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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태동(胎動)하는 음모(陰謀)
1
폭풍군도(暴風群島).
해남도에서 동남쪽으로 육백여 리 정도의 바다를 가다가 보면 무수한 바위섬들이 얼키설키 뒤엉켜 있는 하나의 해역(海域)을 만날 수 있다.
수백여 개의 크고 작은 바위섬들로 이루어지고 일 년 내내 불어 닥치는 광풍폭우(狂風暴雨)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다.
황금해와 더불어 죽음의 이대해역이라 불리는 곳이다.
콰르릉…… 카앙……!
바다를 접한 절벽 면에 파도가 부딪치자 쇳소리가 울렸다. 절벽 면이 바위가 아니라 쇠로 됐음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철벽 면의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반듯한 바위면 중간에는 바위의 결이 상하로 엇갈려져 만들어진 천연적인 공간이 있고, 그곳에는 사람 하나가 걸어 갈 정도의 좁은 길이 쭈욱 나 있었다.
그 정중앙, 사지(四肢)를 크게 벌린 하나의 인영이 거센 파도를 고스란히 받으며 서 있었다.
한 번의 파도가 물러가자 잠시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바닷물에 젓은 머리카락을 뒤로 제껴 넘기는 매혹적인 인물.
바로 무적해룡 용해린이었다.
그는 사지를 두꺼운 쇠사슬로 절벽에 고정한 채 엄청난 위력의 파도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받고 있었다.
대체 그는 이 험악한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폭풍군도의 파도.
그것을 파도라 한다면 말의 어폐가 있었다.
푹풍군도 주위를 휘감고 있는 수십 개의 와선류(渦旋流).
일명 폭풍와선해류(暴風渦旋海流)로 인해 형성된 그 파도의 힘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강철이라도 흠집을 낼 정도로 가공할 힘이 담겨 있다.
헌데 황당하게도 그런 가공할 힘을 머금은 파도를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있는 용해린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권태로움이었다.
그는 하품을 했고, 쇠사슬에 묶인 양손을 들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 슬슬 이 짓도 그만 둘 때가 다 된 것 같다."
절벽 중간에 위치한 하나의 비동(秘洞).
"호천신갑(護天神甲)을 입고 수련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용해린의 시선이 향한 벽에는 기이한 빛을 띠고 있는 검은 색 갑주(甲胄)가 걸리어 있었다.
검은 색을 띤 작은 철편(鐵片)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총총히 박힌 갑주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상당히 육중해 보였다.
용해린은 갑주를 쓰다듬었다.
단맥(單脈)으로 내려오는 그의 가문의 내공법은 아주 특이했다.
폭풍군도를 휘도는 푹풍 와선해류를 전신으로 받으며 자연스럽게 금강불괴의 몸이 되는 것이다.
용해린의 입가에는 자긍심이 담긴 당당한 미소가 어렸다.
"하나 궁극의 목적은 이렇게 함으로써 몸 안에다 가공할 선천강기(先天 氣)를 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름하여 천황패력(天荒覇力), 바로 본문의 최강 심법이며 호신강기이다."
어린 나이에 그가 지닌 가공할 내공과 무공은 절대로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을 자세히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미줄처럼 무수하게 난 가느다란 실선은 상처 자국이었고 거의 걸레조각을 이어 놓은 것 같았다.
바로 이것이 가공할 내공의 대가였다.
폭풍해류에 담긴 힘과 철기(鐵氣)를 받아들이며 내공을 수련하는 그의 가문의 심법. 허나 폭풍해류의 힘이 너무 강해 호천신갑을 입고 수련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용해린은 그렇게 하다가는 이전의 선조들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열 살 때 생각해 얻어진 결론은 호천신갑을 벗고 폭풍해류를 맨몸에 받으며 수련하는 것이다.
"쉽진 않았지."
그는 문득 호천신갑을 벗고 와선해류를 맞았던 그때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직후 그는 뼈가 부러지고 전신의 살이 터져 꼬박 십 일을 누워 있어야만 했다. 허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그 결과가 불과 약관의 나이에 대해제일인으로 불리는 지금의 무적해룡 용해린을 만든 것이다.
동굴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의 앞에 거대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여 명이 뛰어 놀아도 남아 돌 정도로 거대한 지하 광장이었다.
지하 광장 저 높이 오십여 장 높은 곳에 작은 구멍으로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용해린이 멈춘 곳은 두 개의 석문이 마주선 곳이다.
-지심열천(地深熱泉).
-지심한천(地深寒泉).
그 석문 너머에는 음양쌍천(陰陽雙泉)으로 갈라진 두 개의 못이 있다. 이곳은 용해린이 수련하며 부러진 뼈와 손상된 혈맥을 단기간에 치유해 주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도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계속 걸음을 옮기던 용해린은 중앙의 광장을 가로질러 한쪽 벽 앞에 섰다. 시커먼 색을 띤 철벽(鐵壁)이었다.
철벽 앞에 선 그는 돌연 기마 자세를 했다. 이어 그는 두 손을 허리에 둔 상태로 눈을 반개(半開)했다.
잠시 후 그의 전신에서 철벽만큼이나 검은 묵기류(墨氣流)가 흘러나왔다.
검은 기류는 용해린의 허리 어림에서 서서히 팽이처럼 회전했다.
"천황패력―!"
한순간 짧은 일갈과 함께 그의 손이 앞으로 쭈욱 뻗어 나갔다. 더불어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던 묵기류가 장(掌)을 통해 내쳐졌다.
휘류류륭- 츠츠츠츠―!
용해린의 신체를 회전하던 검은 기운이 용해린의 팔목을 타고 뻗쳐졌다.
콰쾅! 우르르르……!
석실 전체가 굉장한 진동으로 흔들렸다.
그가 내리친 철벽에 장인(掌印)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석실 전체를 울릴 정도의 가공할 장력이었지만 벽에는 그저 일곱 치의 장인만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철벽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철로서 희대의 보검이라 해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지극묵강철(地極墨鋼鐵)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더욱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철벽에는 방금 용해린이 만든 장인과 비슷한 손자국들이 무수히 많았다.
깊은 것은 열 치의 두께에서 얕은 것은 네 치의 두께까지 실로 다양한 깊이를 지닌 손자국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섯 치를 넘지 않았다.
"후우…… 역시 똑같군! 일곱 치의 깊이 뿐이다."
그는 나직한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전보다는 그래도 조금 나아졌지만 천황패력공을 칠성에 다다르도록 펼치면 내력이 급격하게 소모되는 것은 변함이 없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혈마를 영원히 잠재우려면 가문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혀야만 한다. 정녕 천황패력공은 칠성 이상 펼칠 수 없는 것인가?"
용해린의 마음은 착잡하게 축 가라앉아 있었다.
최강의 무공이라 해도 극한으로 익혀 펼치지 못한다면 그것의 진정한 위력은 반감되는 것.
가문 최고의 무공을 펼칠 때 육성(六成)까지는 상관없지만 칠성(七成)의 단계를 펼치게 되면 모든 내공이 사라져 버린다.
"이 년여를 매달렸지만 더 이상 무공의 진전이 없었다. 결국 아버님의 말씀대로 본문 십 육 대 조사님의 흔적을 찾아야만 이 결점을 메울 수 있다는 얘기인가?"
허탈한 마음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해를 뒤진 것도 벌써 이 년여가 가까워지고 있으나 조사님의 흔적은 전혀 찾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2
〈조사전(祖師殿).〉
장방형의 아주 넓고 긴 대전이다.
한쪽에 일렬로 주욱 늘어선 좌대(座臺)들이 있었고, 그 위에는 각기 한 사람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생기(生氣)가 전혀 없는 인물들.
그들은 모두 좌화한 시신들이었다.
지금 용해린은 그 좌화한 인물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선조님들! 삼십대 후손 용해린이 문안 인사 올립니다."
그들은 모두 용해린의 선조들이었다.
살아생전 극도의 패공(覇功)들을 연마했었는지 그들의 전신에서는 패기가 흐르고 있었다.
좌대 밑에는 각기 일대(一代)부터 이십팔 대(二十八代) 문주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십육(十六)이라는 숫자가 쓰인 좌대였다.
묘하게도 유독 그곳에만 좌화된 시신이 없었다.
"십 육 대 조사님의 유체를 찾기만 한다면 가문 무공의 결점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매일같이 마주하는 선조들의 시신이었지만 요 근래부터 선조들은 그의 전신을 내리누르는 알 수 없는 침묵을 던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천황패력공의 성취 단계가 칠성에서 멈춰 버린 때부터였다.
용해린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겨 조사전을 나왔다.
* * *
〈무고전(武庫殿).〉
천하의 모든 서책들이 모여 있는 듯 얼핏 보기에도 오만 권은 훨씬 넘어 보이는 서책들이 기다란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지극묵강철로 이루어진 벽이 있었고 용해린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철벽은 조금 특이하게도 아랫부분에는 석자 크기의 철벽이 돌출되어 있었다.
돌출 된 작은 철벽의 한 귀퉁이에 십육이라는 숫자가 아홉 치 두께로 파여 있었다.
'지인(指印)을 남기신 분은 십 육 대 조사님이다.'
철벽 앞에 선 용해린이 자세를 바로 하며 우수를 들었다. 그의 우수는 거무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더불어 그의 주위로 기이한 막이 여러 겹 형성되고 있었다.
'일곱 겹의 묵강벽(墨 壁), 가문의 천황패력공(天荒覇力功)이 정확히 칠성의 경지이다.'
용해린은 검지(劍指)를 곧추세워 지극묵철강에 글자를 새겨 갔다.
〈천(天).〉
용해린이 새긴 천이라는 글자는 정확히 일곱 치 두께의 홈을 만들었다. 그때였다.
그그그긍……!
돌출돼 있던 철벽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며 그 바닥에 무언가 글이 나타났다. 글은 아주 짤막했다.
〈황금해(黃金海)로 나를 찾아오라. 인연이 닿는다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십 육 대 문주 천문(天文).〉
가문의 조사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대대로 조사전에 들어가 좌화하게 되지만 한 인물 십 육 대 선조만은 그 유체가 조사전에 없었다.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그 십 육 대 선조의 흔적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삼 년 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십 육 대 조사님의 흔적이다. 그것도 단지 황금해로 찾아오라는 말만 달랑 적혀 있을 뿐."
돌출된 석벽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유일하게 남긴 이 글조차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용해린의 시선은 십 육이라고 파인 철벽을 주시했다.
아홉 치 두께의 깊이로 파인 홈, 천황패력공이 구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용해린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개파조사에 근접하게 천황패력공을 익히신 그 분의 유물만 찾는다면 나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있을 것이건만……!"
이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해에나 다녀와야겠다."
용해린은 몸을 돌렸다. 이 년 넘게 황금해를 뒤지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용해린의 신형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 * *
해천포(海天浦).
대해제일의 세력 해왕맹의 본거지가 있는 해왕천도(海王天島)에서 가장 큰 포구이다.
며칠 들어 유난히 많은 범선들이 해왕천도에 집결하고 있었다.
오색 번을 돛에 매단 거대한 범선이 끊임없이 포구로 들어오고, 수천 명의 해왕맹 무사들이 배에서 내렸다.
해왕천도는 배에서 내린 무사들과 수천수만의 주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바로 보름 뒤에 대해연(大海宴)이 열리기 때문이다.
대해연은 대해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祝祭)이다.
바다의 신께 제사를 올리고 삼 일에 걸쳐 신나게 먹고 마시는 날이었다. 대해 최고의 축제일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해왕대선.
해옥랑이 타고 있는 해왕대선이었다.
그들은 다른 배들과 달리 닻을 올리고 있었다.
대해연에 쓸 한 가지 물건이 모자라 대륙의 복건성(福建省)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백오골계(白烏骨鷄).
백오골계는 바다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반드시 필요한 새였다.
복건성에서만 기르는 것으로 보통의 오골계보다 크기가 배(倍) 이상 된다. 겉은 백설보다도 희나 그 속살이나 뼈 등 심지어 내장들까지 검은 새였다.
바다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꼭 필요한 것이고 대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것을 한 달 전에 일만여 마리나 준비해 놓았으나 바로 며칠 전 백오골계가 있는 축사(畜舍)에 불이 나서 거의 모든 백오골계가 불에 타 죽었다.
해서 그것을 다시 가지러 그들은 복건성으로 떠나는 것이다.
해왕천도의 한 절벽.
한 인물이 하나의 하늘로 전서구를 날리고,
푸드득―!
힘찬 날개 짓을 하며 날아가는 전서구의 다리에는 하나의 서찰이 매여 있다.
〈지시에 따라 대해연에 쓸 백오골계가 있는 곳을 불태워 백오골계를 모두 없애 버렸음.
대해천봉 해옥랑은 다시 백오골계를 얻으러 복건성으로 출발했음.
다음 명(命)을 바람.
비찰십호(秘察十號).〉
간략한 글이 적힌 서찰이 한 마리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 있었고, 전서구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3
아주 드넓은 지하 석실이었다.
화르르르…….
석 자가 조금 넘는 작은 청동 향로에서 후끈한 열기를 담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으…… 스으…….
향로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분홍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동 향로 앞.
"아흐흑……!"
여인의 숨넘어가는 교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분홍색의 기운 속에는 전라(全裸)의 일남일녀(一男一女)가 기괴한 자세로 뒤엉켜 서 있었다.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라 할 이제 십 칠팔 세 정도나 된 어린 소녀,
그녀는 기괴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치 가슴에 무언가 둥근 것을 잡은 듯한 형상이었다. 그런 소녀의 신체는 바닥에서 두 자 가량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가 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언가에 걸려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전라의 소녀의 몸에 걸릴 것이 있었던가?
있었다. 소녀의 하복부, 막대기 같은 것이 소녀의 여린 비궁(秘宮)에 걸리어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단단한 물건은 사내의 양물이었다.
소녀의 비궁을 꿰뚫은 양물을 타고 한두 방울 선혈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괴할 정도로 큰 사내의 양물이 소녀의 여린 비궁 속을 느릿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사내도 역시 서 있었다. 소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는 한 명의 청수한 중년인, 나이는 사십 대 중반 가량 되었을까?
그런데 그는 눈같이 하얀 백발(白髮)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가 백발인지 그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퍼런 기운이 감돌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양물과 결합된 소녀의 하체는 선혈이 낭자했다.
"아악… 하윽… 아흐윽……."
하나 괴이하게도 소녀의 입에서 연신 숨넘어 가는 교성이 흘러나왔다. 쾌감에 겨워하며 뭇 여인이 토해 내는 단내 나는 교성이었다.
소녀는 지금 엄청난 쾌락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소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중년인이 혈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까닭이다.
쾌감을 느끼는 소녀와는 달리 중년인의 얼굴에는 음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그의 표정은 진중했다.
그의 자세도 소녀와 다를 것이 없어 가슴 앞에 손바닥을 펴서 모은 상태였다. 그의 구부린 손바닥 안에는 원구(圓球)형상의 백색 기운이 머물러 있었다. 하나의 단정(丹精)처럼 느껴지는 원구였다.
원구는 희미한 백색 기류를 빨아들이고 있었는데 그의 양물과 소녀의 비궁이 결합된 곳에서 생성된 백색 기류가 소녀의 모아진 손을 타고 흘러드는 것이다.
스으…… 스으읏…….
청동향로에서 흐르는 기운이 여인의 백회혈로 스며들고, 그 기운은 여인의 단전을 통해 두 사람의 결합된 부위를 통해 중년인의 원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아… 흐윽……."
여린 처녀지를 처음으로 사내의 양물에 꿰뚫려 선혈이 흐르는 데도 소녀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사내가 지극히 천천히 움직이는 데도 여인은 쾌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보통 남녀가 교접을 통해 열락(悅樂)의 정점에 다다르려면 남녀의 성기가 무수히 마찰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소녀는 지극히 느리게 움직이는 중년인의 행동에서 쾌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마도 소녀가 쾌감을 얻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청동 향로에서 흐르는 향이리라.
향로의 향이 소녀의 백회혈로 들어갈 때마다 소녀는 쾌감에 전율했고, 사내의 양물이 자신의 비궁을 느릿하게 드나들어도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흐으으… 하아아… 아흐흑……."
소녀의 교성이 더욱 급박해졌다. 정점이 머지 않은 듯했다.
소녀의 장심 안에 맺혀 있던 기운은 거의 사라져 갔다. 그에 반해 중년인의 손바닥 안에 있던 원구는 점점 더 빛을 발해 갔다.
그때부터 소녀의 단전 부위가 서서히 움푹 꺼져 가는 것이었으니.
그녀의 순음지기(純陰之氣)가 빠져나가는 현상이었다.
사악하게도 중년인은 채음보양(採陰補陽)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단전 부위가 점점 오그라들자 윤택했던 소녀의 피부도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생명의 기운이 점점 빠져나가는 현상이었다.
그에 비례해 소녀의 입에서는 더한 교성이 울려 퍼졌다.
"흐학!"
어느 한 순간 소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뒤로 꺾이며 소녀의 작은 신체가 축 늘어졌다.
소녀는 그대로 죽은 것이다.
죽은 소녀의 입가에는 극도의 쾌감을 느낀 듯 희열의 빛이 충만했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몰골은 실로 볼품이 없었다.
윤택하고 싱싱했던 피부는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곳곳에 주름이 가득했다. 게다가 소녀의 아랫배 부위는 푹 꺼져 있어 시신도 이러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백발의 중년인에게 순음지기를 모두 빼앗긴 결과였다.
중년인의 장심에 모아져 있던 백색의 원구는 서서히 엷어지며 그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츠으으…… 츠으읏…….
한 순간 그의 전신이 하얀 기운에 휩싸였다가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후우우……."
그는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그제서야 자세를 풀었다.
번쩍―!
한기를 절로 느끼게 하는 백색의 뇌전이 그의 두 눈에서 작렬했다.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하얀 얼굴과 마찬가지로 싸늘한 백광이었다. 그는 백광의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음령한빙공(陰靈寒氷功)의 화후가 거의 구성에 이르렀군."
건조하게 말을 내뱉는 그는 볼품없이 변한 소녀의 시신을 구석으로 휙 던져 버렸다. 그곳에는 비슷한 형상의 시신이 빼곡했다. 수백 구가 훨씬 넘는 수였다.
"앞으로 백명(百名) 분의 순음지기를 얻는다면 대성(大成)에 이를 수 있으리라. 흐흐흐!"
그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벌써 구백여 명 가까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무고한 소녀들을 희생시켰다는 얘기인데 실로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흐흐. 음령한빙공이 완성된다면 일황(一皇)이나 일존(一尊)도 내게 두려울 것이 없지."
이 자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천하에서 음령한빙공이라는 빙공을 익힌 이는 천하에 오직 단 하나다.
천하 최고의 절대자들이라는 십대고수 중 사마(四魔)의 한 명인 한령빙마(寒靈氷魔) 뿐이다.
최강의 빙공(氷功)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음령한빙공(陰靈寒氷功)은 빙공의 원조라는 북해의 인물들조차도 떨게 만드는 가공할 무공이다.
그의 손에 걸려 얼음으로 화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의 빙공은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헌데 그것이 이렇게 어린 소녀들의 순음지기를 빼앗아 익히는 것일 줄은 무림인들이 꿈에도 모르고 있는 일이다.
구석에는 소녀들이 세 명 더 있었다.
그녀들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최음(催淫)향에 취해 있었다.
한령빙마가 한 소녀에게로 갈 때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누구냐?"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석실 밖에서 화답이 있었다.
"오호법(五護法)님, 해왕맹의 비찰 십호에게서 전령이 왔습니다."
"해왕맹에서……?"
한령빙마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럼, 해옥랑이라는 계집이 해왕맹을 떠났다는 얘기냐?"
"예!"
"드디어 내려오는군. 그렇다면 곧 마종사뇌 군사의 계획이 실행된다는 얘기이고, 본 혈마천이 천하를 얻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도 되지."
혼자 중얼거리던 한령빙마는 석실을 향해 외쳤다.
"즉시 지금껏 준비해 왔던 구파일방에 관한 계략을 펼쳐라. 또한 육호법(六護法)에게 연락을 보내 만반의 준비를 하라 전하라."
"존명!"
짧은 말을 끝으로 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한령빙마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아쉽군. 해옥랑 정도의 순음지기라면 나의 빙공이 단시일에 대성할 것인데, 대계(大計)를 위해서 그냥 죽여야만 하다니……."
입맛을 다신 그는 또 다른 소녀를 유린해 가고 있었다.
악마에 의해 한 떨기 꽃이 또 떨어지고 있었다.
한데 천하 십대고수에 드는 한령빙마. 그도 혈마천에 속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사악한 향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4
화산(華山).
중원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불리는 천하의 명산이다.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에 위치한 화산. 그런 화산에는 선인봉(仙人峯), 연화봉(蓮花峯), 낙안봉(落雁峯) 등 삼봉이 유명했다.
허나 무림인들에게 있어 이 산이 유명한 이유는 중원 최고의 문파들인 구파일방 중 화산파(華山派)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화봉에 먹장구름이 걸리어 있었다.
비라도 오려는가?
번쩍!
어느 순간 연화봉 위로 번갯불이 작렬했다.
그리고 밀어닥치는 뇌성벽력은 연화봉 정상에 세워진 무수한 전각군들을 밝혔다.
구파일방에 드는 검의 명가 화산파였다.
번쩍…… 우르르릉 쾅!
하늘을 쪼개듯 내리꽂히는 벼락 속에서 한 사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석실의 담벼락을 타고 은밀히 스며들고 있었다.
석실 위에는 커다란 글씨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조사전(祖師殿).〉
이곳은 화산파의 최고 중지인 조사전이었다.
그런 조사전으로 은밀히 스며드는 인영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를 벼락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 의해 조사전 석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한 점 불빛도 없는 그곳은 암흑천지였다.
이내 그는 석실을 닫아 버렸고, 석실에 난 통로 안으로 접어들었다. 암흑 속에서도 그는 정확히 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 또한 암흑 속에 잠겨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딱! 딱!
한순간 목적지에 다다른 사내에게서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안이 환해졌다.
부싯돌의 불꽃이 튀며 횃불에 불이 밝혀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 횃불의 위치를 안 것을 보면 사내가 이곳에 지리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횃불이 밝혀지면서 석실 내부의 모습과 사내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십여 개의 커다란 서가(書架)가 이어진 석실이었다.
서가마다 두툼한 서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서가를 둘러보는 사내는 이십 대 초반의 준미한 청년이었다.
입매가 얇고 날카로운 눈매가 일견 냉혹함을 주는 그런 청년.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책장을 둘러보았다.
어느 한 곳에 이른 그는 하나의 두툼한 서책을 서가에서 빼내었다.
〈육합매화진경(六合梅花眞經).〉
책자의 표지에는 웅후한 필체로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아! 그것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최고 무공이 담긴 비급(秘 )이 아닌가. 그것이 외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육합매화진경…… 됐어!"
그는 비급을 품에 품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불을 끄고 빠르게 조사전에서 나왔다.
그가 조사전을 나왔을 때였다.
"나도성(羅道星) 사제(師弟), 자네가 왜 거기에서 나오는 건가?"
조사전 입구에서 한 명이 의아로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순간 나도성이라 불린 청년은 심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는 그의 여러 사형(師兄) 중 한 명으로 조사전을 지키는 인물 중 하나였다. 조사전을 지키던 이들은 장문인의 부름을 받아 방장실에 가 있었기에 나도성이 조사전에 수월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도성은 다음 대 화산을 이끌어 갈 화산십검(華山十劍)의 막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이는 그의 다섯째 사형 기도옥(寄途玉)이었다.
"조사전은 장문인의 허락이 없이는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자네가 왜 거기에서 나오는 건가?"
기도옥이 눈을 부라리며 나도성에게로 다가들고 있었다.
순간 나도성의 눈빛이 사악하게 변했다. 허나 그의 입가에는 비굴한 미소가 어리며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형. 갑자기 장문인께서 찾고자 하시는 서책이 있어서요."
나도성은 말을 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반경 이백여 장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눈빛이 한순간 잔혹하게 변했다.
갑자기 그의 허리가 쭈욱 펴지더니 팔을 내뻗었다.
그의 사형인 기도옥은 전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앞가슴이 노출되었다.
그곳으로 어느 새 검게 변한 나도성의 장인(掌印)이 다가들고 있었다.
"헉! 흑살장(黑殺掌)!"
기도옥의 낯빛이 하얘졌다. 사제 나도성이 펼친 것은 마도에서도 악랄하다고 알려진 장법 흑살장이었다.
"나를 본 것이 네놈의 불운이었다."
나도성의 손바닥은 그대로 기도옥의 가슴을 찍어 버렸다.
"컥!"
짤막한 신음성과 함께 기도옥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죽는 순간에도 사제가 왜 마도의 무공 초식으로 자신을 죽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빗물에 쓰러짐과 동시에 나도성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반각 후.
뎅! 뎅! 뎅!
화산의 경내는 대변(大變)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연화봉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대혈풍(大血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구파일방 중 다른 구파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혈풍의 조짐은 중원의 전통적인 구파일방(九派一幇)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소림사(少林寺)의 달마전(達摩殿).
무당파(武當派)의 상청관(上靑官).
곤륜파(崑崙派)의 태허관(太虛官).
아미파(峨嵋派)의 만불정(萬佛亭).
…….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거처하는 곳에 동시에 급박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음……."
소림방장(少林方掌)인 혜각선사(慧覺禪師)는 지금 무당에서 날아든 서찰을 읽고 있었다.
〈본 파의 비급인 태청비록(太淸秘錄)이 도난당했소.
이는 본 파 뿐만 아니라 구파일방 전체에 일어난 일이오. 각파의 최고 비급들이 모두 도단 당했음을 알리오. 급히 십방대의(十方大議)를 발동시켰으면 하오이다.
태허상인(太虛上人).〉
서찰을 읽고 난 혜각선사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태청비록이 어떤 것인가. 바로 대무당의 모든 것이랄 수 있는 무당의 최고 무록(武錄)이 아니던가. 그것이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헌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문파들도 그렇다는 것이 아닌가?
혜각선사가 놀람을 금치 못할 때였다.
뎅뎅뎅뎅뎅―!
갑자기 밖에서 급격한 종소리가 울려왔다.
"헛!"
종소리가 들려 옴과 동시에 혜각선사(慧覺先師)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고 말았다.
한 번에 열 두 번이 울리는 종소리.
그것은 소림 최대의 비상령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때였다.
"방장님!"
급박한 음성과 함께 방장실 안으로 한 명의 노승이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들어선 인물은 장경각(藏經閣)을 담당하고 있는 혜지선사(慧智先師)였다. 그의 경악에 찬 얼굴은 동시에 혜각선사에게도 전해져 혜각선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의 뇌리를 후려치고 지나가는 불길함이 있었다.
"혹시 달마세수역근경(達摩洗手易筋經)이……?"
아니나 다를까? 혜지선사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아미타불……."
쿵!
혜각선사의 불장이 바닥을 때렸다.
소림 최고의 비전이자 동시에 시조이신 달마대사의 최고 무록이 도난당했다. 이는 소림 천 년의 역사 동안 한 번도 없었던 불미스런 일이었다.
"당장 구파일방에 무림첩(武林帖)을 발동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혜지선사가 물러가자 혜각선사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잠잠하던 무림에 혈겁이 닥치려 하는가……."
일이 있은 지 정확히 오 일 뒤, 십방대의가 열렸다.
구파일방의 존폐를 위협하는 일이 있을 때 열리게 되는 십방대의가 근 오십 년 만에 열린 것이다.
회의 때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홉 방파의 최고 비급들이 도난당한 것이다.
개방만이 마침 비급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흉수의 윤곽은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극비에 열린 십방대의.
중원을 해하려는 암중 음모를 파헤치고 도난당한 각파의 비급을 되찾는 방법이 논의됐으나 별다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하나, 개방의 비급이 옮겨지고 있는 곳으로 고수들을 급파하는 것이 전부였다.
암중의 흉수가 분명 개방의 비급까지 노릴 것으로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 먼저 고수들 몇을 급파해 흉수의 흔적과 개방의 진산비급을 감시하기로 했고, 뒤이어 정예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첫 추적대는 각파 최고의 신진 기재들을 추려 급히 추적대를 편성하였다.
이름하여 신주오룡(新州五龍).
이들이 파견된 것은 대해옥봉 해옥랑이 복건성을 떠나기 이틀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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