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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35분만에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보다 더 가까운데 외국이라니, 일본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다.
샤프로 작성했던 입국신고서를 볼펜으로 다시 쓰고 (안 걸릴 줄 알았는데)
Domestic Terminal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가 왼쪽 차선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니 일본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후쿠오카 역 근처에서 점심으로 가츠동을 먹었다. 가츠동은 돈까스 덮밥으로,
일본에 있을 때 제일 좋아했던 메뉴다. 학교 앞 돈까스 집 아르바이트 학생이
예뻐서 자주 갔는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아닌 돈까스와 사랑에 빠졌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정말 맛있다. 옛 생각이 난 김에 도토루 커피에 가서 커피도
한 잔 샀다. 수업을 빼먹고 교내 도토루 커피에서 빈둥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참 행복했는데. 요즘의 나는 여유를 잃어버린 것 같다.
가쯔동과 소바
도토루 커피
후쿠오카의 하카타 역에서 카모메 특급을 타고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카모메가
익숙했다 했더니, 영화 ‘카모메 식당’이 떠올랐다. 열차에 갈매기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카모메가 맞는 것 같다. 특급 열차라고 해서 KTX같은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일본에서는 특급은 보통을 의미하고, 초특급은 되야
좋은 것이다. 열차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카모메 특급은 우리
새마을호와 비슷하다. 나가사키까지 2시간 정도 걸렸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농촌 풍경과 해안선이 아름다워서 지루하지 않았다.
나가사키 가는 길
도착할 때 거의 다 되어서 창가 자리를 양보해주셨던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from?” / “캉꼬꾸징데스”
“소데스까...스고이…히또리데스까?” / “하이”
일본 사람들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나 보다. 히또리를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말했다. 아주머니의 서툰 영어와 내 미천한 일본어로
이야기를 좀 하다 보니 나가사키 역에 도착했다.
“Have a nice trip” /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일본 여행의 필수품. JR Rail 패스
나가사키 역을 나오자마자 트램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트램이
정말 좋다. 이스탄불에서 생전 처음 트램을 봤을 때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트램이 따르릉 경적 소리를 내며 차들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이 그렇게
낭만적이었다. 더블린, 뉴올리언스에서는 목적지도 없이, 그냥 트램을 타고
싶어서 트램을 타기도 했다. 나가사키의 트램들은 클래식한 것이 예쁘기까지
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트램을 타고 호스텔로 이동했다.
나가사키 역 앞 풍경
나가사키의 트램
나가사키는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맞은 아픔을 가진 도시다. 폭탄이
떨어진 곳에는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해 평화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공원에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견학을 나온 학생들이 많았다. 가이드로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학생들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전쟁을 경험했을
분들이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평화 공원
평화 공원. 숙제하는 중?
평화공원 옆에는 원폭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폭격이 참상이 기록된 사진과
영상, 세계의 핵 무기 현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모습이 너무
참혹해서 보기가 힘들었다. 한 쪽에는 나가사키 폭격의 역사를 설명해놓은
연대표도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폭격의 역사는 1943년 연합군이 폭격을
논의한 것부터 시작했다. 왜 연합군이 폭격을 논의하게 되었는지, 그 근본
원인은 빠져있는 것이다.
원폭 기념관
폭격이 있었던 날 일본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고,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죄
없는 일반 시민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피해를 주장하려면,
자신들이 저지른 일과 그 때문에 아시아의 수 많은 사람들이 받은 피해도
함께 적어놓아야 한다. 반성은 없이 피해만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을 보니
씁쓸했다. 아까 할아버지들이 설명해준 역시도 분명 가해자의 역사가 아니라
피해자의 역사 아니었을까?
원폭 기념관 옆의 오우라 천주당. 폭격으로 사라진 것을 재건하였다.
트램을 타고 나가사키 항구 쪽으로 내려왔다. 가이드북에 카페와 상점들이 잔뜩
모여 있는 쇼핑의 중심지라고 적혀 있었던 데지마 워프는 별 볼일 없는 작은
건물이었다. (“자신~” 가이드북은 그 후에도 틀릴 때가 더 많았으며, 지도는
정말 최악이었다) 항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항구를 오가는 배들을
구경했다. 다음에 일본에 올 때는 배를 타고 와야겠다.
나가사키 항구
데지마 워프 반대편에는 인공 섬인 데지마가 있다. 1600년대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은 인공 섬을 만들어놓고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외국인과의 교류를 허용했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서양 문물을 일본에 전달했는데, 집, 상점,
관청 등이 그 때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바닥은 다다미 방이고, 벽에는
서양식 예쁜 벽지들을 붙여 놓은 것이 특이했다.
데지마. 네덜란드 상인의 집
계속 걸어 다녔더니 밥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팠다. 차이나 타운으로 가서
탐탐멘과 사포로 맥주를 마셨다. 우리나라 짬뽕의 원조라는 나가사키 참퐁을
먹으려고 했으나, 사진 메뉴의 탐탐멘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시켰다.
라면은 정말 일본이 최고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돼지뼈를 삶아 만든 라멘이
최고다. 라멘이 느끼해서 질릴 때는 약간 매운 탐탐멘을 먹으면 된다.
요즘 한국에서는 찾기 힘들어진 사뽀로 生도 도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것이
내 입맛에 딱 맞다.
차이나 타운
탐탐멘과 사뽀로
호스텔로 돌아와 짐을 풀고 옆 침대에서 쉬고 있던 나탈리와 수다를 떨었다.
나탈리는 영국 사람으로, 일본 서쪽 어딘가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다가 지금은
여행 중이라고 한다. 일본 문화, 일본의 자연, 특히 일본 음식에 대한 사랑이
넘쳐 보인다. 내가 본 영국 사람들은 다 시니컬했는데, 나탈리는 밝고
명랑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Cool~!”을 외친다.
“일본은 처음이야?” / “아니. 두 번째야. 도쿄에 있었어”
“Cool~ 오늘 어디 갔었어?” / “평화 공원이랑 데지마”
“Cool~ 그러고 보니 너 본 것 같다. “학생이니?” / “아니. 직장인. 휴가 중이야”
“Cool~ 난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쳐” / “Cool~ 난 이제 야경 보러 갈려고”
“Wow, cool~~!. Have fun”
야경 보러 가는 길. 3호선 트램
야경은 해가 지기 전부터 봐야 제 맛인데 나탈리랑 놀다 보니 조금 늦었다.
이나사야먀 산에서 보는 나가사키항의 야경은 일본의 3대 야경에 들 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시내에서 산 정상 전망대까지는 케이블카로 갈 수 있다.
트램을 타고 케이블카 근처 역에 내렸는데 이미 해가 지고 노을만 남아있다.
케이블카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난 주에 다친 발에 통증이
오기 시작해서 택시를 탔다. 잠깐이었는데 600엔. 일본의 택시 요즘은 역시
살인적이다.
케이블카 타러 가는 길. 노을
전망대에 오르니 나가사키 시내, 항구, 바다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고층
건물만 빼곡한 도쿄나 서울의 야경보다는 자연과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이스탄불이나 나가사키의 야경이 훨씬 아름답다. 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오늘 흘린 땀과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뭔가
음악이 함께 하면 최고일 것 같은데 마땅히 생각 나는 노래가 없어서
아이팟을 랜덤 재생 시켰다. 평소에는 딱 맞는 노래들이 나와서 이번에도
기대를 했는데, “스페인어 Lesson 1” 이 나왔다. 공부나 하란 말인가.
분위기 확 망친다.
나가사키 만의 야경
나가사키 항
야경도 봤으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야겠다.
일본은 재즈의 나라. 작은 도시에도 재즈 클럽이 있어서 나 같은 재즈
팬들에게는 파라다이스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알려준 나가사키 유일의
재즈 바에 갔다. 그런데 바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놀라고 안에 있던
손님들도 놀랐다. 바 주인을 비롯해서 손님까지 평균 나이가 70대는 되어
보이는 분들이 존 콜트레인을 듣고 계셨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지만, 여행
첫 날의 흥분을 이렇게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싶지는 않았다.
시내로 돌아가는 길
나가사키의 유흥가
바를 나와 론리 플래닛에서 강추한 패닉 파라다이스에 갔다. 80~90년대
락의 전성기를 느낄 수 있는 인테리어가 멋졌고 (컨셉이 아니라 정말 그 때
만들어진 것 같다) 판돌이 아저씨의 선곡도 좋았다. 바텐더 미오, 미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네스를 마셨다. 뭔가 공통적인 주제를
생각하다 일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난 일본 영화를 좋아해. 미야자키 하야오나 기타노 다케시 등...”
“스고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뭐 좋아하는데?”
“다 좋았는데..최고는 역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지.”
요즘 일본 젊은 아이들은 “완전 동의한다”고 할 때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드나 보다. 미오는 양 손을, 미카는 한 손을 올려서 동의했다. 나중에
길을 물어보거나 버스 번호를 물어봤을 때도 항상 내가 맞으면 “Yes”
대신 엄지손가락을 올려줬다. 나도 몇 번 따라해 봤는데 반응이 좋다.
패닉 파라다이스
신나게 일본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완전히 까먹었던 일본어도 조금씩
기억이 났다. 영화 다음으로 익숙한 일본 문화는 재즈다. 마침 미오도
재즈를 좋아했는데, 마일즈 데이비스 팬이라고 한다. 아이팟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서 주길래 나는 빌 에반스를 틀어줬다. 미카는
같은 과에 한국인 교환학생이 있어서 한국 노래를 많이 알고 있었다.
가요를 한 개 골라달라고 했는데, 드렁큰타이거와 이은미 밖에 없어서
Feel good music을 들려줬다.
"김상. 그런데 feat. T는 무슨 뜻이야?"
"아. 여자 보컬이 T라는 가수야. 둘이 부부지"
"소까. 해피 커프루데스"
“응. 그런데 소까랑 소데스까는 뭐가 달라?”
“친구끼리는 소까라고 해”
패닉 파라다이스
현지인과 친구가 되는 순간은 여행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다.
판돌이 형한테 그린 데이를 부탁해서 듣고 있는데 나탈리가 들어왔다.
왠 남자도 하나 구해 왔는데 같은 방에 있는 프랭크란다. 판돌이 형이
점점 흥이 올랐는지 신나는 노래들을 틀기 시작했고 나탈리는 어깨를
들썩대다가 클럽에 가야겠단다. 미오가 나가사키 유일의 클럽 Ayer's
Rock에 가서 수질을 파악하고 왔다.
미오 : “오늘은 힙합 DJ야. 특별 게스트라 입장료가 무려 3000엔”
나탈리 : "김상. 잇쇼니 이끼마쇼"
김상 : "나 지금 돈 없어. 그리고 난 여기 음악이 더 좋다"
프랭크 : "내가 빌려줄게 가자. 토요일 밤이자나"
미오 나 나탈리 프랭크
그래 나가사키 클럽에 또 언제 가 보겠어. 클럽 입구에서 부처님이 주시는
성수(데낄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은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로 꽉 찼다. 아쉽게도 특별 게스트라는 Artical은 완전 내
스타일이 아녔다. 래퍼도 있었는데 내가 노래방에서 술 좀 마시면 쟤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좀 많이 촌스러웠다. 환기장치도 없어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아팠다.
데낄라 부처님
30분쯤 놀았을까, 먼저 나와서 강변을 따라 호스텔까지 걸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지만, 적당한 피로감에 오히려 기분이 더 좋다. 왠지 하루를 알차게
보낸 느낌이랄까? 평소에도 이렇게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좋을텐데.
왜 평소에는 그렇게 안되는걸까?
추가. 재즈와 꽃의 도시 나가사키
나가사키에서는 유난히 재즈가 많이 흘러나온다. 어느 상점에서나 재즈를
틀어 놓는다, 처음 갔던 식당에서는 빌 에반스가 나왔고, 선물 가게에서는
Moon river가 나왔고, 데지마 워프의 카페에서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흘렀다.
일본이 원래 재즈를 많이 듣기는 하지만 나가사키가 특히 재즈를 사랑하는
것 같다. 언제나 귀가 행복하다;;
나가사키 사람들의 재즈 사랑
나가사키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재즈라면,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꽃이다.
꽃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대문 앞을 꽃으로 장식한 집들도 많고, 꽃집도
많고, 거리에도 꽃이 많다. 꽃을 보러 굳이 글로버 가든까지 갈 필요도 없다.
5월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재나 눈이 행복했다. 울산도
이렇게 도시가 꽃으로 가득 찬다면 좀 덜 삭막해보이지 않을까? 도시를
디자인하는 것은 인공 조형물이나 인위적인 캠패인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미관을 해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나가사키에 꼭 한 번 다녀갔으면 좋겠다.
꽃의 도시 나가사키
http://www.cyworld.com/itsnodou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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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음달에 큐슈로 여행을 갈려고 계획중인데, 제가 모르는 나가사키에 대해서 많이 알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저도 가서 친구도 사귀고 해봐야 겠어요, ㅎㅎㅎ
10월에 나가사키 갈 계획인데 그때에도 꽃이 많이 있는가요??
좋은 계절에 다녀오셨네요. 숙소 궁금해서 쪽지 드렸습니다. 자세한 정보 부탁드려요.
잘읽었습니다. 같이 다니면 참잼있겠네요 ㅎㅎ 저는 낮을 많이 가려서 ㅠㅠ
아여행가고 싶다자꾸 가고 싶은 맘이 생겨서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역시나 마음이 또 떠나고 싶어요
저도 다음달 초에 큐슈 가는데요..두번째 방문이라 안가본데를 가보려고 검색중이였는데... 나가사키가 이렇게 멋진곳일줄이야.ㅋㅋ 저도 숙소 궁금하네요...부탁드려요^^
숙소는 아카리 게스트하우스였습니다. 6인실 기준으로 25000앤이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어요~ http://nagasaki-hostel.com/
아.. 가고싶은 곳에 한곳이였는데... 님의 후기에 잠시나마 푹~~ 빠졌었네요 와우 ㅋ
부끄러워서 현지인들이랑 친구못하겠어요ㅠㅠㅠㅠ 그 비법좀알려주세요ㅠ0ㅠㅋㅋㅋㅋ;;
비법이랄게 있을까요....그냥 인사하고 이런저런 얘기 하다보면 친해지는거죠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