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훈(서양사95) 교우
커피리브레 대표
커피 생산자와 소비자,
커피를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이
만나는 교차로
지금이야 스페셜티 커피를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스페셜티 커피는 국내에서 생소한 분야였다. 한국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게 된 데에는 서필훈 교우의 역할이 컸다.
쿠바 여성사를 공부하던 청년이 커피에 영혼을 빼앗겨 무작정 이 길로 들어섰다. 로스팅한 원두가 맛이 없다며 손님들에게 타박을 듣던 그가 몇 년 뒤에는 국내 1호 큐그레이더가 되고, 월드로스터스컵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현재는 국내 매장 세 곳과 상하이 매장 한 곳을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곳에 원두를 공급하고 있다. 1년에 3~4개월은 좋은 원두를 찾아 남미, 인도, 아프리카의 커피 농장을 돌아다닌다. 커피에 있어 그는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었다.
“본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서 교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길 위의 히치하이커는 목적지가 명확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때로는 우연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흘러가기도 해요. 무엇보다 히치하이커에게는 주변의 선의가 필수적이에요. 커피를 시작한 이후 제 삶이 그랬던 것 같아요. 우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어요. 저도 이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겠어요.”
마음의 고향, 보헤미안
서 교우는 모교 후문의 ‘보헤미안’에서 커피를 처음 배웠다. 커피의 매력에 빠져든 서 교우는 무턱대고 최영숙 대표에게 이곳에서 일하게 해 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그는 보헤미안의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커피에 미쳐있었어요. 자료도 읽고 연습도 해보고 그러다보면 매일 밤 12시 넘어서 퇴근을 했죠.”
좋은 재료와 숙련된 테크닉이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커피를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가르쳐 준 이가 최영숙 대표였다. 최 대표는 국내에서 미개척지였던 스페셜티 커피 분야를 공부하는 서 교우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돼 줬다. “1년에 한 번 크게 열리는 세계 커피 박람회나 세미나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다고 하면 다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한 달씩 장기휴가로 해외에 나가 수업도 듣고 견문을 넓히고 왔죠.”
2012년 동진시장에 오픈한 커피 리브레 첫 매장. 지금은 시장 재개발로 이전했다. 왼쪽 사진은 창업 당시부터 사용했던 로스터기 옆에 서 있는 서 교우.
내 원동력은 커피에 대한 마음
서 교우는 약 5년 동안 일했던 보헤미안에서 독립해 연남동에 ‘커피 리브레’를 창업했다. 처음에는 카페를 열 돈이 없어 바리스타를 교육하는 공방으로 시작했다가 3년 뒤 동진시장에 첫 매장을 냈다. “처음엔 장사가 엄청 안됐어요. 어떨 때는 몇 명 안 되는 직원들 월급을 줄 돈이 없어 빚을 내기도 했죠. 사업이 안 되는 건 어떻게든 버티겠는데, 내가 커피에 갖고 있던 신념이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제일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커피를 너무 좋아했어요.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어서 조금만 더 견뎌보자며 버텼죠.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서 교우가 회사에서 담당하는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생두 구매다. 그는 산지에 직접 방문해 좋은 품질의 생두를 확보하고, 농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다진다.
커피 리브레는 중남미 주요 커피 산지인 온두라스에서 소농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간단한 기계를 살 돈도 없어 생두를 헐값에 넘기는 것을 본 서 교우는 설비 구축, 농장 확장, 창고 건설, NFT 발행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농민들과 상생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서 교우는 처음 커피 공부를 할 때 자료가 없어 고생했다고 한다. 커피를 배우려는 다른 이들이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회사 홈페이지에 아카이브를 만들어 커피 관련 서적과 해외 논문 등을 다양하게 업로드하고 있다. 또한 커피 전문 서적을 번역해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좋은 커피란
“객관적으로는 커핑 점수가 높은 커피, 그러니까 소비국의 입장에서 인정하는 커피가 좋은 커피겠죠. 최근에는 커피 산지의 환경 보존, 그리고 현지 농가의 생활 여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요. 품질뿐 아니라 지속가능성까지 보자는 거죠.” 여기에 더해 서 교우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생각한다. “커피는 기호식품이잖아요. 내가 마셨을 때 맛있는 커피, 내가 기분이 좋을 때 마시는 커피,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커피가 좋은 커피라고 말하고 싶어요.”
서 교우는 커피 리브레가 ‘교차로’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커피 리브레 홈페이지에는 ‘커피를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의 미각적 행복과 기술적 진보를 위해 노력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커피 리브레가 앞으로도 커피 생산자와 소비자, 커피를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 그리고 손님과 손님이 만나 서로 연결되는 교차로가 돼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기를.
스페셜티 커피란?
특별한 지리적 기후에서 생산되는 독특한 향미를 가진 커피를 말한다.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의 기준으로 향미, 바디, 후미, 밸런스 등의 총 10가지 항목에서 큐그레이더(SCA 소속으로 커핑 관련 시험 24과목을 통과한 전문가)들이 직접 맛을 보고 평가했을 때 80점이 넘는 커피를 통칭한다.
커피 너머의 진짜 ‘얼굴’들에 관한 이야기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에는 16년 간 스페셜티 커피 불모지인 한국에서 스페셜티 커피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겪은 다양한 일화가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마치 고고학자처럼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기까지 기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내고 복원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커피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생산되어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소비되는 대표적인 산업이다. 서 교우는 커피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가감 없이 서술하며, 우리가 마시는 커피 너머 진짜 농부들의 삶을 적어 내려간다.
커피 리브레를 창업하기까지의 과정과 작은 업체에 불과했던 커피 리브레가 커피 농장과의 직거래를 성장시키는 과정, 산지에서 겪은 좌충우돌 경험담들을 통해 서 교우의 지독한 커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하늘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