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쉬어가는 곳, 감성천국의 통영 가는 길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시인 백석의 ‘통영2’)
통영은 평안도 사내 백석에게 친구에게 첫사랑을 빼앗긴 가슴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인 백석이 통영을 좋아한 것은 비단 여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아련한 하늘과 아름다운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바다’ 하면 ‘통영’이 떠오른다.
만지도와 연대도를 연결하는 출렁다리. /헬스조선DB
살고 싶은 감성천국, 통영
문화, 예술, 관광을 모두 다 가진 부자마을, 통영의 옛 지명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였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의 통제영인 세병관이 이곳에 있어 ‘통영’으로 바뀌었고, 이곳 사람들은 ‘토영’이라고 부른다.
300년의 역사를 가진 통제영뿐만 아니라 깊이를 모를 만큼 진한 바다위에 자리한
570여개의 보석 같은 섬을 지닌 통영은 그 자연을 자양분 삼아 감성을 꽃 피운 수많은 예술가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많은 작품들을 남긴 창작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 문학의 대모이자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미완성의 남자이자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
사랑하는 여인에게 20년 동안 꾸준히 편지를 보냈던 플라토닉 사랑의 선구자 청마 유치환
그리고 그의 형님 극작가 유치진, 일제 강점기 아픈 시절을 보내셨던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미술가 전혁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그리고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한국소설가 김용익 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들이 태어나서 활동하했고,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의 도시가 바로 통영이다.
통영은 이곳에서 태어난 예술가들에게만 영감을 준 것이 아니다.
비운의 화가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 시리즈와 수많은 작품들도 이곳 통영에서 탄생했다.
통영은 예술인을 만드는 공작소이자,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판타지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통영에는 항상 한려수도란 단어가 앞에 붙는다.
한려수도란 통영 앞 바다 한산도의 ‘한’ 자와 여수의 ‘여’자를 합쳐 말한다.
즉, 통영 앞바다에 있는 한산도에서부터 여수 앞 바다에 자리한 오동도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을 한려수도라고 한다.
여행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한려수도의 첫머리니 통영의 매력은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통영에서 2년 넘게 살다 왔지만 아직까지 시간만 나면 가고 싶은 곳이 통영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한려수도 통영의 진면목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한려수도 바다백리길을 추천한다.
연대도 해변데크길.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바다에 새겨진 삶의 흔적을 따라
한려수도 바다백리길은 총 6개의 통영의 섬들로 이루어진 길이다.
통영대교로 이어져 있고, 노을이 아름다운 미륵도의 달아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이 있었던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의 역사길,
두 섬이 산호 해변길로 연결되어 한국의 지중해라고 불리는 비진도의 산호길,
탄소제로의 에코(ECO)섬이자 만지도와 함께 출렁다리가 연결된 연대도의 지겟길,
어머니의 품처럼 드넓은 초지가 펼쳐있는 매물도의 해품길
그리고 쿠쿠다스섬으로 알려진 등대섬이 아름답게 보이는 소매물도의 등대길이다.
이 길들은 새로 만들어 진 길이 아니다.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달픈 애환이 서려있는 삶의 흔적들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6개의 길 중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3개의 길인 미륵도 달아길,
한산도 역사길, 연대도 지겟길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겨보기로 했다.
한산대첩의 유서 깊은 사적지 한산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① 만지도-연대도 지겟길
첫 번째로 방문한 바다백리길은 만지도와 함께 출렁다리로 이어진 연대도이다.
통영 연명항에서 홍해랑호 만지도선을 타고 11시에 들어가서 오후 3시에 나오는 배편을 예약했다.
배를 타고 약 15분, 한려해상국립공원 만지도에 도착했다.
향긋한 꽃향기와 풍난이 피어 있는 해안절벽을 따라 2014년 12월에 개통된 출렁다리를 건너 연대도로 넘어갔다.
연대도와 만지도를 방문하는 여행객에게 명물이 된 출렁다리는 두 섬 사이 바닷길 위에 설치된 다리다.
다리를 건널 때 양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굉장히 시원했다.
연대도는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왜적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섬의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해서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고 한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섬마을 집들의 문패였다.
보통 문패는 집주인 이름으로 다는데 이곳의 문패에는 이곳을 사는 섬사람 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 화초를 좋아해서 목부작을 잘 만드는 이상동 어촌계장이 삽니다.
말이 없어서 답답할 정도지만 사람 좋은 집’, ‘회 만드는 솜씨가 일품 이학조씨 댁’, ‘잘생긴 신랑 이학조 님’,
‘키다리 각시 이향섭님은 추자도에서 시집왔습니다’, ‘연대도 주민대표 최두기 이장님 댁,
연대도에서 이장직을 가장 많이 맡으심, 화초를 좋아 하시고 흑염소를 키우고 계십니다.
아내 김수연 여사와 열아홉에 결혼하셨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패였다.
다시 출렁다리를 건너서 만지도 이장님의 전복양식장에서 걷어 올린 전복으로 만든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싱싱한 전복내장이 함께 나오는 회, 버터구이, 물회, 전복비빔밥 등 전복으로 한 상 잘 차려진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욕지도 전망대에 올라 만지도에서 출렁다리 그리고 연대도로 이어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바다위로 올망졸망한 섬들의 모습은 소리 없는 위로였고 행위 없는 힐링이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됐다.”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실제 크기로 복원한 강구안의 거북선. /헬스조선DB
② 한산도 제승당 역사길
두 번째로 방문한 바다백리길은 요트를 타고 들어간 한산도 역사길이다.
한산도 역사길은 덮을개에서 망산 진두로 이어지는 12km, 4시간 거리의 길이다.
한산도와 연륙교로 이어있는 추봉도에는 봉암 몽돌해변이 있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다.
통영하면 한산도를 빼놓을 수 없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인 제승당은 사적 113호로 삼도수군통제사 순신 장군의 통제영인 운주당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세계해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1597년까지 삼도수군 본영으로 삼아 국난을 극복한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한산도는 보통 여객선을 타고 들어가지만,
한산대첩이 일어난 주변 바다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다면 요트를 이용하는 게 제격이다.
통영의 미륵산과 도남 마리나 관광지, 한려수도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30분 정도 요트를 타고 이동하여 한산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내려서 들어왔던 바다를 바라보니 그 유명한 거북선 등대와 함께 한산대첩기념비가 보였다.
한산도는 한산면의 본섬으로 면을 이루는 29개의 유, 무인도 중 가장 크다.
한려해상공원의 출발점인 한산도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길은 해송 군락지로 이루어져 있어 걷는 데 무리가 없었다.
선착장에서 15분 정도 이동하니 본관인 제승당에 도착했다.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이끈다는 제승당은
1739년 현판을 쓰신 통제사 조경이 재건한 것을 1976년 한산도 정화사업 때 지금처럼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제승당에 걸려 있는 주련의 설명 듣고, 그 유명한 수루로 가보았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노을에 물드는 통영의 서정적인 오후 풍경. /셔터스톡
③ 미륵도 달아길
세 번째로 방문한 바다백리길은 유일하게 다리로 연결된 섬, 미륵도 달아길이다.
미륵도는 통영시내와 통영대교, 충무교 그리고 일제강점 때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과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
미륵도 달아길은 한국 100대 명산인 미륵산 안에 있는 미래사에서 미륵산 정상을 거쳐 달아 전망대까지 5시간이
소요되는 한려 해상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코스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2008년 설치된 미륵산 케이블카를 편도로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 미래사로 내려와서
전혁림 미술관이 있는 용화사까지 내려오는 3시간 코스를 걸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1975m의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는 8인승으로 총 47대가 있다.
약 10분 정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통영 루지 체험장과 통영대교, 통영시내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섬을
포함해 거제도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상부 케이블카 승강장에 내려서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바로 미륵산 정상에 도착한다.
미륵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데크로 잘 정비되어 있었고,
박경리 선생님 묘소와 당포해전 전망대, 봉수대 및 통영 병꽃 군락지, 통영상륙작전 전망대, 한산대첩 전망대 등
다양한 안내판과 쉼터가 마련돼 있었다.
해발 461m 미륵산 정상에 도착하니 “우와~우와~” 감탄사가 연발 나왔다.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한려수도 풍광과 동양의 나폴리 라고 불리는 통영항의 모습은 해외 어느 여행지보다
아름다웠고 세계 3대미항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탁 트인 가을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가는 파란 하늘에는 부끄럽게 물들어가는
통영의 노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에 담고 담아 마음에 새겨서 절대 잊고 싶지 않은 풍광이었다.
통영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걸쭉한 곳이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서호시장 아지매들과, 강구안 문화마당 앞 중앙시장의 악착같은 할매들,
그리고 치열했던 바다에서 어업을 마치고 달동네 집 창밖에서 시커먼 바다만 바라봐야 했던 동피랑 어부아잼들,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은 비록 화려한 커피숍과 수많은 꿀빵집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여행하는 동안 눈으로 만날 수 있었고 마음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느낀 새로운 한려수도 통영은
몇 년 전보다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거리가 더욱더 많아진 사랑스런 도시가 되어 있었다.
푸른 바다와 은빛 물결이 어우러진 외도보타니아의 억새 /헬스조선DB
거제도, 꿈의 다리를 건너 낙원으로
통영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마지막 날,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서 KTX를 타기로 했다.
한려수도에 왔으니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해금강과 외도보타니아를 보기 위해서이다.
거제도는 거제시에 속한 섬으로 통영과 함께 2개의 거제대교와 연결되어 있다.
2010년 12월부터는 부산 가덕도와 함께 거가대교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큰 섬이다.
거제도 및 부산 주변 한려수도와 유적지가 한눈에 보이는 계룡산,
선자산, 노자산과 옥포대첩기념공원, 거제포로수용소 및 알로에테마파크 등 볼거리가 많은 섬이다.
바다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해금강은 명승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서불이란 사람을 보낸 설화가 있는 곳으로 명승지로 지정되기 전까지
강태공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 안쪽으로 들어가니 하늘이 열십자처럼 보이는 십자동굴이 나타났다.
해금강의 오묘한 기암괴석들을 감상하고 최종 목적지인 외도보티니아로 이동했다.
외도보타니아는 거제도에 인접해 있는 60개의 섬 중 유일하게 개인이 운영하는 섬이다.
거제도 안쪽에는 내도가 있고 바깥쪽에는 외도라는 섬이 있었는데,
1969년 한 부부(고 이창호 회장, 현 최호숙 회장)가 외도를 매입하여 45여년 간 쉬지 않고 가꾸어서 1995년 4월 희귀
아열대 식물과 크고 작은 1000여 종이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외도보타니아는 기존의 섬 이름 ‘외도’에 식물의 낙원, 이상향(botanic+Utopia)이라는 외국어를 합성어한 이름이다.
외도보타니아는 사계절이 아닌 한 주, 한 달마다 그 모습이 매번 바뀐다.
짧게는 1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피는 꽃은 없다.
그래서 외도보타니아를 방문하면 항상 새로운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외도는 튤립축제가 열리는 4월과 천리향과 장미꽃이 만개하는 봄의 끝자락,
그리고 비너스 가든 위로 은색의 억새가 멋지게 휘날리는 9~10월의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외도에서 찍는 사진의 절반은 모두 작품이 된다.
선인장 동산에 있는 사막 꽃들과 버킹검궁의 후정을 모티브로 한 비너스가든 그리고
드라마 〈겨울연가〉 마지막 촬영장소였던 리하우스, 아름다운 조각과
이탈리아 피렌체의 보볼리 정원과 비슷한 벤베누토정원 등 천국의 계단, 소망의 등대까지….
외도에 있는 모든 건축물과 조각품 그리고 꽃과 나무는 한려수도 거제도의 바다와 하늘, 주변 섬들과 어우러진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다.
거제도에서 거가대로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는 동안
옥포대첩기념공원과 김영삼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도 지나갔다.
멋진 대금산을 지나 터널을 몇개 지나니 반짝이는 3주탑과 2주탑의 사장교인 거가대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거가대교는 꿈의 다리라고 불린다.
거가대교 덕분에 거제도에서 부산 가는 거리가 단축되어 기존에 2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가 지금은 최대 30분이면
이동할 수 있어서 남해안 여행이 편해졌을 뿐만 아니라 물류, 유류비용 등이 굉장히 절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보는 한려수도의 풍광과 일몰은 서비스로 제공이 된다.
이번 ‘한려수도 바라백리길 힐링여행’이 준 여운은 기대 이상으로 오래 갈 것 같다.
보고 싶었던 가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터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불편하고
깔끔하지 못할 지라도 자연과 함께 그 속도에 맞추어 느리게 사는 것이 풍족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감성충전의
시간이었다.
일상생활로 돌아가 머리가 복잡한 어느 날,
스치듯 지나가면서 들은 노래 한 소절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것처럼 그렇게 이번 여행을 기억하고 싶다.
출처 : 헬스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