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지금 교회의 담임이 되고 새벽마다 뛰어서 교회에 가던 기억이 납니다.
뛰면 대략 12분 정도 걸립니다.
당시에는 집사님도 뛰어서 교회에 오곤 했습니다.
저는 늦을까 봐, 집사님은 운동 겸하느라.
그런데 집사님이 한 번은 경찰에 잡혔다지요.
새벽부터 골목길을 달리는 수상한 사람이어서 잡았다는 것인데...
다행히 손에 성경책이 있어서 금방 풀려났다고 합니다.
새벽과 연결해서 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성서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2/병행구절 시 57:8).”
여기에 새벽기도회의 근거가 있다고 하지요.
이 시는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새벽부터 찬양하는 찬양시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새벽을 깨운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저 새벽이 오니 찬양한다가 아니고, 찬양함으로 새벽을 깨운다는 말입니다.
이 시적인 표현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신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생각할 것은 이 새벽이 물리적 시간으로 그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듣기도 전에 먼저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새벽기도회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설득하기도 지치니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하고...
굳이 말하자면, 성도는 물리적 시간에 관계없이 언제나 깨어나라는 명령 앞에 있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물질적 물과 진정한 생명의 물의 괴리를 말하며, 같은 장 중간에는 물질적 양식이 당신이 말씀하는 양식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찬송 330장)’라는 찬양에서 ‘어둔 밤’을 일반적인 밤으로만 보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어둠으로 상징되는 일할 수 없는 쉼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찬송 '어둔 밤 마음에 잠겨(찬송 582장)'에서 말하는 어둔 밤은 역경과 고난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고요.
이미 신약성서에서 시간과 장소들, 육과 영의 개념들, 빛과 어둠은 의미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해석되었습니다.
이 새벽에 대한 말씀들은, 어둠을 깨뜨리고 동터오는 하나님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아무리 홍해 바다 같은 고통이 눈앞에 어른거려도 깨뜨리는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어둠이 성도를 영영히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밝은 세계가 밝아올 것이라고 찬송하는 시구(詩句)입니다.
글을 마치려 하는데 이 생각이 듭니다.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씻고, 옷을 입고, 뛰어 달리며 ‘그래, 새벽을 깨우는 중이지’하는데...
새벽은 이미 깨어 있더군요.
조간신문을 파는 분들, 청소차들, 버스와 트럭 운전자들, 새벽부터 먼 길 떠나는 사람들...
나보다 먼저 깨어서, 나보다 먼저 새벽을 열고 있더군요.
누구 앞에서 새벽을 깨운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댓글 교만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