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운명(運命)의 일각(一刻)
차(茶)는 철관음(鐵觀音)이었다.
"오룡차(烏龍茶)보다 좋은 철관음이로군. 하지만 찻잎을 너무 많이 넣어
맛이 너무 진해졌다. 사람들은 차를 끓이는 일에도 중용(中庸)의 이치가
통한다는 걸 알지 못한단 말이야."
백무영은 시종이 달여다 주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시종은 나이가 십칠 세 정도.
그는 산동(山東) 출신이라는데, 곤륜검(崑崙劍)을 배우기 위해 관산검맹에
입문했다. 그는 연천십오품식(連天十五品式)이라는 초보적인 검법을 연마
하며 심부름 일을 돕고 있는 처지였다.
그에게 있어 강호고수들이란 하늘처럼 위대해 보이는 존재들이다. 일 장
으로 바위를 부수고, 한 번 몸을 날려 높은 담장을 쉽게 뛰어넘는다는 건
무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 신기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데, 백무영은 만사가 판이하게 달랐다.
'첫째, 눈이 담담하단 말이야. 게다가 태양혈(太陽穴)이 밋밋하니!'
시종은 한 잔의 차를 음미하며 다도학(茶道學) 강의를 하는 백무영의 꼴
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 잔의 차를 달이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지.
백무영은 찻잎을 많이 넣었느니, 다구를 제대로 씻지 않았느니 하는 사사
로운 일에 트집을 잡는 것이다.
'도대체 믿을 수 없어, 이런 낙척서생(落拓書生)이 암호랑이 같은 냉소저
의 정혼자라니!'
시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냉약빙의 정혼자로 온 백무영에 대해 비웃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단 하나의 경이는 있었다.
'참 아름다운 손이다!'
시종은 백무영의 소매를 유심히 바라봤다.
검사의 손 같지 않게 희고 매끄러운 손이다.
우락부락하고 두꺼운 장사의 손에 비한다면, 여자의 손이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탁서생은 정말 냉약빙 소저와 결혼을 할 겁니까?"
"아암, 결혼을 해야지."
"냉소저를 잘 아십니까?"
"몰라. 여자는 자고로 여필종부, 남자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어. 난 여자
가 검을 차고 강호계를 휘젓고 다니는 걸 싫어한다. 여자는 자고로 아이
를 낳고 빨래를 하며 지내는 게 최고야."
"냉소저는 종대선생의 의발전인(衣鉢傳人). 검맹 안의 무사들이 강호제일
화(江湖第一花)라 부르며 공경하고 있지요. 냉소저의 정혼자가 나타났다
는 말에 모두들 흥분하고 있답니다."
"말이 많은 사람들이로군."
백무영은 산동 사투리로 말을 했다.
소년은 산동 출신이다.
그는 타지방 사람과 제 고향 사람의 말투를 쉽게 구별한다.
하지만 그는 백무영이 산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자랐다는 걸 전혀 눈
치채지 못했다.
"헤헤… 저는 탁서생 편입니다요. 부디 냉소저를 데리고 가는 일을 성공
하시기를."
"푸핫핫… 국수 먹을 준비나 해 둬라, 이 녀석!"
백무영이 껄껄 웃을 때, 창 밖에서 백무영을 지켜보는 회의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다분히 침통한 신색을 하고 백무영을 바라봤다.
'저 자가 정녕 냉혈살흔이란 말인가?'
그는 능풍객(凌風客).
그는 대명무문의 대내순찰(對內巡察)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천하 중대사를 저런 자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능풍객은 한숨이 터져 나오고자 하는 걸 억지로 참고 방 안으로 접어들
었다.
백무영은 능풍객이 접어들자, 반색을 하며 장읍을 취했다.
"외숙(外叔), 오랜만이외다."
천연덕스러운 목소리.
능풍객은 백무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반색을 하자, 얼굴이 약간 붉어
졌다.
"오랜만이야, 현질(賢姪)."
"하하하… 전에 척추에 병이 있어 고생을 하시더니, 이제는 괜찮으신지
요?"
"많이 좋아졌네. 사실 그 때 강호야적(江湖夜賊)과 싸우느라 관추혈(關秋
穴)을 다쳐 자네 집에 이레 머물렀던 거지, 본래 척추에 병이 있던 건 아
냐."
두 사람의 대화만 듣는다면, 그들을 수년 만에 만난 외삼촌과 조카 사이
이외의 관계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대명무문에서만 통하는 암호 통신이었다.
'냉혈사흔이 틀림없군!'
능풍객은 불현듯 상대의 무공을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무공을 시험해 보자!'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아래턱을 매만지는 척하면서 손가락에 천강
지력(天强指力)을 모았다.
중지(中指)와 식지(食指)가 퉁기어진다면, 상대의 가슴에 구멍이 뚫릴 것
이다. 그러나 백무영은 전혀 방어하고자 하지 않았다.
"외숙께서 이곳에서 상당히 출세를 하신 듯해 보기가 좋습니다."
능글맞다고 할까? 천진스럽다고나 할까?
백무영은 능풍객이 지공을 시전하여 제 가슴을 쪼개고자 한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능풍객은 지력을 발출할 자세를 취했고, 그 다음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백무영은 싱긋 웃으며 허리를 가볍게 숙이고 있는 바, 그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탄지건곤(彈指乾坤)의 기수식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자세는 능풍객이 암중에 시전하고자 하는 천강지력을 파괴하
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력을 퉁기어 낸다면 내 복부가 뭉개어진다.'
능풍객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백무영은 전혀 살기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그의 사혈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능풍객은 지공을 천천히 회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독서를 많이 했나 보군?"
그가 전에 비할 수 없이 심각하게 말할 때.
"자연스럽게 말하시오."
백무영은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전음입밀로 말을 전했다.
그는 웃는 표정 가운데 싸늘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지붕에 둘, 처마 아래 한 명, 뜨락에 둘이 은잠해 있소. 말을 실수하면
발각당할 것이오."
잘 갈린 비수처럼 예리한 말이다.
'도합 다섯이 은잠해 있다고?'
능풍객은 식은땀을 세우며 청력을 돋웠다.
이제까지 느끼어지지 않던 다섯 줄기의 호흡이 미세하게 느끼어졌다.
'엄청난 감각이다. 웃고 떠드는 듯하는 가운데, 주위를 완전히 감지해 내
다니!'
능풍객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인물이 엄청난 능력을 지닌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 주는 입장. 일을 마무리짓는다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오. 중요한 건, 내가 언제 잠풍을 죽이느냐 하는 것이오."
백무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일대에는 다섯 명의 은잠자가 머물러 있다.
그들은 연검천 쪽의 무사들로, 능풍객과 백무영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간간이 전음으로 비밀 이야기를 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큰소리
로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고향집 늙은 개가 병들어 죽었다느니, 옆집에 살던 장씨 노인 일가가 연
경(燕京)으로 이사를 갔다느니…….
능풍객은 비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소매로 입가를 슬쩍슬쩍 가렸다.
"내일 그를 만나는 자리가 만들어질 걸세. 그 때, 그를 제거하기 바라네."
"그를 지키는 무사의 숫자는?"
"스물일곱."
"무공 수준은?"
"모두 일류급이다."
능풍객은 잠풍의 거처 근처에 펼쳐진 수비세력에 대한 것을 간단명료하
게 설명했다.
이각 후, 능풍객은 백무영의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현질, 푹 쉬게."
"외숙께서 바쁘지 않으시다면 오늘 밤을 세며 회포를 푸는 술을 마실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헛헛… 기회가 있겠지. 그나저나 밖으로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말게. 이
곳은 험한 곳이야. 알겠나?"
"제 앞가림은 하는 나이입니다."
백무영은 풋나기처럼 미소지었다.
밖에서 그를 살펴보는 사람이면, 그가 과대망상증에 빠진 낙척서생(落拓
書生)이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능풍객이 떠난 후, 백무영은 행장을 푼 후에 시경(詩經)을 꺼내 큰소리
내어 읽었다.
하나, 그는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빠진 듯하면서 주위의 은잠자들의
동태에 대해 세세히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양의심공을 익히고 있는 백무영인지라,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쓴다는 것
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관산검맹에는 두 줄기 구름이 겹쳐 있다. 의운(義雲)과 마운(魔雲). 대체
모를 일이다!'
백무영의 시선은 벽 한 곳에 돌리어졌다.
그 곳에는 고풍창연한 초상화 한 폭이 걸리어 있었다.
초상화 안에는 한 청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검을 쥔 채 먼 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바, 의연한 기표가 산악을 압
도하는 듯했다.
검미봉목(劍眉鳳目).
한 장의 초상화에 불과하다고 하나, 그의 기개는 가히 경세적이었다.
<검진중원(劍振中原), 항마천리(降魔千里)>
초상화 우측에는 그러한 글귀가 적히어 있었다.
은유한 가운데 굳강해 보이는 인상의 미남자.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백무영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의 착각일까?
추상화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꽤나 흡사하다고 느끼어지는 것은?
'대체 누구일까?'
백무영이 초상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문득, 냉기(冷氣)가 다가서는 가운데 은의인영 하나가 방 안으로 불쑥 접
어들었다.
"그는 무림의 신화적인 존재이지. 관산검맹의 정신적인 지주인 무적대협
(無敵大俠)."
"아, 그대는?"
백무영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대단하군. 찰나적으로 삼십 장을 지나쳐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상대의 무공은 백무영의 수준과 엇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눈썹이 양 귀 끝으로 뻗쳐 나가고 있고, 매부리코가 강인한 느낌을 주는
용모이다.
늘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
그는 백무영에게는 구면이 되는 자였다.
"난 연검천이라 하네."
"연검천?"
백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어찌 연검천을 모르겠는가?
하나, 그는 무슨 꿍꿍이인지 연검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한 표정
을 지었다.
"이 곳의 심부름꾼인가?"
"훗훗… 강호계의 정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군."
연검천은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도계 인물 가운데 연검천이라는 세 자 이름을 모르는 자가 있단 말인
가?
'무식한 놈!'
연검천은 속으로 욕설을 토하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내삼당주(內三堂主) 지위에 있지. 능풍객과도 잘 아는 사이."
"호오, 그럼 나와 형제와 같은 사이이군."
"훗훗… 멋대로 생각해도 좋아. 솔직히 말해, 난 자네에게 하나의 충고를
해 주기 위해 왔으니까."
"충고?"
"당장 이 곳을 떠나기 바란다."
"떠나라고?"
"여기는 풍운이 이는 곳. 오래 머물다가 목숨을 보존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는 만사가 평화로워 보이는데?"
백무영은 얼뜨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로군!'
연검천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이름이 탁무군이라 했던가?"
"그렇네만……."
"훗훗… 처음 만난 걸 기념해 재미있는 걸 보여 주지."
연검천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활짝 폈다.
문득, 그의 다섯 손가락이 반투명한 혈홍색(血紅色)으로 물들었다.
손가락뼈가 은은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변화된 다섯 손가락 끝에서 붉은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직후, 탁자 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며 글씨가 쓰여졌다.
<탁무군>
세 자 이름이 나무판에 새기는 화인(火印)처럼 선명하게 패여지는 것이
다.
"으으, 그게 무슨 조화요?"
백무영은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났다.
"탁무군! 조속히 떠나지 않는다면, 네 가슴에다가 이름을 새기어 주겠다.
훗훗훗……!"
백무영은 치열을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는 무공으로 백무영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 나는 백면서생. 폭력을 싫어하오."
백무영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척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런 애송이를 경쟁자로 여기고 온 내가 바보였다. 빌어먹을!'
연검천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틀었다.
"날 다시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연검천은 사이하게 말하며 미끄러지듯 움직여 방을 빠져 나갔다.
그는 백무영의 기를 완전히 죽이고 싶은 듯, 멋들어진 신법을 시전해 단
숨에 담장을 타 넘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의 등판에 비웃음이 가득 찬 시선이 꽂히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참아 준다!'
백무영은 애써 분노를 자제했다.
'그러나 세 번째마저 참지는 않을 것이다!'
백무영은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이제는 은잠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요로에 숨어 백무영을 감시하던 자들이 한순간 사라진 것이다.
연검천이 백무영을 경계 대상자가 아니라 여기고, 경계를 철수 시킨 것이
이라.
"언제고 한가해질 때, 상대해 주지."
백무영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소매를 흔들었다.
소매섶이 나풀거리는 찰나, 미세한 파공음이 일어나며 탁자 표면에서 누
런 먼지가 일어났다.
탁자의 두께가 통째로 한 치 정도 깎이는 동시에, 연검천이 쓴 글씨는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 따위하고 시비를 일으키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아."
백무영은 천천히 침상 가로 다가갔다.
사소한데 신경을 쓰다가는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다.
번뇌가 생긴다면,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그는 만사에 무신경해지도록 훈련받았다.
이럴 때에는 푹 쉬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다.
'힘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
백무영은 천천히 휴식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되리라.
그는 눈을 스스로 감다가 다시 한 번 초상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적대협! 바로 저 사람이 무적대협이다!'
무적대협은 백도의 대영웅이다.
그는 죽었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다.
그는 일생 단 한 번만 패했을 뿐이다.
그는 본시 곤륜 문하라고 소문나 있으며, 그가 익힌 검술은 절대무영류
(絶代無影流)라던가?
그것은 천년비학(千年秘學)으로 오백 년 간 실전된 절학이었는데, 무적대
협이 그것을 찾아 내어 일약 강호 최고인으로 올라선 것이다.
'절대검보(絶代劍譜)를 얻는 자, 백도를 얻는다는 말이 있다!'
백무영은 강호계의 떠도는 전설을 머리에 떠올리다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쉬는 일이다.
내일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날이 될 것이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적대협의 얼굴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특히 먼 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거울 속 자신의 눈빛 마냥 가
슴에 사무쳐 오는 것이다.
'묘하게도 나와 비슷하군. 마치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는 듯.'
하늘 가득 별비가 뿌리고 있다.
유성우(流星雨).
하늘은 은색의 화살 세례로 인해 무참히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풍운대전 안.
연검천은 팔짱을 낀 채 태사의(太獅椅)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흑의괴영이 하나둘씩 앞쪽으로 모여들었다.
자시경이 되자, 모여든 사람의 숫자는 사십으로 늘어났다.
정확히 자시가 될 때, 연검천은 두 눈에서 핏빛 광망을 뿜어 내며 입술을
나직이 벌렸다.
"거사는 내일 밤에 거행한다."
"으음, 드디어……."
"……."
장내는 물 뿌린 듯 조용하다.
짙게 번지는 살기, 마치 겨울이 닥친 듯 대기(大氣)가 살벌하게 냉각되는
것이다.
"거사에 가담할 총인원은 팔십일 인(人). 오랫동안 기회를 노려 온 폭풍
귀혼조(暴風鬼魂組) 전원이 이번 일에 가담한다. 우리들은 내부에서 잠풍
을 암살하는 일을 조종하게 되며, 일을 실행할 인물들은 백도명숙(白道名
宿)들로 가장해 도착한다."
가공스러운 살인계획은 치밀히 무르익고 있었다.
여든한 명의 고수들. 그들은 삼 년 전부터 백도 곳곳에 파고들었으며, 여
든한 개의 가짜 신분으로 위장한 상황이었다.
모레,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며… 잠풍은 그 날 제거될 것이다.
"계획은 완벽하다. 훗훗, 잠풍은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각파 명숙에
의해 살해됐다고 소문날 것이며… 백도는 지리멸렬된다. 훗훗, 나는 이번
일에 모든 걸 걸었다. 만에 하나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선다면, 모조리
척살(刺殺)된다. 내 손으로 직접 실패자를 제거할 테니, 만사에 철저히 임
하기 바란다."
연검천은 턱끝을 가볍게 끄덕였다.
흩어지라는 신호다.
그가 숨을 세 번 쉬기 전에 모였던 모든 사람은 암로(暗路)를 통해 조용
히 흩어져 나갔다.
어디에서든 새벽은 신비하고 신선(新鮮)하다.
가을의 새벽은 더할 나위 없이 은은한 정취를 풍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뜨락 가득 국화가 피어 있다면, 그리고 눈앞에 절세미녀가 다소곳
이 앉아 있다면, 정경이 더욱 완벽해지리라.
냉약빙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경장 차림이 아닌 일상복을 걸친 냉약빙의
모습은 전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둘은 뜨락 가 정자의 등나무 그늘 아래 머물러 있었다.
백무영은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외쳤다.
"난 돌아갈 작정이오."
"가다니요?"
냉약빙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가겠다니?'
그녀가 의아해할 때.
"무림은 무서운 곳이외다."
"예에?"
"아, 자세한 건 말하고 싶지 않소. 솔직히 지난밤 내내 악몽을 꾸었소. 난
여기 괜히 왔다 여기고 있소."
백무영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눈치였다.
'설마, 청부살인을 포기하겠단 말인가?'
냉약빙이 듣다 못해 전후사정을 물으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연검천이 뜨락 모퉁이를 돌아 나
왔다.
"가히 한 쌍의 원앙이구려. 하하하……!"
연검천은 옥골선(玉骨扇)을 접었다 폈다 하며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으으으… 가, 가까이 오지 마오."
백무영은 연검천이 다가서자, 기절초풍 놀라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지난밤 뭔가 있었군!'
냉약빙은 그제야 전후사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냉혈살흔이 진짜로 겁을 내는 건지, 거짓으로 이렇게 하는 건지.'
백무영의 정체를 빤히 알고 있는 냉약빙으로서도, 지금 백무영의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백무영은 겁먹은 듯 몸을 떨었으며, 연검천은 환히 웃으며 바짝 다가섰
다.
"잠자리가 불편했나 보네, 무군."
연검천은 친한 듯 이름을 불렀다.
"약간."
"후후… 허약한 체질에 먼 여행은 무리한 일이지. 조속히 고향으로 돌아
가게."
가히 주종지간의 대화라 할 수 있는 대화이다.
겉으로 보아 연검천은 백무영을 완전 압도하고 있었으며, 백무영은 연검
천과 눈빛을 마주치는 것마저 두려워 견디지 못하는 졸장부로 보였다.
연검천은 냉약빙 앞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고 싶은 듯 일각 내내 의
기양양히 떠벌렸다.
과거 검을 메고 강호를 종횡하며 이백 명을 베었다는 등, 어떤 때에는 천
이백 리를 추적해 심장을 도려 냈다는 등…….
이죽이는 표정 가운데 희롱하듯 말하는 연검천은 새앙쥐를 놓고 있는 고
양이나 다를 바 없었다.
냉약빙은 가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녀가 왜 한숨을 쉬는지, 연검천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정혼자의 초라함으로 인해 그녀가 상심하였으리라 단정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약빙, 넌 내 여자야. 정혼자가 백(百)이라도 상관없어!'
연검천은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냉약빙을 바라봤다.
"좋은 친구이니 잘 대해 줘, 냉매(冷媒)."
"……."
냉약빙은 고개를 다소곳이 떨구었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연검천은 할 일이 바쁜 듯 구월(九月)의 맑은 공기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
져 나갔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으며, 가끔 국화를 짓이겨 밟으며 사라져 갔
다.
그가 일백 장 먼 곳으로 떠나갈 때, 냉약빙은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쳐들
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과 내음이 전신에서 흘러 나온다.
한숨 맡기만 하더라도 몸이 노근해질 정도로 강렬한 체향(體香)이다.
"생각할수록 귀하는 무서운 인물입니다."
"훗훗… 왜 그런 생각을?"
"나였다면 연검천이 모욕을 줄 경우, 참지 못했을 거예요."
"참는다는 건 별것 아니오."
"예?"
"모든 건 습관적인 행동이오. 훗훗……!"
백무영은 천진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은 꽤나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 사람이 백도인이라면……!'
냉약빙은 자신의 마음이 촉촉이 젖어듬을 느꼈다.
어떠한 남자를 앞에 두고도 열리지 않았던 여인의 문이 아니었던가. 그런
데 정체 모를 낭인살수(浪人殺手) 하나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녀의 오똑한 콧날에 아침 햇살은 투명한 구슬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아주 좁아 보인다.
'안아 주고 싶다!'
백무영은 또다시 그녀에게서 여인을 느꼈다.
'자제하자. 마음이 동요돼선 안 된다. 나에 대해 알기 위해 얼마나 극기
해 왔던가!'
백무영은 냉혈의 훈련을 거듭하던 소년 시절을 기억하며 마음의 문을 꽈
악 닫았다.
남녀는 서로에 대해 거의 비슷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상대에 대해 완벽히 믿는 처지가 아니기에,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 유시(酉時) 말(末), 잠풍이 부를 겁니다."
"유시 말."
"잠풍의 거처는 관산검부(關山劍府). 그는 늘 그 곳에서 머물러요."
냉약빙은 백무영에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백무영은 두루마리를 건네 받으며 손끝에 차가운 촉감을 느꼈다.
냉약빙의 손은 꽤 차가웠다.
냉약빙은 손가락이 맞부딪치자, 몸을 가볍게 떨었다.
"관산검부의 내부 구조가 적힌 두루마리예요. 읽고 나서 없애 버려요."
"알겠소."
"상대는 방심하고 있으니, 처리하기 쉬울 거예요. 그러나 잠풍은 이제까
지 열다섯 번 암살 위험에 빠졌으되, 그 때마다 살아난 인물. 호락호락하
게 여기면 안 돼요."
냉약빙은 근처를 힐끔힐끔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그녀에게 애틋한 연민의 정념(情念)을 느끼며 물었다.
"잠풍이 쓰러지고 난 후, 어찌할 예정이오?"
"흑과 백이 완전히 구분될 것이며, 대접전이 벌어질 겁니다. 어쩌면 이
곳이 시산혈하(屍山血河)에 덮일지도. 백도는 수년 간 마도에 침식되었기
에, 명숙들 가운데 마도의 동조자가 무수합니다. 맹의 요직은 대부분 마
도계 인물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백도의 저력은 엄청납니다. 상부가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하부가
정리됩니다. 희생자가 많을 것이되, 지금으로선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냉약빙은 그렇게 말한 다음에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애써 모진 표정을 짓는 듯했다.
"후의 일은 생각할 필요 없지 않나요? 귀하는 본래 개인주의자 이니까."
"하긴, 난 세력에 연민하는 사람은 아니지. 후후, 내가 바라는 건 인생의
쾌락일 뿐이지."
"흥!"
냉약빙은 냉소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머리를 매만질 때, 일 검(一劍)으로 그의 심장을 꿰뚫어요. 귀하의
실력은 귀하의 양심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니, 한순간이면 결정
이 날 겁니다."
"후후… 그건 맞는 말이오."
백무영은 웃었으며, 냉약빙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서 등을 돌렸다. 그녀
는 백무영을 혼자 남겨 두고 걸음을 내딛어 뜨락을 가로질렀다.
백무영의 눈빛이 더 암울해졌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고독(孤獨)의 빛을 그득 담기 시작했다.
지금의 눈빛이야말로 그의 진실된 눈빛이다.
누구도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를 기른 사부라 하더라도,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진 못하고 있다.
밤이 되자, 맹내 도처에서 악기 소리가 들려 왔다.
창맹대회가 무르익어 가며 맹내 이십 군데에서 비무대회가 열렸으며, 오
랜만에 만난 강호인들은 말술을 마셔 가며 회포를 만끽하는 것이다.
들뜬 분위기이다.
늘 이런 축제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세상 살 맘이 더할 것이다.
하늘로 터져 오르는 폭죽(爆竹)들.
오색 불꽃이 피어날 때마다 백무영의 입은 딱딱 벌어지고 만다.
"장관이오, 장관!"
그를 안내하는 무사는 의전당(儀典當) 소속의 무사였다.
그는 백무영이 폭죽이 터지는 데 경탄해하자, 피식 웃고 말았다.
'쑥맥이로군!'
백무영은 무사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다분히 경박해 보였으며, 살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로 보였다.
"이런 곳에 늘 머문다면 사는 맛이 날 텐데. 그러나 난 내일 떠나야 하
니, 아쉽단 말이오."
"떠나시다니요, 탁선생?"
"이유는 알 것 없소."
"훗훗… 떠나는 게 좋을 게요."
무사는 연검천이 백무영을 겁주었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실 누가 연검천이 눈여겨 두고 있는 냉약빙에게 시선을 돌 릴 수 있단
말인가?
연검천은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 한이 생길 경우 어떠한 방법을 쓰
든 한을 풀고야 만다.
그러하기에, 맹내 무사들은 잠풍보다도 연검천을 겁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질적인 대권은 연검천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실
정이었다.
하지만 천하 만인이 모두 잠풍을 알고 있으며, 잠풍의 입김은 여전히 강
한 편이었다.
잠풍이 쓰러진다면, 엄청난 풍운이 몰아닥치리라.
'그분들이 바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잠풍을 베고 대명무문마저 없앤 다
음, 관산검맹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일까?'
백무영은 천천히 청석로(靑石路)로 접어들었다.
잠풍은 관산검맹의 입장에서 볼 때 귀빈이라 여겨지는 사람이 올 경우,
의례적이나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대명무문 쪽에서 백무영을 냉약빙의 정혼자로 위장시킨 이유는, 잠풍의
그러한 전통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관산검부는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이 적요했다.
별빛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숲이 울창하고, 호수가 깊다. 어디를 봐도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백무영은 이미 수백 명의 숨결과 맥박을 느낀 후였다.
'생각보다 막강한 수비진세이다!'
백무영은 점점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잠풍은 허수아비 맹주로 여겨지는 인물.
그런데 그의 거처에 펼치어진 진세는 대명무문이 추측한 것보다 세 단계
위쪽이었다.
'대명무문의 정보가 거의 정확하기는 하나, 그들이 알아 내지 못한 관문
이 무수하다.'
백무영은 기관진학(機關陣學)에 정통한지라, 이백여 보 걷는 가운데 펼치
어진 구면매복(九面埋伏)을 거의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실패할지도…….'
그는 처음으로 실패를 생각했다.
그는 완벽한 무사로 길러졌다.
그는 타인이 일 갑자 내내 익혀야 할 제반 절기를 속성으로 연마했다.
그의 무공 깊이는 자신도 측량하기 힘든 상황.
더욱이 그는 세 번에 걸친 암습 연습에서 완전무결한 성취를 이룩했다.
대명무문 쪽에서 배반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암살은 백발백중 성공하기
쉽다.
그러나 관산검부로 접어드는 가운데, 그는 묘한 초조감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도처에 매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형(陣形)이 그득하다.'
잠풍의 휘하세력은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
'뭔가 다르다!'
백무영은 혀끝이 바짝 말라 감을 느꼈다.
일대에 설치된 진세는 만박이 전수한 진형 가운데, 일급진세로 분류되는
진세가 아닌가.
일자살형진(一字殺形陣),
능마검풍영(凌摩劍風形),
화허풍뢰만상대진(化虛風雷萬象大陣).
그 세 가지 진세만 하더라도, 일천 무사의 기습을 능히 막아 낼 수 있다.
'대명무문이 알아 낸 건 빙산일각(氷山一角)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잠풍의 저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을지도!'
잠풍은 대세를 이용해 맹주가 되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가 진정한 힘의 우세로써 맹주가 된 인물이라면?
그러한 경우, 천하 모든 사람이 잠풍에 대해 잘못 알고 있게 되는 것이
다.
청석로 끝에는 날아갈 듯 우아한 처마를 가진 고풍창연한 건물이 한 채
세워져 있었다.
백무영은 자색 장포를 걸친 무사에게 인도되어 건물 안으로 접어들게 되
었다.
그가 제일 먼저 접어든 장소는 해검전(解劍殿)이라는 곳이었다.
"병장기를 지닌 사람은 이 곳에서 해검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전 병장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헛헛… 하긴 서생이시니."
자포무사는 관산검부의 호법당주였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한기(寒氣)가 일어난다!'
그는 병장기에 대해서는 천하의 전문가이다.
그는 백무영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강한 철기(鐵氣)를 느낀 지 오래였다.
'이 기운은 신병이기(神兵利器)의 기운인데……!'
그는 철기가 짙게 일어나는 물체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봤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철환(鐵環)이었다.
백무영은 상대가 자신의 손가락을 보는 걸 알고 피식 웃었다.
"이것도 빼 놓을까요?"
"그,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무사는 멋쩍게 말하며 두 번째 방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두 번째 방은 너른 면적이었는 바, 방 안에는 늘씬한 미녀가 머물러 있었
다.
그녀는 바로 냉약빙이었다.
냉약빙은 초조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백무영을 기다리고 있다가, 백무영
이 접어들자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호위무사가 알아듣지 못하게끔 전음을 써서 물었다.
"병기는?"
"필요 없소!"
"어이해?"
"허(虛)를 찌른다면, 손이 바로 신병이기가 되오."
백무영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았다.
그는 전음입밀의 경지를 넘어선 혜광심어(慧光心語)로 말하는 것이다.
혜광심어는 소림칠십이종절기(少林七十二種絶技) 가운데 하나이다.
냉약빙의 지식이 보다 해박했더라면, 혜광심어에서 백무영의 무공 연원이
소림일맥(少林一脈)이라는 걸 쉽게 알아 냈으리라.
"잠풍은?"
"곧 올 겁니다. 우린 세 번째 방에서 잠풍과 만날 겁니다. 잠풍은 귀하에
게 일배주를 따라 줄 것이니, 그 순간을 노려요."
세 번째 방은 일컬어 의전(義殿)이었다.
잠풍은 그 곳에서 삼천여 명숙을 접견했었다.
그는 특유한 화술로 상대를 설득시키며 관산검맹의 아성(牙城)을 쌓아 나
갔다.
어떠한 의미에서 그는 만 자루 검이 할 일은 세 치 혓바닥으로 해결한
수완가라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무적대협의 공과를 훔쳤기에, 대명무문에 의해 탄핵당하고 있
는 것이다.
탁자는 팔선탁(八仙卓)이다.
탁자 위에는 호화롭지 않은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은 여아홍(女兒紅), 술잔은 흰 도자기 잔이었다.
백무영은 냉약빙의 정혼자로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백무영은 선 채 잠풍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잠풍이 접어들기 이전, 공식적인 맹주의 호의무사들이 모습을 나타내어
벽 아래 일렬로 도열했다.
하나같이 영기발랄한 검객들로, 백무영의 추레한 모습과는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지극히 경건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가끔 백무영과 눈길이 마주치
는 자라면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시선을 돌렸다.
단아하고 질서정연한 동작.
백무영은 언제부터인가 흥분하고 있었다.
십팔 인의 호의무사들, 그들이 제각기 다르게 취하는 기이한 자세는 하나
의 신비한 검진을 구축하였으며… 모든 기세는 백무영의 신체에 집중되
고 있었다.
백무영이 일거수일투족이라도 잘못 움직인다면, 그들이 찰나적으로 백무
영의 몸뚱이를 토막쳐 버릴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백무영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무적십팔로도진(無敵十八路刀陣). 오오, 오사부가 전수한 검법을 알아야
만 시전하는……!'
백무영이 흥분하는 이유는, 호위무사들이 시전하는 자세가 그가 다 아는
검도식(劍刀式)이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힘이 집결되어 있다. 잠풍의 암살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를 이제
야 알겠다!'
백무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르릉-!
우레 소리가 들리고 벽 한쪽이 쩌억 벌어지며 누군가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십팔 무사는 일제히 허리를 숙였으며, 냉약빙은 숨을 멈추며 백
무영을 힐끗 바라봤다.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눈처럼 흰 장포를 걸친 단아한 중년무사가 여덟 명의 호위무사들과 더불
어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관산검협 잠풍.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극소수 거목(巨木)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체격은 다소 작아 보였으나, 인상은 매우 좋았다. 백도를 이끌어 가는 거
인답게 전신에서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져 나왔다.
그는 냉약빙과 백무영이 무릎을 꿇고 절하자, 빙그레 웃으며 금강진력(金
剛眞力)을 발휘해 냈다.
"절할 필요는 없다."
그의 소매에서 일어나는 진기(眞氣)는 두 사람의 몸뚱이를 쭈욱 펴게 했
다.
백무영은 진기를 이겨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척 허둥대며 몸을 쭈욱 폈다.
그는 처음으로 잠풍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잠풍은 그를 보고 있는 바, 우선 보이는 건 그의 귀밑머리가 학(鶴)의 털
처럼 희다는 것이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는 잠풍.
그의 눈빛은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청백기(靑白氣)를 띠고 있었다.
"자네가 탁무군이로군?"
"그, 그렇습니다."
"헛헛… 남아 대장부가 수줍어하기는. 자아, 이리 와 술을 한 잔 받게."
잠풍은 껄껄 웃으며 술병을 쳐들었다.
이 순간, 적어도 다섯 명이 엄청난 긴장감 가운데 백무영을 주시하고 있
었다.
모두 대명무문 사람들.
이들은 백무영의 일 검과 더불어 정체를 나타내어 대혈겁을 시작할 만반
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잠풍 쪽으로 다가섰다.
'저 눈빛은……?'
그는 저도 모르게 숨결을 흩트렸다.
잠풍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낯익게 느끼어진다.
눈은 마음의 창(窓).
인간의 모든 부분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을 지닌 곳은 바로 눈빛이다.
백무영이 잠풍의 눈빛에 접하고 흠칫해할 때, 잠풍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림을 경영하는 거목(巨木) 특유의 경륜이 엿보이고 있었
다.
허수아비 맹주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기세의 거대함은 백무영을 압도하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주향(酒香)이 짙다.
잠풍은 주전자를 들어올렸으며, 탁자 위의 도자기 잔에 술을 천천히 따랐
다.
술은 여아홍(女兒紅).
연한 호박색(琥珀色)의 술이 흰 도자기 잔에 가득 참에 따라 허공 가득
술 향기가 피어 오른다.
술은 마음의 수심을 쓸어 내는 빗자루.
시인은 술로 시(時)를 빚어 내며, 예인은 술로써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킨
다.
백무영은 잠풍이 술잔을 채우는 걸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상한 상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백무영은 야릇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번뇌(煩惱)의 앙금을 애써 삭히며 내
공을 한 곳에 모았다.
이제 시작해야만 하지 않는가.
잠풍을 베는 일은 그가 처리해야 할 대업(大業)의 제이보(第二步)가 아니
겠는가?
'단 한순간이면 된다!'
백무영은 애써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 놓았다.
죽음에 익숙해진 사람이면 죽음의 순간,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당분간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다!'
백무영은 술잔에 눈길을 모았다.
호박색 액체가 문득 핏빛으로 여겨진다.
그가 번뇌를 애써 잊고 있을 무렵, 일대는 기묘한 살기에 휘어 감기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