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족오 깃발 휘날리던 고구려의 기개를 느껴라!
- ▲ 불암산에서 바라본 야경. 북한산에서 도봉산으로 이어진 우람한 연봉에 강북구·도봉구·노원구 일대가 포근하게 안겨 있다.
- 이번 서울편은 도성에서 뻗어나가는 길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본다. 그렇게 하려면 조선시대 한성의 범위를 잠깐 되짚어보는 게 좋겠다. 한성은 크게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성은 성안의 지역으로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이 자리 잡았고,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에 이르렀다.
- ▲ 강북 지역 웬만한 곳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북한산. 노원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찍었다.
- 옛 지도와 현재 지도를 나란히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번에 둘러볼 서울 북동부 지역에서 조선시대 성저 지역은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우이천 물줄기와 중랑천 물줄기를 이은 선이 대체적인 경계다. 그러니까 우이천~중랑천 안쪽의 강북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는 한성부의 성저 지역이었고, 바깥쪽의 도봉구·노원구·중랑구·광진구는 경기도 양주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서울 중심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도성에서 동쪽으로 가는 큰길은 모두 흥인문(동대문)에서 시작했다. 북동쪽은 흥인문~동묘~보제원~안암동천~제기현~고암~수유현~양주 누원을 거쳐 한반도 북동쪽 끝인 함경도 서수라까지 연결된 제2로가 있었고, 동쪽은 흥인문~안락현~중량포~양주~망우리를 거쳐 동해안 평해까지 연결된 제3로가 이어졌다. 제2로와 제3로는 흥인문을 벗어나 동묘에 이른 뒤 보제원(普濟院)에서 둘로 갈라졌다. 지금 이곳엔 경동시장이 있다.
경동시장은 6·25전쟁 이후 경기도 북부 일원과 강원도 일대에서 들여오는 농산물과 채소 및 임산물들이 옛 성동역(현 미도파백화점 자리)과 청량리역,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하여 몰려들면서 형성된 재래시장이다. 특히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의료사업도 벌였던 옛 보제원터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경동 약령시장(서울약령시)은 교통이 편리한 점을 이용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
- ▲ 서울 성곽에서 내려다본 성북동 전경. 1960년대 재개발 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달동네 주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탄생한 곳이다.
- 1960년대 초 20여 개 남짓했던 점포수는 1천여 개 규모로 성장해 지금은 350년 전통의 대구약령시를 앞질렀다. 현재 경동 약령시장은 전국 거래량의 70%를 차지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약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제원의 전통과 20세기의 교통 상황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흥인문에서 보제원터가 있는 경동시장을 지나는 망우로는 조선시대엔 큰길이었지만, 혜화문(동소문)에서 성북구를 관통하는 옛길은 소로였던 듯하다. 물론 현재는 동소문로가 뻥 뚫려 있고, 지하철 4호선으로 서울 도심과 성북구·강북구·도봉구·노원구 등 서울 북동부 지역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이지만 말이다.
- ▲ 전국 한의약 거래량의 70%를 차지하는 경동 약령시장. 350년 전통의 대구 약령시장 규모를 훨씬 앞질렀다.
-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소문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제일 먼저 성북구다. 성북동과 보문동 일대는 전통가옥이 많고, 서울 도시 개발의 초창기인 1960년대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중상류층의 단독 주택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 한 편 들어보자.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 가슴에 금이 갔다. /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의 작품이다. 이 시는 1960년대 성북동 지역의 택지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 동대문구 한의약박물관에 있는 보제원 모형. 보제원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피는 의료사업도 벌였다. /경동 약령시장 한의약거리에 있는 보제원 유지비.
- 시의 무대가 된 성북동은 돈암장·선잠단·간송미술관·이태준 고택·심우장·성락원·길상
사 등 서울의 어느 곳보다도 옛 사람의 흔적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해 고샅길을 누비다 보면 옛 정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성곽과 연계하면 가히 서울 으뜸 산책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성북동에서 빼놓고 싶지 않은 곳이 있다. 그렇다.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을 얻은 최순우 선생 옛집에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정갈한 문체를 그려본 뒤, 일제 강점기 때 10만 석에 달하는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혜원화첩 등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찾아낸 전형필 선생의 소장품을 전시한 간송미술관에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문화 독립운동가의 고고한 체취를 맡아보고 싶다. 비록 매년 봄·가을에만 정기전을 열어 요즘 같은 겨울엔 감상할 수 없지만 말이다.
- ▲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있는 구 영릉의 석물들. 여주로 이장되면서 남은 것들이다.
- 또 소설가 상허 이태준 고택도 사랑스럽다. 후손이 운영하는 찻집으로 바뀐 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상허가 글을 썼다는 사랑방에 앉아 한 잔 들며 그의 수필집 <무서록>을 뒤적이거나, 학창시절 <문장강화>를 읽으며 글쓰기의 엄격함에 전율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심우장(尋牛莊)은 또 어떤가. ‘님의 침묵’을 읊조리기 좋은 백담사계곡은 아니더라도, 만해의 성정처럼 늘 푸른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선 만해가 굳이 북향으로 집을 지은 까닭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런데, 심우장은 만해가 마지막으로 등을 기댄 집이기 때문일까. 심우장에서 떠올리는 ‘님’은 어찌하여 자꾸 만해가 되는지 정말 이상하다.
- ▲ 홍릉수목원 내에 있는 홍릉터. 명성황후 민씨는 이곳에 묻혀 있다가 1919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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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엔 유서 깊은 고개가 둘이다. 아주 큰 고개는 아니었지만, 모두 도성에서 북동쪽으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개였다. 바로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다. 아리랑고개는 정릉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예전엔 정릉고개로 불렸으나, 1926년 나운규가 이곳에서 한국 영화예술에 새 이정표를 세운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미아리고개는 할 말이 아주 많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같은 한성부라 해도 사대문 안쪽만 한양으로 느꼈듯이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까지는 바로 이 미아리고개를 심리적인 경계로 느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토박이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광복 전엔 전차 종점인 돈암동까지가 서울이었고, 미아리고개 너머는 서울로 치지 않았다 한다.
- ▲ 불암산 남쪽 조망. 저멀리 왼쪽으로 아차산~용마산~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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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아리고개라고 말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점집·달동네·공동묘지, 그리고 텍사스촌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잠시 미아리고개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자. 예전엔 현재의 미아리고개를 되너미고개로 불렀다. 18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는 사산금표도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씌어있다. 또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 등 대부분의 지도엔 적유현(狄逾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돈암현(敦岩峴)도 있다. 모두 되너미가 한자로 바뀐 것이다.
‘되너미’엔 무슨 뜻이 있을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유래는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다고 하여 고개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한성을 벗어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당분간 큰 고개가 없으므로 마지막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경사가 심해 고갯마루에 오르면 다시 요기를 해야 된다는 뜻, 즉 밥을 되(다시) 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하였다고도 한다.
- ▲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사지내던 선농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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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름대로 그럴 듯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이 길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되너미’에서 접두어 ‘되’는 ‘일이 힘에 벅차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형용사 ‘되다’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면 되너미고개는 경사가 심해서 되게 넘는 고개, 즉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 된다.
어쨌거나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북방의 여진족이 혜화문으로 도성을 출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 왕래하기는 했지만, 우마차가 통행하기 어려운 험한 고개였다. 그러니 1세기 전까지는 그다지 역할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엔 이 고개를 넘는 북한 인민군 탱크 부대를 막지 못했고, 인민군이 이 고개로 패퇴할 땐 북으로 끌려가던 가족을 눈물로 배웅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사연도 있다. 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태어났다.
- ▲ 일제강점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상허 이태준 고택. 지금은 후손이 수연산방이란 찻집을 열고 있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1933년에 짓고 만년을 보낸 심우장. 만해는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의 서릉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지. 지금도 뽕나무가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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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휴전 후 근대화가 진행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북동부 시민들이 도심으로 왕래할 때 거리가 가까운 미아리고개를 많이 이용했고, 강북구·도봉구·노원구의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통행량은 급증했다. 그 무렵 서울시는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내고 길 주변에 옹벽을 세웠다.
요즘 미아리고개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점집이다.서울시청 자료를 찾아보니 미아리에 점집이 들어선 것은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 씨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원래 서울엔 남산 기슭인 중구 양동 판잣집에 맹인 역술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 동네가 재개발되자 그곳에 살던 이도병씨는 집값이 싸고 전차 종점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미아리 굴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점을 쳤다. 개업 2년만에 이씨는 가게를 얻었고, 10년만에 집 한 칸을 마련했다.
이 일이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동료 역술인들도 하나둘 정착하기 시작해 1980년대 중반에는 1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현재는 70여 곳의 점집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주소로는 성북구 동선동4가 279번지이다.
이렇게 미아리고개를 넘어서면 최근 시행된 성매매 특별법으로 썰렁해진 ‘미아리 텍사스촌’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시 서울 매춘업의 역사를 짚어보자. 각종 자료엔 매춘을 업으로 하는 유곽(遊廓)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해를 190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 ▲ 1960년 4·19혁명 당시 유명을 달리한 민주 열사를 모신 수유동의 4·19국립묘지./육당 최남선이 1941년부터 1950년까지 집필활동을 하였던 고택인 소원(素園)터. 친일활동 장소라는 이유로 철거된 뒤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병사한 조선 10대왕 연산군의 묘. 바로 앞으로 방학동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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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성을 팔고 사는 사람 모두를 무겁게 처벌하는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되었으나 유명무실했다. 그러던 1968년, 당시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커서 윤락지대의 대명사로 불렸던 ‘종삼’이 이른바 ‘나비작전’으로 철거되었다. 1945년부터 종로3가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종삼 집창촌은 6·25전쟁 후엔 종로 3·4가와 낙원동·봉익동·훈정동·인의동·와룡동·묘동·권농동·원남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나비작전’도 성공하지 못했다. 종삼에서 쫓겨난 이들 중 일부가 미아리와 강남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지금의 ‘미아리 텍사스촌’과 ‘강남 룸싸롱촌’이 형성된 것이다. 최근엔 서울 최대 규모인 ‘미아리 텍사스촌’을 비롯해 동대문구 전농동의 ‘청량리
588’, 용산역 부근, 강동구 ‘천호동 텍사스촌’, 영등포역 부근 등에 집창촌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강북구 미아동 주민들은 ‘미아리 텍사스촌’이란 말을 매우 싫어한다. 오죽하면 몇 년 전엔 ‘미아리 텍사스촌’란 말을 언론 등에서 관습적으로 쓰지 말 것을 호소하기 위해 10만 명이 넘는 구민들이 서명을 했겠는가. ‘미아리 텍사스촌’의 정확한 행정명은 ‘하월곡동 88번지 집창촌’이다.
위와 같은 서명 사건에서 보듯 적지 않은 미아동 주민들은 ‘미아리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선을 보거나 미팅을 했는데 집이 미아동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거나, 직장 동료들에게 ‘집이 미아리라 좋겠네~’ 하는 농담을 들었을 때는 정말 당장이라도 이사를 가고 싶은 심정이란다. 또 용한 점쟁이를 소개해달라고 할 때도 그렇고, 나이든 사람들이 공동묘지·달동네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때도 힘겹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미아동에 산다고 말하는 대신에 정릉이나 삼양시장 근처 등에 산다고 돌려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물론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미아리의 이미지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미아동을 품고 있는 강북구는 1973년 성북구에서 갈린 도봉구에 포함되었다가 1995년 도봉구에서 분리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점이 있다. 강북구? 명색이 강북구인데 왜 강이 없냐고. 한강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강북이라 했다는데, 그렇다면 강북에 있는 14개의 도가 모두 강북이 아닌가. 설령 그렇더라도 서울에서 한강을 뜻하는 ‘강’ 자가 들어간 구는 강남구·강동구·강서구·강북구인데, 유독 이 강북구만 한강에 접해있지 않다. 그것도 북한산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 있다.
그래서 서울의 각 구의 명칭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가장 성의 없는 작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하긴 얼핏 생각하면 북한산·삼각산·인수봉 등등 대표하는 명소가 많기 때문에 작명이 수월했을 듯하지만, 그 봉우리들 정상의 주소가 거의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니 전문가들도 고민이 많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북한구’가 이상하면 ‘북한산구’, ‘삼각구’가 이상하면 ‘삼각산구’, 그리고 ‘백운구·인수구·우이구’ 등등 부르다 보면 정 들 좋은 이름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한강과 전혀 상관없는 데도 강북구라니.
길손은 이 중에 상징과 위치 등등 부족할 게 없는 ‘삼각산구’라는 명칭이 가장 맘에 든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면서 현재 강북구청에서 삼각산 옛이름 찾기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으니 더욱 인연이 깊지 않은가. 북한산이 삼각산이란 이름을 되찾는 날, 과연 강북구의 명칭도 바뀔 수 있을까. 대관령으로 유명한 평창군 도암면이 2006년에 대관령면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삼각산 운운에 눈치를 챘겠지만, 누구든지 강북구에 들어섰다면 아마도 거대한 암봉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최고봉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의 인수봉, 남쪽의 만경대가 삼각뿔을 이룬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리던 북한산은 금강산·지리산·묘향산·백두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으로 꼽혔던 명산이다.
백제시대 들어 북한산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정약용이 지은 <위례고>엔 ‘위례성은 백제 시조가 처음 도읍하였던 곳으로 옛 자리가 지금 한양성 동북쪽에 있다. 하북 위례성의 옛 자리는 지금 경성의 동북쪽 10리 되는 곳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주민들이 그곳을 잘못 불러 한양 고현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하북 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북한산 동쪽 어디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전문가들은 범위를 좁혀 지금의 미아동 주변을 온조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하북 위례성 자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 ▲ 아차산 정상에서 감상하는 여명. 도도히 흐르는 한강 너머로 옛 백제 위례성이 서서히 밝고 있다.
북한산 기슭의 수유동은 독립의 열망과 민주화의 소망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민주화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가장 북쪽엔 4·19혁명의 희생자 281명의 민주 영령이 잠들어 있는 4·19국립묘지가 있다. 그 주변으론 독립협회 조직 항일투쟁, 헤이그 밀사로 나갔던 이준 열사,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손병희 등 24명의 열사 묘소가 흩어져 있다.
강북구에선 이곳을 탐방코스(6.7km)로 잘 꾸며놓고 매년 가을 강북구민 한마음 걷기대회를 열고 있고, 강북구 공무원으로 발령이 나면 반드시 이곳에 들러 묵념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각오를 다진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화계사는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최현배 등 국문학자 9명이 모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공포한 곳이기도 하다.- ▲ 아차산 입구 골목길의 고구려 벽화. 아차산성엔 고구려가 70여 년간 한강 유역을 지배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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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대표 들머리인 우이동 등산로 입구에서 얼마쯤 오르면 봉황각이 반긴다. 손병희 선생 등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젊은이들을 합숙훈련시키던 곳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차로 오를 수 있는 큰길 끝에 있는 도선사는 신라 말기인 862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집. ‘천 년 후 불법과 국운을 일으킬 곳’이라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에 일제가 절에 불을 질렀다. 도선국사가 손가락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높이 20m 암벽에 새겨진 관세음석불에 눈 맞춘 뒤, 본격적으로 산행할 작정이 아니라면 북한산 자락을 벗어나야 한다.
- ▲ 아차산에서 바라본 광진구 쪽의 조망. 아차산은 사방으로의 조망이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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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북한산과 헤어지기 전에 꼭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육당 최남선의 옛집 소원(素園)이 있던 자리다. 1939년 건설된 이 집에서 육당은 1941년부터 1952년까지 거주했는데, 일제 말기 친일파로 변절하면서 강연과 신문 논설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을 적극 독려한 곳이다. 고택 보존을 놓고 찬성이냐 반대냐 수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지난 2003년에 철거하고 말았다.
이력 들추기를 껄끄러워하는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철거를 원하기도 했으나 말년에 친일을 한 집이란 이유가 가장 컸다. 소원은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남쪽으로는 정원이 있고 집 주위엔 향나무·전나무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에 5층짜리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우이동에서 고개를 넘어 방학동으로 건너가 연산군묘와 은행나무를 보면 북한산 자락은 거칠게나마 둘러본 게 된다. 이쯤에서 북한산과 헤어지고 도봉산 기슭으로 넘어간다. 도봉산 동쪽, 지금의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 근처엔 누원(樓院)이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이 지역이 조선시대엔 독특한 상권으로 제법 호황을 누렸다.
누원은 한성에서 원산을 거쳐 경흥의 서수라까지 연결될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연천·적성·포천·영평으로도 이어지는 자리였다. 즉 당시 한성에서 북동쪽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었기 때문에 함경도 원산만 일대에서 나는 어물과 길주·북청·종성·회령 등지에서 생산된 포목 등을 도중에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곳은 도성 시전의 금난전권 밖에 있으면서도 비교적 도성에서 가까워 성안의 독점적 도매상인인 사상도고들과 연결이 쉬웠다.
게다가 성안의 영세 상인들까지도 직접 이곳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법 번창했다. 그렇게 도성의 시전상인들 애를 먹였던 큰 장이 섰던 누원이건만 현재는 도봉동의 누원초등학교, 누원고등학교 등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봉서원·천축사 등을 둘러본 뒤 도봉산 기슭에서 벗어나려면 중랑천(中浪川)을 건너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