누군지 아시오?"
"모릅니다."
"하하.... 저 분들은 위명이 실로 천하를 울리는 분들이시오. 백
의를 입은 분은 바로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검제(劍帝) 남궁진
강(南宮進江)이신데, 저 분은 당금무림에서 검법의 일인자요."
"아!"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남궁노선배는 이곳 천풍보의 보주이신 태을성수 종리노선배
님과 처남매부지간이시오. 종리노선배님의 부인이 바로 남궁노선
배의 여동생이기 때문이지요."
하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보무룡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 옆에 적포장삼의 쌍창을 멘 분은 일장이보 중 절강성(浙江省)
신창보(神槍堡)의 보주이신 자면신창(紫面神槍) 소중산(蘇中山)
노선배시오."
"음."
"그 분은 무림사상 최고의 창술을 지닌 창의 진인이시오."
황보무룡은 침을 삼키며 계속 설명했다.
"그 두 분 노선배님 뒤를 따르는 백의청년은 바로 남궁노선배님의
아들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요. 그는 당금무림의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으뜸이라는 중원사룡의 일인이기도 하지
요."
'중원사룡?'
하후성은 중원사룡이란 말에 호기심을 느꼈으나 질문하기도 전에
황보무룡이 말을 이었다.
"또 그 옆의 절세미모를 지닌 백의소녀는 빙심한매(氷心寒梅) 남
궁설지(南宮雪芝)라는 방명을 가지고 있으며 남궁수 소협의 동생
인데 그녀는 성격이 차갑기로 소문 나 있소."
"음."
"들리는 말로 그녀는 신비의 기녀인 북해 빙심곡(氷心谷) 빙심파
파의 수제자라는 것이오. 그녀는 오히려 오빠를 능가한다는 소문
이 있소이다."
황보무룡은 문득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남궁소저는 너무나 마음이 차가와 수많은 청년들의 애를 태우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녀도 하후형을 보면 아마... 핫핫핫핫.....
.!"
하후성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호호호! 황보대가, 뭐가 그렇게 우습죠? 저도 좀 같이 웃을 수는
없을까요?"
교소와 함께 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바로 홍의은편날수 팽소령이었
으며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팽낭자, 앉으시오."
황보무룡이 명쾌하게 말하자 팽소령은 연신 웃으며 말했다.
"앉는 건 앉는 건데, 황보대가를 좀 보자는 분이 계신데요."
"누가......?"
"호호호! 황보 노선배님이 조금 전에 도착하셨어요."
"아!"
황보무룡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하후형, 잠시 나갔다 오겠소이다. 아마도 아버님께서 오신 모양
이오."
"그러시오, 황보형."
황보무룡은 곧 서둘러 영빈청 앞으로 나갔고 그가 자리를 비우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옆에 앉아도 될까요?"
하후성은 흠칫했다. 그러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교태스럽게 말
했다.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앉겠어요."
그녀는 서슴없이 옆자리에 앉더니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앉아 사
나이의 간이라도 녹일 듯 생글생글 웃었다.
"하후대가. 소매의 술 한 잔 받으세요."
그녀는 섬섬옥수로 술병을 받쳐 들었다.
하후성은 일생에 한 번도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당황하
여 고개를 저었다.
"소생은 술을 못하오."
그러나 팽소령은 억지를 썼다.
"아이! 제 손이 부끄럽잖아요. 어서 받으세요."
그녀는 더욱더 하후성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뭉클한 육체의 감촉
마저 느끼게 했고 하후성은 그만 당황하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술
잔을 들었다.
"고, 고맙소이다. 소저......."
그는 곧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드는 듯 마는 듯 입술에 적신 다음
내려 놓았다. 그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팽소령은 재빨리
남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소매에게도 한 잔 주세요."
하후성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웬지 밉지는 않은 심정으로 그는 담담히 술을 따라 주
었다.
팽소령은 잔을 들더니 두 눈을 꼭 감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녀
의 양 뺨에는 곧 홍조가 피어 올랐고, 얼굴이 상기되자 그녀의 미
모는 더욱 눈부시게 피어났다.
팽소령은 왠지 자신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하후성이란 사내에
게 끌려들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대체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단 한 번 만난 사이인데도 이토
록 끌려 들어가다니.......'
팽소령은 멍하니 절세미남 하후성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고 말았
다.
'얼굴이 잘 생겨서만은 아니야. 이분의 전신에서는 남들에게서 도
저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질이 강렬하게 발산되기 때문이야!'
팽소령은 마침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아, 나 팽소령이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도중에 중단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끝까지 이 분을 내가.......'
팽소령은 몸을 움직여 더욱 하후성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술기운에 얼굴이 상기되고 육향이 풍기는 그녀는 거의 하후성과
붙어 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어떤 인물인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인
적인 정력(定力)의 소유자로써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단지 약간 거북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아이.... 하후대가, 저만 술을 마시면 되나요? 대가께서도 한 잔
드시라니까요."
팽소령이 교태스럽게 다시 술을 권했다.
"아, 소생은 술을 하지 못하오."
"호호호... 불문의 스님도 아니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다니 말이나
되나요? 영웅이라면 마땅히 주색......."
팽소령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그녀는 제 풀에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어찌 처녀의 입으로 주색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하후성도 그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불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하하하... 하후형! 과연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었구려!"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는 바로 흑의문사 위전풍이었다.
"아! 위형."
하후성은 반색을 지었고 위전풍은 슬쩍 팽소령의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히 물었다.
"하후형, 여기에 앉아도 되겠소?"
순간 팽소령의 살구씨 같은 눈에 쌍심지가 돋더니 그녀는 마치 어
서 꺼지라는 듯이 야멸차게 위전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의 심정은 정반대로 마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
다.
"물론입니다, 위형. 어서 앉으십시오."
위전풍은 팽소령을 향해 씩 웃었다.
"소저, 죄송하오이다. 그럼......."
"흥!"
팽소령은 그에게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꼬았다.
한편 영빈청의 상좌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과 그의 애녀 당
옥진, 그리고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그의 아들딸인
남궁수와 남궁설지, 그리고 하북의 자전신도 팽수위와 그의 조카
흑금강 팽의천 등이었다.
또 절강성에 있는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도 한참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웃음을 띄고 즐겁게 담소하고 있었으나 단 한 명, 빙
심한매 남궁설지만은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에 조금도 변화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음식을 집어먹을 뿐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당옥진(唐玉眞), 그녀는 힐끔힐끔 다른 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하후성이 있는 곳으로 그녀는 팽소령이 하후성의 곁
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두 눈에 초초함과 질투심까지 드
러내고 있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아무도 그녀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팽
수위 만이 그녀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늙은 얼굴에 히죽 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당소저, 몸이 좀 불편한가 보군!"
당옥진은 깜짝 놀랐다.
"네?"
"허허허... 몸이 아프면 들어가 쉬는 것이 좋을 걸세."
"괘, 괜찮아요......."
당옥진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녀의 귓전에 익숙한 차가운
전음이 들려왔다.
(이 계집애야, 눈치 채게 하지 말고 잠자코 있거라. 너는 그저 이
애비 만 꼭 믿어라. 다른 건 몰라도 사위 고르는 솜씨 만큼은 노
부의 암기 솜씨 못지않으니까!)
당옥진은 자신의 내심을 들킨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으나
반면 야릇한 느낌과 함께 기쁜 심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환성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팽형! 참 부럽소!"
느닷없는 말에 팽수위는 움찔했다.
"허허허! 요즘은 딸을 한 번 시집 보내려면 무척이나 힘드는데 하
북 팽가는 대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토록 부모 힘을 빌리지 않고
도 남자를 잘 고르오?"
당환성의 야유 짙은 말에 팽수위는 비로소 그가 팽소령을 가리켜
하는 말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전신도 팽수위가 또 어떤 사람
인가?
짐짓 그는 신이 난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핫핫핫... 그것은 바로 하북 팽가의 전통이외다! 솔직히 하후소
협 정도면 노부가 여인이라도 당장 발벗고 뛸 것이오. 하하
하......."
당환성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한방 얻
어맞고 만 셈으로, 이렇게 되면 선수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
지 않은가?
팽수위가 득의의 미소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자 당환성은 은근히
약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고인인지라 사감(私感)을
떨쳐버리고 맞은 편에 앉은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에게 말했다.
"남궁형, 소형, 노부가 한 청년기협을 소개하겠소."
그 말에 남궁진강과 소중산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환영신룡 하후성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소?"
두 사람은 모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소중산이 성급히 반문
했다.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이오? 어디 있소?"
"허허! 역시 만나고 싶은 모양이구려. 바로 이곳에 있소이다."
당환성이 하후성을 가리키자 두 사람 모두 안광이 번쩍 빛났다.
특히 남궁진강의 투명한 눈빛은 하후성을 자세히 살펴본 후 한 차
례 진동을 보였다.
'놀라운 기재다, 당금 무림에 저런 기재가 있다니!'
소중산은 탄성을 발했다.
"허어! 말로만 듣던 환영신룡이 바로 저 젊은이요?"
"그렇소이다."
소중산은 몹시 성질이 급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일어섭시다. 오늘 청년기재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