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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상11:1-9
<예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놀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구슬치기, 비석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하늘땅 별땅, 여자친구들의 고무줄 끊기 등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놀이까지 운동장 놀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한때 히트였던 놀이가 있는데 땅따먹기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친구들 몇 명과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와서 운동장에 퍼질러 앉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쫙 펴고 엄지 손가락으로 꼭지점을 만든 후 한바퀴를 돕니다. 그러면 그 땅은 처음 시작의 저의 땅이 됩니다. 순서를 정한 뒤 제 차례가 되면 딱밤으로 돌을 때립니다. 때린 돌은 총 3번만에 처음 시작했던 땅으로 들어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을 넓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방과 후 친구와 열심히 운동장에 저의 땅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이 손가락 튀기는게 얼마나 잘되는지요. 돌을 멀리 보내도 3번만에 저의 땅으로 척척 들어오니 저의 땅을 날로 날로 커져갑니다. 그에 비해 친구는 돌을 제대로 자기 땅에 넣지를 못해서 기회를 날리는가 하면 땅을 넓혀도 아주 조금 넓힐 뿐입니다. 점점 커져가는 저의 땅이 결국 친구의 땅까지 다 집어 삼켰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친구의 땅을 보면서 아주 기고만장하게 웃어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땅을 넓혀가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습니다. ‘학원’ 학원을 가야하는데 땅을 넓히다보니 학원을 못 갔습니다. 학원만 못갔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땅을 넓히느라 운동장 바닥을 집바닥마냥 기고 눕고 뒹굴었으니 옷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운동장 바닥에 넓게 펼쳐진 욕망으로 가득찬 저의 땅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땅을 넓히고 넓혀 친구의 땅까지 삼켰지만 친구는 ‘사명아 내일보자.’ 라며 아주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하고 집에 갔고 저는 저에게 닥칠 시련을 생각하며 아주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던 적이 있습니다.
<서론>
고대사회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영역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 사람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크고 작은, 알려지거나 그렇지 않은 전쟁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습니다. 수없는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고대사회나 현대사회나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전쟁들을 통하여서 강하고 거대한 나라들이 세워졌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했던 나라들 중에서도 영원한 나라는 없습니다. 과거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던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명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라인을 잘 타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누가 실세인지 그 실세를 잘 보고 잘 따라가야한다는 것이죠. 왜 이런 말이 나올까요? 인간관계가 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 즉 인맥이 힘입니다. 학연, 지연, 혈연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인맥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영화에서 배우 최민식씨가 범죄와 연류되어 경찰에 붙잡혀 들어가게 됩니다. 잘못을 했음에도 목이 뻣뻣한 최민식을 형사들이 강압적으로 대합니다. 그 때 최민식씨가 형사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느그 스장 어딧어? 강서장 나오라 그래. 니 내가 누군지 아나? 내가 인마 느그 스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으이? 같이 밥묵고 으이? 사우나도 가고 으이? 마 느그 서장이라 다 했어!” 서장과 사우나도 가고 밥도 먹었다는 그 인맥으로 인해 형사가 범죄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경찰서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의 가장 큰 방법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했을 때 6학년 형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제가 그 때 어떻게 했을까요? 비록 5학년이지만 6학년 형들하고도 싸워서 이긴 교회 형을 찾아갔습니다. 그 형을 찾아가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6학년 형들이 다시는 저를 건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인맥으로써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한 방법이 제일 확실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맥을 쌓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든든한 인맥을 위해서 사람들은 나의 자존심도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며 점점 강성하여 간 것을 기록합니다.
다윗을 살펴보기 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해서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울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사울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유력한 가정 출신으로 잘 생기고 키가 컸으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향해 예를 표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분을 내지 않았고 암몬을 격퇴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길갈에서 모든 백성의 지지 아래 왕으로 전격 즉위하게 됩니다.
이 사울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써 이스라엘을 잘 이끌어 갈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때였습니다. 사울은 점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사람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큰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습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았던 사울을 사무엘상 14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 14:52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잇었으므로 사울이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사울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것은 군사이기에 군사를 모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은 전쟁을 위해 군사를 모으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작은 베냐민 지파의 아들이며 두려움으로 인해 짐보따리에 숨었던 자신을, 친히 선택하셔서 왕으로 세우시고 거룩한 영을 크게 부어주시사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전쟁을 위하여 군사를 모으는 것보다 다른 것을 해야 했습니다. 삼상17:47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머리를 쓰고 군인을 모으고 전쟁 준비를 할 것이 아니라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맡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한번 사람을 의지하다 보니 사울은 계속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로 모든 것을 보고 스스로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앞에 두고서도 나서지 못합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을 보며 불쾌해하고 노하며 시기하고 죽이려 합니다.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사무엘이 죽은 뒤에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한번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으로 해결하니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것이 더 현실성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나요?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하고 말씀을 의지해야함을 알고 있지만 삶의 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다른 방법을, 세상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과 점점 강성하여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과 대사가 있습니다. 수양대군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가 사냥을 마치고 계단을 하나씩 밝으며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내가 왕이될 상인가?” 수양대군은 왕이 될 상인지 모르지만 다윗은 왕이 될 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새의 막내아들로써 다른 형제들과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왕이 될 상은커녕 어쩌면 평생 양을 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객관적인 것으로만 평가를 하자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더 왕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3장에서 기록하기를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라고 기록을 합니다.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는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을 때 사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세워지고 사람이 세워지고 세상의 것이 세워지자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은 강성하여 가고 사울은 약하여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다윗이 근동 세계에서 강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며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다윗은 순간마다 자기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공식적인 첫 전투는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과 싸운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기에 기골이 장대한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전국의 용사들을 모았다고 했는데 전국에서 모아들인 용사들 조차도 골리앗 앞에 설 용기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에게서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에서 모아들인,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무예실력을 가진 용사들이었지만 사무엘상17장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다.’라고 기록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일반인보다는, 용맹한 용사일지 모르지만 그들보다 강한 또 다른 사람, 골리앗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사울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사식을 들고 전쟁터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은 음식만 전달하고 형들의 안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엘라골짜기로 가는 동안은 아버지의 심부름만을 생각했습니다. 음식만 전달하고 형들이 잘 지내나보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진영에 도착을 했는데 블레셋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말합니다. ‘블레셋의 할례받지 못한 저 자가 누군데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것이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게 되는 이유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모든 일에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가 함성만으로 무너져 내리며 무혈사태로 입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여리고성보다 훨씬 작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성도 대패하여 도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란에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의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에 의해 고센땅에서 살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나라보다 더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도록 하시어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광야 40년의 기간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굶기 않도록 함께 하셨고 광야에서 그들의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죄악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매와 사랑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적인 혈통 뿐 아니라 회개한 삭개로를 향하여 이 사람도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 것처럼 믿음의 자손들의 온 천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약속한 바를 이루십니다.
사울이 왕으로 있던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왕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왕이 멀쩡하게, 권세를 가지고 살아있는데 다른 새로운 왕이 세워졌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왕이 있는 그 때에 다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게다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물이면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20여년 전의 기름 부으셨던 그 일을 기억하시고 오늘 본문에서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묵묵하게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조급함을 느끼고 사라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맞이한 사건으로 여전히 지금도 두 민족이 다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점점 강성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순간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하나님께서도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다윗은 이방나라에 명성을 널리 떨쳤습니다.
이 땅에서 살 사는 방법을 다윗이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방법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인가를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나 다른 무엇인가가 아무리 좋아보여도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뛰어날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짧은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방금 본 영상은 영화 라이온킹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심바라는 아기 사자가 친구와 함께 놀다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땅에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곳에 들어간 심바는 곧 교활한 하이에나 무리를 만납니다. 그리고 하이에나들은 심바를 잡아 먹으려 합니다. 심바는 하이에나 무리 앞에서 주눅들지 않습니다. 내가 왕의 아들이고 나는 왕이 될거다라면서 하이에나들을 향해 우렁차에 소리를 질러 봅니다. ‘으 에옹~’ 하이에나들이 비웃습니다. 목을 가담듬고 심바는 다시한번 외칩니다. ‘으 에옹~’ 아기 사자 심바의 목소리에는 어떤 힘도 위협도 권위도 없습니다. 그저 하찮은 새끼 사자일 뿐입니다. 하이에나들은 이제 그만 심바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심바가 있는 힘껏 외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는듯한 천둥소리와 같은 ‘어흥’ 소리가 납니다. 초원의 왕, 아빠 사자가 등장 했습니다. 아빠 사자가 등장을 하자 하이에나들이 혼비백산합니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하이에나들은 아빠 사자 앞에 고개를 조아립니다.
우리 하나님과 함께함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힘이 없습니다. 나는 지혜도 없고 힘이 없고 권세도 없으며 연약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의 약함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의 약함을 들어 사용하실 것이고 나를 통하여 나는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이 찬양을 어릴 때 정말 그냥 불렀습니다. 그 때는 크게 부르면 달란트 주고 그러니까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바로 이 찬양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 공공공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공주다. 이어서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공 나는 공 나는 공주다. 내 앞길 가로 막는 자 모두 다 물리치리라. 거의 20년만에 이 찬양이 갑자기 생각났고 이 가사를 묵상해 봤는데요. 그 감동이 어마어마합니다. 나는 왕자이고 공주인데 곧 왕위를 이어받을 장성한 왕자와 공주가 아니라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라고 합니다. 아직 어립니다. 어리기에 아직 생각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육체적인 힘도 부족합니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찬양으로 고백하기를 ‘내 앞길 가로 막는자 모두다 물리치리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자이고 공주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 아버지이기에 나는 어릴지라도 그래서 연약하더라도 내 앞길 가로 막는 어둡고 더럽고 추악한 모든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현 가족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잘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자녀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을 잘 사는 방법이 세상에게,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을 잘 사는 방법은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육신은 물론이고 영적인 것도 점점 강성하여가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함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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