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파샤(1881~1938)의 도시 앙카라
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파샤(1881~1938)는 터키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 이다. 아타튀르크의 터키어 Ata 는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Türk.. 투르크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칭호는 오직 케말파샤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터키와 적국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그의 생가가 특별히 보존되고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섰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교로 입대해 싸웠지만 결국 오스만투르크는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패전국이 된 오스만투르크는 투르크령이었던 에게 해의 섬과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패전국의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편에 서서 당당히 승전국이 된 그리스에게 떼 줘야했다. 그리고 카프카스에 걸쳐있던 투르크의 영토도 아르메니아, 조지아에게 내줘야 했다.
대제국이었던 투르크 민족의 긍지, 오스만은 지금 현재의 유럽 영토와 현재와 비슷한 터키 영토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이어 패배로 인한 막대한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하니 술탄의 위신은 추락했고 투르크 민족은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좌시할 없었던 것이 터키 젊은이들이었고 더 이상 술탄의 체제, 낡은 관행에서는 터키가 회생 불가라고 생각했다. 참전했다 패배하고 실망했던 케말파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국은 그를 중심으로 청년 투르크당이 결성되었고 술탄의 퇴위를 요구하며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침 북쪽의 러시아가 볼세비키 혁명으로 붕괴되고 공산국가 소련으로 탈바꿈 됨에 따라 인근 터키도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터키 국내에서도 공산당이 조직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철저한 이슬람, 신정국가였던 터키는 전형적인 무신론적인 철학을 지닌 공산당과 맞을리 없었고 청년 투르크당도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그러나 그리스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터키를 침공함으로써 터키는 어쩔 수 없이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케말파샤는 사카리아에서 그리스 군에 승리하면서 술탄을 대신해 터키를 구할 영웅으로 떠오른다. 결국 여론에 밀린 술탄은 마침내 1922년 퇴임하고 1923년 대선을 열어 케말파샤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앙카라 뿐 아니라 터키 곳곳에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앙카라는 터키의 균형적인 발전을 염원한 그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파샤(1881~1938)의 도시 앙카라 두번째 이야기 - 앙카라 시내를 다니면서
그는 15년동안 대통령 3선을 했다. 그러나 그는 터키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변화시켰다. 신정체제의 오스만 터키를 모든 종교는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모든 종교를 인정했다. 당시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케말파샤는 여성들도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게 하고 직업을 갖게 했으며 참정권도 갖게 했다.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이 생긴 나라가 터키다. 그로 인해 어려운 아랍어가 아닌 라틴 문자를 도입해 오늘날 터키문자를 개혁했다. 이슬람 편향이 아닌 모든 종교가 평등하며 여성들도 쉽게 공부하며 익힐 수 있게끔 한 것이다.
그는 외교적으로도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소련보다는 영국이나 미국과 손잡는게 유리하다 판단하여 이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소련과는 단절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을 도움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영토 침략을 외교적으로 막을 수 있었고 영, 미의 지원으로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케말파샤는 영, 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이스탄불을 개방하여 지중해 무역을 촉진시켰고 오스만 제국이 필요 이상으로 쌓았던 보물, 과도히 축적한 재물들을 풀어 경제 개발에 투자해 터키는 1920년대 후반, 1930년 초, 중반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파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서민들에게 다가가 서민들과 동네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민심을 들었으며 인도 홍차에서 유래한 터키 차이가 케말파샤가 서민들 사이에서 즐겨 마셨기 때문에 이름이 아타튀르크 차이라 붙여지고 터키인들이 애용하는 국민음료가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공원에 앉아 그를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놀았으며 청소년들의 고민도 상담해주는 말 그대로 서민들의 Ata, 혹은 파파 프레지던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케말파샤의 정치 행적들을 두고 "아타튀르크 정신", "아타튀르크의 원칙" 이라 명명되고 있다. 이런 대통령이면 터키의 국부(國父)로도 충분히 자격있지 않는가?