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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1세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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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 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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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1세기(2)
우리의 대중가요는 일제 강점기에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문물을 100여년 먼저 받아들인 일본과는 차이가 많아 그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엔카(연가)를 번안한 곡들이 국내에서 불리게 되었고 또 창작곡을 취입하려고해도 기반이 되어있지 않아 일본에 가서 레코드에 녹음하는 시대에서 일본가요와 한국 가요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였으며, 1930년 말기에 이르러 우리말 말살정책에 따라서 일본가요에 동질화가 되어가기도 하였다.
각 레코드사의 문예부에서는 당시의 문필가들이 가사를 창작하였다. 이때 활약하였던 문필가들은 김안서(金岸曙) . 이하윤(李河潤) . 이서구(李瑞求). 이부풍(李扶風) . 박영호(朴英鎬) . 조명암(趙鳴岩) . 고려성 . 김능인(金陵人) . 김상화(金尙火) . 강사랑(姜史郞) . 왕평(王平) 등을 들 수 있다. 창작 가사 이외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일본가요의 번안과 일본 곡에 한국말 가사를 붙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는 일본가요의 중심을 이룬 엔카풍[연가풍(演歌風: 독특한 일본음계 ․ 속요, 음계의 음선율(陰旋律)과 양선율(陽旋律)]의 가요 곡을 작곡하면 히트하는 시대가 되었고, 1934년에는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연락선은 떠난다.> <망향초 사랑> <코스모스 탄식> <고향설>등이 나왔다. 1933년[봉자(峯子)의 노래] (채규엽 노래) (어느 여급의 자살)이후 대중가요의 가사는 사랑. 이별. 눈물. 방랑. 고향 그리고 현실도피와 같은 통속적인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비록 가락이야 엔카풍이지만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대변해 주는 노래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획일적인 정책 하에 일본 군가만을 불러야 했던 한국가요의 암흑기로, 한국청년의 출전을 미화한 노래 <아들의 혈서> (백년설 노래)를 매일 방송하기도 하였다. 8 ․ 15 광복의 기쁨도 38선의 갈림으로 덮어지고 그 38선의 비보를 노래한 <가거라 38선>이라는 넋두리의 되풀이로 한국가요는 여전히 감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38선을 넘어온 실향민들은 <꿈에 본 내 고향> <한 많은 대동강>등을 애창하게 되었다.
왜색의 잔재를 없애고 주체성 있는 건전가요의 제작 보급에 나섰던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이후 <고향초> <아내의 노래> <목장의 노래> 등을 보급, 새로운 한국 가요의 맥락을 찾아갔다. 미국의 팝송과 재즈의 기법이 한국가요에 도입되었던 시절에는 현인(玄仁)의 노래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원시적인 레코드제작법에서도 새로운 가요가 많이 만들어졌다. <명동야곡> <고향만리> <울어라 은방을> <선죽교> <백팔염주> <저무는 충무로>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등이 그것이다. 이때는 새 가요가 레코드보다 무대공연에서 더 많이 불리고 대중에게 애창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유명한 가요인들이 희생되었고 납북되기도 하였다. <전우야 잘 자라> (박시춘 곡, 현인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하여 북진하는 국군과 더불어 전국에 널리 퍼졌다.
1 ․ 4후퇴 이후 실향민의 쓰라린 생활고의 현실은 <굳세어라 금순아> <슈샤인 보이> <이별의 부산 정거장> <단장의 미아리 고개> <추억의 40계단> <물레방아 도는 내력> <비 내리는 호남선> 등에 표현되어 널리 애창되었다. 1957년 공보처에서 제정한 국민가요 중에서 널리 애창되어 건전가요로서 비교적 성공한 노래는 <소녀의 꿈> <(손석우 곡) <청춘목장> (송민영 곡) <고향에 찾아와도> (이재호 곡) <꽃 중에 꽃> (황문평 곡)등이다. 또 1956년 방송드라마의 주제가 <청실홍실>이 크게 히트하자 주제가는 드라마의 정석처럼 되었고, 1955년 이후 한국영화가 성행하자 수많은 영화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산백과>
우리의 가요 발전사를 돌아하면서 느낀 점은 첫째로 일제의 문화 말살정책에 치를 떨게 하였다. 둘째로 우리민족의 끈기와 용기에 놀랐다. 셋째로는 예술성과 창작성이 뛰어나는 점이다. 넷째로 불모지에서도 꽃을 피우는 정신이다. 라고 표현하고 싶다. 다음 3호에서 다시 이어갑니다.
2016년 04월 02일(토요일)
夢室에서 김광수
#일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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