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세가 원종 12년(1271) 신미년• 12년 봄 정월
기사일. 공유(孔愉)와 안세정(安世貞)의 관직을 삭탈했다. 또한 아카이[阿海]가 적의 기세에 눌려 아군을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 그대로 보고하니 몽고 황제가 아카이를 면직시키고 소환했다. 경오일.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장용(李藏用)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영(崔瑛)이 임연(林衍)과 함께 왕의 폐립을 모의했으므로 면직시켰다. ○ 박천주(朴天澍)가 진도(珍島)에 당도하자 적이 벽파정(碧波亭)에서 영접하고 위로연을 베풀면서 몰래 병선 20척을 보내 관군을 공략해 배 1척을 빼앗고 90여 명을 죽였다. 신미일. 홍다구(洪茶丘)의 숙부(叔父)이자 복야(僕射)로 은퇴한 홍백수(洪百壽)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삼아 다시 은퇴하게 했다. 병자일. 부카[不花]와 맹기(孟祺) 등이 몽고로 돌아가자 왕이 추밀원사(樞密院使) 김련(金鍊)을 딸려 보내면서 두 나라 간의 혼인을 요청했는데 그 표문은 이러했다.
“제가 얼마 전 입조했을 당시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저의 세자를 황실의 지파와 혼인시키려 하자[結褵] 폐하께서는 기꺼이 허락해 주셨으니 저의 소원이 정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폐하께서 ‘귀국해 출륙하거든 다시 요청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으니 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와 옛 도읍으로 환도했으니 세자를 다시 폐하께 보내 혼인에 대한 사유를 보고 드려야 했을 것이나 새 거처를 마련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며, 또한 폐하께서 너무 서둔다고 여기실까 우려한 나머지 미처 아뢰지 못하고 미루어 두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소원한 나라를 친밀히 하는 은덕을 베푸사 길이 상국의 보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서에서 말씀하신바 남송의 상선을 그냥 떠나보냈다는 일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얼마 전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과거에는 송나라 상선이 왕래했으나 최근 10년 간 한 번도 보지 못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침 몇 해 전 배 한 척이 우리 영토에 온 일이 있었는데 저희나라의 담당 관리는 폐하께서 이제까지 계속해서 왕래해 왔다고 여기실 것을 우려한 나머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춘 후 그냥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그 즉시 금지시키지 못해서 이런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으니 엎드려 용서를 비옵니다. 일본에서 해마다 공물을 바쳤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지난번 표문에서 보고 드린 것 같습니다. 또한 조서에서 ‘공을 이루겠다고 앞 다투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는 아마도 저희나라에 묵은 감정이 있는 자가 상국의 은혜를 입어 이 땅에 사단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 뿐이오니 폐하께서 잘 살펴주시기만 빌겠습니다. 금후로는 모든 일을 일체 저희나라에 위임하시어 그 공효를 살펴주십시오. 조서에서 ‘저 소인배들이 저들 멋대로 경마저 폐위시켰거늘 하물며 경의 자손에게 어찌 즐겨 마음을 다하여 보좌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가르침을 듣고 보니 크신 은혜에 더욱 감격하나이다. 국왕의 폐립을 주모한 죄를 물어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영(崔瑛)을 둘 다 관직에서 쫓아내었습니다.”
○ 당시 몽고의 중서성(中書省)이 고려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자 왕이 중서성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들리는 소문에 저희나라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여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나라에는 임연(林衍)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해 상국의 군대가 그 죄를 묻기 위해 출동했을 당시에 역적들이 스스로 의구심을 품고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남쪽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또한 저희나라에 대해 묵은 원한을 지닌 자가 그 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저희가 강화도를 나와 육지로 들어갈 때 군사를 풀어 약탈을 마음껏 저지르니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원망의 소리가 드높았습니다. 현재 역적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아 상국의 군대가 남쪽 변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까닭에, 우리 백성들은 밖으로는 역적 토벌에 힘을 빼앗기고 안으로는 군수물자를 조달하느라 곤궁한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전국에 걸쳐 비축해 둔 물자를 지난해 역적들이 남김없이 약탈해가는 통에 이제 겨우 육지로 나와 터를 잡은 신민들은 목숨을 보존해 의무를 이행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저런 무리들이 이러한 건의를 한 것은 과거의 행태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함이니 명목은 둔전을 내걸었으나 기실 우리를 잔혹하게 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여러 가지로 건의한 것입니다. 만일 상국 조정에서 그들의 말을 좇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침해를 자행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를 것이며 저희나라 백성은 거진 씨가 마를 것입니다. 조서에서 지시하신 군량 조달 문제는 저희가 이미 지시대로 각도에 권농사(勸農使)를 보내 있는 힘을 다해 마련하도록 조치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여러 상공들께서는 황제께 잘 아뢰어주셔서 간악한 자들이 둔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 앞서 낭장(郞將) 이영(李瑛)이 몽고에 도망쳐 들어가 황제더러, “본국의 사천감(司天監) 오윤부(伍允孚)라는 사람은 천문(天文)에 밝으며 낭장(郞將) 김희목(金希牧)은 손으로 돌을 깰 수 있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몽고황제가 사신 부카[不花]가 귀국하는 편에 데려오라고 하자 왕이 그들 모두를 보내도록 했다. 기묘일. 몽고가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로 비서감(秘書監) 조양필(趙良弼)과 쿠룸치[忽林赤]·왕국창(王國昌)·홍다구(洪茶丘) 등 40명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전달했다.
“짐이 생각하건대 일본은 예로부터 중국과 서로 교류했으며 또한 경의 나라와 지역이 서로 가깝기에 진작 경에게 지시해 사신을 인도하고 우호관계를 맺도록 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짐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지 못했으며, 그 뒤에는 임연(林衍)의 일 때문에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대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기에 다시 조양필(趙良弼)을 국신사(國信使)로 보내니 반드시 일본에 당도할 수 있게 만전을 기하라. 또한 쿠룸치·왕국창·홍다구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까지 호송하게 하고 국신사가 돌아올 때까지 임시로 금주(金州) 등지에 주둔하게끔 조치했다. 주둔하는 동안 소요되는 군량은 경이 전담 관리를 주둔지로 보내 가까운 곳에서 마련해 공급하게 할 것이며, 전함을 금주에 집결 대기시켜 출발이 지체되거나 물자가 부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왕이 도성 밖까지 나가 조서를 맞이했는데 홍다구(洪茶丘)는 왕을 보고 절을 올리지도 않고서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 보낸 다음과 같은 공문을 내보였다.
“홍다구의 보고에 따르면, 그의 아비 홍복원(洪福源)은 누대 황제들의 분부에 따라 고려에 있는 부모형제 및 친척들을 우리나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숙부인 홍백수(洪百壽) 등 5호(戶)를 아직까지 데려오지 않았다고 하니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홍백수 등을 찾아서 함께 보내도록 하시오.”
임오일. 조양필(趙良弼)이 왕의 폐행인 강윤소(康允紹)와 동행을 요청하자 왕이 부득이 허락했다.병술일. 박천주(朴天澍)가 진도(珍島)로부터 돌아왔는데 적이 반행객사(伴行客使) 두원외(杜員外)를 강제로 억류한 다음 황제의 조서를 박천주에게 돌려주면서, “이 조서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고 접수를 거부했으며 우리 조정의 국서에 대해서만, 분부대로 따르겠노라고 답했다. ○ 밀성군(密城郡) 사람인 방보(方甫)·계년(桂年)·박평(朴平)·박공(朴公)·박경순(朴慶純)·경기(慶琪) 등이 고을 사람들을 규합해 진도의 반적과 행동을 같이 하려고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살해한 후 스스로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를 일컬으며 각 군현(郡縣)에 공문을 보냈다. 또 자기 패거리를 시켜 청도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어떤 문헌에는 최양재(崔良梓)라 되어 있다)을 살해하자 청도군 사람들이 거짓으로 투항하는 체하고 술을 취토록 마시게 한 후 모두 섬멸해 버렸다. 당시 밀성(密城) 사람 조천(趙阡)이 일선현령(一善縣令)으로 있었는데 적이 조천을 불러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꾀니 조천도 그 말을 따랐다. 그러나 얼마 후 그 패거리들이 청도(淸道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섬멸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같은 고을 사람 손일(孫逸)과 더불어 반적의 괴수를 살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어떤 문헌에는 이숙진(李淑眞)이라 되어있다)가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및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합세해 기습하자 조천 등은 방보(方甫) 등을 죽이고 투항하니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정해일. 전 평장사(平章事) 유경(柳璥)을 애도(哀島)로 유배보냈다. 기축일. 박천주(朴天澍)를 몽고에 보냈다. 계사일. 관노(官奴) 숭겸(崇謙)과 공덕(功德) 등이 패거리들을 규합해 다루가치와 본국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한 후 진도로 가서 투항할 음모를 꾸몄다. 대정(隊正) 송사균(宋思均)이 고변하자 왕이 장군(將軍) 최문본(崔文本)과 조자일(曺子一)을 시켜 그들을 국문하게 했는데, 얼마 후 합문지후(閤門祗侯) 신좌선(辛佐宣)이 길거리에서 칠팔 명이 모여 쑥덕대는 것을 보고는 달려와 왕에게 사세가 심각하다고 보고했다. 마침 저물녘이라 재추 및 승선(承宣)·중방(重房)·내시(內侍)·다방(茶房)이 서로 돌아보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할 뿐 아무런 대책도 내어 놓지 못했다. 왕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현원(李玄原)과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보내 톡토르[脫朶兒]에게 구원을 청하니 톡토르가 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재추들을 소집한 후 숭겸 등 10여 명을 체포해 조사하자 다들 자복했다.
• 2월
초하루 을미일. 숭겸(崇謙) 등 네 명을 처형해 큰 거리에 전시하고 그 나머지는 다 석방했다. 송사균(宋思均)에게 섭별장(攝別將)벼슬을 제수하고 은병(銀甁)과 나견(羅絹) 등을 상품으로 주었다. 기해일.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몽고에 보내 방보(方甫)와 숭겸(崇謙)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보고했다. 신축일. 착량(착량 : 강화도)을 지키고 있던 몽고 병사들이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 주민들을 침탁하는 통에 대부도의 주민들이 크게 원한을 품고 있던 중 숭겸 등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자 드디어 몽고인 여섯 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주부사(水州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해 평정하자 그를 5품으로 승진시켰다. 계묘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근자에 병란으로 창고(倉庫)가 텅 비는 바람에 백관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해 관리들을 권면할 길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품계에 따라 경기(京畿) 8현(縣)에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소서.”라고 건의하니 이를 허락했다. ○ 권신이 처형당한 후 종친들과 총신인 이현원(李玄原)·강윤소(康允紹)·이분희(李汾禧)·김자정(金自貞)·이분성(李汾成) 등이 앞다투어 왕에게 청탁해 전원(田園)을 하사받았는데, 이때 와서 재추들이 그 전원을 회수해 모두 영송고(迎送庫)에 귀속시켜서 국가 재정에 충당할 것을 건의했다. 대노한 왕이 그 논의를 주창한 자를 벌하려고 당리(堂吏)들을 문초하게 하니 최승적(崔承的)이, “조정대신들이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 누가 주창했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 삼별초(三別抄)가 장흥부(長興府) 조양현(兆陽縣 :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을 침구해 많은 재물을 노략질하고 전함을 불살랐다. 방어도령(防禦都領) ▶진정(陳井)은 본래 유학(儒學)을 공부하던 사람으로 자원해서 종군했으나 주색에 탐닉해 적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패했다. 정미일. 충청도 안찰사(忠淸道按察使) 홍자번(洪子藩)과 교주도 안찰사(交州道按察使) 노문좌(盧文佐) 등이 임지에서 돌아와 복명하자 왕이 친히 백성들이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물었다. 무신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는데 마침 화재가 나 저시교(楮市橋) 곁의 민가 3백여 호가 전소되었으므로 연등과 기악행사를 중지시키고 태조의 진전만 참배했다. 신해일. 톡토르[脫朶兒]가, “남쪽 지역을 수비하는 우리 군사들이 주·군(州郡)을 침탈하는 통에 백성들이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 못하니 사자를 보내 다독거려야 할 것입니다.”고 건의하기에 장일(張鎰)을 경상도(慶尙道)로, 주열(朱悅)을 전라도(全羅道)로, 곽여필(郭汝弼)을 충청도(忠淸道)로 각각 파견했다. 을묘일. 본궐에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 장군 인공수(印公秀)와 보성(寶城 :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 천호(千戶) 등을 몽고로 보내어 둔전(屯田)을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방금 ‘상국 조정에서 둔전을 경작할 군인(軍人)을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감히 반대하지는 않사오나 다만 현재 저희나라는 출륙할 당시 이제까지 비축해둔 재물을 모조리 역적들에게 약탈당했으며 상국 군사들에게 군수물자를 조달하느라 남은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 필요한 물자도 전국 각지의 백성들로부터 가각호호 거둬들이기가 심히 어려운데 만약 둔전군마저 들이닥친다면 양식이 다 떨어진 판에 농사지을 종자는 또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경작용 소는 원래부터 기르지 않았으며 더구나 성안에 사는 주민들은 거의 가축을 기르지 않으니 시골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저희나라의 충청·전라지역은 역적을 토벌하느라 고초를 겪고 있어서 소를 징발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며 경상도에서 겨우 구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숫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가 조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둔전하는 군사[東作]들도 또한 기근에 시달릴 것이 우려됩니다. 앞으로는 세자에게 국사를 임시로 맡기려 합니다. 미처 다 쓰지 못한 저희들의 정황에 대해서는 3월경에 제가 직접 폐하를 조회하는 자리에서 하나하나 상세히 아뢰겠사오니 우선 저의 사신이 보고드리는 말을 어여삐 살펴주시기 바라나이다.”
병진일. 우부승선(右副承宣) 홍문계(洪文系)가 사직하므로 홍자번(洪子藩)을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 ○ 해당관청으로 하여금 은(銀)과 베를 백관으로부터 차등 있게 거두어 왕이 몽고에 입조할 때 쓸 경비로 충당하게 했다. 경신일. 박지량(朴之亮)을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로 임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경상도로 가게 했다. ○ 이 달에 톡토르[脫朶兒]가 꼭 재상집에다 아들을 장가들이려 하자 딸을 둔 재상들이 두려워하며 앞다투어 사위를 맞아들였다. 나라에서 재상 집 두 세 곳을 적어주고 스스로 택하게 하니 톡토르가 인물을 보고 김련(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했다. 그 집은 이미 데릴사위를 두고 있었는데 그 사위가 겁을 낸 나머지 집을 나가버렸다. 김련이 당시 몽고에 들어가 미처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서는 그가 귀국한 뒤 혼례를 치르자고 요청했으나 톡토르는 듣지 않았다. 나라 풍속에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길러 나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사위로 삼는 것을 데릴사위라고 불렀다.
• 3월
병인일. 몽고가 힌두[忻都] 및 사추(史樞) 등을 보내 아카이[阿海]를 대신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냈다.
“짐이 진작 사절을 보내 일본과 교류하고자 했으나 뜻밖에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며 문을 굳게 닫는 바람에 이제는 좋은 말로 설득해 내기가 어렵게 되었음을 경도 잘 알 것이다. 이제 저들을 다스리기 위해 해당 관청에 지시해 둔전군(屯田軍)을 보냄으로써 차후 저들을 공략할 전략을 세웠으니, 이는 장차 그대 나라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고통을 면제해 주려는 뜻이다. 이에 다시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 먼저 짐의 뜻을 알리고자 하니 경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짐이 세운 전략을 도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짐의 뜻에 부합하라.”
또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황제의 뜻을 받들어 힌두[忻都]와 사추(史樞)를 행경략사(行經略司)로 임명해 봉주(鳳州 : 지금의 봉산(鳳山)) 등지에 둔전할 군영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둔전에 필요한 소 6천 두 중 동경(東京(遼陽)) 등지에서 보낸 3천 두를 제외한 나머지 3천 두는 경략사(經略司)로 하여금 돈을 수령해 고려 현지에서 사들이도록 조치했습니다. 그 외 농기구·종자·사료 등의 물품 및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그 쪽에서 맡아 부족하지 않게 전량을 공급해 주기 바랍니다.”
기사일.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양주(襄州 :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의 백성 장세(張世)와 김세(金世) 등이 그 지역 수령과 향리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다가 일이 탄로나 처형당했습니다. 그 잔당인 천서(天瑞) 등이 몰래 옛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의 조휘(趙暉)에게 투항한 다음 군사 4백여 명을 달라고 요청해 갑자기 양주(襄州)에 침입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바닷섬으로 이주시킨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지양주사(知襄州使)와 향리 및 백성 1천여 명을 몰아다가 배 세 척에 분승시키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임신일. 삼별초가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를 침구해 감무(監務)를 잡아갔다. 계유일. 봉주경략사(鳳州經略司)에서 비단 12,350필을 가지고 와서 농우(農牛)를 사갔다. 갑술일. 왕이 거처를 남산궁(南山宮)으로 옮겼다. 정축일. 몽고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본국사람들이 몽고와 무기·말을 거래하는 일을 금지한다고 알렸다. 임오일. 추밀원사(樞密院使) 김련(金鍊)이 몽고로부터 돌아왔는데, 몽고 황제가 숭겸(崇謙)·방보(方甫) 등이 모반한 일을 듣자 우리가 건의한 사항을 모두 거부했다고 알렸다. 갑신일. 삼별초가 동래군(東萊郡)을 침구했다.계사일. 몽고의 단사관(斷事官) 심혼(沈渾)이 와서 군량을 요구했다. ○ 유경(柳璥)과 유천우(兪千遇)를 소환하였다. ○ 인공수(印公秀)가 몽고로부터 돌아왔는데, 몽고 황제가 그 편에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왕이 건의한 사항을 짐이 잘 알았다. 과거 왕이 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오히려 간사한 자들이 사당을 만들었는데 이제 반역자들이 평정되지도 않은 마당에 왕이 우리 조정에 들어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에 왕의 입조 비용으로 백관들에게 추렴했던 은과 베를 모두 돌려주었다. ○ 이 달에 전중감(殿中監) 곽여필(郭汝弼)을 몽고에 보내 우리의 사정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천자의 사신인 힌두[忻都]와 사추(史樞)가 와서 폐하께서 일본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저희나라는 이제 막 섬을 떠나 육지로 나와 온 정성을 다해 상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 하는데도, 폐하께서는 저희가 일본과 친밀히 지내면서 그들을 감싸고 돈다고 오해하시니, 어찌 저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풍속이 하도 완악하고 어리석기에 상국의 사신이 일본에 들어갔을 때 혹시 접대함에 근실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걱정했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 엄중한 분부를 내리시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사신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기필코 일을 이루어 내겠습니다.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농기구는 저희 백성들이 원래부터 넉넉히 가지지 못해 요구하신 수만큼 마련하지는 못했으나 힘닿는 대로 마련해 조달할 예정입니다. 종자의 경우 백성들이 해마다 농사를 지어 공물과 부세로 납부한 다음 그 나머지로 양식을 삼으며, 약간의 곡식을 남겨두었다가 다음 해 농사지을 종자로 비축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가호호를 뒤져 거두더라도 많은 양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군량의 경우, 큰 병란 이후 나라에 비축해 둔 것을 역적들이 거진 약탈해 갔으며 그 나머지는 상국의 주둔군과 역적 토벌군에 공급하느라 모조리 다 써버려 여분이 없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로부터 벌써 여러 차례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더 이상 거둘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종자·사료 및 가을까지 조달할 군량을 계산해 보면 모두 몇 만 석이나 되는데 이것을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지금 역적이 날로 기승을 부려 경상도 금주(金州)와 밀성(密城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까지 침구했으며 덧붙여 남해(南海)·창선(彰善)·거제(巨濟)·합포(合浦)·진도(珍島) 등지를 약탈하고 연해의 부락들까지 모조리 약탈하는 바람에 재물과 곡식을 거두기가 사실상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모두가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해로로 수송해야 하는데 지금 역적들이 해로의 요충인 진도에 버티고 있어 조운선의 운항이 불가능한지라 군량·사료·종자를 아무리 거두더라도 수송할 길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감히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마땅히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만 이른바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우리나라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 여름 4월
병신일. 각 도에 농무별감(農務別監)을 보내 농우와 농기구를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와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납부할 것을 독촉하게 했다. 경자일. 어떤 자가 다루가치 톡토르[脫朶兒]더러, “우리나라에는 사월 초파일날 관등(觀燈)행사를 벌이는 풍속이 있는데, 누군가가 이 날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소이다.”라고 귀띔하니, 이 말을 곧이들은 톡토르가 도성 바깥에 머물며 여러 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신축일. 삼별초가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를 침구하자 방호 장군(防護將軍) 박보(朴保)가 별초(別抄)와 함께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적들은 고을을 불지르고 약탈한 다음 가버렸다. 임인일. 영광부사(靈光副使) 김수(金須)의 처에게 쌀 10곡을 내려주어 전사한 남편의 충절을 표창했다. 정미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金方慶)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진도(珍島)의 적들이 사람을 시켜 힌두[忻都]에게, 은밀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잠깐 자기들 섬에 들러달라고 요청했으나 힌두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뒤 적들이 다시 술과 음식을 마련해 대접하겠다고 요청하자 힌두가 허락했습니다.”
○ 힌두가 황제에게, “반신(叛臣) 배중손(裴仲孫)이 우리가 보낸 사신을 오래 억류한 채 험준한 지세를 믿고 항복하지 않고 있으니 쿠룸치[忽林赤]·왕국창(王國昌)과 여러 방향에서 협격해 토벌하게 해주소서.”라고 건의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임자일. 몽고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 왕희(王熙)·왕옹(王雍) 등 두 명으로 하여금 군사 4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도를 토벌하게 했다. 을묘일. 톡토르[脫朶兒]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재추(宰樞)들과 함께 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사람 홍택(洪澤)을 참수하고 그 일당인 홍균비(洪均庇) 등을 장형에 처한 뒤 역리(驛吏)로 삼았다. 이는 착량(窄梁 : 강화) 방수군(防守軍)을 죽인 죄를 다스린 것이다. 정사일. 몽고에서 주부개(周夫介)를 보내면서 부친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힌두[忻都]와 바얀[白羊]은 병력을 증강해 더위와 장마가 닥치기 전에 역적을 진압하자고 건의했으나 짐의 생각에는 여름 장마가 닥치기 전에 부대가 그곳에 도착할 수 없으리라 본다. 경은 인근지역에서 군사 6천 명을 뽑아 각 군에 나누어 편성한 다음 진도를 공격해 점거하라. 작전이 일찍 종료되면 그 나라 백성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 또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 보낸 공문은 다음과 같았다.
“진도의 적도들이 관민(官民)을 노략질하고 서른 곳이 넘는 섬을 함락하면서 그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연히 우리를 희롱하면서 전혀 투항할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하니 전군을 동원해 급습함으로써 큰 해악을 미리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여름 장마철이 닥치면 함락시키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니 현재 진도 부근에 있는 병선 260척 외에 귀국의 병선 140척을 함께 동원해 병력을 증강한 다음 힘을 합해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번 작전에 필요한 군량과 군수 물자는 관리들로 하여금 조금도 착오 없이 전력을 다해 조달하도록 지시해 주기 바랍니다.”
○ 이 달 단사관(斷事官) 심혼(沈渾)이 몽고로 돌아가는 편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먼저 번에 사신 힌두[忻都] 등이 황제 폐하의 분부를 전달했습니다. 그중 둔전에 관해 지시하신 것은, 황제께서 저희나라를 동정하셔서 군량과 사료를 조달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나라에서 농우 3천 두를 사들이도록 경략사에 지시하셨는 바, 저희들이 그 값을 받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황제의 분부이니 어찌 있는 힘껏 조달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관용 비단을 보내어 그 값을 치르게 하시니 그 은혜에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경략사(經略司) 사추(史樞)가 쿠룸치[忽林赤]·조양필(趙良弼)·왕국창(王國昌)·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농우·농기구·종자에 관한 문제를 의논한 후 반드시 그 숫자를 책정하라고 여러 번 독촉하기에 농우 1,010두, 농기구 1,300개, 종자 1,500석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얼마 후 전국 관아에 위임해 농사철에 맞추어 공급하게 했으며 또 올해 안으로 계속 뒤진다면 농우 990두를 채울 수 있겠기에 그것으로 숫자를 재약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 사신 심혼이 와서 다시 농우 등에 관계된 지시를 거론했습니다. 원래 약속한 수량 이외에 현재 공급하지 못한 농우와 농기구는 원래 숫자에 맞추어 차차 공급할 예정입니다. 상국 군대에서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힘닿는 데까지 조달해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우리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백성인데 농우·농기구·종자를 모조리 빼앗아 생업을 상실하게 만들면 그들이 모두 굶어죽게 될까 걱정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는 사람은 번다한 부역으로 힘이 다해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반면 역적 편에 선 자가 굶주림이나 고통이 없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역적 편에 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이런 사정을 아신다면 필시, ‘어찌하여 사정을 잘 헤아려 진작 나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서 우리 백성들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었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니 그렇게 되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마땅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이오니 부디 이 애처로운 사정을 한번 살펴보아 주시기 바라나이다.”
• 5월
초하루 계해일. 홍다구(洪茶丘)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珍島) 토벌에 나섰다. ○ 이 날에 톡토르[脫朶兒]가 재추(宰樞)들과 함께 교외에서 군사 5백여 명을 열병했다. 그중 도령(都領)과 지유(指諭)에게는 각각 말 1필씩, 군졸에게는 열 명당 말 1필씩을 지급했는데, 행군이 시작되자 군졸들이 행인들의 말을 다수 빼앗았다. 톡토르가, 종군하는 사람 가운데 재추의 자제가 있는가 묻고는 없다는 말을 듣자 재추들로 하여금 각각 말을 내어 군관들에게 주게 했다. 갑자일. 경군(京軍)을 더 징발하고 또 충청도와 경상도의 군사들을 선발해 병력을 증강[濟師]했다. 을축일. 왕이 친히 본궐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임신일. 변량(邊亮)과 이수심(李守深) 등이 수군 3백을 거느리고 진도 토벌에 나섰다. 을해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전(金佺)이 죽었다. 병자일. 몽고 사신 주부개(周夫介)가 제 나라로 귀국하는 편에 왕이 사신을 딸려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사의를 표하는 표문을 올렸다.
“인덕(仁德)을 베푸시어 저희나라를 환난에서 구해주시니 그 뜻은 백성의 피해를 없애려는 것이었으며, 장수를 교체해 남쪽 섬에 병위(兵威)를 떨치니 빨리 가서 공을 세우도록 독려하신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옛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완악한 역적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돼지가 물을 건너서 도둑질 한 것과 같고,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달려듦으로서 하늘을 속인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략이 좋지 못해 한 해가 지나도록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며 수군도 피로에 지친 탓에 시일만 허비하며 대치해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폐하께서 훌륭한 장수를 선발해 지휘관을 교체시키셨으며 또 주부개를 보내어 저더러 여름 장마철이 닥치기 전에 부근의 군민 6천 명을 선발해 각 부대에 나누어 편성시킨 다음 공격해 함락시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현명한 가르침을 받고서 지극한 은총을 절감했으며, 분부에 따라 전국의 관원에게 위임해 말씀하신 숫자대로 병력을 징발해 빨리 토벌에 나서게 했습니다.”
정축일. 김방경(金方慶)·힌두[忻都]·홍다구(洪茶丘)·왕희(王熙)·왕옹(王雍) 등이 3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공격해 적을 대파하고 가짜왕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죽였다. 적장 김통정(金通精)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로 숨어들었다. 경인일.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치르고 급제자 명단을 제시하자 몽고 사신 조양필(趙良弼)과 초천익(焦天翼) 등이 직접 참관하고서 이렇게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일이로다! 우리가 오랫동안 말로만 듣다가 이제 직접 보건대 난리통에도 이처럼 문풍(文風)을 계속 떨치니 정말 훌륭하도다!” ○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몽고에 보내 적도들을 평정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제법 많은 적선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관계로 아직 완전히 적을 평정한 것은 아니오나 역적의 처자식들과 친족들은 모두 죄를 인정하고 처형당했습니다. 다만 먼저 옛 수도로 나왔던 귀족·평민들의 부모 친척과 노비 가운데 역적에 의해 납치되었던 사람들이 지금 다시 상국 군대의 포로가 되어 모조리 상국으로 잡혀갔으니, 폐하께서 장수들을 잘 타일러 돌려보내게 해주실 것을 바라나이다.”
• 6월
갑오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신일. 몽고가 단사관(斷事官) 지비케[只必哥] 등 여섯 명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전달했다.
“경이 얼마 전 인공수(印公秀)를 보내, ‘저희나라에서 비축해둔 재물은 출륙할 당시 죄다 역적들에게 약탈당했으며 또 상국의 군대에 군수물자를 조달하느라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로부터 물자를 거두어들이기가 심히 어려우며 또한 경작용 소를 기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거두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보고하기에, 해당 관청에 지시해 직접 현지에 가서 실정을 알아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올린 표문에서 경은, ‘상국 군대에서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힘닿는 데까지 조달해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며, 둔전에 필요한 농우와 농기구 등은 원래 숫자에 맞추어 차차 공급할 예정입니다.’라고 보고했으니, 이는 전에 올린 보고가 거짓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낱 필부라도 말 한마디를 성실케 하지 못하면 오히려 남들이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경은 일국의 군주로서 거짓 보고를 해서야 되겠는가?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할지어다. 경은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백성들도 역시 황제의 백성인데 그들의 생업을 빼앗아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만들면 도적들에게로 마음을 기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폐하께서 「어찌하여 사정을 잘 헤아려 진작 나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서 우리 백성들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었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니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까?’ 따져보자면 그대 나라의 불순한 자들이 방자하게 반역을 일으킨 까닭에 군사와 백성들이 이처럼 노고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나라가 이미 한 집안이 된 터에 애초부터 안팎의 구별이 없었으니 안정을 되찾은 후에 어찌 백성들의 곤란과 고통을 좌시하고 돌보지 않겠는가? 짐의 지극히 어진 마음을 잘 헤아려 더욱 충성을 다할지어다.”
○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사신으로 갔던 심혼(沈渾)이 돌아오는 편에 부친 표문에 따르면, ‘양주(襄州)사람 천서(天瑞) 등이 관원들을 묶어놓고 구타한 후 바닷섬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보고했는데, 취납관(取納官)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다 머리를 깎고 백성들을 몰아다가 옛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로 갔다고 합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관인을 귀국으로 보내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할 것입니다. 아울러 개경에서 부역을 회피한 범죄자들이 대부분 서경으로 도피했다고 보고한 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신을 시켜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할 테니 귀국에서도 관원을 파견해 함께 조사에 임하도록 조치하기 바랍니다.”
○ 중서성에서 또한 “전 대경(大卿) 민방(閔昉)이 손발에 생긴 질병의 치료에 능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바 가능한 한 빨리 보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민방은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한 관계로 법률에 의해 면직되어 관직에 오를 자격을 상실한 지가 여러 해가 된 자였다. 몽고 황제가 발에 병이 있다는 말을 듣자 다루가치 심혼(沈渾)을 만나 자신이 의술에 능하다고 거짓말을 했으므로 그 말을 곧이들은 심혼이 황제에게 알려 황제가 그를 부른 것이다. 왕은 그에게 상서좌승(尙書左丞) 벼슬을 주어 몽고로 보냈다.
기해일. 세자 왕심(王諶)을 몽고에 질자(質子)로 보내면서 상서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군기감(軍器監) 설공검(薛公儉), 호부낭중(戶部郞中) 김서(金 ) 등 20명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하고 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창경(李昌慶)을 시켜 여행길을 호위하게 했다. 그 편에 보낸 표문은 이러했다.
“저로부터 재상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제들을 번갈아 입시(入侍)시키기로 결정하고, 먼저 세자 및 조신(朝臣)의 맏아들 20명과 각 관청의 직원 1백 명을 보냅니다.”
정미일.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무신일. 몽고 사신 지비케[只必哥]가 귀국하는 편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보냈다.
“저희나라에 원래 비축해두었던 양곡은 죄다 역적들에게 약탈당했으며 조금 남아 있던 것마저 연전에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고 뒤에 또 상국의 주둔군에 공급하느라 남김없이 다 써버렸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것도 이미 여러 차례이므로 더 이상은 계속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소문에는 어떤 간사한 자가 저희나라에 아직도 군량이 많이 비축되어 있다고 말했다기에 사신에게 온 나라를 두루 조사해 사실 여부를 검증해 보라고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금번 내리신 조서에서 ‘보고가 사실과 다르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셨으니 말씀을 받잡고 황공함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양곡이 정말 있는지는 앞으로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 또 중서성에 보낸 공문은 다음과 같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부역을 회피하고 도주한 범죄자들을 철저히 심문해 달라고 요청한 바, 황제께서 특별히 단사관(斷事官) 지비케[只必哥]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국문을 받았던 이황수(李黃秀)란 자는 역신(逆臣) 임연(林衍)의 조카로 임연과 함께 국왕의 폐립(廢立)을 공모했으며, 또 임유무(林惟茂)와 더불어 상국의 군대에 저항하려고 옛 수도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신하인 홍문계(洪文系)와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林惟茂)를 처형하고 이황수를 진도에 유배했는데 뒤에 삼별초가 그곳으로 이동하기에 이황수를 나주(羅州)에 이감시켰습니다. 그러자 이황수는 옥중에서 자물쇠를 풀고 탈옥해 상국(上國)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금년에 홍다구(洪茶丘)를 따라와 제 멋대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았습니다. 진도를 공격할 때는 남녀 1백여 명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고 의복 150여 벌과 양곡을 강탈했으며 또 전함을 탈취한 다음 수군과 뱃사공 등을 위협해 빼앗은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온 바 있습니다. 그 죄악은 당연히 법에 따라 조치해야 마땅하나 그가 상국의 군대에 몸을 기탁하고 있는 까닭에 감히 힐문하지 못하고 다만 혼자서 부심하고 있던 차에 마침 단사관 지비케가 톡토르[脫朶兒]와 함께 그 죄를 따져들자 일일이 다 자백했습니다. 그러나 제 혼자서 처단할 수 없어 황제께 보고 드린 다음 명령대로 거행할 것이오니 부디 승상께서는 황제께 잘 아뢰어 단죄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대장군(大將軍) 곽여필(郭汝弼)과 국자박사(國子博士) 위문개(魏文愷)로 하여금 지비케와 함께 서경으로 가서 도망한 범죄자들을 심문하게 했다. 을묘일. 몽고가 비칙치[必闍赤] 카라쿠룩[黑狗]과 이추(李樞) 등 일곱 명을 보내 궁실을 짓는데 필요한 자재를 요구하는 한편 중서성의 지시라며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목(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 : 자단(紫壇)나무)·등석(藤席) 등의 물건을 요구했다. 이에 왕이 중서성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금번 중서성으로부터, ‘국왕의 나라가 아직 평온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므로 황제께서 불쌍히 여기사 올해는 공물의 납부를 면제해 주기로 했습니다. 다만 금칠(金漆)이 매우 많이 필요해 이제 비칙치를 보내 가져오도록 했습니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희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금칠은 수도를 육지로 옮길 때 모두 없어졌습니다. 또 그 산지가 남쪽지방의 바닷섬인데 최근 역적이 출몰하고 있으니 기회를 보아 사람을 보내 채취해서 바치겠습니다. 우선 현재 남아있는 열 항아리 분을 올리며 옻칠액을 만드는 기술자는 그 산지에서 징발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또 카라쿠룩[黑狗]이 말하는 비목(榧木 : 비자나무)은 지역민들이 백목(白木)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 산지를 이추(李樞)에게 물어 보았더니 승천부(昇天府)의 금요도(今要島)라고 대답했습니다. 청등(靑藤)과 팔랑충(八郞虫)도 또한 금요도에서 나고, 또 진도(珍島)와 남해(南海) 등지에서도 난다고 했으며 비자 열매[榧實]와 동백 열매[冬栢實]도 또한 거기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수도에서 천리가 넘기 때문에 바로 보내드리기가 힘듭니다. 이추가 가보지도 않고 되돌아 왔기에 다루가치[達魯花赤]와 함께 각기 사람을 보내 정말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실상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우선 거두어 두었던 무늬 있는 비목 몇 조각을 바칩니다. 팔랑충은 이추가 당초 교동군(喬桐郡)에서 난다고 하기에 사람을 시켜 채취해오게 했으나 아예 없었으며, 다시 금요도에서 난다고 말을 바꾸니 사람을 보내 조사시킬 예정입니다. 그 노태목(奴台木)·해죽(海竹)·동백(冬栢)·죽점(竹簟 : 대자리)은 현재 보유분을 모두 바치겠으며, 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은 아니나 과거 송나라[西宋] 상선에서 얻은 것이 약간 있으므로 아울러 바칩니다.”
• 가을 7월
병인일. 지비케[只必哥]가 서경(西京)에서 돌아오자 마침에 옛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의 조휘(趙暉)가 몽고로부터 와서 지비케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면서, “사실은 양주(襄州 : 지금의 강원도 양양(襄陽))사람들이 스스로 상국에 투항한 것이지 내가 그 사람들을 강제로 몰아 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사실을 황제께 아뢰어 조서를 받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비케가 서경에 도피해 있던 범죄자들을 심문해 데려왔다. 서경측에서 서해도(西海道)의 은파장(銀波莊 : 지금의 황해북도 은파군)과 삼진강(三進江 : 지금의 황해북도 재령군 삼지강(三支江)으로 추정)을 우리로부터 분할해 자기네들의 속현(屬縣)으로 만들려 하자 왕이 다시 몽고 중서성에 글을 보냈다.
“은파장과 삼진강은 본래부터 서해도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서경인이 ‘두련가국왕(頭輦哥國王)이 서경에 와 있을 때 이미 두 지역의 백성들을 호적에 등재했다.’고 주장하니 이것은 분명 허황된 말입니다. 연전에 두련가가 회군한 이후 금년 정월 15일에 서경의 백호(百戶)인 복대(福大)가 처음 그 지역으로 가서 백성들을 위협해 머리를 깎게[開剃]한 것이니 시간의 순서를 헤아리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황제의 분부를 좇아, 그 백성들을 본래 소속된 지역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8월
초하루 임진일. 일식(日食)이 있었다.병진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채정(蔡楨)이 죽었다. 정사일. 몽고의 토번(吐蕃) 승려 네 명이 도착하자 왕이 선의문(宣義門) 밖까지 나가 영접했다. ○ 이 달 정자여(鄭子璵)가 몽고로부터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이제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강화도에서 적도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백성들은 그 부모처자를 서로 확인시킨 뒤 본래대로 살게 허락합니다. 또 적도들의 가족과 노비로서 우리 군인들에게 상급으로 나누어 주었던 자를 제외한 사람 중에서 원래부터 진도에 거주했던 백성들은 모두 가족들과 결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앞으로는 진도의 백성들을 수도 부근 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업에 안착시켜 주기 바랍니다.”
글을 본 왕이 곧 원수(元帥) 힌두[忻都]에게 알려 협박에 못 이겨 끌려간 백성들을 돌려보내게 했으나 힌두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에 왕이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 다시 간청했다.
“역적들에게 협박을 받아 끌려갔던 죄 없는 백성들의 부모·자녀·부부가 황제의 은덕으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감격해 다들 새 삶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국의 군대에서는, ‘협박당해 끌려간 백성들의 조부와 손자, 장인과 사위, 숙부와 조카, 형제·자매, 그리고 노비는 황제의 석방 명령에 적혀 있지 않다.’고 하며 일절 풀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붙잡혀 갔던 백성들이 함께, ‘표문에서 요청하지도 않았던 진도 백성들은 죄도 없이 잡혀온 것을 불쌍히 여겨 모조리 돌려보내주면서 우리는 무슨 죄가 있다고 놓아주지 않는가?’하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애로운 황제께서 다시 지시를 내리셔서 모두 돌아가도록 선처해 주십시오.”
또한 중서성(中書省)에도 다음과 같을 글을 보냈다.
“여러 공들께서 저희들을 애틋이 여기사 황제께 건의를 올린 덕분에 역적에 의해 끌려갔던 백성들이 모두 돌아가게 되어 온 나라 백성들이 우러러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협박 때문에 복종했던 신민(臣民)들의 친척 가운데는 난리 통에 이리저리로 쫓겨 다닌 자도 있으며, 무슨 일 때문에 즉각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협박을 당한 경우도 있는데, 지금 상국 군대에서는 이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돌려보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의 지시가 내리기 전에 나누어 가졌던 우리 백성들을 제 각각 전라도·경상도·개경·황주(黃州)·봉주(鳳州) 등지로 분산시켜 앞다투어 인근 지역으로 숨겨 놓거나 몰래 상국으로 보내어 버리니 비록 친척이 있더라도 서로 만나지를 못하니 무슨 수로 서로를 확인하겠습니까? 또한 다른 섬이나 고을에서 진도로 들어갔다가 붙들린 자도 있으며 혹은 상국의 군대가 다른 섬이나 고을로 나누어 쫓아 보낸 자도 있는데, 말로는 확인 절차를 거쳤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한 곳에 모아놓고 철저히 조사해 석방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또 노비들은 자기 주인이 황제의 분부대로 출륙할 당시 주인을 따라 나왔으나 나중 남겨둔 가산을 정리하기 위해 강화도로 되돌아갔다가 모두 납치를 당했습니다. 지금 죄다 잡아다가 역적의 무리로 몰아버리니, 그렇다면 황제의 은덕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또 진도 백성의 가족은 애초에 복귀를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방면하신 반면, 황제의 분부에 따라 강화도로부터 출륙한 신민의 가족들은 더욱 처지가 딱한 데도 불구하고 계속 붙들려 있는 형편입니다. 황제의 은택이 애초에는 두터웠으나 이제는 점점 엷어지고, 우리에 갇힌 죄수가 처음엔 환호하다가 마침내는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격이라 애긍하기 짝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여러 공들께서는 측은히 여기셔서 황제께 잘 아뢰어 무고한 백성들을 모두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또 실정을 하소하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저희나라는 애당초 창고에 쌓아둔 양식이 빈약한 데다 연전에 왔던 상국의 군대가 지금까지 주둔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백관들에게 봉록으로 줄 미곡을 군량으로 조달했으나 부족하므로 그 뒤 네다섯 차례나 양반과 백성들의 집에서 거두어 충당했습니다. 가을까지 전국의 주둔군에게 조달해야 할 군량을 상국의 석(碩)단위로 환산하면 무려 15만 석이 넘으니 처음에는 고통을 참고 견뎠지만 이제는 도저히 공급할 형편이 못됩니다. 방금 올라온 추토사(追討使) 김방경(金方慶)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지역 주민들이 모조리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어 전혀 양곡의 징수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한 현재 상국의 군사가 6천 명에 이르는데다 과시적(科施赤)은 도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밖에도 관인(官人)·찰살적(扎撒赤)·수령관(首領官)·영사(令史)와 아울러 상국 군사들의 가족·형제와 교체 병력 모두에게 봉급을 우리가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진도를 쳐부순 후 강제로 데려온 사람들에게까지 양곡을 지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정규군 6천 명이 몰고 다니는 말을 대략 한 명당 세필로 계산하면 모두 1만 8천 필에 달하는 바, 한 필에 하루 닷 되씩 사료를 지급한다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쳐서 상국의 단위로 13만 5천 석에 이르며, 본국의 단위로는 17만 석에 이릅니다. 거기에다 농우 4천 마리에 드는 사료가 한 마리당 하루 닷 되씩 든다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국의 단위로 3만 6천 석이며, 본국의 단위로는 7만 2천 석이나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해낼 여지가 없을 것이며, 상국 군사의 수요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현 실정을 그대로 하소할 경우 얼버무리려하는 말이라는 책망을 들을까 두렵기는 하오나 우선 참고 그냥 미루어버리면 마침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이 무지몽매한 유민들로 하여금 남은 목숨이나마 근근이 이을 수 있게 해 주소서.”
• 9월
경오일. 재추(宰樞)들이 톡토르[脫朶兒]와 함께 힌두[忻都]의 군영이 있는 오산(烏山 : 지금의 충청북도 오산군)에 가서 역적을 제외한 나머지 백성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흔도가 굳이 허락하지 않자 톡토르가 황제의 지시를 거론하며 극력 따지자 그제야 힌두가 약간명을 데려가게 했다. 병술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 겨울 10월
정유일. 왕이 다음과 같이 사면령을 반포했다.
“짐이 부족한 덕으로 삼한의 임금이 된지 12년이 지났다. 이제 옛 수도로 환도해 영원무궁토록 기업을 연장하려고 다짐했는데 뜻밖에도 해마다 천재지변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짐이 두려운 나머지 온 나라에 두루 은혜와 관용을 베풀고자 한다. 참형과 교수형에 해당되는 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하고, 제주(濟州)를 지키다가 전사한 장군 고여림(高汝霖)과 영광부사(靈光副使) 김수(金須) 및 역적의 토벌에 참가했던 경별초·외별초의 아들들은 모두 품계를 뛰어 올려주고 관직을 상으로 줄 것이다. 그중 아들이 없는 자는 그 부모와 처의 부역을 면제시켜 준다. 적도 가운데 귀순한 자로서 원래 관직에 있던 사람은 직전(職田)을 돌려주고 군인에게는 전정(田丁)을 돌려준다. 잡류인(雜類人)은 원에 따라 특별히 우대하며, 적도들을 따라갔다가 적이 평정된 후에 몰래 향리로 돌아간 자는 모두 죄를 불문에 붙여 생업에 안착하게 할 것이다. 장군 현문혁(玄文奕)의 처와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의 처는 바다에 투신 자결해 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등급을 넘어 봉증(封贈)하고 그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노라.” 기해일. 왕이 천재지변을 막기 위해 내전에서 금강법석(金剛法席)을 열었다. ○ 다루가치[達魯花赤] 톡토르[脫朶兒]가 죽었다. 그는 중후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안정시켰으며 일을 명료히 처리해 한 번도 법을 그릇 적용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왕도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병이 들어 국의(國醫)가 약을 바쳤으나 톡토르는, “병이 깊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텐데 내가 만약 이 약을 먹고 죽으면 나쁜 마음을 먹은 자들이 필시 너희 나라에서 독살했다고 참소할 것이다.”라며 물리치고는 약을 들지 않고 죽으니 모든 나라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신축일. 이창경(李昌慶)이 몽고로부터 돌아와서 몽고 황제가 세자의 혼인을 허락했다고 전했다. 임인일. 본궐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갑진일.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 초천익(焦天翼)이, 개인집에 병기를 비치해서는 안 된다며 나라 사람이 진도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병장기를 모두 압수해 염주(鹽州 : 지금의 황해남도 연백군)의 진영으로 가져갔다.
• 11월
갑자일. 왕이 친히 본궐에서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계미일. 이창경(李昌慶)과 문선열(文宣烈)을 몽고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는 한편 세자의 혼인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고 또 이렇게 건의했다.
“역적의 잔당이 제주로 도망쳐 들어가 해변의 섬들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시 육지로 나올 것이 우려되니 섬멸해 주시기 바랍니다.” ○ 또 몽고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보내 우리나라에서 도망쳐 들어간 사람들을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병술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金方慶)이 귀환하자 그 전공을 기려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관직을 덧붙였다.
• 12월
갑오일. 힌두[忻都]가 봉주(鳳州)로부터 와서 왕에게, 군사와 말들이 많이 굶주려 죽는데도 군량과 사료를 계속 공급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힌두가 이를 구실로 삼았으나, 기실 참소를 듣고 우리 내부 사정을 엿보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해당 관청에서 군량 수송을 독촉했는데 수송로가 너무 멀어 사람들이 다들 고통스럽게 여기자 김방경(金方慶)이 염주(鹽州)와 백주(白州)로 주둔지를 이동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해일. 몽고가 사신을 보내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으로 정했다고 알렸다. 계묘일. 왕이 친히 본궐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병오일. 힌두가 사람을 시켜, 많은 수의 말들이 굶어죽어 염주(鹽州)로 주둔지를 이동하기가 힘들다고 통보해오므로 해당관청에서 다시 군량과 사료의 징수를 독촉했다. 당시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공급을 지탱하지 못하자 경략사(經略司)에서 원나라에 이렇게 보고했다.
“두 차례나 사람을 고려 조정에 보내 군량과 사료를 보내라고 재촉했으나 전혀 보내주지 않아서 열 마리 중 두 세 마리 꼴로 소와 말이 굶주려 죽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종자 4백여 석을 우선 사료로 지급했으나 얼마 후 다 죽어버렸으니 만약 다시 조달이 지연된다면 소와 말이 다 폐사해 봄 농사를 망치는 사태가 예견됩니다.”
이에 원나라에서 다시 공문을 보내 독촉했다. 정미일. 힌두가 염주와 백주로 주둔지를 옮겼다. 기미일. 도둑이 제수대보(除授大寶)를 훔쳐 갔다. 十二年 春正月 己巳 削孔愉·安世貞職. 又以阿海畏縮不救, 遣將軍印公秀如蒙古以奏, 帝免阿海職召還. 庚午 門下侍中李藏用, 叅知政事崔瑛, 坐與謀林衍廢立, 免. 朴天澍至珍島, 賊迎致碧波亭宴慰之, 潛遣兵船二十艘, 掠官軍, 奪一艘, 殺九十餘人. 辛未 以茶丘叔父僕射致仕洪百壽爲樞密院副使, 致仕. 丙子 不花·孟祺等還, 王使樞密院事金鍊伴行, 仍請婚, 表略曰, “臣頃當親覲之時, 深沐至慈之眷, 覬將嫡嗣升配皇支, 尋蒙領許於結褵, 誠滴我願. 却諭言‘還而就陸, 更請斯來.’ 自聞天語之丁寧, 曷極臣心之慶抃? 旣還歸於本國, 方徙處於古都, 而令世子, 復詣於天庭, 以告端由, 時則新居, 曾未遑於營緝, 卽於睿鑑恐將謂之遽忙, 以此稽留未能敷奏. 伏望, 俾諧親好於附 , 永固恩榮於庇本.” 又奏云, “詔旨所諭, 發遣南宋船事. 頃當承問, 對以‘嘗有宋商舶往返, 距今十年, 未曾見來.’ 適於年前, 有一舶到于我境, 小邦執事慮於睿鑑, 將謂從前絡繹往來, 而敢匿其情, 不以實陳, 議欲送還. 而臣不卽禁沮, 以至無狀, 伏冀聖慈. 其日本歲貢事, 一如前次表奏. 詔旨所諭, 爭先自效, 願赴事功之人, 此殆是小邦之有宿憾者, 圖欲買恩於上國, 而生事于此土耳, 伏冀聖慈. 自今凡事, 一委小邦, 以觀其效. 其詔云, ‘若輩小人, 於卿猶擅廢立, 況此後, 於卿子孫, 豈肯盡心輔佐?’ 仰承諭旨, 益感聖恩. 其首謀廢立事, 侍中李藏用, 叅知政事崔瑛, 已皆黜職.” 時蒙古中書省, 請於高麗置屯田經略司. 王寄書中書省曰, “竊聞, 有人請於小邦置屯田, 未知信否. 小邦自林衍逆命, 王師問罪時, 有不軌之人, 妄自疑懼, 遂構亂而南下, 又有宿憾於小邦者, 幸其本國之有難, 因利乘便, 方小邦, 去水就陸之時, 放兵大掠, 由是, 中外嗷嗷愁怨. 今又因逆賊之未除, 王師猶在於南鄙, 小邦人民, 外則勞於逆賊攻討之事, 內則困於兵馬資粮之費. 而內外蓄積, 去年爲逆賊偸掠無遺, 粗得出居臣民, 其將保喘供職難矣. 而此輩人有是請, 蓋嘗狃于去年, 亦欲東來, 名爲屯田, 而實欲殘害. 乃以小邦之所難堪者, 多般乞請. 萬一朝廷聽從其言, 則彼必恣行侵害, 靡所不至, 小邦人民, 殆無孑遺矣. 小邦今已欽奉詔旨所諭資粮事, 已差遣諸道勸農使, 盡力措辦, 伏望諸相公, 善爲敷奏, 以遏奸人屯田之請.” 初郞將李瑛逃入蒙古, 奏曰, “本國有司天監伍允孚能曉天文, 郞將金希牧手能裂石.” 帝因不花之來召之, 王命皆遣之. 己卯 蒙古遣日本國信使秘書監趙良弼, 及忽林赤·王國昌·洪茶丘等四十人來, 詔曰, “朕惟, 日本自昔通好中國, 又與卿國, 地相密邇, 故嘗詔卿, 道達去使, 講信修睦. 爲渠疆吏所梗, 不獲明諭朕意, 後以林衍之故, 不暇及. 今旣輯爾家, 復遣趙良弼充國信使, 期于必達. 仍以忽林赤·王國昌·洪茶丘, 將兵送抵海上, 比國信使還, 姑令金州等處屯住. 所需粮餉, 卿專委官赴彼, 逐近供給, 鳩集船艦待於金州, 無致稽緩匱乏.” 王迎詔于郊, 茶丘見王不拜, 又出示中書省牒曰, “據洪茶丘告說, 父洪福源欽奉累朝聖旨, 王國有父母兄弟親屬, 曾敎取發. 今有叔父洪百壽等五戶, 尙未曾得. 今欽奉聖旨, 洪百壽等幷取發來. 壬午 趙良弼請與倖臣康允紹偕行, 王不得已從之. 丙戌 朴天澍還自珍島, 賊勒留伴行客使杜員外, 以詔還附天澍曰, “此詔非諭我也, 不敢受.” 答國書曰, “惟命是從.”密城郡人方甫·桂年·朴平·朴公·朴慶純·慶祺等嘯聚郡人, 將應珍島, 乃殺副使李頤, 遂稱攻國兵馬使, 移牒郡縣. 遣其黨殺淸道監務林宗(一作崔良梓), 淸道郡人詐降, 飮以酒醉而殲之. 時密城人趙阡爲一善縣令, 賊召阡, 約與同叛, 阡從之. 尋聞其黨殲於淸道, 乃與郡人孫逸, 謀殺賊魁. 按察使李敖(一作李淑眞), 與金州防禦使金晅·慶州判官嚴守安, 領兵奄至, 阡等斬方甫等降, 賊遂平. 丁亥 流前平章事柳璥于哀島. 己丑 遣朴天澍如蒙古. 癸巳 官奴崇謙·功德等聚其徒, 謀殺達魯花赤及國中在位者, 往投珍島. 隊正宋思均告變, 王命將軍崔文本·曹子一鞫之, 俄而祗候辛佐宣見閭巷七八人偶語, 奔告于王曰, “事急矣.” 時日將暮, 宰樞及承宣·重房·內侍·茶房相顧失色, 計無所出. 王遣知樞密院事李玄原, 上將軍鄭子璵, 請救於脫朶兒, 脫朶兒與洪茶丘等會宰樞, 捕崇謙等十餘人按問, 皆服.
二月 乙未朔 崇謙等四人棄市, 餘悉釋之. 拜宋思均攝別將, 賜銀甁·羅絹等物. 己亥 遣上將軍鄭子璵如蒙古, 告方甫·崇謙之亂. 辛丑 窄梁防戍蒙古兵入大部島, 侵奪居民, 民甚怨之, 大部人聞崇謙等起, 遂殺蒙古六人以叛. 水州副使安悅率兵討平之, 進悅秩五品. 癸卯 都兵馬使言, “近因兵興, 倉庫虛竭, 百官祿俸不給, 無以勸士, 請於京畿八縣, 隨品給祿科田.” 從之. 自權臣誅夷, 諸王及寵臣李玄原·康允紹·李汾禧·金自貞·李汾成等, 爭先請王, 受其田園, 至是, 宰樞又請收之, 悉屬迎送庫, 以充國用. 王大怒, 欲罪先發言者, 勑問堂吏, 崔承的對曰, “廟議皆如是, 臣不知先發言者.” 三別抄寇長興府兆陽縣, 虜掠甚衆, 焚燒戰艦. 防禦都領▶陳井◀, 素業儒者, 自募從軍, 沉湎酒色, 不修武備故敗. 丁未 忠淸道按察使洪子藩, 交州道按察使盧文佐等復命, 王親問民間疾苦. 戊申 燃燈, 王如奉恩寺, 會楮市橋邊, 民家三百餘戶火, 乃除燃燈伎樂, 但謁太祖眞殿. 辛亥 脫朶兒告王曰, 我兵之戍南方者, 侵掠州郡, 民不聊生, 宜遣使安撫, 於是, 遣張鎰于慶尙道, 朱悅于全羅道, 郭汝弼于忠淸道. 乙卯 設消災道場于本闕. 遣將軍印公秀, 寶城千戶等如蒙古, 請罷屯田, 表曰, “今聞, 上朝發遣種田軍人. 玆事非敢有辭於違拒, 但小邦蓄積, 方就陸時, 悉爲逆賊攘奪, 又因供億王師, 罄盡無餘. 時則留屯軍馬所須, 亦於中外人民, 家歛戶収, 甚爲艱難, 設有種田軍又至, 則農粮旣乏於此, 時穀種更求於何處? 乃如耕牛, 元來不畜, 況城中居民, 鮮有畜使者, 當索於外邑. 然小邦忠淸·全羅道, 方困討賊, 徵索未便, 唯慶尙道, 儻可得致, 斯亦不多耳. 然則上供之事, 豈唯難於成辦, 東作之師, 亦懼罹於歉艱. 擬令世子, 權攝國事, 凡小邦情狀, 筆所未到者, 近當三月, 跨馬, 躬自朝于天陛, 一皆敷奏, 惟是賤介之陳諗, 冀垂憐察.丙辰 右副承宣洪文系辭, 以洪子藩代之. 命有司, 歛銀布于百官有差, 以充親朝之費. 庚申 以朴之亮爲水路防護使, 率兵赴慶尙道. 是月, 脫朶兒爲子求婦, 必於相門, 凡有女者懼, 競先納壻. 國家記宰相兩三家, 使自擇焉, 脫朶兒選姿色, 欲聘金鍊女. 其家已納預壻, 其壻懼而出. 鍊時入朝未還, 其家, 請待以成禮, 不聽. 國俗, 納年幼者, 養于家待年, 謂之預壻. 三月 丙寅 蒙古遣忻都及史樞等, 代阿海. 詔曰, “朕嘗遣信使, 通諭日本, 不謂執迷固閉, 難以善言開諭, 此卿所知. 今將經略於彼, 勑有司, 發卒屯田, 用爲進取之計, 庶免爾國他日轉輸之弊. 仍復遣使持書, 先示招懷, 卿其悉心盡慮, 裨贊方略, 期於有成, 以稱朕意.” 又中書省移文曰, “欽奉帝旨, 以忻都·史樞行經略司, 於鳳州等處, 營軍屯田. 所有屯田牛六千頭, 除東京等處起遣一半, 餘三千頭, 令經略司, 受直王國和市. 外農器·種子·蒭秣之類, 及接秋軍糧, 一就供給, 無致闕乏.” 己巳 東界安集使報, “襄州民張世·金世等, 謀殺守令及吏士, 事覺伏誅. 其餘黨天瑞等, 潛投古和州趙暉, 請兵四百餘人, 猝入襄州. 誣以謀率人民徙居海島, 驅掠知州及吏民千餘人, 分載三船而去.” 壬申 三別抄寇合浦, 執監務而去. 癸酉 鳳州經略司, 以絹一萬二千三百五十匹來, 市農牛. 甲戌 移御南山宮. 丁丑 蒙古中書省移文, 禁國人貿易上國兵器及馬. 壬午 樞密使金鍊還自蒙古, 帝聞崇謙·方甫等謀叛, 凡所奏陳, 皆不允. 甲申 三別抄寇東萊郡. 癸巳 蒙古斷事官沈渾來, 索軍糧. 召還柳璥·兪千遇. 印公秀還自蒙古, 帝答詔曰, “王所奏陳, 朕悉知之. 嚮王在國中, 猶有姦人生事, 今叛人未靖, 王不可來朝.” 於是, 悉還百官所納銀布. 是月, 遣殿中監郭汝弼如蒙古, 陳情表, 略曰, “天使忻都·史樞至, 聖旨所諭日本事. 小邦今方去水就陸, 盖欲悉心供職, 其私日本而有以庇護者, 寧有是理? 但其俗, 頑癡莫甚, 慮當使臣之入也, 接遇容有不謹. 今又聖勑嚴厲, 兢惶失措. 庶將敬禀使臣之指揮, 期於有成. 又承中書省牒, 鳳州屯田農牛·農器·種子·軍粮等事. 若乃農牛, 如前表奏, 小邦京中鮮有畜使者, 外方農民雖産之, 饒者畜養亦不過一二頭. 貧者多以耒耕, 或相賃牛而使之. 今外方牛畜, 悉因全羅道糧餉轉輸, 以至飢困損失者大半. 農器則, 小邦人民, 元來未有贍庀者, 此皆雖不得如數, 倂當隨力供辦. 種子則, 百姓趂年畊作, 以修貢賦, 用其餘以爲糧料, 稍存若干斗斛, 以備明年耕種, 以故雖或戶歛, 殆是不多碩耳. 軍糧則, 大軍之後, 小邦元來蓄積, 除逆賊攘奪外, 悉因供億留屯軍馬, 及追討軍馬, 罄竭無餘. 中外臣民, 徵歛者累度, 猶不連續. 且又汎計種子·蒭秣·接秋軍粮, 凡幾萬碩, 此則何從而致之耶? 况今逆賊日益蔓衍, 侵及慶尙道金州·密城, 加又掠取南海·彰善·巨濟·合浦·珍島等處, 至於濱海部落, 悉皆怯奪, 以故凡所徵歛, 難於應副. 而慶尙·全羅貢賦, 皆未得陸輸, 必以水運, 今逆賊據於珍島, 玆乃水程之咽喉, 使往來船楫不得過行, 其軍糧·牛料·種子, 雖欲徵歛, 致之無路. 然不敢違命, 當以力盡爲限, 但念, 所謂農器·農牛·穀種·糧料, 則斯皆百姓之資生, 如盡奪而供給, 迺此三韓之遺噍, 實荐飢以耗淪. 愚情憫望之在玆, 睿鑑裁量之何似.”
夏四月 丙申 分遣諸道農務別監, 催納農牛·農器于黃·鳳州. 庚子 或告達魯花赤脫朶兒曰, “本國之俗, 以四月八日觀燈, 竊聞有人, 欲因此作亂.” 脫朶兒信之, 出舍城外, 數日不還. 辛丑 三別抄寇金州, 防護將軍朴保與別抄, 皆奔入山城, 賊縱火剽掠而去. 壬寅 賜靈光副使金須妻, 米十斛, 以表須戰亡之忠. 丁未 追討使金方慶報, “珍島賊使人告忻都曰, ‘有密議, 請官人暫臨小島.’ 忻都曰, ‘我不受帝命, 何敢入?’ 賊又請具酒()來饋, 乃許之.” 忻都奏帝曰, “叛臣裴仲孫稽留使命, 負固不服, 乞與忽林赤·王國昌, 分道追討.” 帝從之. 壬子 蒙古遣永寧公綧之子熙·雍等二人, 領兵四百來, 討珍島. 乙卯 脫朶兒承帝旨, 與宰樞, 斬唐城人洪澤, 杖其黨洪均庇等充驛吏. 治殺窄梁防戍軍之罪也. 丁巳 蒙古遣周夫介來, 詔曰, “據忻都·白羊奏請, 添遣軍馬, 比及暑雨前, 討平逆賊, 朕以爲, 暑雨之前, 軍馬未能到彼. 卿宜於旁近, 簽軍六千人, 分附攻取珍島. 若事早畢, 於卿百姓便益.” 中書省移文曰,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三十餘所, 其力漸盛. 明見虛行調發, 不肯實心投拜, 便合急攻, 以除巨害. 若至暑雨時節, 卒難收取, 除珍島邊見有兵船二百六十艘, 令本國添發兵船一百四十艘, 更乞增兵幷力攻賊. 其合用軍餉·什物, 委官盡力供頓, 毋致失誤.” 是月, 斷事官沈渾還, 上表略曰, “前次, 使臣忻都等奉傳聖旨. 諭以屯田事, 此盖皇帝矜恤小邦, 將省軍糧·蒭秣之供給. 令就小邦, 和市農牛三千, 玆事雖不受直, 皇帝有命, 敢不盡力供辦? 況送官絹, 以充其直, 感戴悉深, 經略使史樞與忽林赤·趙良弼·王國昌·洪茶丘等, 議農牛·農器·種子, 必定其成數, 多般詰責, 玆用約以農牛一千一十頭·農器一千三百事·種子一千五百碩. 尋委中外, 當及農時, 又於今年內, 續後須索, 僅可得農牛九百九十頭, 以定其數. 使臣沈渾繼至, 復諭之以農牛等事. 竊念, 向件元約數外, 農牛·農器之今未足辦者, 漸次當依元數. 其軍馬接秋糧餉, 限以力盡, 不令受飢. 噫此百姓, 皆是皇帝之百姓, 迺此農牛·農器·種子, 一皆收奪, 使失其業, 則恐百姓決定飢死. 其又在此者, 役煩力竭, 不堪困苦, 而從逆賊者, 靡有歉艱, 則焉知愚民有所貳於彼哉? 聖鑑若知如此, 必曰‘何不揆力陳實, 早達宸所, 使我百姓至於此極?’ 然則, 誰當任其責? 玆用昧死, 庶幾一曉于哀悰.”
五月 癸亥朔 洪茶丘領兵, 討珍島. 是日, 脫朶兒與宰樞, 閱兵于郊, 凡五百餘人. 其都領·指諭, 給馬人一匹, 軍卒每十人, 給馬一匹, 及行, 軍卒多掠取行人馬. 脫朶兒問曰, “宰樞子弟, 有從軍者乎?” 答云“無.” 脫朶兒乃令宰樞, 各出馬, 給軍官. 甲子 加發京軍, 又調忠淸·慶尙道軍, 以濟師. 乙丑 親醮三界于本闕. 壬申 邊亮·李守深等領舟師三百, 討珍島. 乙亥 門下平章事金佺卒. 丙子 周夫介還, 王遣使伴行, 上表陳謝略曰, “推仁恤難於下藩, 意存除害, 易帥揚威於南島, 命促赴功. 臣方出古都, 忽遭頑賊, 豕涉波而竊地, 螗拒轍以欺天. 閫略無良, 旣經年而莫制, 舟師已老, 徒曠日以相持, 豈意陛下尋選將以代之? 又遣周夫介, 諭臣以比及霾熱已前, 當於側近軍民, 起發六千人, 分附攻取. 仰窺明訓, 深感至恩, 於是, 委諸中外, 依數調發, 亟令進討.” 丁丑 金方慶·忻都·茶丘·熙·雍等率三軍, 討珍島, 大破之, 斬僞王承化侯溫. 賊將金通精, 率餘衆, 竄入耽羅. 庚寅 監試放榜, 蒙使趙良弼·焦天翼等往觀之曰, “眞盛事也! 吾等聞之久矣, 今得見之, 其於亂離, 不墜文風如此, 良可嘉也. 遣上將軍鄭子璵如蒙古, 謝平賊.” 仍奏曰, “賊船頗有逋漏者, 禍燼尙存, 且逆賊妻息·族類, 甘伏其辜. 但大小人民, 先出古都, 其父母·親屬·奴婢被賊劫掠者, 今復爲官軍所獲, 盡歸上朝, 伏望聖慈, 敦諭將帥, 悉令復舊.”
六月 甲午 王如奉恩寺. 丙申 蒙古遣斷事官只必哥等六人來, 詔曰, “卿嚮遣印公秀奏曰, ‘小邦蓄積, 就陸之日, 悉爲逆賊攘奪, 又因供億王師, 罄盡無餘. 歛及中外臣民, 甚爲艱窘, 而又耕牛不畜, 難於徵索.’ 乃勑有司, 前往體問. 卿方上表謂‘軍馬接秋糧餉, 限以力盡, 不令受飢, 屯田農牛·農器等, 漸次當依元數.’ 則前奏豈非虛妄? 且匹夫一言不誠, 尙恐不爲人所信, 卿一國臣民之主, 敷奏不實可乎? 爾後愼勿如此. 卿又云, ‘吾之民亦是皇帝之民也, 使其失業, 不堪勞苦, 則恐有貳於盜賊, 若不揆力陳實, 早達于宸所, 以至困窮, 誰任其責?’ 盖由爾國不逞之人, 肆爲叛逆, 以致軍民之勞. 旣爲一家, 初無內外之閒, 如撫定之後, 豈坐視人民困苦, 而不加恤哉? 尙體至仁, 益殫誠赤.” 中書省移文曰, “宣使沈渾回賫表文曰, ‘襄州天瑞等, 縛打官員, 詐稱謀入水內.’ 據取納官之辭, 悉剃頭, 驅虜百姓, 入古和州.’ 欽奉聖旨, 差官前去取問. 幷王京避役犯罪之人, 多竄于西京, 亦令差去使臣, 徇問是實, 分付王國, 請各差官, 一同取問.” 又曰, “聞前大卿閔昉, 能治人手足疾, 可速遣來.” 昉素無行義, 坐法免廢錮累年. 聞帝有足疾, 見達魯花赤沈渾, 妄言能醫術, 渾信之, 達于帝而召之. 授尙書左丞以遣之. 己亥 遣世子諶, 入質于蒙古, 尙書右丞宋玢, 軍器監薛公儉, 戶部郞中金 等二十人從之, 又命樞密院副使李昌慶, 調護其行. 表奏云, “自臣至于輔相, 欲令子弟相遞入侍, 而先遣世子與衣冠胤冑二十人, 衙內職員百人進詣.” 丁未 王受菩薩戒于內殿. 戊申 只必哥還, 上表略曰, “小邦元來蓄積, 悉爲逆賊所攘, 粗有所遺, 供給年前大軍, 後又以供留屯軍馬, 殫竭無餘. 收歛內外臣民, 至于累度, 猶不能繼. 且聞憸人有言, ‘小邦尙有軍糧多蓄.’ 請使臣審閱內外, 驗其實否, 亦不聽. 今下詔云, ‘敷奏不實, 愼勿復爲.’ 及斯言之聆禀, 無所措以震惶. 其糧料之有無, 漸當採實.” 又報中書省曰, “前此, 小邦避役犯罪而逋逃者, 表奏乞令推究, 皇帝聖慈, 特遣斷事官只必哥就鞫. 時有李黃秀, 乃逆臣林衍妻姪與衍, 同謀廢立, 又與惟茂, 謀拒王師, 不出古都. 陪臣洪文系·宋松禮等, 誅惟茂, 流黃秀于珍島, 後以三別抄向其地, 徙黃秀拘于羅州. 黃秀, 自獄中解鏁而逃, 走入上國, 今年隨洪茶丘以來, 恣意肆惡, 奪人田民. 及攻珍島, 驅掠男女百餘人, 攘奪衣服百五十餘件及米麥, 又奪戰艦, 仍脅船軍·蒿工等, 滿載而還. 其罪惡, 當置於法, 第緣投托官軍, 不敢致詰, 徒自腐心, 會有斷事官只必哥與脫朶兒, 推究其罪, 一皆自首. 然未敢自斷, 上奏宸聽, 以俟帝命, 伏望丞相閣下, 善爲敷奏斷罪, 鑑戒諸人.” 遂遣大將軍郭汝弼, 國子博士魏文愷, 偕只必哥往西京, 推究逃民. 乙卯 蒙古遣必闍赤黑狗·李樞等七人, 來索宮室之材, 又以省旨, 求金漆·靑藤八郞虫·榧木·奴台木·烏梅·華梨·藤席等物, 王報中書省曰, “今奉省旨云, ‘王國未平, 聖慮憐憫, 今歲朝幣, 不須進奉. 所用金漆良多, 今遣必闍赤往取.’ 竊念, 小邦所貯金漆, 就陸時散盡. 且其所産南方海島, 比爲逆賊往來之所, 當更乘閒, 往取奉獻. 先將所有十缸以進, 其瀝汁之匠, 當就産地, 徵來起遣. 又黑狗口宣榧木, 土人謂之白木, 問其産地於樞, 則云昇天府之今要島也. 其靑藤·八郞虫, 亦出於此, 又於珍島·南海等處, 皆産焉, 其榧實·桐栢實, 亦産此地. 距王京千餘里, 難以立致. 樞不自往見而返, 玆與達魯花赤, 並差人, 視其有無, 待還具奏, 先以收取色狀榧木若干片奉獻, 八郞虫則, 樞初言産於喬桐郡, 今使人往取, 則無有也, 又云, 出於今要島, 當復遣人就審, 其奴台木·海竹·冬栢·竹簟, 輒隨所有以進, 烏梅·華梨·藤席, 元非所産, 昔於西宋商舶得之, 粗有若干, 並此進奉.” 秋七月 丙寅 只必哥至西京而還, 時古和州趙暉, 自蒙古來, 以詔授只必哥曰, “襄州人實自納款于上朝, 非我驅迫其民也. 吾以此奏于帝, 受詔而來.” 只必哥推刷西京逃民而來, 西京, 又欲割西海道銀波莊·三進江爲屬縣, 王又報中書省曰, “銀波莊·三進江, 本西海道所屬, 今西京人托言, ‘頭輦哥國王來在西京時, 已籍兩處人民.’ 是其妄言明矣. 年前頭輦哥班師, 至今年正月十五日, 有西京百戶福大始至其處. 脅其人民而開剃, 則時有先後, 理有曲直. 伏冀, 一依帝命, 使彼人民, 悉復屬款.” 八月 壬辰朔 日食. 丙辰 門下侍郞平章事蔡楨卒. 丁巳 蒙古吐蕃僧四人來, 王出迎于宣義門外. 是月, 鄭子璵還自蒙古, 中書省移文曰, “今奉聖旨, 自江華島爲賊人驅去百姓, 其父母妻子, 許令相認復舊. 除賊人家屬·奴婢, 分給戰土外, 據珍島元有百姓, 俱敎家屬圓聚, 明白分付本國. 仍將珍島百姓, 起移王京附近之地, 耕種安業.” 王乃諭元帥忻都, 令還脅從者, 忻都不聽. 王遣印公秀如蒙古, 復奏云, “逆賊所脅, 無罪之民, 父母·子女·夫妻, 旣蒙聖恩, 聽還本國, 擧國感激, 咸望更生, 今官軍乃謂, ‘所脅之民, 祖孫·舅甥·叔姪·兄弟·姉妹及奴婢, 聖旨不錄.’ 略不容釋. 向件被執之民, 相與號跳哭泣, 而相告曰, ‘不曾表請珍島之民, 憫其無罪, 皆許復舊, 吾屬何罪, 獨不放釋?’ 伏望聖慈, 更下明勑, 咸使復舊.” 又上中書省書云, “伏蒙諸公, 咸賜矜憐, 導宣聖澤, 逆賊之民, 許令復舊, 擧國感仰, 然其脅從臣民親屬, 方離亂時, 或有來此, 或有往彼, 抑因事故, 未得徑出, 而擧族遇脅者, 今官軍皆以爲逆賊之類, 不許放歸. 輒於聖旨未降前, 分取人物, 各自散住於全羅·慶尙·王京·黃·鳳州等處, 或相爭匿於旁近, 或先潛送于上朝, 雖有親戚, 不得相見, 何由識認? 或自別島他邑, 入珍島而見獲者, 或官軍, 分往別島他邑, 而驅捉者, 名雖揀給, 其實不曾圓聚一處, 窮詰許放. 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 而還江華者, 悉被驅去. 今皆分執, 同于逆賊之屬, 則蒙聖恩而復舊者幾何? 且珍島百姓之家屬, 元不申請, 而猶許放免, 自江華順命出陸臣民家屬, 尤所矜憐, 而未免拘繫. 雨露之澤, 始優渥而今也漸希, 籠檻之囚, 初懽呼而卒乃啜泣, 良可矜哀, 伏望, 僉垂惻隱, 善爲敷奏, 無辜之民, 悉令還本.” 又上陳情表, 略曰, “切以小邦, 元來倉廩所蓄旣薄, 自年前出來上朝軍馬, 至今留屯, 初以百官俸粟, 供給而不足, 繼歛兩班百姓之戶者, 至于四五度. 今接秋, 中外所供軍馬料, 以上朝碩數之, 則無慮十五餘萬. 始則耐忍艱苦, 今則絶不能輸納. 今有追討使金方慶報云, ‘界內百姓, 皆食草實木葉, 雖有徵索, 勢無可爲者.’ 且見今官軍六千, 而科施赤則不得細諳其數多少, 外有官人·扎撒赤·首領官·令史, 幷官軍家屬及其兄弟, 遞番往來者, 悉令給料, 至乃攻破珍島後, 驅掠人物, 亦令給糧. 今計正軍六千人所帶馬, 率以一人三匹爲計, 則凡一萬八千匹, 一匹日支五升, 自十月至明年二月, 則當用上朝碩十三萬五千, 而本國碩則二十七萬矣. 加以四千農牛料, 一首日支五升, 自十月至明年三月, 以上朝碩計之, 三萬六千, 本國碩則七萬二千. 然則, 小邦百姓飢困, 固不假恤, 官軍所須亦必匱乏. 欲陳情實, 則恐有縫之責, 姑忍稽留, 則事勢至於窘急. 伏望, 曲賜矜憐, 許令蠢蠢之遺黎, 獲保緜緜之餘喘.”
九月 庚午 宰樞與脫朶兒, 往忻都屯所烏山, 請還逆賊外人民. 忻都堅執不許, 脫朶兒稱聖旨力詰, 稍令揀出. 丙戌 幸王輪寺.
冬十月 丁酉 赦曰, “朕以凉德, 臨莅三韓, 十有二載. 今者復都舊京, 庶欲萬世延基, 而災變連年. 朕心兢省, 欲以恩宥, 覃及中外. 斬絞二罪以下, 咸赦除之, 戍濟州戰死將軍高汝霖, 靈光副使金須, 及從討逆賊京外別抄之子, 超資賞職. 無子者復其父母及妻. 其自賊中歸順人, 有職者還職田, 軍人還田丁, 雜類人從願, 特加優恤, 其從賊之徒, 賊平之後, 潛還鄕里者, 亦各勿問, 俾安其業. 將軍玄文奕妻, 直學鄭文鑑妻, 投水亡身, 不爲賊所汚, 節義可尙, 宜超等封贈, 官其子孫.” 己亥 王以天變, 設金剛法席於內殿. 達魯花赤脫朶兒卒. 脫朶兒沉重寬厚, 撫恤人民, 聽斷明白, 未嘗枉法, 王亦甚重之. 及疾作, 國醫進藥, 脫朶兒却之曰, “我病殆不起, 若飮此而死, 則讒構爾國者, 必曰高麗毒之.” 遂不飮而卒, 國人惜之. 辛丑 李昌慶還自蒙古, 帝許世子婚. 壬寅 設消灾道場于本闕. 甲辰, 副達魯花赤焦天翼曰, “兵器不可畜於私家.” 收國人攻珍島兵仗, 悉輸于鹽州屯所.
十一月 甲子 親醮太一于本闕. 癸未 遣李昌慶·文宣烈如蒙古, 賀正, 仍謝許世子婚, 且奏云, “逆賊餘種逋入濟州, 橫行於諸島浦漵閒. 慮將復出陸地, 乞令殄滅.” 又上書中書省, 請還我國逋逃人口. 丙戌 追討使金方慶還, 以功加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
十二月 甲午 忻都自鳳州來, 詰王曰, “軍馬多飢斃, 粮料不繼, 何也?” 忻都以此籍口, 而其實聽讒, 欲覘國中也. 於是, 有司督輸軍粮, 道路悠遠, 人皆苦之, 金方慶請移屯鹽·白州. 己亥 蒙古遣使, 告建國號曰大元. 癸卯 親設消災道場于本闕. 丙午 忻都使人來言, “馬飢多死, 難移鹽州.” 於是, 有司更督科歛. 時國家府庫匱竭, 供給不支, 經略司報于元曰, “兩差使人, 催取糧料, 寂無輸轉, 牛馬羸瘦, 僵仆者十二三.” 卽將先到種子四百餘碩, 支給飼秣, 尋復盡死, 若又供運不繼, 恐牛馬盡斃, 有誤春作, 元又移牒, 督之. 丁未 忻都移屯鹽·白州. 己未 盜竊除授大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