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스님들(5.15/부처님오신 날) 스터디 자료
Ⅰ. 임진왜란과 유정(惟政, 1544〜1610)
1. 출생〜휴정(서산대사) 사사
경상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의 차남으로 출생. 1557년(명종12) 13세 나이로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이후 2년 동안 부모를 여의는 아픔을 겪고, 결국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 ? ~ ?)에게 선(禪)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됨. 승려가 된 1년 뒤인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 선종시(禪宗試)에 합격.
이후 승려로서 불교의 개혁과 진흥 등을 위해 노력하다가 1575년(선조8) 32세의 나이로 봉은사의 주지로 추대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찾아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각성했고, 휴정은 그에게 '사명(泗溟)'이라는 당호를 붙어주었다.
2. 임진왜란 시기의 활약
49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던 휴정의 격문을 받고 머물고 있던 금강산 유점사에서 200명의 의승(義僧) 모집했고, 평안도 순안으로 이동해 휴정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의승도대장'이 되어 이듬해 체찰사 류성룡과 이 무렵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군과 함께 평양성 수복(승병 2,000여 명 참여)에 공을 세웠다. 이후 1593년 3월에 '선교종 판사(禪敎宗 判事)'에 제수되었고, 이후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면서 '당상(堂上)'에 오르기도했다.
3. 종전 후의 활약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의 정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고, 이에 대마 도주 소 요시토시를 통해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전란이 마무리된 지 6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 선뜻 나서지 않는 관리들이 없었고, 결국 전란 이후 강원도에 머물던 유정을 불러 일본으로 가게 했다.
이에 유정은 1604년(선조 37) 왕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교토에서 협상을 하여 결국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그는 이 협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 간 조선인 약 3,500여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이 공로로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 받았다
4. 입적 : 해인사에서 1610년(광해군2) 세수 65세, 법랍 50세로 입적
Ⅱ. 이순신과 스님들
1. 이순신과 함께한 승장(僧將)들
이순신의 인격에 감동한 영호남 일대의 승병(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장계를 확인해 본다.
<의승병을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아뢰는 계본(分送義僧把守要害狀)>/1593년 1월 26일.
“스님(중)들이 소문을 듣고 즐거이 모여들어 얼마되지 않아서 무려 4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중에는 용략이 있는 순천에 사는 중(스님) 삼혜(三惠)를 시호 별도장, 흥양에 사는 중(스님) 의능(義能)을 유격별도장, 광양에 사는 중(스님) 성휘(性輝)를 우돌격장, 광주에 사는 중(스님) 신해(信海)를 좌돌격장, 곡성에 사는 중 지원(智元)을 양병용격장으로 모두 임명하고.....중 신해를 석주로, 중 삼혜를 순천에 진을 치고 머물러 있게 하고, 중 의능은 본영에 머물며 방비하고 있다가 적세의 경중을 보아서 육전이 중하면 곧 육전에 달려가고, 해전이 중대하면 곧 해전에 달려가도록 약속하였습니다. ...
도망치는 큰 적을 질러 막아 모조리 무찌르자면 병세가 외롭고 약해서는 안되겠으므로 소속 수군을 넉넉하게 정비하고, 의병장 성응지와 승장 삼혜‧의능 등에게 전선을 나눠주어 수선해서 나누어 타고 함께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 시사점 : 의병, 승병들로만 구성된 함선이 확인됨. 그 배의 지휘관은 의병장, 승장
2. 이순신과 도총섭 유정, 승장 처영(處英) 등과의 갈등
<승장의 위조문서를 봉하여 올리는 계본(封進僧將僞帖狀)>/1594년 정월 초.
“작년에 순천 의승장 삼혜와 흥양 의승장 의능 등이 연해안 여러 고을에서 수군에 종군할 중(스님)들을 많이 모집하였는데, 자원에 의하여 수군에 소속시켜 각각 전선을 타고 거느려 왜적을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 시사점 : 의병, 승병들만으로 구성된 함선..의 존재 재확인
“이번에 도총섭(都摠攝) 유정(사명대사)이 인신(印信)을 차고 남쪽으로 내려와 호남과 영남 지방의 각 사찰에 있는 승려들은 물론 수군이나 육군의 의승을 가리지 않고 남김없이 찾아내어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전라좌도의 총섭(摠攝)(각도에 2명씩 18명) 처영(處英)이라는 사람은(순천부 송광사에 와서) 의승장 삼혜와 의능 등이 거느린 군인을 모두 빼앗아 갈뿐 아니라 혹은 부역을 면해 준다, 혹은 천한 신분을 면해 준다는 등의 공문을 제 맘대로 만들어 주면서 군량을 헤아려 결정하고서는 바칠 것을 독촉한다고 하는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까지 극심하니, 참으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또한 도총섭 유정은 승장 의능의 천한 신분을 면해 준다는 공문을 체찰사(윤두수)의 공문인 것처럼 만들어 보냈는데, 법규와 양식이 규격과 다르며 서명도 또한 달라 위조한 것이 명백합니다.
부역을 면해 주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며, 천한 신분을 면해 주는 것은 더욱 중대한 일입니다. 시세를 빙자하여 마음대로 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극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입니다. 이런 일을 징계하지 않으면 필시 막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 것이므로, 위조 문서를 봉해서 올려보내며 조정에서 상고하여 처지해 주시기를 엎드려 기다립니다.”
-> 시사점 : 중앙 정부 차원의 승병 조직과 수군 내 자발적으로 편성된 의승병 사이의 소속 문제에 대한 갈등 문제 발생. 승병의 리더 그룹인 도총섭/총섭과 수군의 리더 이순신과의 갈등. 아마도 사명대사 등 스님들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승병이 참여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완화하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을 것 같음.
3. 이순신의 승병 사랑
<여러 의병장(승장)에게 상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請賞義兵諸將狀)>
“삼가 상고하실 일로 아룁니다.
수군을 자신해서 모집하여 들어온 의병장 순천 교생 성응지와 승장 수인(守仁)‧의능(義能) 등이 이런 난리에 눈앞의 안일만을 생각하지 않고 의기를 발휘하여 군병들을 모집해 각각 300여 명을 거느리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 하였는바,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수군의 진중에서 2년 동안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이곳저곳에 나누어 주면서 간신히 양식을 이어대는데, 그 부지런함과 고생하는 모습은 관리나 군사들보다 배나 더 하였고, 오히려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지금까지 더욱 부지런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싸움터에서 적을 무찌를 적에도 뛰어난 공로가 많았으며, 그들의 나라를 위한 분의의 마음은 시종 게으르지 않으니 더욱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위에 적은 성응지, 승장 수인(守仁)‧의능(義能) 등은 마땅히 조정에서 각별히 표창하여 뒷사람들을 격려하여야 하겠습니다.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 시사점 : 승장 수인‧의능 등은 관리나 군사들보다도 더 부지런하고 고생하였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표창하여 뒷사람들이 보고 배우도록 하여야 함.(<공이 있는 자 반드시 후사(厚謝)한다>..는 일종의 ‘상에 신뢰감을 주는[信賞]’ 이순신의 리더십을 엿 볼 수 있음.
4. 일기에 보이는 이순신과 스님들
- <일기>
“의능(義能)을 면천시켜준다는 공문을 봉해 올렸다.”(갑오년 1월 14일)
“정혜사의 중 덕수(德修)가 짚신 한 켤례를 바치므로 거절하고 받지 않았으나, 두 번 세 번 간절히 말하므로 값
을 주어 보내고 짚신은 원명(元溟)에게 주었다.”(정유년 5월 7일)
“아침에 승장 수인(守仁)이 밥 지을 중(스님) 두우(杜宇)를 데리고 왔다.”(정유년 5월 8일)
“늦게 승장 처영(處英)이 보러 와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정유년 6월 12일)
“중 혜희(惠熙)가 와서 보기에 의병장의 사령장을 만들어 주었다.”(정유년 8월 8일)
-> 시사점 : 이순신의 스님 사랑, 스님들의 이순신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또 한편 무엇을 받으면 반드시
되갚는 이순신의 자존심?,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을 느낄 수 있음.
5. 이순신 사후..스님들의 이순신 사랑
- <승평지(昇平志)> : 1618년(광해군 10)에 부사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전라도 순천부 읍지.
* 순천 마래산 아래에 있는 충민사를 지킨 스님 옥형 일화
“중(스님)으로 옥형(玉泂)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통제사 이순신을 따라 진중에 있어 잠시도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통제사가 죽은 뒤에 그대로 충민사에 있으면서 초당을 그 곁에 마련하고 맡아서 지키는 것을 폐하지 않았으며 매양 손수 제찬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는데 나이가 지금 80여 세이다. .... 또 해상에서 경보가 있을 때면 통제사가 반드시 기일을 앞서 꿈에 보인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영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지, 나라를 위하는 한 조작 마음이 죽어서도 죽지 않았음일런가.”
- 남해 노량 호충암이라는 암자를 지킨 화방사(花芳寺)의 스님들 일화(<충렬사지(忠烈祠志>)
“노량 충렬사 곁에 호충암을 두고 화방사 중(스님) 10명과 승장 1명으로써 윤번으로 와서 숙직케 하였다. 경인년 10월에 승장 유습(裕習)의 꿈에 공이 장검을 짚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왜 산을 순찰하지 않느냐!>하므로 유습이 깜짝 놀라 깨어 여러 중을 데리고 횃불을 들고 산을 순찰해 보니 어떤 사람이 사당 뒷산에 몰래 무덤을 묻었으므로, 이튿날 아침 관가에 고발하여 파 옮겼다. 사당 아래 3리 가량 되는 곳이 바로 공이 순절한 곳인데 예로부터 <이락파(李落波)>라고 일컬었다.”
- 수륙제를 지냈다는 일화(이분의 <행록>)
“호남에 사는 중들이 공을 위하여 제를 올리는데 절마다 안올리는 곳이 없었다. 그중에 자운(慈雲)이란 자는 공의 진중에 따라 다니기도 하고 또 늘 승군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인데 공이 돌아가신 뒤에 정미 600석으로 노량에대 큰 수륙제를 열고 또 음식을 성대히 차려 충민사에 제사까지 지냈다.”
-> 시사점 : 스님들의 이순신 사랑에서..이순신의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인격감화형 리더십을 느낄 수 있음.
첫댓글 5.15일(부처님 오신 날) 충주지회 스터디 자료 공유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담에는 서산대사도 한번 ... ㅎㅎ
서산대사님은 임란 발발 시 이미 70대의 노승이어서.....승군과 관련된 대부분의 일을...아마도..사명당(풍천 任....우리 조상님..ㅎ)께서 하신 것 같아요...ㅎ
감사합니다.
옮겨서 따로 저장했다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볼랍니다..ㅎ🙆♀️🙆♀️
후딱 보면 되는데........감춰놓고 보실 정도의 자료는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ㅎ
@일심 후딱 볼 여유가 마땅찮네요..
늦게까지 모임하고..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안동답사로. ㅎㅎ
부처님 오신날
이순신과 스님들 에 대한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두손모아 감사드립니다
삼국시대부터...형성된 우리나라의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호국불교..라고 합니다. 살생유택(殺生有擇)...참 이상한 계율입니다. ......ㅎ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시의적절한 자료라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순신과 스님들'처럼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맥을 잡아 보는 것도 참 좋네요. 정성가득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평소...이순신 장군과 스님들의 관계가 참으로 돈독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마침...부처님 오신 날....산사에 가서...절밥도 얻어 먹고...차도 마시면서...스터디를 하자고 하셔서...순간적으로 떠오른 주제가...이순신과 스님들...........다시 자료를 보아도...이순신 장군님과 스님들의 관계...찡하기도 하고..부럽기도 하고.......아!.....이런 것이 결국 리더십이구나........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ㅎ
잘 읽었습니다 나라가 위기때 스님의 전쟁 참여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고려 때까지가 ...불교의 시대요...불교의 나라이니...불교는 현실의 정치 권력,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그러다보니 ...나라와 백성의 일이..곧 불교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국보..팔만대장경도..결국 위기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호에 의존하여...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판각된 것이니...자연스럽게..우리나라 불교가 호국불교가 된 모양입니다...ㅎ
특이하다십어면서 공부잘했습니다
안녕히계십시요
경상우수사님.
힘내세요~^^
늘 응원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기, 장계에서 스님들과 관련된 내용을 자주 보다 보니...저도..이상한 생각이 들어서..호기심에 한 번 자료를 정리해 본 것이랍니다....경상우수사님...건강에 유의하셔요...ㅎ
호국불교
일심 대강백! 마치 큰스님 법호 같습니다. ㅎㅎ
적절한 소재, 옥고 잘 읽었습니다.
불교는...저 멀리 있는 산 속 깊이 있는 것이 아니라...언제나..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고...세속과 참진리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니....세속의 일이 모두 부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지요......ㅎ
장군님의 전사후에도
스님들의 장군님에 대한 큰 사랑에 대한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해 노량에서...큰 수륙제를 올렸다는 스님의 이야기....여수 충민사..옆의 석천사 스님 이야기....근데..노량 충렬사 옆에 있었다는 호충암...혹시 어디 있었는지..아시나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부지런히..이리 저리...카페의 방을 수색하시면서...공부하러 다니시는 백의종군보산원님......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ㅎ
감사드립니다. 공부하고갑니다. 흥국사에서 해설할때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