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지지 않는 꽃
(1)
길 위에 핏방울은 반 족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뚝뚝 떨어져 있었다.
핏자국은 산 정상으로 향하는 쪽으로 길게 나 있었고, 커다란 바위 아래 허리 굽은 소나무까지 연결돼 있었다.
초승달 하나가 교교하게 대지를 밝혀주는 가운데 임단하는 소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빌어먹을! 잠시 방심했기로 그런 쓰레기들에게 이 지경이 되다니…….'
일신에 걸친 검은 옷은 소나기라도 맞은 듯 흠뻑 젖어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으윽!"
임단하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찡그려졌다.
'도, 독이 급속히 온몸에 퍼지고 있어. 독을 제거할 방법을…….'
그녀는 손으로 나무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많이 불편하면 좀 쉬지 그러시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임단하는 흠칫 놀랐다.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가깝게 접근해 올 상대라면?'
나쁜 일은 겹쳐 찾아온다는 말도 있잖는가.
임단하는 손목을 굽혀 소매 속에 넣어 두었던 화무신관을 소리없이 뽑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 당신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임단하의 눈은 휘둥그래 떠졌다.
뒷짐을 지고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몇 시진 전, 객점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사내였다.
임단하는 자신도 모르게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저 자를 보는 순간 왜 갑자기 마음이 느긋해지는 걸까?'
속세를 벗어난 듯 깨끗하고 늠름한 석비룡의 모습이 임단하로 하여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스러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소. 금의위의 용비석이외다."
석비룡이 허리를 숙였다.
"날 따라온 건가?"
어느새 임단하의 목소리는 예의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석비룡은 빙긋 웃었다.
"당신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내가 먼저 이 자리에 와 있었다면 믿겠소?"
임단하는 매몰차게 말했다.
"내가 왔을 땐 아무도 없었어."
석비룡은 웃는 낯으로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어디 좀 봅시다."
"그 손 저리 치우지 못 해?"
임단하는 그가 내미는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석비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말했다.
"해치겠다는 게 아니고 도와주겠다는 거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소?"
"상관 말고 꺼지란……."
임단하는 그의 뺨을 후려갈길 듯 손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아……!"
순간, 찡하고 현기증이 일며 하늘이 샛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힘없이 쓰러져갔다.
"소저!"
석비룡이 재빠르게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받았다.
임단하는 스르르 긴 눈꺼풀을 감았다.
그의 품안이라고 생각하자 왠지 가슴 저 밑에서부터 편안해지는, 아늑한 느낌에 감싸였다.
임단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스르르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그곳은 석비룡이 미리 보아 둔 동굴이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 데다 짐승의 거처인 듯 공기도 따뜻하고 바닥에는 푹신한 낙엽까지 깔려 있어서 치료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임단하는 계속 신음을 토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어, 엄마! 더……더워요…… 더워……."
그녀의 몸은 불덩어리였다.
더위 속에서도 오한을 느끼는 듯 두 팔을 감싸안고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래 덥겠지, 왜 안 덥겠어? 몸속이 불을 지른 것 같은 염명독을 맞았으면 당장 고칠 방법을 찾아야지,
네가 무슨 금강철괴(金剛鐵拐)를 닦았다고 버텨? 안 더우면 그게 되레 이상한 거지."
석비룡은 그녀 앞에 앉아 진맥을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상태를 살필 수가 없었다.
임단하가 손바닥으로 상처 부위를 부벼대면 댈수록 옷자락은 자꾸만 흐트러졌고 급기야는 그녀의 손길에 따라 봉긋한 젖가슴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녀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젖가슴의 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허나 그것을 보는 석비룡의 표정은 시금털털하기만 했다.
"난 별로 이런 것은 바라지 않는단 말이야."
차려진 밥상은 먹지 않는 것이 그의 성미다. 더구나 그는 지금 환자의 병을 치료해야 하는 의원의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속옷고름까지 풀리고 억눌렸던 생명이 사슬에서 풀려나듯 돌연 뽀오얀 젖가슴이 자태를 드러내자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온 몸의 피가 얼굴로 확 쏠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진정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상아빛으로 윤이 나는 듯한 젖가슴은 지금까지 어떤 여인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이상스런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아냐, 아냐! 이건 아냐!"
석비룡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솟구치는 욕망을 뿌리쳐야 했다.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했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떴을 때, 그의 눈 속에는 일체의 티끌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가,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맑음과 깊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임단하는 의식을 차린 것도,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닌 혼돈 속에서 깊이 침잠해 있었다.
몸속이 유황불로 지진 듯 뜨거워졌다가는 얼음장처럼 싸늘해지기를 수십 번.
"허억!"
목에서 비릿한 피가 울컥 치밀었다.
임단하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왈칵! 한 움큼의 검은 피를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그 앞에 앉아 신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 그는 금의위 위사 용비석이었다.
"다, 당신……."
"내공이 높아 생각보다 빨리 효과를 보는군. 하지만 아직 조심해야 할 것이오."
그녀는 가슴이 시원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옷고름이 풀어지고 가슴의 맨살이 훤히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 발끈했다.
"이 나쁜 자식!"
임단하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벌떡 일어서려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지(四肢)가 무엇인가에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억지로 힘을 주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 시큰한 통증이 뒤따랐다.
석비룡은 혀를 찼다.
"쯧쯧! 성미가 그렇게 급해서야 어디…… 몸속의 독기는 뽑아냈으나 아직 독침은 제거하지 않은 상태요. 그리고 당신 스스로 옷고름을 풀었을 뿐, 나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소."
임단하는 그제야 암암리에 운기를 해보고 뜨겁던 몸속이 개운해진 것을 느꼈다.
"그, 그럼 당신이 내 몸 속의 독을……."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살인에는 능숙했지만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석비룡은 냉소를 던졌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나는 대가는 반드시 받는 사람이니까."
그는 손에 든 단검을 모닥불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뒤집고 있었는데, 단검의 날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임단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독침을 맞은 곳이 모두 몇 군데요?"
"허벅지에 둘…… 왼쪽 가슴에 하나…… 그리고 어깨에 하나……."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벗으시오."
임단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석비룡의 얼굴을 쳐다봤다.
"옷을 벗어야 독침을 뺄 것이 아니오."
말뜻은 알아들었지만 임단하는 곤혹스러운 듯 망설였다.
석비룡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시간을 끌수록 손해지. 다시 독이 몸으로 퍼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임단하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저고리를 와락 벗어 젖혔다. 그리고 바지를 움켜잡고 허벅지 부위의 옷을 부욱! 찢어냈다.
"역시 화끈하군."
석비룡이 이죽거렸다.
임단하는 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동굴 천정을 보고 똑바로 드러누웠다. 그러나 석비룡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명심해! 털끝만치라도 엉뚱한 수작을 부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걱정할 것 없소. 난 대가를 받으면 되니까."
잠시 후 석비룡은 불길에 달아오른 단검을 고쳐 잡고 몸을 일으켰다.
"단단히 각오하시오. 뇌화곡의 비폭천산뢰의 독침이 워낙 작고 가늘기 때문에 단검으로 빼내야 하오. 또한 마혈(痲穴)을 짚으면 아픔은 줄이겠지만 독이 퍼지는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불 맨살을 찢을 수밖에 없소."
석비룡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다시 말했다.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시오. 그러면 고통이 다소 덜할 것이니……."
추억, 그 말은 임단하에게 낯설은 단어였다.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 그런 것이 내게 있었던가?'
다섯 살 무렵이었던가. 부모와 함께 대막을 여행하다 사막의 도적들에게 부모님을 잃었다.
그 후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지금까지 누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치이익!
어깨살이 타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임단아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천정에 붙박여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단 하루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과거의 나날들.
돌이켜 보면 떠오르는 것은 어둠과 죽음 따위의 먹빛 단어들뿐이다.
오히려 석비룡이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푹!
단검이 다시 허벅지 살을 헤집고 들어갔다.
어깨에 하나와 허벅지의 독침 둘을 뺐다.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소."
그의 손이 조심스러워졌다.
독침은 왼쪽 젖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 아름다운 조각품에 손상을 입힌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게 틀림없다!'
석비룡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그의 손이 젖가슴에 닿았을 때 임단하는 처음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네 개의 독침을 모두 뽑아낸 후 석비룡은 그녀의 등에 장심을 모으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곧 따스한 기운이 임단하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정신이 맑아지며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사지백해에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석비룡은 휴우우! 길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소맷자락으로 이마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끝났소. 이제 옷을 입으시오."
임단하는 앞가슴을 여미고 나서 석비룡을 돌아봤다.
"당신, 여자의 몸에 꽤 익숙해 있군. 의술도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고……."
석비룡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단검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임단하는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완전히 돌아앉았다. 석비룡을 쳐다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금의위 위사라고?"
석비룡은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잘못됐소?"
임단하는 흥! 코웃음을 쳤다.
"내 몸이 조금만 성했어도 당신 멱살을 붙잡고 물었을 거야. 일개 금의위 위사의 무공이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냐고!"
석비룡은 껄껄!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당신 몸이 조금만 성했어도 멱살을 붙잡고 물었을 거요. 무슨 여자가 단검으로 살 속을 후벼 파는데도 비명은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 의뭉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임단하는 쿡! 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당신 용비석이라고 했지? 언제고 오늘의 빚은 반드시 갚아주겠어."
석비룡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언제고가 아니라 바로 오늘 갚아야지."
"어떻게?"
임단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석비룡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을 감고 일각만 참고 있으시면 되오."
"왜?"
"그건 묻지 말고……."
임단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석비룡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난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분명히 대가를 받는다고 했잖소. 그러니 소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엣?"
임단하는 한 순간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2)
석비룡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오른손가락으로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임단하의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이 이마에서 콧등으로 천천히 더듬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인중에 닿은 손가락은 더듬이처럼 그녀의 주사빛 입술에 머물렀다.
임단하는 언제부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의 입술을 섬세하게 매만지는 손가락의 감촉에 질린 것 같았다.
손가락 더듬이는 입술의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다시 끝으로, 위로 아래로 움직였고, 닫혔으되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입술 속에서 임단하는 이빨을 앙 다물었다 놓기를 되풀이했다.
석비룡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임단하의 볼과 관자놀이에, 눈시울에 스치듯 가볍게 입을 맞추고 끝내 그녀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 그것은 묘한 느낌이면서 한없이 달콤했다.
임단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비룡을 쳐다봤다.
"이것으로 됐나?"
"이제 시작일 뿐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비룡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그의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를 끌어당겼다.
"으읍!"
임단하는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석비룡의 입술에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비룡은 자신의 입술로 임단하의 오래도록 떨렸던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혀로 그녀의 이빨과 잇몸과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임단하는 뜨거운 하나의 덩어리가 자신의 몸으로 덮쳐온다는 아득하고도 선명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져서 어쩌면 이러다가 아주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임단하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한 남자와 이렇게 입을 맞출 수 있다니…… 아무렇지도 않게…….'
임단하는 숨이 막혔다.
석비룡의 손이 어느 결엔가 그녀의 웃옷 속에 파고들어 맨살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입을 맞춘 채 임단하를 아기처럼 자신의 무릎에 누이고 그녀의 젖무덤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 때, 임단하는 감은 눈을 고통스럽게 찡그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것은 예정에 없던……."
석비룡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임단하 자신도 모르는 젖은 눈동자에 반짝이는 그녀의 욕망을 그는 읽고 있었다.
석비룡은 가늘게 미소를 짓고 다시 입술을 더듬었다.
"내 예정에는 있었소!"
"으읍!"
다시 입술이 마주치고, 깊고 깊은 입맞춤이 나눠졌다.
임단하는 몸이 굳어졌으나 숨을 내 쉴 때마다 저항하는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진기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아니 진기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이 다리만 한 번 쭉 내뻗어 가슴을 차 버리면 되리라.
하지만 임단하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몸은 이성보다는 본능이 지배하고 있었다.
임단하의 가슴 속에 갇혀있던 여자가 석비룡이라는 남자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몸은 서서히 더워지고 석비룡의 입술과 손길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흐윽……!"
임단하의 몸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었다.
석비룡이 그녀의 오른쪽 젖가슴을 함뿍 베어 문 것이다. 상처가 있는 왼쪽 젖가슴은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히면서……
젖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그러나 그 고통 속에 섞여 얄궂게 따라오는 야릇한 쾌감.
임단하는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황홀한 세계에 몰입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 감정을 막는 것은 마치 바람을 손으로 밀어내는 것과 같이 부질없는 짓이다.
'아아! 이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
젖가슴을 더듬던 그의 입술이 위로 거슬러 올라오며 사슴처럼 긴 목을 더듬고 입술로 올라왔다.
'이번엔…… 이번엔…… 반응을 보이면 안 돼.'
굳게 마음을 먹지만 이번에도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입술로 올라올 것 같았던 그의 입술은 얼굴선을 따라 귀쪽으로 옮겨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운 귓볼을 물고 훅! 뜨거운 입김을 귓속으로 불어넣었다.
"하아!"
임단하의 입에서 감미로운 탄성이 나직이 흘러나온다. 결코 싫은 목소리가 아니다. 석비룡은 입 안에서 귀를 살며시 밀어내고 한쪽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돌려 덥석 입술을 덮쳤다.
"으흠……!"
임단하는 신음과 함께 사르르 두 눈을 감으면서 순순히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석비룡은 임단하의 입술을 격렬하게 빨았다.
임단하는 이대로 눈이 멀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석비룡의 입술은 뜨거웠고 혀는 임단하의 입 속을 헤매고 있었다.
임단하는 이제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남아 있던 저항할 힘도 빠져나가고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석비룡의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임단하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석비룡은 입술을 통해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그녀조차 몰랐던 반응을 격렬히 요구했다.
뜨겁고 감미로운 입맞춤이 계속되는 동안 석비룡의 오른손은 서서히 그녀의 허리를 타고 내려가 급격한 곡선을 이루며 퍼진 둔부에 가서 멎었다. 그리고 슬슬 어루만졌다.
석비룡의 손은 그녀가 입은 검은 바지 고름을 끌러냈고, 임단하는 순간적으로 허벅지가 굳어지며 저항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다리의 힘을 풀었다.
그녀는 어떤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바지가 아래로 쑥 내려가며 동시에 석비룡의 손도 아래쪽으로 깊이 찔러 들어갔다.
"하아악……!"
임단하는 저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비명 같은 신음을 토했다.
석비룡의 손은 여인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까슬거리는 거웃을 더듬고 그 밑의 부드럽게 젖은 속살을 확인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중심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
임단하의 입에서는 연신 환희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듯, 꿈과 같이 몽롱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허억!"
임단하는 두 눈을 치떴다.
자신의 몸 위에 와서 또 한 겹으로 얹히는 자신의 몸과 같은 다른 몸의 감각.
석비룡의 몸이 그녀의 몸 안에 들어왔다.
처음엔 놀랐지만 곧 임단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깊게 받아들였다.
완벽한 일체감(一體感)으로 그를 느꼈다.
그녀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남자,
이것은 축복이리라!
석비룡은 그녀에게 자신의 여자를 찾아주었다. 여자에게 남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두 사람의 교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우쳐 주었다.
그녀는 이 행복을 석비룡에게서 받았고 그에게 고마워하고 싶었다.
"하아아……흐으흑!"
임단하가 내지르는 신음은 후끈 달아올랐고 석비룡은 그녀의 신음소리에 맞춰 맹렬하게 그녀의 아랫도리를 찍어 눌렀다.
임단하는 이제 오로지 본능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앞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흐으응…… 흐응……!"
임단하는 마치 요부처럼 허리를 비틀며 야릇한 신음을 흘렸고 석비룡의 허리를 낀 양다리를 버둥거리며 그의 몸을 억세게 조였다.
두 사람의 정열이 완전히 융화되어 서로를 포근히 감쌌다.
사내는 여인의 대지에 비를 뿌렸고, 사랑에 목마른 여체는 뜨겁고 진하게 그 비를 받아들였다.
임단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온통 기쁨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려웠다.
현실 같지 않은 그 느낌을 전해주는 이 남자를 앞으로 오래토록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 * *
묘지 속에 자리 잡은 사당(祠堂)은 검은 지붕만 을씨년스럽게 어두운 새벽하늘에 우뚝 자태를 내놓고 있었다.
바람결에 삐걱거리는 처마 아래에서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고 괴기스러웠다.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지 사당 안은 태풍이 막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살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제대 위에는 촉대 두 개가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다.
적송자(赤松子) 노용무(盧龍茂)는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두두두……!
난데없이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노용무는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
삐이걱……!
문이 열리고 휘이잉! 세찬 바람이 안으로 몰아쳐 들어왔다.
노용무는 감히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더욱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무림맹 산하 곡강지단(穀康之團)의 책임자로 있는 노용뭅니다. 고명하신 화령귀객님을 뵙게 되어 무상의 영광입니다!"
그렇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화령귀객 임단하였다.
"부탁한 것은……?"
노용무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화사하고 고귀한 여인이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아름다움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긴장으로 심장이 벅차올랐다.
노용무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두 손바닥 위에 종이 꾸러미를 받쳐 앞으로 내밀었다.
"물론 가져왔습니다. 살명부에 오른 자들의 얼굴입니다. 모두 인근 백여 리 이내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확인된……."
임단하는 종이뭉치를 받아 휘리릭 넘기며 종이 위에 그려진 얼굴들을 확인했다.
몇 장의 종이를 뽑아 아무렇게나 휙 던져 버렸다.
"이건 없애 버려."
"예?"
노용무는 의아한 표정으로 임단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임단하는 짧게 대답했다.
"이미 숨 쉬지 않는 자들이니까."
아래를 내려다보는 노용무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위에는 금각동인 조추상을 위시하여 백구혈안 소진량, 귀왕 제수륭, 상산쌍마 등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보내는 척살객들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던 이 악적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다니, 화령귀객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로군!'
종이를 뒤적이던 임단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란 빛이 스쳤다.
그녀는 종이뭉치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뽑아 노용무의 얼굴에 뒤집어 보여주었다.
"누군가?"
노용무는 즉시 대답했다.
"천리무영 석비룡입니다."
임단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가 천리무영이라고?"
마치 자신이 말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노용무는 침을 튀기며 말했다.
"이백오십육 명의 척살대상자 중 가장 강한 자로 지목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입니다만……."
임단하는 종이 위에 그려진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석비룡……거꾸로 하면 용비석이라, 정말 재미있군."
"예?"
노용무는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다 생각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됐어."
임단하는 휙 몸을 돌렸다.
문쪽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무슨 뜻일까? 신분이 드러날 걸 뻔히 알면서 내게 접근한 이유는……?'
임단하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를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3)
무림맹 총관, 지다성(知多誠) 하을현(河乙鉉)의 등 뒤에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 짙게 드리워지는 순간 그의 얼굴은 무섭게 경직되었다.
'손님이 왔는가? 꽃마저 시들 정도로 뼛속까지 밀려오는 차가운 죽음의 한기(寒氣)를 지닌 자라…….'
그의 유일한 취미였던 매화는 애써 꽃을 피운 공도 헛되이 그대로 시들어버린 것이다.
하을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서있는 자는 귀검수 왕소우를 설득하기 위해 떠났던 총집사 해은이었다.
"총관님을 뵈옵니다."
"먼 길을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소."
하을현은 해은의 인사를 받으며, 해은이 허리를 숙인 그 뒤에 서 있는 한 명의 사내를 보았다. 숫돌에 잘 갈린 한 자루
칼날을 연상시키는 사내. 그가 매화의 꽃을 지게 만들었으리라.
'이만한 기도를 가진 사내라면…….'
하을현은 한 눈에 그 자가 귀검수 왕소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여인은 왕소우가 금아, 라고 불렀던 여인. 빗속에서 왕소우에게 굴욕적으로 몸을 빼앗겼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쪽으로……."
해은이 왕소우를 안내해 정원 저쪽으로 멀어졌다.
왕소우와 하을현은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뿐, 의례적인 수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의부(義父)를 뵙습니다."
하을현은 아연 긴장하고 있다가 금아가 구름처럼 절을 올린 후에야 그녀가 바로 자기 앞에 있음을 알아챘다.
의부라니?
그렇다.
하을현은 어린 나이로 기루를 떠돌던 그녀를 거둬 자신의 수양딸로 삼아 애지중지 키웠던 것이다.
"그, 그래. 금아였구나."
금아는 고개를 완전히 들지 못하고 여전히 시선은 땅 끝으로 고정돼 있었다.
하을현의 얼굴에 측은한 빛이 서렸고,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어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도록 얼굴을 들어올렸다.
"달빛보다 더 고왔던 너의 얼굴이 이렇게 상하다니……."
금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자욱한 물기가 어렸다.
"아, 아닙니다. 의부님."
입술을 바르르 떨며 내뱉는 그녀의 말이, 서리서리 깃든 슬픔이 하을현의 가슴을 모질게 때렸다.
"아니긴…… 미안하구나. 금아야. 이 의부가 이번 일로 너에게 평생을 통해 갚지 못할 빚을 졌으니……."
금아는 그의 얼굴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아니옵니다. 의부님의 하늘같은 은혜를 입은 몸…… 소녀가 보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하오리까."
하을현은 금아의 어깨를 포근히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금아의 머리 위로 한없이 푸르러 더욱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 봤다.
"허어! 참으로 못할 짓을 한 게야. 참으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이 가혹한 운명 앞에서 하을현은 긴 탄식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 *
무림맹 맹주의 집무실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볼품없었다.
집무실을 장식하는 가구라고는 책은 별반 꽂혀 있지도 않은 작은 책장과 싸구려 나무로 짠 것같은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 몇 개뿐이었다.
서문화는 의자에 앉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천장을 향해 있었고, 입은 한없이 벌어져 있었으며 코에서는 드르렁, 드르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서문화는 잠에 취해 있는 것이다.
"맹주님, 맹주님!"
언제부터인가 그 앞에는 해은이 소리를 높여 맹주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도 자장가처럼 들리는 걸까?
서문화의 코고는 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마침내 해은이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음…… 총집사?"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해은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그뿐이다.
"나 깨우지 말고 나중에 와! 난 점심 먹고 한 숨 때리는 게 유일한 취미야."
해은이 안타까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귀한 손님이……."
"글쎄…… 얼마나 귀한 손님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오라고 그래…… 난……."
서문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잠꼬대나 다름없다.
해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귀검수 왕 대협이 왔는데 이렇게 눈을 뜨지 않으시면……."
"뭐? 누, 누가 왔다고?"
서문화는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번쩍 두 눈을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해은의 등 뒤에 서 있는 귀검수 왕소우의 얼굴이 그의 두 눈에 가득 찼다.
"아이고! 내가 이런 결례를!"
서문화는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났고,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왕소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마치 헤어졌던 님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
"저, 정녕 그 위명이 대단하신 귀검수 왕 대협이시오?"
"내가 왕소우인 것은 맞소만……."
왕소우의 음성은 여느 때나 다름없었다. 높낮이 없이 낮게 깔린 저음이었다.
서문화는 무림맹 맹주의 신분도 생각하지 않고 넙죽 허리를 꺾었다.
"미천한 서문화, 이 시대 최고의 검신(劍神)을 만나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올시다!“
* * *
실내에는 시큼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아마 이런 걸 두고 얘기하는 것일 게다.
왕소우를 마주 하고 술을 마시는 서문화는 술이 다섯 순배가 돌기 전에 목소리가 꺾어지기 시작했고, 열 순배가 돌기 전에 몸이 뜨거운 물에 데친 오징어처럼 흐트러졌다.
꺼어억! 트림을 하기도 하고, 딸꾹질을 연발했다.
"아시겠소? 여섯 번이란 말이오……지난 팔 년 동안 무려 여섯 번이나 무림맹주가 바뀌었다는 건 다시 말해서……
현 무림맹주의 자리가…… 싸구려 주루의 주인만도 못한 꼬락서니로 전락했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왕소우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잔만 비워대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의 냉정함이다.
킥킥킥!
서문화는 갑자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백오십육 인의 인간을 선별해서 살명부에 올리자 무림은 벌집을 건들인 양 난리가 났소."
뜬금없이 이렇게 얘기하고는 축 풀어진 눈으로 왕소우를 쳐다보며 헤벌쭉 웃었다.
"정파에선 같잖은 짓을 한다며 비웃고, 사파에선 눈에 불을 켜고 날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이거요. 허나 말이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완수하겠다고 결심했소! 이것만 성공하면 무림맹은 새롭게 변신할 수 있소. 아울러 이 서문화의 체통도 좀 살아날 테고……."
서문화는 다시 헤헤 웃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혼자 만취해 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지. 이 일은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소. 왕 대협께서 도와주시기로 결심한 이상 누가 우릴 막을 수 있겠소?"
왕소우는 말이 없었다.
다만 스스로 술잔을 채우고 또 비웠다.
그 표정이 심상찮다고 느꼈는지, 서문화는 왕소우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서, 설마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하신 건……?"
왕소우의 무거운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내 발로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모든 걸 결정했다는 뜻이오."
서문화의 얼굴에 금방 희열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고, 고맙소! 왕 대협!"
무림맹 맹주의 체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인사를 하는 것이다.
비웃을 법도 하건만 왕소우는 무뚝뚝했다.
예의 그 무거운 눈빛으로 서문화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무슨……?"
서문화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눈을 껌벅 껌벅거렸다.
"맹주께선 어째서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계시오?"
"본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왕소우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한때 무림엔 이런 소문이 있었소. 무림을 지배하는 건 구파일방과 육문오가, 십팔봉회이지만 그 중 서문세가의 저력이 으뜸이라는……."
서문화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소문도 있었소?"
왕소우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서문세가에서 배출한 두 명의 천재 때문이었소.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 둘 가운데 한 명은 출가한 뒤 완전한 미치광이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강호를 떠돌다 반미치광이가 되었소."
서문화가 바보처럼 웃었다.
"헤헤…… 설마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
서문화는 펄쩍 뛰며 두 손을 훼훼 내저었다.
"아이구! 그 무슨 듣기 민망한 말씀을! 반 미치광이라는 말은 맞겠지만 애초부터 난 천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올시다!"
"무림맹으로 오면서 이런 예감이 들었소. 어쩌면 이번 일은 상상 이상으로 험난할 것이라는…… 나의 생명을 걸어도 부족할 만큼 말이오."
왕소우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서문화의 턱이 움찔 굳어지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귀신조차 속이지 못한다는 귀검수 왕소우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