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쭉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지요.
과거에는 이 전쟁을 남북전쟁으로도 불렀으나 남북전쟁이란 명칭은 보통 미국의 Civil War를 지칭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정부 및 국사 교과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6.25전쟁이지요. 그러나 6.25란 이름은 전쟁의 개전일에 국한될 뿐 전쟁의 총체적인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학술적으로는 한국전쟁이란 표현을 주로 사용하지요. 이곳에서도 한국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읽어보시기 전에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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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의 시작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북침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69%였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라 단어에 혼동이 와서 그런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용어에 대한 정리를 하자면 ‘남침=남한을 침략’, ‘북침=북한을 침략’입니다. 앞에 괄호치고 ‘(북한의) 남침’이라고 생각하시면 좀 편할 거 같네요. 남한이 침략, 북한이 침략이라고 해석하시면 곤란하지요.
사실 한국전쟁 이전부터 남한과 북한은 38선을 기준으로 소소한 국지전을 벌여왔습니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이 점을 근거로 들어 한반도는 1945년부터 사실상 내전 상태였고 이 혼란이 확대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주장을 했었지요. 이 학설은 단순히 북한이 원흉이다라고 말하던 전통적인 시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설은 충분한 자료(공산권 국가의 기록 등)가 준비되지 않은 극초기의 연구라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료가 공개된 현재,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틀린 것이라고 판명 났지요.
여하튼 한국전쟁은 명백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당시의 군사적 우세를 활용해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남로당의 인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지요.
그 근거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 국군이 전쟁 초반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을 들 수 있겠네요. 신성모에 대한 포스팅에서 언급했다시피 남한은 전쟁 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지요. 반면 인민군은 남한 각 행정 소재지의 상세한 정보를 수집 중이었고 6월 12일에는 병력의 대부분을 38선 근처로 배치시켰습니다. 북한이 순식간에 서울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90년대에 공개된 소련의 기밀문서도 남침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 문서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전쟁 허락을 구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지요. 수십 차례나 개전을 거부하던 스탈린은 결국 ‘중국이 괜찮다고 하면 니 멋대로 하게 적당히 지원해줄게.’라는 의사를 전합니다.
물론 스탈린이 평화주의자라서 전쟁을 반대한 건 아닙니다.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전력이 미국에 못 미친다고 판단했고, 남북한의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지요.
결과적으로 중국의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이것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간혹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미국이 일부러 도발하거나 방관했다는 음모론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남침유도설’이지요. 확실한 근거가 있기에 이미 폐기된 북침설에 비해 나름 마일드한 의견입니다.
일단 ‘애치슨라인’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애치슨라인이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 발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뜻합니다. 근데 이 방위선은 필리핀 및 일본까지만 포함할 뿐 한반도가 빠져 있었지요. 즉, 한반도는 미국이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심지어 교과서조차 이 애치슨라인을 한국전쟁의 주요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많이 다릅니다. 애치슨의 연설이 있기 전부터 북한은 구체적인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학계에서는 애치슨라인이 전쟁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지요.
애초에 애치슨라인은 단순히 애치슨의 연설 중에 나온 용어일 뿐, 미국 정부의 공식 선언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세간의 통념처럼 애치슨라인이 한반도를 포기하는 정책이었다면 미국은 남한에 아무런 원조를 하지 않았을 테고 훗날 미군의 참전 역시 없었겠지요. 현재까지 애치슨라인이 비판받는 것은 정치적 진영논리의 탓이 큽니다.
또한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면 반격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전혀 다르지요.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맥아더는 먼저 찰스 스미스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스미스 부대를 파견합니다. 맥아더의 생각은 ‘세계 최강 미군이 참전하면 알아서 꼬리를 내리겠지’ 정도였겠지만 김일성이 그 정도의 개념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인민군은 오산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를 그야말로 개박살 내버리죠.
스미스 부대의 처참한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2차 대전 당시 상대했던 일본의 쓰레기 같은 전차를 생각하며 북한을 과소평가했지요. 하지만 당시 북한이 운용하던 소련제 T-34/85전차는 상당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또한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정예부대였지요. 이런 상황을 인지 못한 스미스 부대는 연패를 거듭합니다.
이후로도 미군은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소규모 부대를 한반도로 보냅니다. 역시나 패배를 거듭했고 결과적으로 미군과 한국군의 연합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나게 되지요. 이런 전략적 열세 상황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지속됩니다. 정말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면 이런 백중세의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은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된다면 지도층과 난민들을 오세아니아의 사모아 섬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지요.
결국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략했다거나, 스탈린의 사주가 있었다거나, 미국이 북한의 침략을 방관했다거나 하는 의견들은 타당한 근거가 없는 상황입니다. 과거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앞서 말한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된 이후 모두 논파되었지요.
즉, 한국전쟁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층들이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한반도를 나락으로 빠뜨린 것을 생각한다면 그 죄는 누구보다 무겁지요.
출처 : 5분 한국사이야기
첫댓글 수원오산간 1번국도에 스미스부대 참전 기념비가 있죠.....
몇시간만에 전멸했던 스미스부대
남북전쟁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