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우리 대중 음악의 마지막 독립군(REVIEW,96.5)
대담 : 정태춘 vs 강헌 사진 : 황유선 일시 : 1996년 5월 13, 23일
강 : 이 땅의 대중음악가들의 상상력을 사전에 구금해온 사실상의 검열인 사전심의 조항이 6월이면 드디어 폐지된다. 대중문화의 또다른 한 축인 영화의 사전심의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상황에서 지난 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고 12월 7일 행정부가 입법공고한 지 6개월 되는 6월7일이면 시행령과 함께 음반의 검열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단기필마로 뛰어들어 이와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감회는 어떠한가?
정 : 참으로 어처구니 없던 일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작가가 공륜운영자금이 되는 한 곡당 삼천원씩의 심의료를 내고 '검사'를 받고 수정지시에 따라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이제야 끝난 것이다.
강 :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나는 사전심의의 폐지가 한 마리 제비는 될지언정 봄이 완전히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직권심의 형태의 사후심의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 : 그냥 무제한적으로 놔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문체부의 입장이고 보면 6월7일부터 발효되는 시행령에 뭔가 담겨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아직 알 수는 없고, 그래봐야 시행령 싸움이 아닌가? 물론 사후심의가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의 마광수의 경우처럼 다른 일반 형법상의 차원에서 음악도 싸울 수 있게 된 것이 커다란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심의, 사실상의 검열조항의 폐지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대 문화 / 계층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이 찢어질 대로 찢어진 문화 상황에서 중심 문화가 창출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강 : 문제는 이 문제가 몇몇 창작자나 관계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이 이 문제의 본질과 전망을 정확히 공유하는 데 있다고 본다. 사실 대부분의 수용자들, 특히 십대의 수용자들은 작년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 파문의 진원지 정도 이상의 인식이 없다. 금년 봄 서울의 어느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1학년 여학생이 '태지 오빠' 때문에 사전심의가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단순함에 무척 놀란 기억이 있다.
정 : 역설 같지만 검열제 아래서도 전혀 상상력의 제약을 받지 않는, 혹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와 대중에 의해 주류문화는 꾸려져 온 것이다. 나의 연배 중에서도 송창식이나 김창완 같은 이들은 사전심의를 폐지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그나마의 여과장치도 없으면 별별 노래들이 쏟아져 나올 우려 때문에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 적이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비방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고 인간의 기본권리의 하나인 표현의 자유가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조항의 폐지는 그것을 향한 첫번째 발걸음일 뿐이다. 검열제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대중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주류문화가 검열문화와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류문화에서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사전심의라는 검열은 가장 낮은 단계의 통제라고 생각하며 그 뒤로 강력하고도 질기게 펼쳐져 있는 고도의 그물망들, 가령 국가보안법이나 입법 추진중인 청소년기본법 같은 사후의 통제장치들이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내어야 할 부분이다. 향후 이 싸움의 주체도 여전히 비주류권이 되겠지만 그 싸움의 성과들은 검열의 폐지가 그렇듯 주류 담당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서태지의 경우도 많은 권위주의와 억압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신세대들의 사고와 정서를 대변했지만 기성세대 및 세상에 대한 발언은 결국 포기당했다. 만약 이후에 작업을 재개한다면 그 역시 혜택을 입지 않겠는가?
강 : 표현의 자유라는, 어떻게 보면 당위적인 명제 이전에 당신은 한 명의 예술가로서 다른 대중음악가들에 비해 가혹하다고 할 만큼 줄기차게 검열의 박해를 받았다. 당신의 음악적 관심이 오직 정치적인 것에 한정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신에게 적용된 사전심의의 기준은 어떤 것인가?
정 : 데뷔 앨범부터 90년의 <아! 대한민국 ...>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걸렸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이 지금도 모호한 '시의에 적절하지 않다'라는 개작지시 이유이다. 그 밖의 이유도 다양하다. 직설적이어서 안되고 통속적이어서 안 되고 지나치게 방황을 강조하고 있대서 안되고 표현이 미숙해서 안 되고 대중가요 가사로 부적당해서 안되고 가정불화를 조장해서 안 되고 해학의 농도가 지나쳐 혐오감을 조성할 수 있으니 안 되고 '동무'라는 말도 안되고 배움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킬 여지가 있어서 안 되고 극단적으로 투쟁을 강조했대서 안 되고 어떤 가정의 불행을 굳이 이념적 사회문제로 결부시켰대서 안 되고 남북통일과 평화 그리고 핵전쟁의 관념물들이 마구 뒤섞여서 안 되고 고향을 노래하는 데 미군부대와 문둥이가 등장했대서 안되고, 끝이 없다.
정태춘, 데뷔앨범(1978)
70년대 후반의 매너리즘의 시대에 록 밴드로는 산울림이 평지돌출적 존재였다면 텅 빈 모던 포크계의 유력한 싱어송라이터로서 평택 출신의 정태춘이 텅 비어 있는 권좌의 왕관을 쓴다. 모두 자신의 손에 의해 쓰여진 열곡을 담은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 사상 가장 소중한 데뷔 앨범 중의 하나이다. '시인의 마을'과 '서해에서'에 흐르는 질박함은 미국 자유주의 문화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 통기타 문화의 독립 선언이나 진배 없었다. '아하!날개여' 같이 문학 청년적인 순수한 치기를 엿볼 수 있는 재미는 이제 보너스에 가깝다. |
강 : 논의를 창작방법론의 차원으로 잠시 돌려보자. 당신은 전사이기 이전에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몇 안 되는 얼터너티브의 아티스트이다. 특히 90년대의 싱어송라이터들이 선율과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를 우선적으로 설정하고 노랫말을 나중에 붙이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나는 그러한 경향이 은연중에 한국 대중음악의 서구 종속을 가속화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창작스타일은?
정 : 작곡의 모든 동기는 노랫말에서부터. 선율이 영감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 가사가 잡히기 시작하면 선율이 뒤엉켜 솟아오르고 선율화한 가사가 정리되기 시작한다. 지금 주류 음악 문화의 작곡 성향들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전문 작사가들에게 의뢰한 가사의 작사료(일급일 경우 한 이백만원?)가 너무 싸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노래에서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안다면 가사 역시 2차 저작권의 차원에서 인세제가 되어야 한다.
강 : 아직도 30대 이상의 평범한 사람 중에서 당신과 당신의 부인이자 음악적 동반자인 박은옥에게서 '촛불' 과 '사랑하는 이에게 3' 같은 '달콤한' 노래만 상기해내는 이들이 많다. 내면과 세계의 음악적 전투가 본격적으로 발효되는 80년대 중후반 이후의 당신의 음악은 너무 장황하고 어려우며 이른바 '운동가요'로서도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 :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느 경우에나 대중들이 쉽게 같이 부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나의 경우 아직은 절제된, 다르게 말하면 단순한 가사로 내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정말 내 노래가 다 그런가?
강 : 당신의 음악이 배태되는 그 '말'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 : '할말'은 리얼리티가 살아야 한다. 할말을 축약하려 하다 보니까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변한다. 가령 90년 <아!대한민국...>앨범의 '우리들의 죽음'같은 것은 아예 신문기사를 그대로 인용했다. 막연히 감상적인 것은 싫다. 최근 대학공연에서 '5.18'노래를 계속 부르고 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젠 낡은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노래의 시발점은 작년 광주에서 열렸던 비엔날레이다. 비엔날레의 대상이 하필이면 쿠바 작가의 '잊기 위하여'냐?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나는 이 행사에 대항해 10월에 열렸던 안티비엔날레의 개막식 공연에서 '잊지 않기 위하여 갑시다!'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강 :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당신의 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접근을 빠뜨릴 수 없다. 단속적이긴 하지만 90년대 주류 음악권내의 대표적인 아티스트들도 국악과의 접합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당신이 우리의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과 조우하게 된 계기와 계속적인 시도 과정에서 포착한 명제는 어떤 것인가?
정 : 주류의 대표자들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시도하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 또 확대된 우리의 음반시장은 그 시도들을 어느 정도 받쳐준다. 내가 국악과 만나게 된 시점은 많은 사람들이 섣부르게 예단하듯이 운동 진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80년대 후반이 아니다. 운동에 뛰어들기 훨씬 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군에 입대하기 전인 70년대 초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향전'을 음악극으로 만들어 고향 동네(경기도 평택)에서 통기타 반주로 고향 선배 친구들과 공연하는 치기도 부렸다. '우리 것은 정당하다. 우리 것은 아름답다'라는 오기에 가까운 관심은 나를 고대사로 이끌었고 국악 공연장으로 인도했으며 가야금을 배우게 했다. 시장에 채 깔리지도 못한 80년대 초반의 세번째 앨범의 한면은 국악 반주로 감행했던 것도 이와 같은 '우리 것이 중심에 서야 한다'라는 기조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이 과제를 전면적으로 풀어놓기 시작한 것은 88년 <무진 새노래>앨범 발표 직후(물론 이 앨범에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아가야 가자' 등에서 북과 꽹과리, 가야금을 끌어들였다) 전국의 대학을 순회했던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공연에 이르러서이다. 나는 스무개의 북소리에서 한이 아닌 신명의 선동성을 발견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박제화된 우리 것과 일상화된 서구의 것을 결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였다. 태평소만 해도 주선율과 관계없이 오부리하듯이 맘대로 하라면 모르되 그것이 내면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음고에서의 충돌을 피하고 우리 장단의 화려한 내용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선율에 있어서의 우리적인 '토리'를 그대로 형상화하는 것- 너무 큰 과제이다. 이 명제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현실적인 가능성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들어오더라도 멜로디는 일단 빼자 그렇게 한발짝 물러섰다. 그런데 비록 너무 재즈 쪽으로 치우친 것이긴 하지만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레드 선 Red Sun'의 협연앨범을 들어보니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더라고. 가장 큰 한계가 우리 리듬을 잡아놓으면 선율이 그 장단에 구속되는 것인데 이제는 조금씩 극복되어감을 느낀다. 우리 음악이 액세서리가 아니라 음악의 뼈대가 되고 서구 음악이 풍성함을 부여하는 그런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강 : 당신은 통기타로 상징되는 70년대 청년문화의 유력한 아들 중의 한명이다. 하지만 당신 자신과 1978년 데뷔 앨범의 음악적 이미지는 대학가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당시의 청년문화의 표정과는 또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포크는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왔는가?
정 : 60년대 중후반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 기타를 통해서 청음을 느꼈던 것 같고, 계명악보를 그렸다. 주위에서 재질이 있다고 부추겼고 그것이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때는 중앙에서 이른바 통기타라는 청년문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었고 김민기, 서유석, 한대수, 양병집 같은 이른바 포크 4인방 체제가 형성되었다. 우리 옆 학교 음악 선생님이 서유석의 첫 음반을 들려주신 것이 기억난다. 헤르만 헤세의 전집 마지막 권인 '유리알 유희'까지 독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던 그 사춘기에 나는 (결국 '유리알 유희'만큼은 끝까지 읽진 못했지만) 쇼펜하우어와 도피적인 자학적인 낭만이 가득한 시인 고은의 초기 작품에 매료되었고, 시골의 음악다방, 그래 봤자 그저 젊은 애들이 모이는 누추한 다방에서 'Yesterday'와 'Who'll Stop the Rain' 같은 곡들을 들으며 보냈다.
강 : 그 청년문화의 기수 중에 당신의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그리고 당신이 본격적인 대중음악 활동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얘기해달라.
정 : 영향을 받은 인물? 단연 김민기이다. 판금조치가 내려진 72년 초까지 심야 FM에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들이 나오면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서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방황했다. 그러던 중에 지금 명동 쉘부르 자리의 '사장실'이라는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거기서 '도시적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번안적이지 않아서 독특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다 당시 CBS FM의 DJ이자 지구 레코드 문예부장인 최경식을 찾아가 틈틈이 만들었던 노래를 보였더니 그 영국신사는 '자신이 부를래요? 아니면 누가 불렀으면 좋겠어요? 하며 관심을 보였다. 73, 74년경 서유석이 취입하려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고 다시 양병집으로 넘어가 '양단 몇마름'을 포함한 앨범의 녹음을 마쳤는데 덜컥 대마초로 걸려버리는 바람에 음반은 공중에 떠버렸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에게 작품료로 5만원씩 가지고 면회온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에 내가 작곡한 '한송이 꿈'을 이수만이 불러 인기가요 차트에서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럴 즈음 당시 포크 계를 주름 잡으며 이장희와 송창식을 프로듀스했던 나현구의 제안으로 휴가 나오면 틈틈이 녹음을 했다. 프로듀서는 사랑노래를 만들라고 재촉하곤 했는데(통기타의 본산에서도 그랬다) 모 트로트 가수는 150만원에 전속시켜 주면서, 나에겐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열도 받고 해서 다시 최경식한테 찾아갔고, 그는 사보이 호텔 중국집에서 당시 산울림과 최백호, 하수영 등으로 정상을 구가하던 서라벌 레코드를 소개시켜 주었다. 회사는 흔쾌히 받아주었고 이튿날로 바로 유지연의 편곡으로 가녹음을 했다.
박은옥, 데뷔앨범(1978)
70년대 초반의 양희은/김민기 커플에 대한 70년대 말의 응답 서신. 보컬리스트로서의 박은옥의 고결한 여운의 톤은 그 이후에는 거의 멸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정태춘의 곡으로만 채워져 있는 이 앨범의 보석같은 노래는 각각 뒷면과 앞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윙윙윙'과 '회상'. 마치 목관과도 같은 따뜻함과 경쾌함과 진지함이 앨범의 전면을 관통한다. 전 12곡 중 '시인의 마을'과 서해에서' 등 3곡을 다시 부른 것도 단순한 빈칸 채우기가 아니라 이 곡들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런데 왜 아름다운 앨범을 지금 구할 수가 없을까? 황학동의 고물상을 뒤질 수밖에. |
강 : 그것이 바로 1978년에 발매된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 >인가? 상업적으로도 '촛불'을 앞세워 성공한 이 앨범으로 당신은 MBC의 신인가수상과 TBC방송가요 부문 작사대상을 받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연말의 수상장면은 아직도 그 촌스러운(?) 매너가 기억이 날 정도이다.
정 : 그렇다. 이미 데모 테이프 단계부터 기자들이 듣고는 좋은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큰 돈은 아니지만 음반사에서 다달이 생활비도 대주고(인세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종로서적 가서 책 목록 뽑아주면 책도 사주고 여행도 가야 한다면 여행도 보내주고 그런 것이 너무 기뻤다. 비록 간간이 동대문에 나가 노가다도 했지만. 하지만 첫 음반은 사장이 직접 선곡했다. B면의 '사랑의 부슬비' 같은 노래가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단번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별로 목적의식도 없었고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 가령 명랑운동회 같은데 나가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오죽하면 PD한테 "정태춘! 너 닭살 돋게 굴려면 뭐하러 나왔어?" 이런 소릴 들었을까?
강 : 그리고 당신은 박은옥을 만났으며 그의 데뷔 앨범의 대부분을 제공하게 된다.
정 : 디미니시도 메이저도 모르고 코드라곤 그저 Am같은 기본밖에 모를 때 회사 스튜디오에서 박은옥을 처음 만났다. 그가 기타를 치며 재니스 이언 Janis Ian의 '제시Jesse'를 부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연애가 시작되었다.
강 : 당시에도 높은 평가를 받은 두 사람의 데뷔 앨범이 발표되었던 때는 긴급조치 9호 이후의 어둠의 시대, 곧 한국 현대사의 최악의 시기 중의 하나였다. 그 정치적 폭풍 아래 70년대 초반의 통기타 정신은 속절 없이 와해되고 만다. 어쩌면 두 사람은 한 시대를 장악했던 통기타 문화의 마지막 계승자 중의 한 명일지도 모른다. 한국 모던 포크의 계보학에서 당신이 자평하는 당신의 위치는?
정 : 통기타 문화가 피어오를 수 있었던 것은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의 수용자가 아닌, 구체적인 구매력을 가진 이 문화의 수용자층이 지금의 십대처럼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문화의 수용자들이 비록 제한적이나마 정치적인 자유주의의 경향을 공유하고 있었고 바로 이들을 바탕으로 김민기와 한대수 같이 한국에 뿌리 내린 포크가 가능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을 통과하며 서유석과 송창식이 주류에서 성공을 거두고 김세환, 윤형주 등이 스타덤에 오르면서 초기의 저항성은 무너진다. 물론 이미 그때는 유신의 어둠 속에서 초기의 포크 4인방이 다 무너지고 난 뒤였다. 나는 그 문화의 변방을 떠도는 무명 아티스트에 불과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포크를 얘기할 때 초기 4인방에서 한돌, 백창우까지 얘기하다가 김광석으로 휙 넘어가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더군다나 이 청년문화가 대학을 근거지로 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학에 몸담은 적이 없는 나는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강 : 당신과 공륜과의 역사는 데뷔 앨범부터 시작된다. 4공화국의 관점은 당신의 '변방적 사유'를 어떻게 판정했는가?
정 : 데뷔 앨범의 머릿곡 '시인의 마을'부터 심의에 걸려 '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유는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이런 신인이 쓴 것 같지는 않고 어떤 시를 베낀 것 같으므로 오리지널 시의 확인을 위해 판정을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시가 있을 리는 없으므로 당연히 원작 시는 찾아지지 않았지만 느닷없게도 결국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많은 부분을 개작하고서야 간신히 통과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뒤로도 끈질기게 엮여질 공륜과의 악연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앨범을 낼 때마다 예외 없이 서너 곡씩 문제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륜에 소명서 내고 들락날락하다 보니 가장 '찍히는'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과정 중에 친해진(?) 가요담당 부장을 볼 때마다 "중견이 되면 심의의원 위촉을 받을 지도 모르는데 같이 이해하고 해야지" 하고 어르기도 했고 "몇곡은 내가 약간 정리해서 통과시킬 테니 이러이러한 곡은 알아서 좀 신경 써달라"는 친근함을 보일 정도까지 되었다. 문화행정 관료가 마치 건축 설계도면이 들어오면 이런 부분들을 개선하면 준공필증을 내주겠다는 식이다.
'시인의 마을'의 가위질
창문을 열고 내다봐요 /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저 높은 곳에 푸른 하늘 구름 흘러 가며로 수정) /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밝은 한줄기 산들 바람으로 수정) / 살며시 눈 감고 들어봐요 /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벗들의 말발굽 소리(숨가쁜 자연의 생명의 소리로 수정) / 누가 내게 따뜻한 사랑 건네 주리오(누가 내게 손수건 한장 던져주리오로 수정) / 내 작은 가슴에 얹어주리오(내 작은 가슴 달래주리오로 수정) /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생명의 장단을으로 수정)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수정) /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사색의 시인이라면으로 수정) 좋겠소 /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 고행의 수도승처럼 /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 우산을 접고 비 맞아봐요 / 하늘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서 / 당신의 그늘진(울적한으로 수정) 마음에 비 뿌리는 / 젖은 대기의 애틋한 우수 /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주리오 / 내 작은 손 잡아주리오 / 누가 내 운명의 길동무(누가 내 마음의 위안으로 수정) 돼주리오 / 어린 시인의 벗 돼주리오 /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 고행의 수도승처럼 /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1977.9)
수정 가사의 저 순수주의에게 저주를! 하지만 84년에 지구 레코드에서 본래 가사로 심의를 냈으나 이때는 문제 없이 통과되어 본래 가사로 음반에 실을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이미 발표된 노래라 가사가 바뀐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공륜의 사무착오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
강 : 심의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5공화국까지 심의위원회에 중앙정보부 혹은 안기부의 기관원이 회의에 참석하다는 얘기들이 무성했다.
정 : 심위위원장은 문체부 장관이 위촉하고 위원은 위원장이 위촉하며 그 외에 방송 쪽 사람들과 평론가들로 구성된 전문위원이 있다.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관원'의 참석 여부는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하여튼 문제가 생기면 심의위원들은 자기들은 외국팝만 담당한다고 발뺌을 한다. 내가 회의에 들어가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문제가 된 가사를 심의하는데 오랫동안 심의위원을 한 시인 박재삼은 언제나 가만 있고 작곡가인 최 모씨가 나서서 떠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대중가요가 우리 국민의 언어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아느냐.' 늘 이런 논지이다. 사실 기본적인 맞춤법도 안 맞는 가사들이 실제로 많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는 이런 노래를 잡아내는 것으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강 : 이 땅의 많은 대중음악가들이 공륜 심의로 인해 참혹한 모욕을 느껴왔다. 그러나 당신만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한 경우는 없다고 본다. 왜 유독 당신의 노래들에게, 더군다나 데뷔할 때부터 유력 방송사의 작사대상까지 받은 작곡가의 음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정 : 내 정서 자체가 비주류적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초기가 소극적인 도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중기 이후는 적극적인 참여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일탈의 정신이다. 글쎄, 성장과정에서 특별한 계기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 정서가 상투성의 범주에서 바라보았을 때 아마도 불편하고 불쾌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88년 이후 내가 '어느날 갑자기 바뀌었다'고 걱정에 찬 눈으로 봐주는 사람이 많았는데, 내 스스로는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메이저보다는 마이너적인, 부정적인 서정성 위에서 있었다. 다만 도피가 공격으로 바뀌니까 더욱 불쾌해진 것뿐.
정태춘·박은옥(1984)
정태춘의 은은하지만 화려한 독백. 이제부터 부부의 호흡으로 앨범과 라이브 무대에 서게 된다. 두 사람의 노래가 앞 뒷면의 서두를 장식하는데 '이어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떠나가는 배'는 5공화국의 청년문화의 복화술과 같은 것이었으며 '사랑하는 이에게3'은 동시대 대학에서 가장 호평받는 러브 듀오 발라드가 되었다. 하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80년대 초에 좌절한 두세 번째 앨범을 통해 선보였다 사라진 '탁발승의 새벽노래'와 '얘기'. 정태춘 음악의 비경이 그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박은옥이 작곡한 것으로 거의 유일한 노래인 '하늘 위에 눈으로'가 수록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이채. |
강 : 그러나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당신은 최악의 시련에 직면한다. 두번째와 세번째 앨범은 시장에서 버림받았고(나도 그 두 장의 앨범은 결국 구하지 못했다) 당신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정 : 이 두 앨범은 나한테도 남아 있지 않다. 박은옥과 결혼하던 해인 1980년의 두번째 앨범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부터 내가 직접 선곡했다. 데뷔 앨범의 '촛불'같은 사랑 노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앨범은 처절하게 실패했고 국악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세번째 앨범 <우네>는 한술 더 떠 시장에 제대로 깔리지도 못했다. 가정도 꾸린 마당에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소속 음반사의 경영이 부실해지면서 생활비도 끊겼고 나는 수유리에서 당시로는 변두리인 지금 살고 있는 송파로 밀려왔다. 80년대 초에 나는 사회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숱한 고민이 한꺼번에 나를 에워쌌다. 노래는 무엇인가? 나의 노래는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때의 고민이 담긴 노래가 나중에 <무진 새노래>앨범에 수록된 '그의 노래는'이다. 그나마 검열 때문에 전혀 다른 노래가 되었지만, 그러던 중에 지구 레코드에서 4년에 팔백만원이라는 전속 계약을 의뢰해 왔다. 그렇게 해서 각각 '떠나가는 배'와 '북한강에서'를 내세운 네번째 앨범(1984)과 다섯번째 앨범(1985)은 '사랑하는 이에게'같은 듀엣 곡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앨범은 우리 부부에겐 고통을 겪은 시간의 엑기스와 같은 것이다.
강 : 이 두 앨범에서 당신은 이후에 당신이 다다르게 될 음악적 원형을 대중과 함께 호흡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85년 앨범의 <봉숭아> 의 정결한 아름다움을 더욱 주목하고 싶다. 이 노래는 당신의 음악적 관심에서 주변적인 것이지만 어떤 대중음악도 획득하지 못한 정결함의 텍스처를 분만하고 있다.
정 : 노랫말을 박은옥이 주었다.(아마도 거의 유일한 예가 아닐까?) 설계도 없이 무작정 한 결혼, 그렇다고 허허허 하는 포용력도 내겐 없고 아내는 예민하고, 연탄과 쌀이 떨어졌는데도 어찌할 주변머리는 없고, 철저히 고립됐다는 느낌, 그런 얼굴들을 서로 쳐다보며 애틋해하기도 하고, 그런 감정의 상태가 그 노래를 낳은 것 같다. 그 서정은 최근에 만든 '강은 여기서 흐르는구나'로 이어진다.
강 : 80년대 중반의 두 앨범의 성공으로 조동진을 제외하면 포크의 명맥이 거의 끊어진 대중음악계에 당신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리고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 소극장 라이브 문화의 하나의 촉매 구실을 했던 85년 '정태춘·박은옥의 애기 노래 마당'이라는 이름의 장기 콘서트이다.
정 : 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소극장 공연이라는 문화가 없었다. 있다고 해야 겨우 [따로 또 같이] 정도? [얘기 노래 마당]은 부산 카톨릭 센터에서 가진 공연에서 비롯되었는데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자 내친 김에 근 일년 가까이 전국을 순회하게 된다. 체육관이건 소극장이건 닥치는 대로, 어차피 방송은 포기한 것이나 진배 없으므로 음반사도 방송국은 알아서 기본으로 할 테니까 공연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포스터 제작비 정도를 지원해 주었다.
강 : 바로 그 시점에 소극장을 거점으로 이른바 동아기획 사단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언드그라운드 진영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70년대 중반 이후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주류 대중음악에 대한 전면적 전복이 시작된다. 들국화와 김현식, 그리고 조동진 패밀리를 정점으로 하는 이 군단이 언더브로드캐스트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기 했지만 이들의 음악에 대한 신념과 태도는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고 대중음악계 전반에 미만한 천민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 당신은 이 흐름의 또다른 국외자인 셈인데 이른바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어떠한가?
정 : 나는 그 당시의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음악 진영이 불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도 끼지 못했다. 아무나하고는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은 존중하지만 이들의 표현욕구와 음악적 양식, 그리고 도시적인 이미지는 정서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강 :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 합법 음반 <무진 새노래>가 기다리고 있다. 앞의 두 앨범만큼 명확한 히트곡은 없지만 이 앨범의 내용은 뭔가 들끓어 오르기 직전의 응축된 에너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대중음악 시장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박차고 비상하는 도약대가 됨은 물론이다. <무진 새노래>에 대해 자평한다면?
정 :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올림픽이 준비되고 있었다. 심의에서조차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 제작음반인 그 앨범은 많이 잘렸다. '그의 노래는'은 본래의 의도가 실종될 수준으로 수정되었고 '얘기2'는 하도 많이 고쳐서 원래 가사가 뭔지도 모를 지경이며 '고향집 가세'는 '문둥이'와 '미군부대'가 문제가 되어 6절을 통째로 지워버렸고 아예 실리지도 못한 곡도 있었다. 그 전 같으면 못 나왔음이 분명한 머릿곡 '실향가'가 두어 가지 유의사항의 단서가 붙긴 했지만 무수정 통과된 것이 의외라면 의외랄까? 그러나 80년대 초중반에 만든 그 곡은 당시 나의 관심과는 조금 비켜서 있었다. 위안을 삼고 싶은 것은 이무하와 같이 부른 '우리의 소원'에서의 북이다. 외계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에서 접했던 운동권 문화의 선동성에 조금씩 매료되어갔다. 심의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가 가장 좋게 생각하는 앨범이다.
강 : 그리하여 당신은 85년의 [얘기 한마당] 같은 닫힌 공간에서의 콘서트가 아닌, 문화운동의 풍물패들과 결합하여 [송아지 누렁 송아지]라는 일종의 1인 집체극 형식의 공연을 들고 전국을 누비게 된다. 관습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개량 한복에 북을 메고 선 당신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충격이었다.
정 : 대도시를 엮어 전국 순회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교조와 결합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구호도 외쳤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덩치가 커지다 보니 전국 총학생회의 문화국장단과 협의하게 되었고 주변에 '운동권'들이 몇몇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금은 영화제에서 제작자로 활약하고 있는 유인택이 기획한 연세대에서의 한돌과 노찾사 합동공연에서 지금 민예총에서 일하는 박인배도 소개받았고 음악원 교수로 있는 이건용이(당시 서울 음대 교수) 한국일보에 [송아지 누렁 송아지] 공연 평도 써서 '아니 대학교수가?' 하는 놀라움도 안겨주었다. 이렇게 한두 사람 알아가면서 민예총과 민음협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쯤으로 기억하는데 조동진 콘서트에 갔더니 그가 '작은 배' 부른 뒤에 고은을 두고 "참 좋은 시인이었는데 근래에 민족 예술인이 되어서..." 하는 말이 꼭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지금은 물론 잘 지내지만.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도 내가 특히 <오세암>을 좋아하면서 친했는데 종교에 빠지면서 소원해졌다. 그가 "사전심의는 페지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기독교적 윤리상으로는 또 안 맞고" 하며 곤혹스러워하던 기억이 난다.
정태춘·박은옥 (1985)
수평적으로 길게 끌며 행간의 울림을 극대화하는 '북한강에서'의 첫 여덟 마디에서 드러나는, 앞의 마디를 물고 이어지는 음의 이 수평계열화는 이후 그가 '민중의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될 때 가장 중요한 음악적 무기가 된다. 그는 통기타와 해금 사이에 가로 놓인 음의 비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푼 것이며 그의 노랫말대로 '강물 속으로 또 강물이 흐르고 내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는' 그런 소리의 세계인 것이다. '북한강에서'와 함께 음반의 앞면을 장식하는 '애고, 도솔천아'와 뒷면의 '장서방네 노을'은 '도두리 벌'과 '보리원의 들 바람'의 박동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
강 : 그러나 가장 단촐한 편성으로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포크야말로 가장 자기비판적이면서 동시에 확장가능성이 높은 음악언어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모던 포크를 록과 굳이 별개의 장르로 분류하고 싶지 않다. 당신의 포크관, 특히 한국의 모던 포크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다.
정 : 언젠가 L.A.에 공연 갔을 때 니카라과, 그리스, 필리핀 등 세계 각국에서 온 포크 음악인이 같은 통기타를 하면서도 자기 고유의 민속적 색채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포크 자체가 악기간의 정교한 결합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내용을 담아내기에 편안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유가 포크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앞의 나라들이 자생적인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포크 문화가 들어왔다면 우리의 경우는 식민지를 겪은 문화가 또다른 서구 제국주의 문화에 괴멸당한다는 한편으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접합이 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88년 앨범의 <고향집 가세>는 그러한 단절된 맥들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채감이 녹아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강 : 당신이 93년에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음반을 제작하여 법정에 서기 전에 이미 메이저 음반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있었다. 그것은 대중음악가의 사회적 발언만큼이나 중요한 권리 투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명인이라는 족쇄 때문에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해야 하는 것이 한국 대중음악계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음악가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했다.
정 : 나도 84, 85년 앨범은 많이 팔렸다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것이 몇장이나 나갔는지 모른다. 사건은 <무진 새노래> 앨범을 제작한 뒤(이 앨범은 지금까지 십만 장 정도 판매고를 올렸다) 지난 곡들을 모아보자 해서 '발췌곡 1'을 만들었는데 전 소속회사이던 지구에서도 여하한의 사용승인 없이 작품사용료조로 곡당 6만원씩을 보내오고 히트곡 모음집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 음반이 곡수도 훨씬 많고 재킷 디자인도 당연히 낫고, 시장에서의 승부는 빤했다. 그래서 문체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더니 재편집시 저작권자로부터 사용승인을 받는 것이 온당하다고 해서 소송을 걸었지만 1심 2심 모두 패소했다. 사전심의로 법정에 서기 전에 저작권 문제로 먼저 선 셈이다. 재판부는 외국 판례를 구해보라고 했지만 외국이야 모두 인세로 하는데 판례가 있을 턱이 있나?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시인의 작품들을 누군가가 여기저기서 모아 임의로 시선집을 냈다면 말이나 되겠는가? 음반회사 측에서는 음반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떠들며 승리를 만끽했고 나는 이것이 대법원 판례로 남을까봐 상고를 포기했다.
강 : 그리고 당신은 작년 말 음반과 비디오에 관한 개정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즈음에 저작권협회의 이사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 법개정 투쟁뿐만 아니라 권익보호 투쟁까지 직접 나서는 것인가?
정 : WTO니 우루과이 라운드니 베른협약이니 국제적으로 지적 소유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계 메이저 음반사의 소프트웨어를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련 법규가 개선되고 이에 덩달아 국내의 저작권에 대한 보호가 진전되는 현실이다. 따라서 저작권 시장도 이삼십억 규모에서 몇년만에 이삼백억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 저작권 문제는 어떤 대의명분보다도 대중음악인에게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사안이다. 운동권으로 찍힌 분위기에서, 더군다나 구체적인 내용도 모르는 상황에서 선거운동도 없이 선거권이 있는 450명 가량의 정회원에게 편지만 한통씩 쓰고 출마했다.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우려해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20명 중 최연소 이사로 당선되었다. 기성 작가들 중에서도 속으로나마 검열폐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선거날은 매우 추웠는데 선거가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하겠지 싶어 차도 놔두고 갔는데 신임 집행부 중 어느 누구도 같이 밥 먹으로 가자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음악인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너무 기성세대로 편중된 현재의 정회원제에서 대의원제로 바꾸는 것이 시급한 사안이라고 본다.
정태춘·박은옥, "무진 새노래"(1988)
드디어 이 부부는 음반사의 족쇄에서 풀려나 독자적인 제작의 길로 들어선다. 이 독립은 그러나 다만 자본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태춘은 이 여정에서 비로소 그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우리 전통 악기들의 미학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발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저 슬픈 '고향'이라는 단어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박한 희망은 이미 보다 높고 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외향적으로 두드러지는, 이른바 '히트곡'은 없다. 바로 그 점이 음반을 진정한 의미의 '앨범'으로 만든다. |
강 : '운동권'음악가의 일인으로서 80년대 말의 노래운동, 내가 보기엔 진정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던 그 흐름에 대해 정리해보자. 나는 80년대 중후반에 순식간에 불타 오른 노래운동은 민문연 산하의 '새벽'이 추구한 프롤레타리아 음악을 향한 다양한 실험과 김호철로 대표되는 인민주의적인 시위가 및 대중주의적인 문법이 두 개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고 평지돌출 격인 당신이라는 또 하나의 갈래가 있다고 본다. 자신을 제외한 앞의 두 맥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어떠한가?
정 : 문승현이 이끌던 새벽과 김호철을 향도로 '노동자노래단'에서 '꽃다지'로 이어지는 80년대의 두 흐름 사이에는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적 요소와 정서들을 연구했던 엘리트주의와 노동자적 정서 그 자체에 기반한 비 엘리트적인 것이 대립했다고 본다. 면면이 맥을 이어온 문학과는 달리 김민기 이후의 저항적인 전통이 오랫동안 단절된 상황에서 나와 같이 그 어느 쪽도 아닌 다소 돌출적인 개인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계급혁명의 포기와 현실 사회주의의 와해로 타격을 입으면서 사회주의 지향적인 엘리트 그룹부터 괴멸되었다. 엘리트는 신발만 거꾸로 신으면 지배계급의 꼭대기로 포섭되지 않는가? 그런 가변성이 급속한 와해를 촉진하지 않았을까? 이에 비해 '꽃다지'는 기본적인 계급속성 때문에 비록 국지적인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계급모순이 여전히 유효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위세가 옛날 같지 않고 자신의 공간이 점점 협소해지면서 과연 무엇이 우리의 노래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에 봉착해 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의 흐름이 없었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80년대에 만약 자유로운 창작 상황이 보장되었더라면, 단지 TV 출연을 반대한 80년대의 이른바 언더그라운드계의 프로페셔널 중에서 새로운 표현들이 꽤 많이 제출되었을 것이다.
강 : 그러나 94년에 이르면 '꽃다지'와 김호철이 이끌었던 '노래공장' 같은 두번째 흐름의 주역들이 모두 비합법에서 뛰쳐나와 심의를 받고 음반을 내는 합법 영역으로 이행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당신의 사전심의 반대 투쟁이 시작되던 바로 그 직후에 말이다. 최소한 이들이라도 연대해야 하지 않았는가?
정 : 이들뿐만 아니라 처음에 동조의 의사를 표했던 몇몇 싱어송라이터들도 뒷걸음 쳐서 그야말로 나 혼자 남은 셈이 되었다. 마음은 착잡했지만 어려움에 봉착한 다른 노래운동집단의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다만 이 싸움에서 다른 사람들 보다는 그래도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나라고 되뇌이면서 문공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보좌관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한명의 가수가 마치 세일즈맨처럼 기웃거리며 별로 관심도 없는 입법자들을 상대로 법을 설명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정상용 의원과 박계동 의원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고 법안이 통과되는 마지막 상임위 회의 직전에 문공위 소속 의원들의 보좌관을 만나는 자리도 주선해주었다.
강 : 음반에 관한 법률의 개정은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 같은, 정태춘이라는 한 사람의 끈질긴 몸부림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과연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소한 그 법률 조항이 과연 어떻게 개선되었나를 따져볼 때이다. 먼저 이번 개정의 의의를 총괄적으로 설명해달라.
정 :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은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두 매체를 하나로 묶어서 본다는 점이다. 이 둘은 법률상으로 명백히 분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의 개정에선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고 조항 상에서의 분리를 최대한 이루어냈다고 본다. 가장 문제가 되어온 제 17조(심의)항을 보자. 모든 항목에서 비디오와 일괄적으로 묶여 있던 음반 부분을 모두 삭제한 것이 첫번째 성과이다. 그것은 우선 판매/배포/대여/시청 제공을 위해 수입 혹은 반입을 할 때 공륜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 의무를 삭제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2항. '판매/배포/대여 등의 목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거나 수입 또는 반입 추천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당해 음반의 내용에 관하여 미리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을 수 있다'는 이 짧은 말. '심의를 받아야 한다'가 '받을 수 있다'로 바뀌는데 저 일제시대 이후 근 육십년이 걸렸다.
강 : 하지만 그 문구는 제작자들에게 미묘한 뉘앙스를 던져주고 있다고 느낀다. 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협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 : 그렇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근본적으로 사전심의 제도의 폐지를 반대한다. 사후에 문제가 되어 법원에서 음반 회수명령이라도 떨어지면 최악의 경우 바로 회사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전심의를)'받을 수 있다'라는 면죄부 조항을 만듦으로써 메이저 음반사들로 하여금 사전심의를 유도할 것이다.
강 : 특히 이어지는 4항의 내용, 곧 직권심의라는 이름의 사후심의가 명시된 것도 그러한 우려를 현실화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4항을 유심히 보자. '공연윤리위원회는 제18조 제1항 각 호의 내용 (필자 주 : 1.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 또는 이익을 손상할 우려가 있는 내용 2.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내용)에 해당된다고 인정되는 음반에 대하여는 제2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심의를 할 수 있으며 당해 음반을 제작하고자 하는 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심의결과를 준수하여야 한다'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음반을 내는 것은 자유지만 더욱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정 : 그렇다. 사실 이 조항은 상임위 마지막날까지 옥신각신한 부분이다. 나는 행정관료들을 상대로 위반시 사실상의 처벌이 뒤따르는 '준수하여야 한다' 대신 '유념하여야 한다'로 하여야 한다고 버텼고 결국 3년 이하의 징역, 이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처벌조항을 완전 삭제하는 선에서 조정되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그럼 과태료 정도라도 넣자는 몸부림이 있었지만. 나는 '하여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가 처벌조항을 동반하지 않는 것은 법제적 차원에서 문제되지 않겠는가 따졌지만 담당자는 전면적으로 방기할 수 없지 않냐며 그것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해서 마무리되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결국 사전심의의 의무화의 폐지와 처벌조항의 삭제가 핵심적인 내용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도 이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정태춘, "아,대한민국..."(1990)
1978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후로 가장 빛나는 저항음악의 성과. 이 불법 테이프는 천민적인 음반산업계에 뛰어든 한 명의 왜소한 '연예인'이 12년 간의 오욕의 터널을 통과하며 어떻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역사를 바로 세웠는지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다. 5공화국의 노래인 정수라의 '아!대한민국'의 기만을 통쾌하게 질타한 '아,대한민국...'부터 굿거리 장단의 질펀한 독설이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우리들 세상'에 이르기까지 정태춘은 자신의 솟구치는 감관과 전투적 관점을 완전 연소시켜 행진곡 풍의 투쟁가로서는 역불급인 새로운 음악적 흥분을 연금해 낸다. |
강 : 수용자의 문제에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대학의 대중들이다.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우리의 대학문화는 대항문화의 참호로서의 성격을 거의 상실하고 일반 대중문화의 차별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학이 80년대적인 정치 우위의 투쟁문화가 아닌 진보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교두보로서의 비판적 기능으로 재무장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만이 우리 모두가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학가의 단골이었던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정 : 지금의 대학은 이상도 낭만도 열정도 없는, 역사상 가장 재미없는 대학이다. 모순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면서 몸부림치는 것이 청춘의 힘이 아닌가? 작년엔 어느 대학 축제에 가서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대동제 말고 차라리 은밀한 곳에서 나를 불러라. 기득권이나 따먹으려 들지 말고, 당장 어떤 사소한 성과에 연연하지도 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지배세력을 변화시킬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금년 5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 근 십년간 전국에 안 다녀본 대학이 없는데 유독 연세대로부터 초청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연대 노천극장에야 수없이 서봤지만 말이다. 처음으로 방송제에 초청을 받고 무대에 섰는데 천오백 명도 넘게 운집한 학생들이 내 앞 순서인 동물원이 무대를 내려가자 금세 빠져나가고 고작 삼사백 명만이 남았다. 나도 맥이 풀렸고 남은 관객들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 대한민국...'을 부르기 전에 이 노래에서 내가 '저들!'이라고 불렀던 대상에 이제는 지배계급이 편입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학과 그 문화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대와 객석은 비로소 집중되기 시작했다.
강 : 이제 오는 6월7일이면 당신의 역사적인 두 앨범, <아! 대한민국 ...>과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합법적으로 복각되어 발매된다. 과연 이 두 앨범이 앞에서 말한 대로 그렇게 바뀐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정 : <아 대한민국 ...>을 추억으로 듣는 이도 있겠고 6년 전과 지금의 현실을 대비해보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가까이 두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메시지만 제외하면 음악적 기호에선 <무진 새노래>까지의 합법 음반을 관통하는 일상적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 좀더 생활 가까이에 있지만 그래도 친숙함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향토적이고 유랑적인 정서로 규정하는 이들이 많다. 바로 이들이 아직도 초기 음반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한편의 희망으로는 국내 음악 중에서 다른 노래를 요구하는, 상투성에 질린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판이 팔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록이 부상하고 있다. 이제 언더그라운드도 보다 다양하게 분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이 부부가 자유를 얻는 대가는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모든 '운동권'이 방향을 전환하거나 급기야는 훼절을 서슴지 않을 때 그는 거리로 법정으로 기꺼이 나섰다. 하지만 정작 이 노골적인 불법 음반에 담긴 노래는 너무나 아름답고도('저들에 불을 놓아') 너무나 슬픈 것이었다.('비둘기의 꿈') '사람들'과 'L.A. 스케치'의 저 파노라마를 보라. '나 살던 고향'의 처절한 패러디를 보라. 그리고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단단하게 흐르는 저 정관의 힘을 느껴보라.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도도히 흘러 넘치는 기백을 보라. 이 앨범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앨범 안에 있다. |
강 :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은 '대중가요'에서 시작하여 '민중가요'에 이르렀다. 이 대척적인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가? 나는 80년대 노래운동이 좌절한 동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중가요'라는 대립적인 개념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민중가요라는 설정은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대중음악의 지형도에서 진보적인 성향들이 어떻게 헤게모니를 획득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관점은 어떤가? 그리고 그 관점에 입각한 당신에게 남은 음악적 과제는 무엇인가?
정 : 지금은 모든 것이 많이 달라졌다. 민중이라는 말 자체가 정치 및 경제와 결부된 계급으로서의 동질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형을 볼 때 민중 대 반민중 세력의 이분법적 담론은 사라졌다고 본다. 물론 운동진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이고 누구인가 하는 질문 앞에선 혼돈을 느낀다. 이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에서 볼 때 그 동안 명확한 슬로건을 가지고 노래해왔던 이들이 이후로 대면해야 할 대상이 누구다라고 적시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는 '민중가요'라는 개념도 폐기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단계에선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최소한의 과거/현재/미래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동안 풍미했던 중산층 구호에 편입당하고 회유당했던 대부분의 대중들 - 우리사회 발전의 가장 중요한 초석이면서도 내팽개쳐진 대부분의 사람들의 고통과 희망을 노래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민중'이라는 담론에서 '우리 주변의 시민들'로 돌아왔다고 할까? 내가 지금 제일 헤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누구를 위해 노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그런지도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대학도 안 나왔고 더구나 엘리트 지식인 집단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내 노래의 주력적인 수용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점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나의 초미의 과제는 아무래도 우리 전통음악에 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족쇄일 수도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남아 있고, 또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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