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추억이다 -이영혜-
문득 나 홀로 기차 타고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고민만 하다가는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1박2일로 떠돌다 오자.’라는 생각으로 상행선 동대구역에서 서울역까지 하행선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 표를 끈었다. 상행선은 일반석 하행선은 특실로 3일 뒤 출발하는 표였다. 표를 끈자마자 마음은 이미 기차에 올라탔다. 30년 만에 처음 혼자 떠나는 여행이여서 그런지 긴장도 되었다. 그래서 동탄에 사는 막내동생에게 서울역으로 나오라고 했다.
딸아이가 동대구역까지 차로 배웅해주었다.
“엄마! 전광판에 시간표 확인하고 바닥에 유도선를 따라가서 기차의 호차를 찾고 좌석번호를 잘 찾아 앉아.”
“엄마 조심히 잘 다녀와!”라고 덧붙였다. 오십대 중반의 젊은 엄마인데 딸아이는 염려스런 얼굴로 거듭 당부하였다.
들뜬 기분으로 밤잠을 설치고 새벽에 일어나서 피곤하였던지 기차에 앉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많이 느끼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눈을 뜨니 서울역 이였다. 동생은 조카와 함께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역은 내가 20대 때 보았던 서울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변화된 서울역부터 구경하고 싶었다. 동생과 조카는 배고프니 밥부터 먹자고 했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했다. 현재의 서울역은 백화점과 같았다. 고급스런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고 다양한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옛 서울역을 찾아갔다. 그곳은 문화역서울284라고 쓰여 있었고 무료로 구경하도록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화역서울284는 서울 역사를 활용한 공간으로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 철도의 남대문 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우리나라의 느낌보다 서구의 느낌이 풍겼다. 해설을 읽어보니 1925년 르네상스풍의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인사동과 익선동을 둘러보았다. 인사동은 다양한 상인들과 사람들로 붐볐다. 테라스가 있는 카페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억양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흔히 TV에서 듣던 억양이었다. ‘여기는 대구가 아니라 서울이구나!’를 느끼며 내가 살던 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 왔음을 알았다.
다음날 운현궁을 거쳐 북촌으로 갔다. 문화해설사가 운현궁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기에 따라다녔다. 지금까지 유적지나 유원지를 다니면서 문화해설사에게 설명 듣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30분 정도 적당한 시간으로 설명이 끝나고 북촌으로 향했다. 북촌에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인해 북촌에 사는 사람들이 피해 보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북촌 시작과 끝에 안내문과 안내원이 서서 조용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기차시간이 다되어 다시 서울역으로 향했다. 하행선은 특실 칸이었다. 특실 칸 승객들이 들어온다.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는다. 승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깔끔하고 우아하게 차려입고 있으며 기품이 풍긴다. 마치 설국 열차의 특등 칸 승객 속에 나도 있는 것 같았다.
보통은 중앙통로를 기점으로 양쪽에 두 사람씩 앉도록 되어있는데 특실은 한쪽 방향은 두 사람씩, 나머지 쪽은 한 사람씩 앉도록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소화물 선반이 특실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고 바로 앞에는 특실서비스 물품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시원한 음료와 과자, 그리고 안대 등이 있었다. 좌석 간의 거리도 넉넉하고 의자도 자유로이 조절 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 좋은 것은 휴대폰 충전과 블루투스 기능 등이 장착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기차역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 꽂은 휴대폰의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20대 때 경주에서 일했다. 야간 일을 마친 친구들과 경주역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해운대역에 내렸다. 해운대역에서 내려서 해운대 해변까지 걸어갔다. 해운대에 가까워질수록 바다 내음이 우리를 달음박질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없이 해운대 모래사장을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날뛰었다. 파도를 따라 들어가기도 하고 파도가 쫓아오면 도망치듯 뒷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한참을 뛰다가 모래밭에 주저앉아 소리도 질러댄다. 마냥 신났다.
이번에는 설악산이다. 경주역에서 영주역을 거처 속초 설악산까지 가는데 경주에서 전날 마지막 기차표를 끈어서 영주역에서 내린다. 경주역에서 영주역까지 가는데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많은 역을 거쳤던 것 같다. 영주역에서 내려서 역내 긴 의자에 앉아 배낭을 푼다. 배낭에서 약간의 간식을 꺼내 먹고 배낭을 베개 삼아 아침 첫차 출발전까지 잠을 잔다. 당시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긴 의자의 빈자리가 남아 있으면 행운인 셈이다. 우리는 역에서 잠자는 것을 즐겼다. 기차는 우리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내려주면 좋았다. 기차 타고 어딘가로 간다는 자체가 좋았다.
내장산으로 갈 때는 중간에 대전역에서 경유한다. 대전역에서는 잠도 자지 않았다. 대전역에 내리면 먼저 대전역 광장으로 달려가서 역과 가까운 자리를 물색한다. 역 광장에 자리를 깔고 손벽치며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하며 밤이 새도록 놀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젊은 청춘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대전역은 우리 청춘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를 가다 멈추어 쉬는 곳뿐만 아니라 즐기는 만남의 광장 같은 장소였다.
기차는 창문을 열지 않아도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는 느낌을 받는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들판도 달리고, 깊은 산속을 달리며 감각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게 만든다. 가끔은 옆좌석에 누가 앉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멋진 남자가 앉기를 기대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는 괜히 흥분되기도 한다.
함께 일하는 친구의 고향이 예천인데 예천을 가기 위해서는 안동역을 지나야만 했다. 당시의 안동역으로 가는 기차는 비둘기호나, 무궁화호가 있었다. 이 두 대의 기차는 느리게 가면서 시골 마을마다 정차하여 사람을 내리고 태우는 역할을 하였다. 가다 보면 닭과 함께 타는 승객도 있었다. 타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꿀꿀하는 돼지 소리도 들리곤 했다. 돼지는 항상 두 번 ‘꿀꿀!’ 했다. 특히 여름에는 무덥기도 무더운데다 승객과 동물들이 한데 엉켜 사람의 땀 냄새와 동물들의 오물 냄새가 뒤섞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함께 탄 동료와 이야기하며 무심하게 가다가도 자신이 내릴 곳에서 정확하게 내리곤 하였다. 우리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안동역에서 내렸다.
안동역은 석탄과 철이 결합 된 철도는 근대 문명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철도는 강산과 백성에게는 억압과 착취라는 제도적 폭력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일본 헌병과 관리를 실어 나르면서도 독립운동가와 식민지 백성을 함께 동승시켰던 나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욕과 영광의 역사를 관통한 안동역은 근대역사의 중심으로 특별했다.
각 역에는 많은 역사가 있었다.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문득 시간이 된다면 코레일에서 실행하는 내일로 프로그램을 딸과 함께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방문했던 역도 다시 가보고 가보지 않은 역도 가보고 싶다. 내 추억에 또 하나의 추억을 얹고 싶어졌다. 내일로 프로그램은 전 국민 누구나 가능하고 3일권과 7일 권이 있다. 시간과 좌석도 다양하고 연중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문역에 제휴 혜택도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지난 추억에 젖어 있는 동안 이어폰의 노래는 진작부터 반복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고 다른 가수의 노래로 바꿔 틀었다. 해는 서쪽을 넘어가고 있는데 기차는 아직 산과 들을 지나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여행이 앞으로의 활력소가 되고 오래오래 추억되리라.
첫댓글 내일로 프로그램 저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철도여행의 꿈을 꾸게 해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