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려 옮겨진 돌
누가복음 24:1-8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아침의 그 찬란한 빛이 내면의 어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가득히 차올라, 빛 앞에 선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시간 우리 또한 기쁨과 설렘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어둠은 스러질 줄 모르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쓰라림은 쉬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죽이는 자들은 여전히 죽이고, 훔치는 자들은 여전히 훔치고, 빈정거리는 이들은 여전히 빈정거립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절망하고 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림살이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졌지만,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민들이 저항하고 있을 때, 세계 미인대회에 참가한 미스 미얀마가 전 세계인들에게 자기 조국을 위해 호소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를 기억해 달라면서, 미얀마가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세상을 치유해요’(‘Heal the World’)라는 노래의 일부를 불렀습니다. 노래는 상처 많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모두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랑의 공간을 넓히자는 호소를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진실하다면 결국 거기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함께 불러야 할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는 공정, 정의, 상식입니다.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지난 대통령 선거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문제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공적인 정보를 미리 선점하여 자기 배를 불린 이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자녀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준 행위들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은 정치적인 성향과 관계없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 이렇게 쓸쓸하고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 마음에 벼락처럼 다가온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브롯 핫다아와’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공동체가 경험했던 부끄러운 역사의 한 단면을 드러낸 단어입니다. 긴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꿈은 이미 빛이 바랬고, 현실적인 어려움만이 그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보내주셨지만 연이어 찾아오는 어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그리워하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많은 메추리기를 거두어들여서 먹고 남은 것을 저장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재앙을 내리셔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가온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 불렀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말처럼, 탐욕은 우리를 무덤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 사건은 우리에게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런 탐욕의 무덤 앞에 이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주님의 주검을 안치했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빈 무덤 이야기’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부활 현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꽤 많은 이들이 빈 무덤 이야기는 부활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육체의 부활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게 마련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제자들조차 여인들의 증언을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었습니다. 빈 무덤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도 이상히 여길 뿐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부활은 자기들의 경험 세계에 없는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 세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당혹감에 빠졌습니다. 당혹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그 현실을 모른 척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든 합리적인 설명을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부활 사건을 두고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에 공모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려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부끄러움을 느낀 제자들이 각성해서 스승의 뜻을 이어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메테르(Demeter)의 이야기를 끌어와 부활 이야기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De’는 땅을 뜻하고, ‘meter’는 어머니를 뜻하니까 문자 그대로 ‘땅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데메테르는 곡물, 과실, 목초 등 모든 식물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땅의 모성’을 상징합니다. 로마 신화에서는 데메테르를 Ceres라고 하는데, ‘곡물’을 뜻하는 영어 ‘cereal’은 여기서 기원한 말입니다. 데메테르는 외동딸 페르세포네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어느 날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가 그 딸을 납치해 버립니다.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데메테르는 땅에 베풀던 모든 은혜를 거두고 노파로 변장한 채 세상을 떠돌았다고 합니다. 세상이 황폐하게 변하자 당황한 제우스는 페르세포네가 일 년에 몇 달 동안은 엄마와 재회하도록 했습니다. 마침내 데메테르의 노여움이 풀려 세상은 다시 꽃을 피우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깊은 상실감을 거쳐야 기쁨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원형적으로 알려 줍니다. 무덤에 갇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뭔가 큰 상실감을 맛본 후에야 기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꽤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설명처럼 보이지만 그건 부활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 혹은 영적 깨달음만이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도리는 없지만, 그 사건은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가 서 있던 삶의 토대를 사정없이 흔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옛 삶과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드고아의 목자였던 아모스는 예언자들과 어울린 적도 없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암3:8)
내가 지금부터 예언을 해야겠다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들었던 것처럼, 그의 삶 전체가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흔들렸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운명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절 날 벌어진 사건도 이와 유사할 겁니다. 여자들과 제자들은 어떤 압도적인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새벽에 여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인들이 고개를 깊게 숙이자 그들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눅24:5-6)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오늘 이 자리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기억하는 순간 그 말 혹은 그 일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서히 여인들의 눈에 드리웠던 비늘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을 사로잡고 있던 어둠이 스러지고, 영적인 새벽이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돌문만 굴려진 게 아니라, 여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슬픔과 절망의 돌문도 굴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 여인들이 본 것은 굴려진 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 돌을 보고 있는지요? 우리들 속에서 꽃 피어나려는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굴려졌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돌문이 굴려졌는데도 여전히 그 속에서 나올 생각을 못 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돌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두려움, 슬픔, 자기 연민, 좌절감, 원망, 미움, 자학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서 꽃피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들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를 가두었던 돌문은 이미 굴려졌습니다. 이제는 그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강원도에 있는 마음 분교 6학년 배강길 어린이가 쓴 ‘옥수수 심기’라는 동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크면 우리가 먹는 옥수수
지금 옥수수 씨앗이 새 삶을 시작한다.
땅속에 파묻혀
캄캄한 세상을 살다가
작은 씨앗으로 시작해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오늘도 한 옥수수 씨앗이 새 삶을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시이지만 이 아이의 삶을 잘 아는 선생님의 눈으로 보면 이 시가 그렇게 평범하게 보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권일한 선생님은 이 시를 소개하며 이런 글을 덧붙였습니다.
“땅속에 파묻혀 캄캄한 세상을 사는 아이를 여럿 만났습니다. 부모가 싸우면 지진이 나는 것 같다는 아이, 부모의 이혼 때문에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 웅크린 아이, 욕설과 학대에 주눅이 들어 불장난을 하며 희열을 느끼는 아이, 점심은 학교에서 먹는 급식, 저녁은 학교에서 가져간 급식, 아침은 학교에서 가져가 먹다 남은 급식으로 해결하는 아이,”(권일한 글, 반예림·이가진 그림, <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 우리교육, p.92-93)
정말 많은 아픔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 주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일한 선생은 이 시를 보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이지만 아이들이 캄캄한 세상을 뚫고 나와 싹을 틔우고 밝은 세상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해달라고, 인생은 저마다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돌문은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과거에 벌어진 한 사건을 사실로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은 참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죽임의 질서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을 뒤덮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패하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것이 부활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예언자가 꿈꾸었던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의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명사를 동사로 바꾸는 과정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만이 부활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교리 속에 박제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정한 사람들의 위신과 이익을 위해 볼모로 잡혀 있어도 안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살아낼 때 생동감 있게 현실로 다가옵니다.
로빈 월 키머러가 쓴 책에서 생태천이(生態遷移, ecological succession)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이 용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떠한 장소의 식물 군락이 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저자는 광산지대에서 황폐하게 변했던 땅이 어떻게 복원되는지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만큼 황폐하게 변했던 그 땅이 몇 년이 지나자 거기에 이끼가 덮이고, 이끼가 덮이자 어디선가 사시나무 씨앗이 날라와 거기에 싹을 틔우기 시작하고, 사시나무가 자라면서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나무는 새를 불렀고 새는 우리 주위에 만발한 라즈베리, 딸기, 블루베리를 불렀다. 숲 가운데는 그늘이 져 시원했고 사시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은 폐기물 위에서 얇은 부엽토 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주변 숲에서 이주해 온 단풍나무 묘목 몇 그루가 광산의 척박한 환경으로부터 숲의 보호를 받으며 뿌리내리고 있었다.”(로빈 월 키머러, <이끼와 함께>, 하인해 옮김, 눌와)
생태천이는 숲의 기적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생명을 풍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세상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과 평화가 살아 숨 쉬는 세상, 아름다운 생태계를 열어가기 위해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절망과 체념은 불신앙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우울에 빠지지 말고 생을 경축하며 살라고, 주변에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라고 말합니다. 따뜻함과 친절함과 명랑함으로 사람들이 마음 편히 머물 공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개인이 할 수도 있고 공동체가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고, 절망의 어둠에 갇힌 이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굴려주십시오. 그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비애감은 기쁨과 감사로 바뀔 것입니다. 황폐한 땅이 숲으로 복원되듯이,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주변에 하나님 나라의 생태계가 형성되기를 빕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런 아름다운 세상의 꿈이, 하나님 나라의 꿈이 번져 가서 우리와 더불어 세상이 밝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환히 열린 미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길로 뚜벅뚜벅 나아가며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지난 주말에 대화입니다
''동료 선생님이 지각을 했다지 뭐예요...15분 정도를 늦었대요...근데..그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교실 앞을 지나간 거예요..아이들만 있고 담임 선생님은 보이지 않으니..교실에 들어와 담임 선생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은 거예요..그 때 아이들이 그랬대요...
''선생님, 화장실 가셨어요''
...아유, 6학년이니 이렇게 말하지...저학년이면 어림도 없다고...우리 선생님들끼리 얘기했네요''
제가 그랬습니다
''아, 참 속상해요...선생님들이 감동의 순간을 놓치셨어요..철부지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이타적인 대처를 했는지..저는 무척 감동이에요..그 중, 누구 하나라도 튀면서..담임 선생님 골탕 좀 먹으라고..지각했다고 꼰지를 수도 있는데...아이들이 제법 성숙해요''
저로 인한,
뜻밖의 대화 전개로..잠시 차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시선에 같이 공감해 주셨습니다
*주일 설교 시간에
저는 위에 대화를 상기하며
무엇이 감동의 순간을 방해한 걸까?
그 돌덩이의 정체가 뭘까를..잠시 고민했습니다
*'사명'이 '직업'이 돼버린 결과가 아닐까?
(너무 이상 세계에 살고 있다고 탓하지 마시고..저의이상세계로초대할게요)
두려움, 슬픔, 자기 연민, 좌절감, 원망, 미움, 자학...
나를 가로막았는 돌문은 한두 개가 아니라 이것 모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돌문은 굴러져 있었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부활절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돌문이 굴러져 있다고 기뻐만 했지 저는 늘 그대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제는 무덤에서 그만 나와 부활의 참 생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부활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저를 통해서도 조금이나마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싶습니다.
저의 믿음이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