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공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양(홍)이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장군께서 듣고 따라 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바라건대 높으신 뜻을 들려주시오"
손권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제야 공명은 전에 없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때에 장군께서는 강동에서 몸을 일으키시고
우리 유예주께서는 한남(舊南)의 무리를 모아 조조와 더불어 천하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조는 여러 가지 큰 어려움을 없이 하고 대강 천하를 평정한 데다
가까이는 또 형주를 새로이 얻어 그 위엄이 온 세상을 크게 떨쳐 울리고 있습니다.
비록 영웅일지라도 거기에 의지해 군사를 기르고 싸워 볼 땅이 거의 없어진 셈이지요.
우리 유예주께서도 그런 까닭에 조조에게 쫓겨 오늘 이 마당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장군께서 지닌 힘을 헤아리시어 조조에게 대처하도록 하십시오.
오월(臭越) 땅의 백성들을 이끌고
중원(中原)의 힘에 맞서 버티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찍 조조와 오고감을 끊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맞서 버틸 수 없다면 여러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군사를 세워하여 조조를 섬기면 될 것입니다"
도무지 싸우라는 것인지 항복하라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소리였다.
☆☆☆
손권이 그 말의 참뜻을 헤아리느라 잠시 대답이 없자
공명이 다시 재촉하듯 덧붙였다.
"장군께서 겉으로는 조조에게 복종하시는 것 같으면서
속으로는 두 가지를 모두 의심하고 주저하시느라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 됩니다.
일이 급한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다가
때가 이르게 되면 그때는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손권이 거기에 대한 대답 대신 불쑥 물었다.
"그대의 말이 정성된 것이라면 어찌하여 유예주께서는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으셨소?"
바로 공명이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공명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옛적에 전횡(田舊=전국시대<戰國時卞>)의 협객은
한낱 제(齊)의 장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義)를 지켜 욕되지 않게 죽었습니다.
하물며 제실(帝室)의 후예요 세상의 뭇 선비들이 우러르는 영웅이신
우리 유예주(劃豫州)께서 어찌 조조 따위에게 항복하는 욕됨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뜻대로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설령 끝내 싸움에 져서 죽게 되더라도
스스로 몸을 굽혀 다른 사람 밑에 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 주인인 유비는 애초부터
손권과는 격이 다른 인물로 추켜세움으로써 손권을
겁 많은 졸장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너 정도의 인간은 항복한들 어떤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하든지 말든지 하라- 대강 그런 뜻이었다.
손권이 어찌 그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문득 노기로 낯빛이 변한 채 소매를 떨치며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공명을 소리 높여 꾸짖지 않은 것만도
손권의 인품의 크기를 보인 것일 뿐이었다.
손권이 성나 자리를 떴으니
제갈량이 힘들여 강동까지 온 일은 일견 모두가 허사로 된 것처럼 보였다.
항복을 권하던 무리들은
그게 바로 자기들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공명을 비웃으며 흩어졌다.
☆☆☆
공명의 지나친 말이 일을 그르쳤다고 보는 것은 노숙도 마찬가지였다.
둘만 남게 되자 공명을 나무랐다.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소?
우리 주공께서 너그럽고 도량이 넘으셨기 망정이지
아니면 아까 그 자리에서 크게 꾸짖음을 받았을 것이오.
도대체가 선생의 말씀은 우리 주공을 너무 깔보는 것이었소!"
그러나 공명은 오히려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그리도
남의 헤아림을 받아들이실 줄 모른단 말이오?
조조를 쳐부술 계책이 내게 있으나
그분은 내게 그것은 묻지 않으시고 항복할 것인가 아닌 가만을 물으셨소.
그분이 묻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대답할 수 있겠소?
그 바람에 이야기가 잘못 흘러 그리 된 것이오"
☆☆☆
그 말을 듣자 노숙도 어렴풋이 짚이는 게 있었다.
얼른 낯빛을 바꾸고 매달리 듯 공명에게 물었다.
"정말로 선생께 좋은 계책이 있다면
저는 마땅히 다시 말씀드려 주공으로 하여금 선생께 가르침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의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조조의 백만대군을 개미떼만큼도 여기지 않소이다.
내가 한번 손을 댄다면 그것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오! "
공명이 자신에 넘치는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결코 무턱대고 하는 큰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에 노숙은 공명을 남겨두고 손권을 보러 후당으로 들어갔다.
아직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채로 앉아 있던 손권은
노숙을 보자 불쾌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명 그 사람이 나를 너무 심하게 속였소!"
공명에 대한 꾸짖음을 노숙에게 대신하는 것 같았다.
노숙이 얼른 대답했다.
"저 역시 그 일로 공명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공명은 오히려 주공께서 남의 헤아림을 받아들여줄 줄 모른다며 웃었습니다.
공명이 비록 조조를 깨뜨릴 계책을 지녔다 한들
어찌 그것을 가볍게 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주공께서는
그 계책을 묻지 않으시니 이야기가 빗나가 그리 된 것입니다"
손권도 겉보기와는 달리 그 말을 금세 알아 들었다.
성난 기색을 거두고 기쁜 빛까지 띠며 노숙의 말을 받았다.
"원래 공명은 좋은 계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나를 격동시켰구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한때의 얕은 안목으로 그를 대했으니
하마터면 큰 일을 그르칠 뻔하였소이다"
그러고는 곧 노숙을 내보내
공명을 다시 불러들이게 했다.
뒷날 수성(守成)의 명주(明초)로 알려지기에 족한 인물됨이었다.
노숙이 뛰듯이 돌아와 손권의 뜻을 전하자 공명도 못 이긴 체 따라 들어왔다.
손권은 그런 공명을 반가이 맞으며 말했다.
"아까는 선생의 맑고 엄숙한 뜻을 알아듣지 못해 맘에 없는 욕만 보인 꼴이 되었소.
부디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그 부드러운 사과에 공명 또한 솔직하게 죄를 빌었다.
"양(리)의 말이 높으신 위엄을 모독했습니다. 그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손권은 공명을 후당 안으로 청해 들인 뒤 술자리를 열고 마주 앉았다.
주인과 손이 권커니 받거니 몇 순배 잔이 돈 뒤에 손권이 슬그머니 마음속의 얘기를 꺼냈다.
"조조가 평생토록 미워했던 자들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여포와 유표, 원소, 원술 그리고 유예주와 이 몸이었소이다.
그런데 이제 앞서의 네 영웅은 차례로 망하고 남은 것은 오직 유예주와 나뿐이오.
그것도 나는 오(臭)땅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해 남의 억누름을 당할 지경에 놓였소이다.
물론 내 뜻은 이미 정해져 있소.
나는 유예주와 함께 힘을 합쳐 맞서지 않으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다고 그쪽으로 방도를 찾아보았소.
그러나 유예주가 이제 막 조조에게 꽤한지라
어떻게 이 어려움을 맞설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기 짝이 없소이다"
"유예주가 비록 조조에게 새로 꽤했다 하나
아직도 관운장은 1만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유기(料澤)도 강하(江夏)에서 싸울 만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역시 1만에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편 조조의 군사들은 멀리서 와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우리 유예주를 쫓는다고 가벼운 차림으로 하룻밤에 삼 백 리를 달렸습니다.
그런 군사들이 무슨 수로 싸움다운 싸움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이른바 <강한 활에서 쏜 화살일지라도
끝에 가서는 부드러운 비단조차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조조의 군사들은
북쪽 사람들이라 수전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물에 익숙하기로는 새로이 조조 밑에 들어간 형주의 백성들이 있지만
그들은 또한 조조의 위세에 눌려 따르고 있을 뿐 본심이 아니라 제대로 싸워 줄 리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장군께서는 진심으로 유예주와 한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조조군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달리 그렇게 형세를 낙관하던 공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조조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까지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싸움에서 지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형주와 동오의 세력은 오히려 전보다 커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하를 조조와 우리 유예주 그리고 장군 셋이서 나누어 가지는 게 되니
바로 솥발(舊足) 셋이 한 솥을 떠받드는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일이 그렇게 되고 안 되고의 기틀은 오늘 장군께서 내릴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
그 말을 듣자 손권은
어둡던 마음속이 일시에 확 개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오갈 데 없어 자신에게 빌붙으러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유비까지 자신과 나란히 천하의 주인노릇 하려는 게 아니꼬울 수도 있었으나,
당장은 조조의 발 앞에 무릎을 끓지 않아도 되리라는 희망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그저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욕심으로 흐려져 막힌 내 가슴속을 문득 밝게 열어 주었소이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달리 의심하지 마시오.
여럿과 의논하여
오늘로 군사를 일으키고 함께 조조를 쳐 없애도록 하겠소"
그러고는 노숙에게 명해
즉시로 그 같은 자신의 뜻을 문무의 관원에게 알리게 했다.
공명은 그런 손권의 배웅을 받으며 역관으로 돌아가 쉬었다.
☆☆☆
한편 장소는 손권이 군사를 일으키려 함을 알자 여럿을 불러모으고 의논조로 걱정했다.
"공명의 계책에 우리 주군께서 걸리시고 말았구려! 이대로 있을 수가 없소"
그런 다음 급히 안으로 들어가 손권을 보고 말했다.
"이 소가 들으니 주공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조조와 싸우려 하신다는 데
주공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저 원소에 비해 어떻다 여기십니까?
지난날 조조는 강성한 원소도
많지 않은 장졸들로 북소리 한 번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그 조조가 백만 대군을 몰아 남으로 밀고 내려오는데
어찌 가볍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
만약 제갈량의 말을 들어 함부로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이른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 나고 말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화친을 주장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한번 더 펴보는 설득이었다.
☆☆☆
이미 뜻을 굳힌 바 있으나 장소의 말 또한 함부로 물리칠 게 못 돼
손권은 머리를 수그린 채 생각에 잠겨 얼른 답하지 못했다.
고옹이 곁에서 거들었다.
"유비는 조조와의 싸움에 져서 고단해지자 강동의 군사를 빌려 맞서 보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유비에게 이용당하려 하십니까 ?
바라건대 자포(子布)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고옹까지 그렇게 나오자 손권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이미 정한 뜻이 혼 들렸다기보다는 대들보나 기둥 같은 문산(文臣)들이
한결같이 항복을 권하고 있다는 데 대한 실망과 근심 탓이리라.
장소와 고옹을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앉았는데
이번에는 노숙이 들어와 말했다.
"장자포 같은 사람들이 와서 다시 주공께 군사를 내지 말고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힘써 권한 모양이나 주공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모두 몸이나 돌보고 처자나 지키려드는 무리라
스스로를 위해 꾸민 계책일 뿐입니다"
☆☆☆
그래도 손권은 대꾸가 없었다.
장소와 고옹의 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닌가 두려워진 노숙이
한층 엄숙하게 손권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만약 마음을 정하지 못해 시간을 끌다가는
항복을 주장하는 무리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경은 잠시 물러가 있으시오.
나는 세 번 고쳐 이 일을 생각해 본 뒤에 결단을 내리겠소"
이윽고 손권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노숙을 내보냈다.
아무래도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강동의 아홉 고을과 수백만 백성들의 안위는 물론 자신의 흥망이 달린 일이라 그런 것 같았다.
노숙은 적이 마음이 불안했지만
더는 손권에게 졸라대지 못하고 물러났다.
공명은 지혜와 변설을 다한 깨우침으로 강동을 일깨웠으나
아직도 그 주인 손권은 선뜻 떨치고 나서 조조와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일 만큼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